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오랜만에 돚챈에 글 쓰는데, 오늘부터는 이슬람권의 사회주의에 대해서 글을 써보려고 해요.


지금부터는 편의상 음슴체를 쓰겠음


이슬람권의 사회주의는 크게 세가지 부류로 나뉘는데

1) 아랍사회주의

이쪽의 원조는 가말 압델 나세르(1918-1970) 초대 이집트 대통령. 원조인 나세르의 아랍사회주의는 아랍세계의 통일을 지향했으며, 장기적으로 아랍민족의 단일국가 건설을 추구했음. 그 초석을 닦은 것이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일한 아랍연합공화국이였으나 개같이 멸망ㅋㅋ 이후에도 번번히 시도가 있었으나 4차 중동전쟁 이후 이집트가 친미노선을 타면서 그냥 망하게 됨.

이후 아랍사회주의는 크게 두가지 분파로 나뉘는데, '정통' 아랍사회주의에 가까운 무아마르 알 카다피(1942-2011)와 칼리파 하프타르(1943-)의 나세르-카다피주의 또는 자마리히야주의, 그리고 아랍사회주의에 파시즘적 요소가 가미된 미셸 아플라크(1910-1989)와 살레 알-딘 알-비타르(1912-1980)의 바트주의가 있음. 나세르-카다피주의의 대표적인 지도자로는 다들 아는 그 카다피가 있고, 바트주의의 경우 시리아의 아사드 부자나 이라크의 후세인 정도가 있겠음. 


2) 사회민주주의와 강력한 세속주의

이쪽은 주로 비아랍권에서 주로 볼 수 있음. 가장 유명한 지도자라 할 것 같으면 단연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1881-1938). 이외에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중앙아시아 5개국이 이와 비슷한 케이스라 할 수 있겠음. 방글라데시나, 수카르노의 인도네시아가 이런 케이스라고 할 수 있지.


3) 정통 맑스-레닌주의

오히려 이슬람권에서는 이쪽이 가장 희귀한데, 이것은 냉전시절 아랍권 자체가 대부분 소련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소련 입장에서도 현지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굳이 공산화시킬 필요가 없었던 것이지. 하지만 그럼에도 실제 사례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남예멘과 아프가니스탄. 


그 중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할 것인데...

사실 공산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는 나 말고도 정리한 글이 인터넷에 많더라고? 유튜브 영상도 있고. 찾아보면 나올거야.


하지만 님들이 잘 모르는, 최후의 공산 아프간인, 

희대의 조커, 우즈벡인으로서 아프간의 별이 된 남자,

아프가니스탄민주공화국 영웅이자 아프가니스탄이슬람공화국의 유일한 원수

'압둘 라시드 도스툼'(1954-)과 그의 작은 공산주의 공화국에 대해서 알아볼거야


때는 1987년,

아프가니스탄은 소련-아프간전쟁의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음. 그 와중에도 아프가니스탄의 집권여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은 그 와중에도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고 자빠졌었는데, 강경파인 '할크'파와 온건파인 '파르참'파로 나뉘었음. 할크파는 맑스-레닌주의 정통을 신봉하여 노동계급 정당을 건설해 공산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파르참파는 아프가니스탄 자체가 레닌주의 사상을 도입하기엔 너무 미개하기 때문에 국가 발전을 하는 것이 먼저라고 믿었음. 일례로 할크파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기 때문에 종교 자체를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파르참파는 이슬람을 국교로 지정하여 한다고 주장하여 대립이 있었음.


이게 얼마나 막장이었냐면 아프간 국토 반도 못 차지한 새끼들이 지들끼리 파벌 나뉘어서 쿠데타 일으키고, 소련-아프간 전쟁의 시작 중 하나인 아민 대통령 암살도 사실 무슨 이슬람주의 야당이 아닌 지들 집안싸움에서 아민을 미국 간첩을 몰았다가 탈이 난거임. 이게 소련 철수 직후인 89-90년에는 더 심해져서 89년에는 할크파 주도 쿠데타 미수가 있었고, 90년에는 딴 사람도 아니고 국방장관이 또 한번 이슬람 원리주의 군벌 굴부딘 헤크마티에르(1947-)를 포섭해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했음.


할크파가 계속해서 쿠데타 시도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암살한 하피불라 아민(1929-1979) 대통령 시절에 이미 군부 내 파르참파 세력에 대한 대숙청이 있었고, 그래서 군부 내에 할크파가 없으면 군을 굴릴 수 없는 상황이 와버린 탓이 큼. 결국 이것은 89년 쿠데타 직후 모하메드 나지불라(1947-1996)가 군장성에 대한 대숙청을 벌이고, 결국 공산정권이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짐



같은 파르참파이지만 나지불라 '따위'에 밀려 소련->러시아로 빤쓰런한 바브라크 카르말(1929-1996)은 자신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신임하던 우즈벡계 군인 압둘 라시드 도스툼 대령을 꼬셨음. 도스툼도 솔깃할 수 밖에 없었던게, 카르말 정권 시절 도스툼은 자신의 고향인 조우즈잔 주에서 근무하면서 말로는 인민군의 일개 연대장에 불과했지만 카불 바깥아서 유일하게 주 하나를 통째로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사실상 왕 노릇을 하고 있었음. 도스툼은 애초에 군에 입대해서 대령이 된 사람이 아님. 


도스툼은 어렸을 적 찢어지게 가난했거든? 그래서 뭐라도 벌어먹고 살아야지...해서 정유소에 취업했음. 그게 도스툼 15살때임. 그때만 해도 왕정이었거든. 근데 돈을 열심히 벌긴 하는데, 도스툼네 집은 그래도 가난한거지. 그래서 어린 도스툼은 노동환경을 개선해야겠다!는 원대한 꿈을 갖고 노조에 들어가. 노조에 들어가서 20대에 위원장까지 했는데 이게 무슨 횡재야? 쿠데타가 일어나서 '노동자 나라를 세우겠다!'고 하는 세력이 정권을 잡았네? 그렇게 도스툼은 공산정권이 들어서자 노조원들, 그리고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지역 주민들과 함께 공산주의 정당 인민민주당을 지지하는 민병대를 창설해. 그 민병대는 저절로 아프간 인민군에 흡수되었고, 도스툼은 장교가 되어 대령까지 진급하게 된거임.


나지불라가 집권하자 꼴통 파슈툰 새끼밖에 없는 칸다하르에서 있으라니까 빡이 치지. 그 와중에 원래 도스툼이 활동하던 조우즈잔 주의 연대장에는 파슈툰족이 임명되었음. 거기에 엎친데 덮친격으로 1992년 소련이 해체되며 아프간 공산정부에 대한 외부지원이 모두 끊기게 되지. 상황을 파악한 도스툼은 몰래 아흐마드 샤 마수드(1953-2001)와 손잡고 카르말과 우즈벡 대통령 이슬람 카리모프(1938-2016)의 지원을 받아 조우즈잔 주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우즈벡계, 투르크멘계 인민민주당 당원들, 민병대원들, 휘하 병력들과 함께 인민민주당을 탈당하여 '아프가니스탄 국민이슬람운동'을 창당함. 이것이 1992년 3월의 일이야.


이것이 바로 아프가니스탄 국민이슬람운동의 당기. 공산당 냄새가 아주 풀풀 남


도스툼의 배신 이후 아프간 정부군은 급격히 무너졌고, 1992년 3월부터 카불 공세가 시작되었음. 이때 연합한 6개의 군벌은 다음과 같아:

* 아프가니스탄이슬람사회 / Jamiat-e Islamoi

  지도자: 부르하누딘 라바니(1940-2011), 아흐마드 샤 마수드(1953-2001)

  성향: 이슬람민주주의, 타지크민족주의

* 이슬람혁명운동 / Harakat-i-Inqilkab-i-Islami

  지도자: 무하마드 나비 무함마디(1920-2002)

  성향: 이슬람주의

* 굴부딘이슬람당 / Hezb-e-Islami Gulbuddin

  지도자: 굴부딘 헤크마티에르(1949-)

  성향: 이슬람주의, 파슈툰민족주의

* 아프가니스탄해방이슬람연합 / Ittehad-e Islami bara-ye Azadi-ye Afghanistan

  지도자: 압둘 라술 샤이프(1946-)

  성향: 이슬람주의

* 아프가니스탄이슬람연합당 / Hezb-e Wahdat-e Islami Afghanistan

  지도자: 압둘 알리 마자리(1946-1995)

  성향: 이슬람시아파주의, 하자라민족주의

* 아프가니스탄국민이슬람운동 / Junbish-i-Milli Islami Afghanistan

  지도자: 압둘 라시드 도스툼(1954-)

  성향: 사회주의, 세속주의, 우즈벡-투르크멘민족주의


이런 식으로 각자 민족의 이익을 대변했고, 각자 어느 정도의 종교적 색채를 원하는지도 다들 달랐음. 그저 '나지불라 개좆같은놈 빨리 끌어내자'라는 공통의 목적을 가지고 일시적으로 원팀이 된 것에 불과했음. 92년 4월 25일 여섯개의 군벌은 일단 카불에 입성하여 나지불라를 끌어내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공산정권이 무너지자마자 바로 지들끼리 싸움(...) 결국 라바니와 마수드의 이슬람사회를 중심으로 5월 2일 먼저 굴부딘 군벌을 제외한 나머지 5개 군벌이 연합에 합의했으며, 5월 25일, 굴부딘이 신정부의 총리직을 약속받으며 연정에 합류했음. 그러나 채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29일, 아프간 임시대통령 시브가툴라 모자데디(1925-2019)가 그의 전용기를 격추 시도했다는 이유로 굴부딘을 기소하면서 이 일시적인 평화는 4일만에 파탄이 남. 그날 이후 카불은 연말까지 로켓이 안 날아오고 사람이 안 죽는 날이 없었음. 말 그대로 무법천지.


한편, 도스툼은 마수드와 협상하며 바글란, 사망간, 발흐, 조우즈잔, 사리풀, 그리고 파르얍주의 지배권을 인정받았음. 이 지역에서만큼은 과거 공산정부의 복지정책 등이 그대로 유지되었고, 돈이 어디서 나는지 노인들은 연금도 받았고, 의료혜택도 좋았다고 함. 한편 길거리에는 히잡을 쓴 여성과 히잡을 쓰지 않은 여성의 비율이 반반이었다고 하고, 여성들에게도 남성들과 동등한 권리가 주어졌음.


그러나 카불에서는 외세가 개입하며 내전은 막장으로 치닫았음. 라바니와 마수드의 이슬람사회는 타지키스탄이 무함마디의 이슬람혁명운동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마자리의 이슬람연합당은 이란이, 도스툼의 이슬람운동은 우즈베키스탄이, 굴부딘의 이슬람당은 파키스탄이 지원했음. 일단 굴부딘에 맞서 나머지 다섯개 군벌은 연합했고, 92년 6월 내내 수세에 몰린 굴부딘은 파키스탄 ISI의 도움으로 카불 곳곳에서 폭탄테러를 저질렀음. 그렇게 해서 연말까지 죽은 카불 시민만 1만명에 이름. 



마수드의 이 사진이 그 참상을 전해듣고 나온 것. 


93년이 넘어가자 굴부딘의 군벌은 카불에서 완전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지만, 탈레반의 선배격 되는 인간 아니랄까봐 도시 곳곳에서 게릴라전과 폭탄테러를 일으켰고, 94년 1월에는...


마자리와 도스툼이 굴부딘한테 붙음ㅋㅋ


이때는 도스툼 영지도 마수드한테 털려서 발흐주의 마자르이샤리프에서도 전투가 일어남. 하지만 당연히도 극우 굴부딘과 극좌 도스툼은 물과 기름같은 존재였고 둘이 다시 손절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94년 11월, 칸다하르에서 '탈레반' 입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때 도스툼이 한 말이 그 유명한


"우리는 위스키도 음악도 없는 체제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도스툼은 95년 1월 다시 최종적으로 마수드 편으로 전향하였으며, 96년 6월엔 굴부딘도 다시 전향하였음. 일단은 일시적으로 도스툼의 영지인 북부 지역도 안정되었으며, 이때 도스툼은 전성기를 누림.



이 당시 도스툼의 영지에서는 자체 국기와 화폐가 발행되었으며, 길거리는 도스툼의 사진으로 도배되었고, 도스툼의 군사규모는 최소 5만, 최대 10만으로 추정. 자체 폭격기는 물론이고 미사일까지 가지고 있던 미친 군벌이었음. 


그러나 이 전성기 역시 오래 가지 못했음. 헤라트의 지방 군벌이었던 모하메드 이스마일 칸(1946-)이 칸다하르에서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도스툼은 이스마일 칸의 통수를 쳐 헤라트를 공격했음. 이스마일 칸은 결국 이란으로 망명하게 되었으나 동시에 헤라트는 도스툼이 아닌 탈레반의 영토가 됨. 이후 96년에 도스툼 군벌의 군인이었던 라술 팔라완(?-1996)이 마자르-이-샤리프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를 도스툼의 배신이라고 여겼던 라술의 동생이자 마자르-이-샤리프의 민병대원 압둘 말릭 팔라완(?-)이 탈레반에게 북부지역의 권력을 넘겨받겠다는 약속을 받고 97년 5월 도스툼을 배신하고 마자르-이-샤리프를 탈레반하게 넘겨주게 됨. 도스툼은 일시적으로 우즈베키스탄에 망명했으나 97년 11월 다시 마자르-이-샤리프를 수복하였으나 98년 8월 다시 탈레반이 차지함. 도스툼은 터키로 망명했고, 마자리를 탈환한 탈레반은 도시를 다시 뺏길까 두려워 도스툼의 민병대원들은 물론 타지크족, 하자라족, 우즈벡족, 투르크멘족 민간민들을 묻지마식으로 학살하였음. 그렇게 잡하온 수만명의 남성과 '이슬람 율법을 어기며 타락하게 살아온' 여성들은 대형 컨테이너에 100-150명씩 갇힌 상태로 컨테이너에서 질식사했음. 그렇게 학살로 죽은 피해자만 약 8천명에 달함.


1996년 북부동맹(파란색)과 탈레반(빨간색)


2000년 북부동맹(파란색)과 탈레반(초록색)


2001년 5월 도스툼은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여 반격을 시도했으나, 2001년 9월 9일,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벨기에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조직원들에게 암살당했고, 이틀 후인 9월 11일에는 '그 테러'가 일어남. 10월 17일 '12 솔져스'로 각색된 미군 육군 595특전부대원 12명이 도스툼과 누르의 민병대에 합류하여 11월 10일 마자르-이-샤리프를 탈환하였음. 11월 24일 쿤두즈에서는 15000명의 탈레반 대원들이 포로로 잡혔는데, 도스툼은 복수를 위해 그 중 2천명을 컨테이너에 우겨넣고 포로수용소까지 빙빙 돌아서 점령지일주를 한 결과 포로수용소에 도착하자 그들은 모두 질식사한 상태였음. 이게 그 유명한 '도스툼 통조림'임. 이외에도 툭하면 탈레반놈들을 학살해서 미국한테 욕처먹었음.



신정부가 세워졌음에도 욕심이 많았던 우리 장군님은 2003년 카르자이 좆같다고 쿠데타 일으키려다가 미국형님한테 걸려서 겸상한 다음 사과하고 자숙했으며 그해 5월에는 암살당할뻔했다가 터키로 빤쓰런해서 자숙했다가 다시 돌아오고, 08년도에 정적 고문혐의로 국내 여론 나빠지자 또 터키가서 자숙하고, 09년도에 돌아와서 14년도부터 런슈라프 가니(1949-) 밑에서 제1부통령을 지냈는데 16년에 정적을 납치하고 부하들을 시켜 강간, 그리고 동영상을 찍어 유포한 혐의로 고소당했다가 또! 터키로 빤쓰런하고 자숙. 18년에 복귀하여 이번엔 IS한테 암살당할뻔하다가 자폭테러범이 타이밍 잘못 맞춰서 애꿏은 민간인들만 죽음. 19년에도 암살 시도가 있었으나 또 실패. 이쯤 되면 불사신임. 



21년 8월 11일 마자르-이-샤리프를 지키기 위해 직접 나섰으나 런슈라프 가니의 개병신또라이급 삽질로 본인과 휘하 민병대들은 비무장 상태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망명했음. 그리고 도스툼은 또! 터키로 런하고 자숙한 다음 현재는 우즈베키스탄으로 복귀하여 

NRF 조우즈잔지부, 또는 울프스쿼드를 이끌며 반탈레반 게릴라전을 지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