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고려는 어쨌건 벽란도라는 상업시장이 있긴 했는데 고려와 조선이 왜 이런 차이가 났느냐. 유교탈레반의 자폐적 쇄국 때문인가? 그런것보다는 명나라의 해금령이 더 큼. 명나라에서 왜구때문에 골치아파서 바닷길을 막아놓음-> 한정된 조공무역 외에 사무역을 할 창구가 없는거지. 이게 고려와 조선의 결정적 차이점
내 사견으로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에 논리학적 방법론이 전무함 -> 과학적 탐구가 불가하고 반증불가능한 내적사유에만 골몰함 등등의 근본적 한계가 있어. 그래서 체제유지에는 적당히 좋은데 좁은 우물안에서 그것만 붙잡고있음. 그러니 개인의 인격수양과 처신을 다루는 체계가 종교화 되어버리고 인격수양용 이데올로기로 온갖 국가시스템을 다돌리게 됨.
결국 애초에 명청이고 나발이고 공산당식 자급자족 농업국가 말고는 포텐셜이 없었다고 생각함.
아가리를 함부로 놀려도 존나 함부로 놀리는게
고려시대 상업활동이 병신레벨이라고? 기사는 다 찾아보고 씨부리는거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수백 개의 기사가 동아시아에서 고려의 상업활동을 증명하는데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몰라도 함부로 놀리지마 ㅋㅋㅋ 규모를 가늠하기 힘들 뿐이지 충분히 활발했는데 어느 블로그에서 쳐봤냐? ㅋㅋㅋㅋ
어릴 땐 훈구가 나쁜 놈들이고 사림이 훈구 때려잡는 정의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다시 공부해보니 아니라는 걸 알게 됨. 애초에 훈구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하면서 실리적인 과학기술도 중시하고 성리학 외 다른 사상에 포용적이었음. 근데 사림 이 새끼들은 과학기술 경시하고 사상도 성리학만 빨면서 뜬구름 잡는 소리나 하다가, 명청 교체기 가면 상황판단 못하고 명과의 으-리를 저버릴 수 없다 이지랄하면서 으리 으리 거리다가 청한테 박살남. 중기 들어서면서 훈구 멸종하고 나면 이젠 붕당해서 지들끼리 처싸우고 앉았음. 천하에 쓸모없는 족쓰레기같은 개 호로 잡놈새끼들. 사림만 아니었어도 조선은 좀 더 빨리 발전했을 거고 중기의 외침에 그렇게 무력하게 시달리지도 않았을 거라고 생각함
훈구는 나쁜놈들이 맞음. 아마 관학파와 훈구파를 동일시해서 그렇게 생각하는것같은데, 훈구파=관학파가 아님. 훈구파는 세조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그에 동조한 세력들이 권력을 쥐면서 생겨난 세력임. 세조 자체가 정통성이 없으니 자신을 지지하는 신하들에 대해 관대했고, 막대한 토지를 내려줌. 이들이 부패하면서 조선 전기의 황금기가 세종~성종으로 제한된것임.. 심지어 세조~성종은 세종대왕이 남긴 유산으로 그나마 버틴 정도지, 지들이 뭔가를 개혁하거나 한것도 없음. 하여튼 부패하고 강력해진-왕을 갈아치울수 있을정도로- 훈구파를 견제하기 위해 중종이 사림을 등용하게 된 것임. 조선왕조의 창업공신들은 세조가 다 박살내서 권력을 쥘 여지가 없었음.. 관학파도 그냥 관료집단정도였지 권력을 쥘 정도가 아녔고.. 세종시절 왕권과 신권의 조화라는게 왕권 내에서 신하들에게 자율권을 어느정도 줬다는거지, 왕권에 개길거나, 반항할정도가 아님.. 사림은 중앙정계에서 진출못한 세력들이었고,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세력을 갖추자 훈구파의 후손들도 그 줄에 선것. 성리학이 교조화된것은 그나마 임진왜란 이후 성리학에 대한 연구/발전이 멈추고 이이와 이황의 학설을 답습한것도 있지만, 문제는 지들끼리 권력다툼에 성리학을 이용한 것과, 임진왜란/병자호란을 통해 약화된 평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들이었음.. 유교질서의 확장, 향약, 과부의 재가 금지같은 것들이 민중을 통제하기 위한 장치들임.
문장 맨앞에 통설이라고 썼을텐데. 내가 관학파와 훈구파를 동일시하는게 아니고 기존의 관념이 그렇다고. 훈구파야 뭐 세조 따까리들 적폐와 일부 관학파의 조합이겠지만 그게 중요한가? 내가 쓴 글에서 딱히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거같은데. 핵심은 사림파의 인적구성이 훈구의 친자식들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훈구가 세대교체되면 자연스럽게 사림이 집권하게 된다는거임. 그게 쿠데타를 동반한 유혈사태건 자연스러운 정권교체건 간에 사림이 집권하는건 필연이라는게 핵심이지.
1. 신권땜에 망했냐 왕권땜에 망했냐로 단순하게 볼 수 있나? 다만 개인적으론 왕권vs신권 나름 밸런스 맞추면서 평타치며 그럭저럭 굴러온 기본 시스템들이 세도정치때 박살나면서 그냥 노답상태로 떨어진거라 봄. 그런 노답상황을 옛날로라도 재부팅해볼려고 한게 흥선대원군이고, 그런 노답상황을 감당하기엔 쪼렙이었던게 고종이라고 생각.
2. 고려vs조선 대외개방성은 중국 영향이 크지 않나? 통일신라나 고려떄는 당/송/원에 들렸던 서역 상인들이 신라/고려까지 오면서 국제무역 범위가 커진데 반해 조선 떄 명은 해금정책을 펼치면서 중국을 거쳐서 조선으로 오는 외국 상인들이 줄어들었지. 그러면서 조선 때는 국제무역 범위가 중국이나 일본, 좀 멀리 가봤자 오키나와 수준으로 바뀐거고.
3. 그럼 조선이 먼저 대외교류를 넓혀야지 할 수 있는데, 그 전에 조선이 외국 상인들을 끌어올만한 매력적인 지역이었는지가 의문임. 조선은 애초에 겨우 식량 자급자족을 할까말까 수준이었고 그러니 농업에 몰빵하면서 18세기 전까지 수공업은 찬밥신세였지.. 그때 중국은 이미 양자강 유역에서 농업 포텐이 터져서 신나게 상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일본은 하다못해 세계구급 은광이 터져나오기라도 했지...
약간 나도 조선빠 기질이 있는거 같지만, 고만고만한 나라/영주들끼리 투닥대던 유럽이랑 온갖 정치/경제력이 몰빵된 초강대국이 패권을 잡고 있던 동아시아를 비교하는 것도 무리고, 그런 동아시아에서 독자적으로 살아온거 자체가 그냥 평타친거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