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 통일신라와 고려의 치소도 평지에 있었단다

  우리들은 이르면 고려시대, 늦으면 조선시대 이전까지 우리의 관아들이 산성에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우리는 이걸 '산성읍치설'이라고 한다. 1995년 심봉근, 심정보 등 성곽을 연구하던 고고학자들이 주장한 이 설은 옛 고을 중심부나 근처에 산성이 존재하는 곳이 많은 것에서 착안한 것이었라고 한다. 이후 문헌 사학 쪽에선 산성에 치소가 있지만 주민들의 거주에는 여러모로 좋지 않기 때문에 인근 평지에 주민들이 사는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보는 연구가 발표되었으며, 밀양(삼별초의 전쟁에 동조.)을 사례로 들어 고려말 ~ 조선전기 사이 산성에 있던 치소가 평지로 옮겨졌다고 보는 연구도 발표되었다. 하지만... 역사이론도 과학이론처럼 굳건할 순 없는 법.

  어떻게 가능하냐고? 반례를 증명하는 사례들이 엄청나게 많이 쌓이면 된다. 이게 가능한가? 가능하다, 아니 가능해졌다. 여러 지자체들이 조선시대 관아와 읍성이 있었던 곳들(주로 20세기 이전의 경찰서, 시/군청이 많았음.)을 재개발하려고 구제발굴을 했는데, 수많은 곳들에서 조선시대 건물지 흔적은 기본이고 고려시대와 그 이전의 치소로 보이는 흔적들이 대량으로 확인된 것. 심지어 후술할 상주처럼 도심근교 빈땅에서 통일신라~조선시대의 도시유적이 발견되기도 했고. 

  그 뿐이겠는가? 불교사원의 흔적 또한 치소가 평지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통일신라와 고려가 존속한 시기는 7세기 말 ~ 14세기, 아프로유라시아 대부분을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같은 주요 종교들이 지배한 시대. 사원은 속세에서도 무시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사원들은 으슥한 자연 속 뿐 아니라 도시 한복판 노른자 땅에도 굳건히 자리잡았고, 교통의 요지에도 자리잡게 되었다. 신라와 고려도 마찬가지. 수도가 절들로 가득했는데 지방 거점도시는 오죽하겠는가? 읍성 일대에서 발견된 사원의 흔적들은 통일신라 이후 도시들의 치소가 평지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로서 역할을 했다. 

  이에 필자는 이러한 발굴자료들을 근거하여 통일신라대 주와 소경 중 어느 것이 평지에 있었는지에 대해 설명코자 한다. 

 



1. 상주(尙州) - 경상북도 상주시 복룡동 복룡동 유적

 




 상주 복룡동 유적에선 통일신라, 고려, 조선시대 동안 형성된 적심건물지, 우물, 수혈, 배수로 등 도합 1,005기의 유구가 발견되었고, 도기, 토기, 와전, 명문자기 등 2,1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에는 '沙伐州', '沓里' 등의 명문 납석제품이 출토되는 한편, 조선시대 배수로와 함께 통일신라 배수로가 발견되기도 했다.

  복룡동 유적 동쪽 '돌방아샘', '새봇들'이라 불리는 곳에는 '동방사(東方寺)의 터가 남아있다. 이 절터에 버려져 있던(1975년 이후 왕산공원으로 이전) 비로자나불상은 지권인을 하소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 지권인은 8세기 중엽 통일신라에 전해진 것이라 한다. 

 



2. 서원경(西原京)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舊 청주읍성 일대

 2011년 청주 남문로 남궁타워 신축공사 현장을 발굴하면서 '丙辰', '四月', '日', '畢役' 등 조선시대 청주읍성에서 만들어진 명문기와와 함께 '城', '官', '大中三'과 같은 통일신라의 것으로 보이는 명문기와가 발견되었기 때문. 여기서 '大中三'은 '대중(大中) 3년(서기 849년)'에 해당하며, '官'은 서원경의 관아시설과 연결될 수 있는 유물이다. 또한 청주목 관아터에서 고려시대의 흔적들(고려중기에 조성된 우물, 고려시대 내내 누차례 개보수된 건물지 6기, 도로시설, '城'명문와, etc)이 확인되었음을 감안하건대, 689년 서원경성이 축성된 이래 서원경의 치소는 지금의 청주읍성 자리에 있었으며 고려가 건국된 이후에도 그대로 재활용, 조선시대의 청주읍성으로까지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청주읍성 일대에는 나말여초에 지어진 것으로 확인된 흥덕사, 당간지주중 하나가 통일신라의 양식인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다. 이 두 절은 통일신라대 청주 일대의 도심지 사찰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3. 전주(全州) - 전라북도 전주시 전주성 일대



  전라감영 발굴조사현장에서 '官'명문 기와가 확인되었다. 선화당 일대에선 '全州牧官', '庚寅二月'명문기와와 함께(각각 고려, 조선전기로 보임) '官', '全?', 명문 기와와 함께 석렬, 부석, 적심 등의 유구가 확인되었다. 2022년 전주객사의 월대시설(해당 발굴조사에서 15세기 무렵 지어진 것으로 밝혀짐.)과 박석시설아래에선 고려와 통일신라의 대지 조성층이 확인되었다. 통일신라 대지 조성층에선 적심석기초(생 땅이 나올 때까지 기초 웅덩이 파고 적심석이라고 하느 자갈을 층층이 다지면서 쌓아올린 기초)의 흔적과 함께 또 '官'자명 선문기와, 완 등이 출토되었다. 이런 통일신라의 대지 조성층이 앞서 언급된 전라감영과 경기전에서도 발견된 것으로 볼 때, 완산주는 전주성 일대에 있었고, 685년 설치 시점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이뤄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오목대에서 크게 나뉘어 있는 성벽, 집선문 평기와, 초기 어골문 기와, 연화문 수막새, 연화문전, '大'. '官' 명문와 등 신라말기~후백제 시기의 유물이 확인되었다. 풍남동에선 단변 2칸, 장변 5칸의 대형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집선문 평와편과 변형 '官'명기와가 발견되었다. 오목대에서 확인된 성벽과 그 일대 출토 유물이 후백제 시기 신축 및 개보수된 해룡산성(순천), 마로산성(광양), 자미산성(반남), 무진고성(광주), 동고산성 동문지 3차성벽과 서문지 2차성벽(전주, 후백제 대형 건물지 확인)의 그것과 유사하다. 또 오목대에선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후백제 건국 이후 견훤이 기존 전주치소 바깥 일대에 새로운 성을 쌓고 그곳을 도성으로 삼았지만, 고려가 후삼국 통일 이후 후백제의 완산주도성을 철거함에 따라, 도성이 있던 곳은 전주 산하의 마을로, 전주성은 전주의 치소로 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임석규의 테마가 있는 절터 기행 4 - 경북 상주 동방사지(東方寺址), 법보신문, 2018년 2월 27일

청주읍성 안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조각 출토, 연합뉴스, 2011년 3월 31일

"옛 전북도청, 통일신라 때부터 1300년간 관청 부지", 뉴스1, 2016년 11월 2일
전주객사, 고려시대부터 존재 추정, 전북일보, 2022년 2월 22일

전주 오목대서 후백제 성벽 흔적 발굴, 연합뉴스, 2015년 6월 11일

전주 후백제 도성벽 추정지 시굴조사, 국립전주박물관

전주 후백제 도성 추정지 시굴조사, 국립전주박물관

상주복룡동유적 발굴보고서(복룡동 397-5번지, 256번지, 230-3번지, 10-4번지), 영남문화재연구원

『고려 시대 전통 대읍 읍치 공간의 실증적 검토와 산성읍치설 비판 -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대읍의 분석을 중심으로』, 정요근, 한국중세고고학(2019)

디지털청주문화대전 용두사지, 청주 흥덕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상주 복룡동 유적

청주 향토기념유적 청주읍성, 충북 문화유산 디지털 아카이브, 2021년 10월 21일

전라감영지는 통일신라 때에도 전북의 중심지역이었다, 이종근의 한국문화스토리, 2007년 3월 14일(舊 다음블로그, 現 티스토리 블로그) 




그리고....

이 글의 원본은 옆에 있는 링크에 있던 글.  https://blog.naver.com/heysungho/222888405948

스크랩 할까 복붙 할까 고민하다가 복붙을 했는데.... 아카라이브 자체가 복붙하기 매우 어렵게 되있는 듯. 복붙 뒤에 어떻게 올릴 지가 참 골때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