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알아볼 도시는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레바논
인구: 약 677만 명(2021년 기준)
면적: 10,452km²
수도: 베이루트
언어: 아랍어(국어), 프랑스어
민족: 아랍인 94%(레바논계 75%,쿠르두족 10%,팔레스타인 5%등) 아르메니아인 5%
종교: 이슬람 53%(수니파27%,시아파 26%),기독교45%(마론파24%,그리스정교회5%,멜키트파5%,아르메니아정교회4%등),드루즈교 5%
정치: 의원내각제,공화정
GDP: 약 73억 6천만 달러(약 8조 8천억원)
1인당 GDP: 약 4981달러(약 597만원)
인간개발지수: 0.744(세계 92위)
화폐: 레바논 파운드(페그제 실시 중,1달러=1507파운드)
인플레이션율: 350%
산업: 농업 12%, 제조업 22%, 서비스:66%
하위 행정구역: 6주



필자가 생각하는 훌륭한 도시는


1) 문화.관광의 성지
2) 소프트 파워가 강한 도시
3) 산업과 물류,금융의 중심(허브)
4) 조화미와 비례미의 건축물
5) 아이덴티티가 뚜렷한 도시(토포필리아)


이 다섯개가 조화를 이루는 도시인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베이루트라고 생각함.


그래서인지 베이루트는 필자가 애정하는 세계도시 7개 중 하나다.


그러면 '레바논의 수도' '중동의 파리' '롤렉스의 고장' '무하마드 깐수의 고장' '오스만의 미항' '중동의 알프스가 보이는 곳' '중동의 허브' '아름다운 지중해의 도시' '페니키아인의 고장' 베이루트로 떠나보자







[ 5000년의 역사 도시 베이루트]


세계사 소개 할거 아니므로 간단히 요약

페니키아-아시리아-신바빌로니아-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헬리니즘-셀루오코스-로마제국-이슬람 제국-이스라엘 왕국(십자군)-아이유브-맘루크-오스만제국-프랑스령-레바논내전-현재




[ 제1 번영기 팍스로마나 시대 ]

팍스로마나 시기 베리투스 포룸 유적


로마 목욕탕



로마법의 성지로 팍스로마나 시기 부흥이 일어났던 베이루트. 베이루트의 입지는 로마 7대도시에 준하였다.


[ 제 1의 침체기 십자군 전쟁]

이벨린 성채

이슬람왕조와 십자군의 치열했던 대립을 보여주는 성채.


원래는 십자군 원정기에 지어진 크리스쳔 성지


현재는 이슬람교도들이 오 마리 모스크라는 모스크로 사용중이다.



[ 이슬람의 영역에서 프랑스령으로 ]

맘루크 왕조(이집트)시기 zawiyat Ibn Arraq 모스크 돔



Petit Serail에 위치한 오스만 항구 유적




오스만 제국 시기 지어진 오스만 은행 베이루트 지점





2. 아랍의 국제도시, 아랍의 허브도시 - 부흥의 서막 

여기서 말하는 베이루트는 행정구역 상의 베이루트가 아니라 그레이트 베이루트(Great Beirut)를 통칭.


먼저 도시 구조를 간략하게 설명




오스만까지 이어오던 항구 자리를 중심으로 프랑스 건축가들이 설계하여 도시를 확장시켰음.





고교과정 세계지리에 나오는 제3세계 도시구조 모델과 상당히 비슷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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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설계한 시계탑 7거리 (Place de l'Étoile). 순교자 광장을 비롯한 이 지역은 프랑스의 도시계획 모델인 방사형 구조가 많다. (롤렉스 시계의 모델이 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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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베이루트 시가지 풍경



1955년 레바논의 1인당 GDP는 영국,스웨덴과 비슷


베이루트는 프랑스 식민지 시절의 외국어 교육, 다양한 종교로 인한 중동 내 개방적 분위기, 중동 지중해 연해의 가장 큰 배후 항구라는 점에서 금융의 허브로 자리잡게 된다.



1950년대 바빌로스 은행


사우디아라비아 항공과 함께 중동 항공시대의 개막을 알린 중동 항공(Middle East Airlines.). 베이루트에서 1946년 첫 비행



1960년대 베이루트 아메리칸 대학의 모습.

베이루트의 주요 산학 연구기관으로 성장하여 베이루트가 금융과 물류의 허브로 성장하는 발판이 되게 해주었음.




1960년대 카지노 두 리비안의 모습.
베이루트는 카지노 호텔 관광업을 확장시키며 국제 컨퍼런스의 장으로 성장.



1960년대 아랍은행 베이루트
중동 전역이 산유국으로 부흥하자 중동지역의 자본들이 규제로부터 자유롭고 친서방적인 레바논으로 몰려들었다.



1967년 베이루트 주거지 모습


1960년대 세계 도시 베이루트의 모습




3. 국제도시에서 아랍의 화약고로 - 몰락의 과정



하지만.. 1975년 베이루트 내전이 시작되었고 서베이루트는 이슬람교가 동베이루트는 기독교인으로 분할되었다. 도시 전역에서 총격전이 매일 벌어졌다.



1982년 이스라엘-레바논 전쟁 당시 폭격당한 경기장




도시 곳곳에 남아있는 전쟁의 흔적들



결국 내전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으로 인해 침체기를 맞게 된 베이루트는 성장동력을 잃었고, 그 자리를 사막 변방 토후국 두바이가 차지하며 세계도시로 급부상하게 됨.




4. 베이루트의 재도약 - 다시 부흥기로 



손수 잔해를 쓸어담는 베이루트 시민들/ 재건된 거리


그리고 이 거리에는 Hope Peace Beirut 그리고 특산물 베이루트 장미로 채워진다.




전후 베이루트 Central District(중구) 재건 계획안





레바논은 1990년대 이후 장기적 경제불황을 타개하기 위해 각종 방안을 모색했고 그 중 하나가 세재 혜택을 통한 글로벌 기업의 유치 전략임.






실제로 경제 성장은 2005년을 기점으로 폭풍성장함.




serail, City Cetre의 오피스 지구


베이루트 미항 Zaitunay Bay





베이루트의 지역별 빈부격차

성장에는 그 이면도 있었는데... 베이루트의 도심지 중심 개발은 외곽 지역과 도심지의 급격한 빈부격차를 야기했고 베이루트의 심각한 사회이슈로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지.



However 베이루트에게는 또 한번의 위기가 찾아오는데


5. 베이루트항 폭발사고 그리고 위기의 서막

 


이 한 짤로 보이는 '베이루트항 폭발 사건'이다

2020년 8월 4일 18시 8분 18초

이 시각이 베이루트 경제를 한순간에 몰락시켰다.




폭죽 창고에서의 1차 폭발이 옆에 붙어 있던 질산 암모늄 저장고까지 번져서 2차로 대형 폭발이 일어났다.




폭발 이후 녹아 내려버린 컨테이너항의 모습.



"30만 명이 갈 곳을 잃는 등 도시 절반 이상이 피해를 보았고, 피해액은 30~50억 달러(5조 9,400억 원)를 상회하리라 추산했다." -연합뉴스 보도-




베이루트 폭발 사고 피해지역




실제로 베이루트 경제는 이 사건 직후 실질 GDP가 20% 하락하고 ,물가상승률은 100% 가까이 치솟았으며, 빈곤률은 27%가량이나 증가했다.



IMF 위기를 맞이한 레바논 (남일 같지 않아 보인다.)




희망을 상징하는 베이루트 벽화
베이루트가 세번째 부상을 이뤄냈으면 한다...



+ 베이루트 장소 돞아보기 




프랑스 식민지 건축양식인 Saifi Village



Beit Beirut. 레바논 내전 당시 사수들이 서로 탈환하려고 했던 건물이다. 위치 상 우위를 점할 수 있어서였다고 한다. 현재는 문화의 허브로 자리잡아 내부에 박물관과 도시 문화센터가 있다.ㅎ



레바논 입법.사법.행정의 중심지. Grand Serail



참고자료 : KOTRA 암만 무역관(베이루트 이전), 위키백과, National Geograph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