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가지 전제를 하자면.
1. 서경의 중요성(토지.교통.풍수) 본격적으로 등장한 시기는 고려 중기입니다만. 그 시기 유학을 배운 학자들이 주장한 남경(서울)(서경의중요성과동문) 의 중요성도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2. 서경천도 운동을한 묘청(스님)핵심은 단순한 지리 이동이 아닌 개경에 기득권을 가진 세력에 대한 대규모 차원의 권력이동 및 개편입니다. 그 투쟁적 과정에서 기존 기득권에 반대에 결국 실패합니다만. 서경의 중요성과 더불어 남경의 중요성은 확대됩니다
3.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들은 철저한 승유억불(유교숭상 불교억압)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만든 새왕조의 정당성을 위해서 수도를 선택하려하고. 기존에 제시되서 몇차례 홍역을 앓던 개경. 숭유억불에 반하는 스님들이 주장했던 서경. 보다는 과거에 고려 유학자들이 주장하고 논쟁이적어 기득권에 완연한 이동이 가능한 남경이 높은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결론: 수도를 선정할때 지리적.군사적.기후적.농경적 배경 조건을 고려함은 당연하고 이것보다 더욱 중요한것은 “각 시대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지배 계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도는 정해진다는것” 입니다
간단하지. 비록 고려의 마지막 수도가 개경이었으나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다. 더군다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인데 평양사람들이 고려 망한 조선에게 호의적이었을까? 절대 아니지. 개경 만큼은 아니었어도 평양도 조선에 대해 결코 우호적이진않았지. 그런 상황에서 평양에다 수도? 죽을려고 환장한격
고려가 중시했다는 것 외에도, 태조 이성계 당시 명하고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였죠.
태조 본인이 명 정벌한다고 가다가 돌아왔고(위화도 회군=최영 축출&고려 멸망),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이 새롭게 명 정벌 주장하며 대립하는 상황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정하기에는 부담이 있었겠죠. 신라 통일 후에 38선 이북 지역은 거의 군사 요충지여서(후고구려나 고려마저 평양 천도는 안 함) 대다수 인구는 남쪽에 몰려 있고. 세종 때 가서야 겨우 두만강까지 확보하는 지경이었고, 아무리 여진족을 얕잡아본다고 해도 그 이상의 영역을 확보하겠다고 하면 명하고 정말로 싸웠을 지도..
조선 태종 때가 되면 고려의 권문세가 출신이자 서북계 성씨인 신천 강씨(이성계 둘째 부인)와 연주 현씨가 거의 멸문을 당하다시피 하는데 이 두 가문은 제주도까지 도망을 쳤음. 그래서 이 두 성씨는 본관이 각각 황해도 신천과 평안도 영변(연주)인데도 제주도에 집성촌이 많은 독특한 분포를 보임. 제주도 내에서도 고양부 3성씨가 지배적인 북제주보다는 중세에는 무주공산이었던 남제주에 많이 정착했음. 오늘날 제주도 출신 신천 강씨 유명인으로는 강금실과 강용석(목포를 거쳐서 서울로 올라 옴) 집안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