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요약



- 신라는 552년 신주(新州) 설치 이래로 한산주(漢山州) 치소를 이성산성에 두었음.

- 통일 이후 다른 동네 죄다 평지에 신도시 만들고 하는 동안에도 여기는 그대로.

- 하지만 8세기 이후 한주 치소가 평지로 내려오는데....

- 그 평지는 하남 교산지구(X) 송파구 일대(O)

- 교산지구는 호족들의 중심지로 남았다가 고려 말기쯤 되야 치소로 선정됨. 










교산지구의 도시 유적


 광주향교 경관광장은 A지구와 B지구로 나뉘어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B지구에선 통일신라 주거지 7기, 고려시대 주거지와 건물지, 담장, 암거, 배수로, 도로, 기단, 석축시설 등이 확인되었다. 교산동 건물지에선 나말여초, 여말선초, 조선후기에 해당하는 유구들이 확인되었다. 이 중 나말여초에 해당하는 유물은 주름무늬병(신라말기), 귀문수막새(고려전기), 도자기편, ‘城達伯士’(3점), ‘哀宣伯士’(3점), ‘廣州客舍’(6점), ‘官’, ‘官草’ 등의 명문기와가 발견되었다. 이로 보건대, ‘官’, ‘官草’ 명문 기와 뿐 아니라 ‘廣州客舍’ 명문기와가 출토된 교산동 건물지는 한주의 치소였고, 하사창동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들은 주의 창고였으며, 광주향교 일대는 통일신라대 한주 시가지의 일부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여타 주와 달리 한주는 이것만으로 치소.........


인 줄 알았다. 헌데 




①이성산성

 하남시 춘궁동 이성산(208.1m)에 축성된 이성산성(二聖山城)은 둘레 1,665m, 내부 면적 128,890㎡, 경내에서 확인된 건물지만 11동에 달하는 대형 산성. 성내 저수지에선 ‘戊辰年正月十二日朋 南漢城道使…’, ‘須城道使村主前南漢城…’, ‘■■浦 ■■■■■■…’의 글귀가 새겨진 목간뿐 아니라 6세기 이후 신라 토기와 기와, 철도끼, 나무인형, 짚신 등 다양한 생활유구들이 발견되었다. 출토유물과 성의 규모로 보건대 통일 이전 한산주(漢山州)의 치소였다고 보는데 큰 이견은 없다. 문제는 이런 성이 통일 이후에도 치소 급 거점으로 사용되었냐는 것인데.... 성 경내에선 황룡사, 월지(舊 안압지)에서 출토된 것과 유사한 8세기 신라 토기, 7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나무 자(당척 29.8cm 기준) 등 적잖은 통일신라대의 유적들이 확인되었다. 이는 통일 이후에도 한동안 한산주의 치소가 이성산성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②명문기와로 본 하남 교산지구(舊 광주군 동부면)의 상황

 상술했듯 교산동 건물지에선 ‘廣州客舍’명문 기와가 확인되었다. 하지만 이 기와가 발견된 것은 여말선초 층. 광주향교 전사청과 제기고 발굴에서 확인된 유물들의 중심 연대는 고려 말기인 14세기경이었다. 그 뿐 아니라 광주향교 수복사 부지에선 ‘泰定廣州’, ‘二年客舍’, ‘泰定二年’ 명 기와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서 태정(泰定)은 1324년 ~ 1328년, 그러니까 고려 말기에 사용된 원 제국의 연호이다. ‘城達伯士’, ‘哀宣伯士’ 명문 기와에서 성달(城達), 애선(哀宣)은 후삼국 통일전쟁기 고려에 가담했던 호족들의 이름이고, 백사(伯士)는 안성 봉업사의 사례로 보건대, 나말여초 당시 높으신 분들에 대한 존칭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표(禁標)의 한계를 정하였는데...(중략)... 노량(鷺梁), 고부평(古富平)을 거쳐 낙하(洛河)에 이르고, 동쪽은 과천(果川), 고광주(古廣州), 경안역(慶安驛)...(중략)" 연산군일기 1권, 1506년 2월 2일 기사 일부


"상(인조, 남한산성 존버 실패)이 뒤따라 나아가 고광주(古廣州)앞에 이르자, 용골대가 시신(侍臣)들을 뒤에 떨어뜨려 두었으므로 상은 다만 삼공, 오경, 육승지, 한림과 주서 각 한 사람만을 거느리고, 왕세자는 시강원과 익위사를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비석 앞에 이르러 멀리 바라보니 황제가 마전포(麻田浦)에 단을 설치하고서 위에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주 차림에 궁검을 찬 자가 각각 방진(方陣)을 치고 옹립하였으며, 깃발과 창검이 사방에 빽빽이 늘어서 있고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하였는데, 대략 중국의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용골대 등이 말에서 내리니, 상 또한 말에서 내려 비석 아래에 앉았다.(그 뒤에 벌어진 일이 그 유명한 삼전도의 굴욕)" - 승정원일기 55책 1637년 음력 1월 30일 


"남한산의 서쪽 중대면에 고광주(古廣州)의 땅이 있으며, 지금의 고읍(古邑, 하남 교산지구 일대)보다 훨씬 이전의 고읍이다. 『병자록』 등의 책에는 조선시대 인조가 청군에게 항복하고 나서 남한산성의 서문으로부터 나와 고광주를 거쳐 삼전도에 이르렀다고 한다." - 『조선고적조사보고』, 1917년 조선총독부 작성(여기서 병자록은 나만갑이 쓴 병자록이 아닌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작자미상의 병자록)


 위의 3가지 기록은 지금의 송파구 일대에 ‘고광주(古廣州)’, 그러니까 교산지구 이전 광주의 치소가 있었다는 지역이 존재한다. 현재 송파구 일대에선 이렇다 할 신라 이후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하지만 1631~1656년 동안 송파구 각지에 세워졌다가 도시개발 이후 가락동 비석거리공원(가락시장역 8번 출구)에 모인 광주수령들의 선정비의 존재가 문헌자료를 뒷받침해주고 있을 뿐.





결론



 교산지구에서 통일신라 ~ 조선에 이르는 수많은 도시 유적들이 발견되었다. 우리는 이에 근거하여 676년부터 1623년(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광주 치소 이전)까지 한주&광주의 치소가 교산지구 일변도라고 보았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문헌기록들을 보니, 그게 아니란다. 교산지구 이전에 어딘가가 광주&한주의 치소였으며, 자신들은 그곳을 ‘고광주(古廣州)’라 부른다더라. 송파구 도처에 널렸던 광주 수령들의 송덕비, 고려말이 되어야 교산지구에 나타나는 관아의 흔적들은 이를 뒷받침해줬다.  

 그래서, 통일신라 한주의 평지 치소는 교산지구가 아닌 송파구 어딘가에 있었고, 교산지구는 고려말 이후에야 광주의 치소가 되었으며, 그 전까진 지역 호족들이 사는 도시였다고 봐야 한다. 이성산성에서 확인된 신라 토기 중 가장 시기가 늦은 것이 8세기라는 점, 그 8세기 동안 신라가 패강진을 개척하며 한주가 후방으로 바뀌었다는 점으로 보아, 치소가 바뀐 시점은 8세기 중반 이후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여담으로 치소가 아니게 된 이성산성은 672년 축성된 주장성(晝長城, 現 남한산성)에 밀려 급격히 쇠락했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사료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승정원일기

기사&보도자료

하남시 이성산성, 7세기 통일신라시대 유물들 발견, KBS, 1999년 12월 19일

하남, 천왕사지 등 2023년 문화재(국가) 신청, 시티뉴스, 2022년 10월 14일

하남서 초대형 고려시대 창고 유적 출현, 연합뉴스, 2018년 5월 27일

하남 하사창동서 국내최대 창고 유적 발견, 투데이24, 2018년 5월 28일

논문

『廣州邑治에 대한 硏究』, 김세민, 서울과 역사(2011)

『공산성 내 통일신라시대 이후 건물지의 구조와 분포 특징』, 최병화, 백제문화(2018)『고려 시대 전통 대읍 읍치 공간의 실증적 검토와 산성읍치설 비판 - 충청도와 경기도, 강원도 대읍의 분석을 중심으로』, 정요근, 한국중세고고학(2019)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이성산성출토목간, 하남동사지

국가문화유산포털

하남 이성산성

경기문화재연구원

하남 이성산성, 하남 교산동 건물지유적, 연산군시대금표비

그 외 사이트

광주관아와 선정비, 경기학광장 Vol.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