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대만

   

 멀게는 청의 일개 성(城)부터 가깝게는 일제의 식민지였던 대만은,

국공내전 패배 후 국민당이 대만을 본토로 삼게 되면서 1683년 정씨 왕국 멸망 후 300년만에 국제사회에 주체로서 등장하게 되었다. 주체와 객체로서 여러 정치적 상황이 혼재했던 대만의 경제사에 대해서 알아 보겠다.

   

1. 일제하 대만의 경제적 발달

 대만은 식민지배를 받기 시작한 이래로 부족한 기반 산업으로 인해 재정적으로 일본에 의존했다. 1904년 러일 전쟁 발발 후 재정난이 생긴 일제는 대만섬의 재정자립화를 시도해야 했고, “재정 20년 계획”이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20년안으로 본국의 보조금 없이 재정적 자립성을 갖추겠다는 계획을 갖게 되었다. 한편 급진적인 공업화 정책으로 인해 탈농업화가 가속돼 농업생산량이 부족했던 일제는 본토의 부족한 생산량을 매우기 위해서 공업은 일본, 농업은 대만이라는 모토를 시작으로 대만의 농업화를 시작했다. 대만섬의 재정적 자립과 농업생산량 증대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기 위해서 원래 식량생산이 주였던 대만의 농업화를 사탕수수와 장뇌 같은 상품식물 위주의 농업화로 바꾸게 되었다. 

상품작물의 뛰어난 수익성으로 인해서 대만은 식민지의 1차적 목표인 흑자 경영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적 목표인 일제의 숙원인 대륙침략의 선봉이자 일본의 공업품 공급과 수요를 같이 분담하는 내지의 연장선상에 노이게 되었다.

 대만은 해양적 요충지로 인한 일본해군의 수요, 중화민국의 중심부인 난징과 상하이와 가깝다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한 일본육군의 수요가 맞물렸고, 해군을 위한 조선, 항만 산업과 중일전쟁의 보급지로서 필요한 기초인프라가 건설되었다. 또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전함들의 수리필요로 인해서 대만의 조선소들은 조선이나 내지의 조선소들과 다르게 제조보다 수리를 초점으로 설치되었다.

 요약 하자면 식민지 시대 대만은 민간경제에서는 상품작물을 재배하는 농업적인 정책이 실현되었으며, 국가경제적인 면에서는 일제의 2대전 준비를 위한 군수,인프라 산업에 초점이 맞춰졌다. 이러한 대규모 인프라 사업의 유지·발전을 위한 대만은행 등 은행 신용체계의 확장, 공영사업의 운영 자금 부족을 메꾸기 위한 대만은행권의 남발로 인해 발생한 통화 팽창은 해방 이후 대만 경제의 회복을 저해하는 최대 원인 중 하나였다.

또 엔블록이라는 독점경제 실현을 위해서 일제는 매곡을 독점적으로 수행했는데, 역시 인플레에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일제가 남겨둔 인프라, 비록 상당수가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서 붕괴되었지만, 는 전후 대만의 강한 제조업과 공업의 밑바탕이 되었으며, 일제가 남겨둔 항만과 조선산업 역시 대만의 강했던 조선업의 뿌리가 되었다.

대만 본토 내에서도 식민지 시대 대만의 경제적 성취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대만의 고도 성장은 식민지 시절의 발달이 가장 지대했다는 평과, 대만의 경제성장은 대륙,일본의 영향이 혼재되어있다는 주장, 대만의 자본주의적 경제 발달은 일제와 연결될 수 없는 핵심적인 선이 있어 일제의 영향보다 초기 국민당의 영향이 강했다는(예를 들어 대만의 직조업) 의견이 상충되고 있다.

   

2. 해방 전후 대만의 경제적 발달 1945-1972

 일제의 패망에 따라 50년 만에 반환된 대만은 곧 극심한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엔 블록이라는 기형적인 종속경제로 인한 구조적 문제와 일제가 애시당초 설계한 경제적 목적과 상반된 대륙의 대만에 대한 경제적 요구, 제2차 국공내전에서 군비 증가로 인해서 대량의 인플레이션이 겹쳐 대만경제는 아주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이에 대해서는 일본의 영향이 컸다는 설과 국민당 정부의 지나친 국방비로 인해서 심화되었다는 설이 공존한다.)

끝없는 군비증가와 부패 문제로 인해서 결국 국민당 정부는 대만으로 이주하게 된다.

국민당을 따라 탈출한 대량의 이민자는 대만섬 으로 끝없이 유입되었고 이는 기존의 대만섬의 인구에 맞춰졌던 인프라 에 비해 지나치게 많아서 경제적 혼란을 더욱더 가중시켰다.

그러나 5.4사건으로 지속돼왔던 대만 내의 계엄령과 본토로부터 유입된 다량의 군인, 경찰 ,소방관등의 치안인력은 경제적 혼란을 해소할 수 있는 정치적 안정을 주었다.

 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기존에 일본, 필리핀을 제외한 극동 국가들은 소규모의 미군 지원 하에 자체적인 방위능력을 갖게 하려했던 애치슨 라인을 포기하고 극동에서 전면적인 개입에 나서게 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애치슨 라인 외각에 있었던 대만 역시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이는 한국과 일본에는 미치지 못하는 양이였으나 당시 국민당으로서는 획기적인 금액 이였다. 인플레 문제는 국민당이 화폐개혁을 실시해 일달락 되었다,

 1950년대 초 대만은 일제가 남기고 간 농업자본을 이용해서 수출 대다수를 작물로 하는 전형적인 농업국가의 모습을 취했다. 국민당 정권은 이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저렴한 인건비와 강한 국가적 개입을 통해서 섬유제조 같은 내수 위주의 면직업 산업을 빠르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섬유제조 산업 역시 빠르게 전환되었는데, 첫 번째로 미국의 원조가 유상원조로 전환되었으며, 둘째는 대만이라는 섬 자체가 지나치게 왜소해 내수경제주도는 맞지 않았고 세번째로 전후 빠른 경제 성장이 찾아와 기존의 선진국들의 임금이 상승해 외국계 기업들이 새로운 생산 기지를 찾게 되었다. 결국 대만은 위의 세가지 이유로 인해서 본격적인 제조,수출 중심의 국가로 전환되었다. 한편 제조업 분야에서 일본으로부터 지나치게 기술적으로 의존했기에 초기에는 기술인재의 부족이 극심했지만, 내지의 혼란상으로 인해서 대만에 정착하려 했던 일본인 기술자, 대륙으로부터의 충당과 대만 자체적으로 길러낸 인재를 중심으로 극복해갔다. 이러한 기존의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빠른 공업중심 경제로의 전환에 대해서 학계는 1930 황금시대 이후 지속적으로 중화민국내 엘리트 층에 존재해왔던 중공업, 국가 중심의 경제체제라는 일종의 공감대가 대만에서 발현됐다고 주장한다.

대만은 제조업,수출 위주의 구조로 전환되기 위해 지속적이였던 국가개입을 줄이고 또한 지나치게 저평가 됐던 대만달러의 가치를 올렸다. 부족한 자본 충당을 위해서 화교 자본 유치를 위한 화교귀국투자법(1960)과 해외투자자들을 위한 기술합작법(1962) 등이 새롭게 개설되었다. 이러한 일렬의 탈국가화, 수출위주의 경제구조 변화는 지금까지도 대만 경제에 대해서 뿌리깊게 작용하고 있다. 한편 1960년대 후반 대만의 초기 수출형 구조의 핵심적인 수출품은 시맨트나 콘크리트 합판 같은 경공업 위주였으며 이는 낮은 인건비와 빠른 인촌향도 현상으로 인한 신속한 노동력 충당이 핵심이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기존의 경공업-저임금의 경제체제가 또다시 하나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임금상승으로 인해서 기존의 단순조립공장형의 경공업이 불가능해졌으며 1974년에 발생한 오일쇼크로 인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대만의 외교적 입지 축소로 인해서 투자규모가 축소된 것 이였다. 이에 새롭게 출범한 장징궈 정부는 대대적인 경제개혁을 통해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하려 했다. 첫 번째로 긴축재정을 통해서 불어났던 인플레이션을 극복했다. 두 번째로는 정채 되어있던 인프라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해 신규 인프라 조성을 통한 투자규모 확장을 불렀다. 세 번째로는 기존의 경공업 산업에서 탈피한 중화학공업으로의 성장을 통한 이윤 증가를 꽤했다. 추가적으로는 민간경제 분야에서는 기존의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선진기술 도입과 생산을 통한 수출을 시도했다. 이러한 노력은 성공했고 대만경제는 석유파동에서 극복해서 1988년도까지 지속적인 고성장기세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1988-00년대 초반

 높은 저축율과 상당한 무역흑자를 통해서 승승장구 하던 대만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 외적으로는 선진자본진영의 성장률 둔화로 인한 보호주의 증가로 인해서 무역흑자 감소와 저성장에 시달리고 내적으로는 무역흑자 규모에 비해서 뒤떨어진 기술력과 농업발전의 한계라는 이중고에 시달리게 된다. 동시에 정치적인 변동, 민주화와 자유화로 인해서 1990년 내성인 출신 총통인 이등휘가 집권하게 되자 기존의 국가주도 경제에서 벗어나 발전국가의 관성유지를 위해서 자유방임주의 체제로 돌입, 민간-중소, 국영- 대기업이라는 정책 탈피와 적극적인 복지정책, 국내방어 정책을 펼쳤다. 이는 국가경제에 심히 의존하던 기존의 국영기업의 쇠퇴를 불러일으켰으며, 기술발전 저하와 겹쳐 저성장 기조를 심화 시켰다. 다음은 80년대부터 00년대 초까지 대만의 내수와 전체경제성장률이다.


   


   

   

보시다시피 대만의 내,외,정치적인 문제에도 불과하고 대만경제는 동남아시아 발 경제위기가 닥쳤던 90년대 후반에도 건재한 경제 성장률을 갖추었다. 하지만 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심한 경제적 위기와 경제둔화를 보이게 되었다. 이는 8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벌어들였던 무역흑자와 금융소득으로 90년대 후반까지는 방어에 성공했지만 00년대 들어서 중국이라는 동일한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거대국의 제조업참여와 경공업분야에서의 신흥국 증가, 첨단기술 분야에서의 초 격차 발발로 인해서 방어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결국 80년대 초반부터 대만경제에 꾸준히 요구되어 왔던 경제의 복합성 증가와 첨단화를 수행하지 못함으로 인해 00년대에 들어서 요구된 새로운 문제인 발전국가로서의 관성유지에 실패한 것이다.

2005-현제

 00년대의 실책에 대해서 대만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미래정책에 대한 부재라 판단, 신자유주의 제한과 발전국가로서의 관성 유지를 둘 다 걷는 “잡종의 길“을 선택한다.

이를 위해서 대만은 90년대에 쇠퇴한 국가경제위주의 산업역시 지속하되, 민영산업에서의 기술발전을 이루는 두 마리 토끼 잡기에 시도했다. 이러한 결정은 결과역시 잡종의 길로 나타났다. 장점으로는 기존의 저 기술 산업에서 탈출하는데 성공해 tsmc같은 유수의 it회사들을 기르는데 성공했다는 것과 국가주도의 금융에서 민영 금융으로 변환시켰지만 여전히 막강한 금융력을 보유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단점 역시 존재하는데, 첫 번째로는 국가주도의 발전국가 관성 유지라는 명목으로 국영기업과 공공 인프라 에 대해서 대규모의 투자를 했지만 정경유착 으로 인해서 상당한 금액을 손실했다는 것과 두 번째로는 발전국가로서의 관성유지를 위해서 저임금, 저임금 상승이라는 민생경제에 악영향을 주는 정책을 피게 되어서 가계경제의 위기와 빈부격차의 심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대만에게는 현재 여러 주요한 과제들이 놓여 있다.

첫 번째로는 정치적 마찰을 일으키는 중국으로부터의 경제 의존도 해소와 인재의 해외탈출 감소. 두 번째로는 임금인상을 통한 고도선진사회 진입이다.

여러 복잡한 문제들이 복합되어있기에 난관이 예상되지만 지금까지 끝없는 시련에도 불구하고 유연한 해결책과 민관의 합동이라는 전통적인 사상을 통해 극복해온 만큼 대만과 유사한 문제점과 인접국으로서 앞으로의 대만의 도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