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성의 통일신라 유적
지금까지 살펴본 주와 소경들은 통일 이후 평지에 치소를 두었으며, 그 치소가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재활용되었던 것들이다. 이는 종래의 산성읍치설에 대한 반박과 조선시대 읍치들의 근본력에 대한 좋은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소개할 웅주(熊州)는 다르다. 문주왕의 천도 이래 나당전쟁이 끝날 때까지, 아니 그 이후 김헌창의 난과 후삼국 통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명성(겸 악명)이 자자했던 웅진성(熊津城)이 있던 탓이다.
공산성에서 확인된 통일신라 건물은 남쪽 정상부 평탄지(진남루 부근)에서 확인된 기타 건물지 C, 동쪽 정상부 및 주능선 선상부에서 확인된 12각 건물 2동과 28칸 건물 1동, 성안마을 일대의 건물지 7동, 서문지 후면 초석건물지와 12칸 건물지 1동이다. 건물지들에 대해 설명하면 아래와 같다.
기타 건물지 C
면적 60㎡(18평)의 단층건물. 일대에선 백제와 통일신라의 와편들이 확인되었다. 이 건물이 확인된 공산성 남쪽 정상부 평탄지는 7,730㎡의 면적으로 성내에서 가장 넓으며 진남루를 통해 공주 읍내와 바로 연결된다.
기타 건물지 C 일대에선 백제와 조선시대 건물들도 확인되었는데, 전자는 과거 웅진백제시절의 백제 왕궁으로 지목되었다가 지금은 웅진백제 시절 전시 궁궐로 보고 있는 상황.
이로 보건대 기타 건물지 C는 통일신라가 웅진성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세워진 건물로, 웅진성의 행정업무를 보는 관공서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통일신라 당대에는 기타 건물지 C외에도 다른 관공서 건물들이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건물명칭 | 건물면적(㎡) | 건물면적(평, 소수점 이하 버림.) | 대지면적(㎡) | 대지면적(평) |
12각 건물지 1호 | 182 | 55 | 1,840 | 556 |
12각 건물지 2호 | 190이상 | 57이상 | 1,200 | 363 |
28칸 건물지 | 206 | 62 | 1,220 | 369 |
서문지 후면 초석 건물지 | 115 | 34 | 530 | 160 |
12칸 건물지 | 158 | 47 | 600 | 181 |
12각형 평면의 대형 건물지 2동과 28칸 건물지
성 동쪽 정상부와 주능선 선상부 지역에 몰려 있다. 다각형 평면을 가진 건물터는 경주 나정, 순천 검단산성(12호 건물지), 하남 이성산성(8각 1동, 12각 1동, 9각 2동), 평양 금강사지 목탑터 등 왕궁이나 중요 산성, 사원에서 확인된 적이 있다. 기존 연구결과를 살펴보았을 때, 이런 다각형 건물들은 복층의 형태로서 전망대나 종교시설(제단 혹은 탑)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되었다. 또 두 건물 근처에선 206㎡(62평)에 달하는 28칸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는데, 이 건물은 연회시설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마을과 그 일대 건물들
성안마을은 공북루 근처에 위치했던 자연마을로 면적이 24,600㎡에 달하는 평
지로 문화재 발굴 이전까지 실제 주민이 살던 마을 이었다(물론 발굴 이후로 마을은 사라졌으며 원주민들도 어딘가로 떠났음. 여기에 대해서도 할 말이 있지만 나중에 쓴다.).
2008년부터 2017년까지 이뤄진 발굴조사에선 백제 ~ 조선시대 건물, 집수지, 우물, 배수로, 도로 등이 확인되었다. 이중 통일신라대의 것은 2011년 ~ 2012년에 발굴된 7동인데 기단석, 구들, 적심 등 약간의 잔해들이 뜨문뜨문 남아있다. 백제의 도시 구획으로 보건대, 이 건물들은 마을 중앙에 뚫린 도로를 따라 층단식으로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도로와 함께 확인된 배수로는 곡부 중앙부에 조성된 집수지와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성내에 모인 물을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암튼, 이런 성안마을은 공산성의 성벽과 능선, 그리고 금강에 둘러싸여 있어 외부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곳이기 때문에 백제부터 조선시대까지 군사기지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표에서 언급된 서문지 후면 초석 건물지와 12칸 건물지는 이런 마을 근처 능선에 바짝 붙어있어 지리적으로 철저히 은폐되어 있다. 이로 보아 두 건물지는 웅진성 내 장교와 병사들의 막사, 무기제작소, 마굿간 등 철저한 기밀보장을 요하는 군사시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웅주 치소를 웅진성에 두어도 괜찮을까?
웅진성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건물들 모두가 웅진성을 웅주 치소로 두어도 좋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게끔 만든다.
기타 건물지 C . 이 건물 아래에는 추정백제왕궁지 가 발견되었다. 웅주 정부가 다스려야 했던 사람들 중 대부분이 과거 백제 유민 이었으며 신라와 백제 간 뿌리깊은 증오를 생각해보자. 백제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서든, 아예 기강잡기를 시전하기 위해서든, 이 건물을 활용하는 것이 웅천주 정부가 세워졌을 적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뜬끔없지만)남다른 규모를 자랑하는 종교/연회건물 이 건물들은 웅주의 유력자(높은 확률(?)로 백제의 귀족출신), 네임드 승려(유력자의 후원을 받거나 그 자체로 유력자), 도독 이하 웅주의 지방관료들을 모으기에 충분한 공간을 갖고 있었다. 종교 행사가 그대로 지역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는 축제가 되었고, 종교 사원이 지역 커뮤니티의 기반이 되었던 시대에, 이 공간은 통일신라 시기 웅주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공간으로 기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성안마을 성안마을은 웅진성 내에서도 금강과 가깝다. 비록 하상계수가 커서 계절이나 강수량 빨을 많이 타긴 하지만, 한반도 물류 운송체계에 있어 하천수운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신라의 충남지역 + 백제 고지 통치의 거점이었던 웅주가 소화했어야 할 물량을 생각해보건대, 치소가 대량의 물자를 쉽게 수송할 수 있는 곳과 가까울 수록 좋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웅주 치소를 웅진성에 바로 박아버리는 짓을 할 순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다음 편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참고문헌
『공산성 내 통일신라시대 이후 건물지의 구조와 분포의 특징』, 최병화, 백제문화(2018)
『성(城)안 마을 사람들』, 대전 MBC, 1990년 제작, 자체 유튜브계정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