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도호부랑 군은 주현 출신, 현은 속현 출신인 고을에 인구 상관없이 갖다붙인 거라 그런지 도호부랑 군이 현한테 발리는 경우가 저 표에선 심심찮게 보이는데 목이랑 대도호부는 주현 중에서도 어지간히 큰 주현에만 붙었던 거라 능주목 빼고 목은 다 상위권에 있어서 의외라는 것
이에 대해서는 확실한 언급을 못 찾음. 신분제 철폐 이후에 집계된 일제시대 통계와 비교하면 사실상 노비인구도 포함한 걸로 볼 수 있을 듯. 일례로 의주는 1789년 89,970명에서 1911년 111,099명으로 증가했는데 1789년 인구에 노비가 제외된거면 100년 동안 인구가 거의 제자리 걸음이었다는건데 그건 좀 이상하지 않냐. 역사학자들이 전국 노비 비율을 30~40%로 추산하는데 89,790명에 이를 더하면 1911년 인구보다 많아짐. 아님 맬서스 트랩의 영향으로 정말 인구가 감소한 걸 수도 있고. 이상 뇌피셜.
https://www.hankyung.com/news/article/2014051670741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사회가 안정되고 경제상황이 호전되어 자원, 특히 식량이 풍부해지면 출생률이 높아지고 사망률이 낮아져서 인구 증가율이 높아지지만, 자원에 비하여 인구가 많아져 인구 압력이 높아지게 되면 출생률이 낮아지고 특히 사망률이 높아지게 되어 인구 증가율이 낮아지고 심하면 인구가 감소하게 된다."라고 하네. 인구 감소도 가능한 듯?
방금 전국 인구 구해보니까 답이 얼추 나오는 듯. 조선 인구가 1789년 7,394,138명이었는데 1911년 13,832,376명으로 증가했음. 조선 후기는 인구증가가 눈에 띄게 낮은 시절이었는데 상식적으로 인구가 두 배 증가할리가 없지. 노비나 천민 인구가 누락된게 유력함.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호구조사가 실시되었으며, 각 군현별로 호적대장(戶籍大帳)이 작성되었다.
호구조사는 매 3년인 식년(式年: 子·卯·午·酉年)에 이정(里正)·풍헌(風憲)·약정(約正) 등의 면임(面任)과 호방(戶房)·호적색리(戶籍色吏) 등의 색리의 주관 아래 각 가호(家戶)로부터 가내거주인구와 소유노비에 관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신고받아 먼저 이를 수령이 확인하였다.
호구단자의 기록은 대체로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전(戶典)에 규정된 호구식(戶口式)에 준하였으며, 기록항목으로는 ① 가구의 소재지, ② 호주의 신분(직역·성명·연령·본관), ③ 사조(四祖)의 신분 및 성명, ④ 호주의 처의 신분(성명·연령·본관), ⑤ 처의 사조의 신분 및 성명, ⑥ 동거인의 호주와의 관계(신분·성명·연령), ⑦ 소유노비 및 고공(雇工)주 01)의 신분(성명·연령·부모) 등이 내포되어 있다.
흥양은 현 주제에 저때부터 인구가 드글드글했네... 고흥반도 일대를 한때 속현으로 갖고 있었던 장흥 보성 낙안 셋 다 고흥반도 뱉어낸 뒤로 흥양보다 인구가 적어짐 ㅋㅋㅋㅋ 5.10총선거 때는 고흥 갑/을로 나누기도 했고 한동안 독립 선거구로 갔다가 13대인가 그 때 돼야 보성군이랑 합쳐짐. 합쳐진 뒤로도 물량빨로 계속 고흥 출신만 당선되다가 결국 20대 총선까지 와야 보성 이외에 다른 군이랑도 묶이게 됨
노가다 결과 전국 인구는 7,394,138명으로 집계됨. 세부적으로는 경상도 1,590,963명, 평안도 1,296,044명, 전라도 1,213,085명, 충청도 868,187명, 경기도 831,300명, 함경도 708,358명, 황해도 567,813명, 강원도 318,378명.
신분제에 따라 빼고 넣고 한다는게, 어처구니가 없는게 관노비든 사노비든 그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여서 인구에 필요가 없을것 같다.
호패에 포함한 양인 남녀면 저정도 나올것 같은데. 그리고 1789년도면 이산 죽기 1년전이었고, 당시 경제상황이 상당이 좋았다고 생각됨.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되는데 이정도면, 질문 하나 있는데 지금 저 지도는 오늘날 한반도 지도인가요 아니면 일제강점기 고적도보 측량도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