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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은 일찍이 모더니즘을 수용했던 비단 전 세계만이 아닌 유럽 전체를 봐도 첨단을 달리던 도시였다. 신성 로마 제국의 마지막 봉건적 잔재인 합스부르크 가문의 황제정이 정치와 외교를 담당하던 벨에포크 시대에도, 19세기 말엽 중부 유럽에서 일어났던 후기 산업혁명의 중심지였던 빈은 공학과 사회과학 예술 모든 분야에서 당대의 혁신을 선도했고, 양차 세계대전과 전간기의 연이은 정치적 파동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시의 무형 또는 유형적 자산은 흩어졌을지언정 사멸해버리지는 않았다. 이는 옛 제국의 다른 자매도시들이던 프라하, 부다페스트, 자그레브, 또는 렘베르크 그리고 근현대 오스트리아 역사의 동반자 독일의 수도 베를린이 겪었던 냉전기의 침체와 달리 영세중립국의 형태로나마 자유진영과의 교류가 끊기지 않았던 점도 있을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소련이 동베를린만이 아닌 빈의 동쪽 역시 점령했었고, 마찬가지로 분단통치를 염두했다가 그 계획을 거두어 들였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다행이 아니었을까. 이는 동시기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에서 일어났다 좌절된 반소 봉기들 동안 빈이 유럽 대륙 자유주의의 최동단에서 해당 국가들로부터 탈출한 망명객들을 품어주던 피난처였던 점에서 이 도시의 역사적 의의는 비록 열강의 수도였던 패권적인 과거만큼은 아니겠지만 현대라 한들 괄시할 수는 없다. 


전술한 반공주의를 빙자한 오늘날에서 보는 리버럴적 시각의 낡은 감상은 집어치운다 하더라도, 순전히 미적 시각으로 보더라도 오스트리아의 이 고풍스런 과거를 자랑하던 수도는 네온사인과 커튼 윌의 현대화 역시 무리없이 소화했단 점이 인상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