"지난 20년간 자유민주주의 정당정치는 키르기스스탄을 완전히 무너뜨렸습니다. 빈부격차, 부정부패, 경제침체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국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정부가 필요합니다."
 - 사디르 자파로프 키르기스스탄 대통령


벨라루스 얘기를 할까 하다가...벨라루스보다 키르기스스탄 얘기가 더 흥미로울 것 같아서 중앙아시아 얘기 먼저 하고 나중에 벨라루스 시위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키르기스스탄은 중앙아시아 일대 유일한 민주주의 국가였습니다. 아시다시피 구소련 출신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소련 해체 직후 해체 전부터 지역에서 왕노릇하던 구 공산당 출신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독재를 하고, 그 2인자들이 이어받아 독재하는 구도가 뚜렷한 지역입니다. 중앙아시아를 둘러싸고 있는 이란, 중국, 아프간같은 나라들 모두 강력한 독재국가들이죠. 근데 키르기스스탄은 그 사이에서 민주주의를 유지했습니다.
물론 키르기스스탄이 몽골처럼 독립 직후부터 계속 민주주의였던 건 아니였습니다. 1990년, 아직 소련의 일부였을때부터 대통령을 하고 있던 아스카르 아카예프(1944-)는 다른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재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이것이 붕괴된 것이 2005년 제1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입니다. 2005년 키르기스스탄 총선에서 아카예프가 자신의 아들과 딸을 당선시키고 여당의 요직에 앉히자, 제2도시 오쉬를 중심으로 분노한 남부 지역의 국민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이어나갔습니다. 아카예프는 무력진압하고자 하였으나, 이번에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이 반대하여 무력진압을 좌절됩니다. 결국 비슈케크까지 시위가 펼쳐지자, 아카예프는 사임하고 러시아로 망명했습니다. 현재 아카예프는 모스크바대 수학과 교수로 재직중입니다.


그렇게 독재정권이 붕괴되고 민주적으로 쿠르만벡 바키예프(1949~)가 대통령이 당선되어 이제는 좀 평화로워지고 경제도 좋아지나 싶었는데...현실은 아니였습니다. 민주주의는 정착되긴 했는데, 부정부패는 더욱더 심해지고, 정부 정책들은 우유부단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경제상황은 나빠져만 갑니다. 거기에 2008년에는 키르기스스탄에서 지진이 일어났는데 69명이나 죽었습니다. 이재민들에게 돌아가야 할 지원금은 중간에서 '민주적 선거를 통해 당선된' 정치인들이 빼먹습니다. 복구는 세월이 지나도 안 됩니다. 경제는 더 망해가고, 이젠 '민주적으로 비자 얻어서 들어온' 우즈벡인들이 그나마 남은 경제를 장악하고 키르기스인 노동자들은 임금조차 밀리는 최악의 상황이 도래한 것입니다. 이에 2010년 제2차 키르기스스탄 혁명이 일어나 바키예프는 12시간만에 사임하고 키르기스스탄은 이원집정부제 국가로서 새출발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민주주의가 정착되었으면 해피엔딩이였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2차 혁명 이후부터 자파로프가 집권하는 2020년까지, 10년 사이에 총리만 14번 바뀌었습니다. 최단임 총리는 6일을 집권했고, 가장 오래 총리직을 지낸 사람도 2년을 채 못 넘겼습니다. 부족간 갈등도 심해져서, 북부 부족 출신 총리가 집권하면 남부에서 반발하고, 남부 부족 출신 총리가 집권하면 북부에서 반발합니다. 선거를 치를때마다 정권을 잡지 못한 측에선 부정선거를 주장하며 불복합니다. 


이쯤되면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냥 혼란입니다. 확실히 주도권을 가진 세력이 없게 되니 이게 말이 좋아 민주주의지, 그냥 정부가 통제력을 상실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상태입니다. 정치인들은 민주주의랍시고 자기들 파이 챙기기에 바쁘니, 경제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심각하게 의존하게 되어버리고, 중국 상대론 빚덩이만 많아집니다. 민생? 우리 자유민주주의 추종하는 키르기스 정치인들 안중에는 그딴 거 없습니다. 매해 납치혼으로 인해 죽는 여성만 한 명 이상 나옵니다.


부패한 공권력은 이 잘못된 풍습을 바로잡을 생각이 아예 없습니다. 사람이 죽었는데요. 


근데 키르기스랑 사실상 같은 민족인 카자흐스탄은 독재는 했지만 눈부신 경제발전을 이루었네요? 치안도 좋아요. 납치혼 관습은 키르기스스탄에만 있던 게 아닙니다. 카자흐스탄에도 있었습니다. 지금 카자흐스탄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아무 여자나 납치해가면 어떻게 됩니까? 거긴 아무리 경찰이 부패했다고 그런 중범죄를 봐주진 않습니다. 아니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죠. 키르기스스탄은 민주주의 빼고 나머지 것들이 당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쪽 국가들을 보면 독재 = 절대악이고 민주주의 = 절대선이라고 보기에도 참 어렵습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는 카자흐와 키르기스 사람들 입장에서는 물론 비판받을 점들은 비판받지만, 그래도 영웅급 존재 맞습니다. 카자흐스탄은 30년 전만 해도 아프리카 웬만한 국가들보다 못사는 나라였습니다. 한때는 헝가리보다 잘 살았고, 석유값 떨어진 지금도 중진국 중에서 가장 잘 사는 편입니다. 키르기스스탄도 30년 전에 경제력 비슷했습니다. 현재도 30년 전이랑 경제력 비슷합니다.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중에 꼭 살아야 하는 나라를 골라야 한다면, 어디 가서 사시겠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이제 민주주의에 염증을 느끼는 것이죠. 중앙아시아 사람들에게 민주주의란, 혼란과 파멸입니다. 키르기스스탄만 그런 거 아닙니다. 타지키스탄도 1990년대에 민주주의 하다가 내전이 터져서 10만명이 죽고 120만명의 난민들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떠돌아 다녔습니다. 사디르 자파로프는 그래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올해 독재체제를 구축해 내고야 말았습니다.



미국의 아프간 철수와 키르기스스탄의 민주주의 붕괴로 이제 중앙아시아에 민주주의 비스무리한 건 다 사라졌군요. 예견된 일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