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글 내용 선 3줄 요약

-라틴아메리카 축구의 역사를 보면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국가들이 그러했듯이 이민자들로 인해 시작되었다. 

-이민자나 대학이나 유학을 다녀온 엘리트를 통해 축구가 전파되었지만, 전파를 주로 이끈 것은 각 국가마다 조금 다르다.

-이러한 전파 및 발전 과정에서 지리는 상관없어 보일 수 있지만, 꽤 크게 영향을 주었다.

 

주의사항: 다음 연재글의 본론 중 초반은 고대 김ㅇㅇ 교수님의 특강을 기반해서 작성했으며, 일부 내용은 더 추가했음.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며, 많이 생략될 수도 있음

다음편은 언제가 나올지 몰?루 그래도 방학이니 짬내서 써볼게요

 

서론-역대 라틴아메리카 축구 리그의 우승팀은?

브라질의 역대 축구 리그 우승팀(현재 브라질 축구 리그인 Serie A와 그 전신인 Taça Brasil 등 포함)을 보면 파우메이라스, 산투스, 코리치안스 등등 이 순서로 우승횟수가 많다.

아르헨티나의 역대 우승팀을 보면,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 등등 순으로 우승을 많이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평범해 보인다. '스페인 라 리가에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많이 우승했어요'라는 말과 사실상 다를 바가 없으니까.

 

하지만, 역대 칠레 리그 우승팀을 보면 콜로-콜로(33회), 클루브 우니베르시다드 데 칠레(18회), 우니베르시다드 카톨리카(16회) 순으로 우승횟수가 많다. 여기서 특이한 점 하나 있다. 스페인어 Universidad는 대학교를 의미한다. 이게 칠레에 국환될까?

이번에는 페루로 넘어가보자. 가장 많이 우승한 팀은 우니베르시타리오 데 데포르테스(26회), 스페인어로 ‘대학의’를 뜻하는 ‘Universitario’란 말이 들어간다. 한편 에콰도르의 경우, LDU 키토라는 구단이 있으며, 마찬가지다(Liga Deportiva Universitaria의 준말로). 11번 우승했으며, 직전 시즌에 16팀 중 4위를 기록했다. 마지막으로 멕시코의 경우 Club Universidad Nacional(Pumas UNAM), Tigres UNAL이란 팀이 있으며 각각 우승을 7회 기록했다. *Tigres는 호랑이를 의미함

 

이러한 대학?프로 팀이 라틴아메리카에 많으며, 칠레의 사례(Clásico Universitario)처럼 이러한 팀들간의 더비 매치도 많으며, 열기가 뜨겁다.

 

즉, K리그에서 고려대 호랑이나 연세대 독수리라는 팀이 있거나 아니면 서울대 FC나 경북대 FC가 있다는 말과 같다. 
고연전/연고전의 K-리그화?

사진출처: 고대 공식 사이트


각설하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과 같이 대서양을 접한 국가들의 프로 축구 구단은 대학교와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칠레, 페루, 에콰도르, 멕시코와 같이 태평양을 접한 국가들은 일부 명문구단의 이름에 '대학'이란 말이 들어갈 정도로, 적어도 해당 구단의 역사가 '대학교'와 관련이 깊으며, 더 나아가서 해당 국가의 축구는 대학교와 어느정도 연관이 깊다.

이러한 차이가 기인한 배경을 지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문화는 여러가지 요인이 뒤섞여서 발생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인과관계를 가지지는 단언 못하지만,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본론1-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산업화, 이민자 그리고 축구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의 경우, 축구의 발전은 산업화 과정의 노동자 계층과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 축구 구단들은 노동자들이나 그들을 고용한 회사 들로부터 시작되었다.

1880년대부터 1900년대 초기를 거치면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본격적인 산업화를 시작했으며, 그로 인해 수송을 위한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특히 브라질의 경우 커피와 우유 중심지인 리우데자네이루와 상파울루, 여기에 미나스 제라이스와 히우그란지두술을 중심으로 철도를 부설했으며, 주로 영국계 자본과 기술이 유입되었다.

이미 1836년 대규모 철도 건설 사업 관련 법령을 제정했으며, 1854년 리우 주변에 15km에 달하는 철도를 건설했고, 1867년에 산투스(Santos)-상파울루(São Paulo)-준디아이(Jundiaí)를 잇는 139km에 달하는 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철도 부설의 배경은 주로 커피, 사탕수수, 고무 등의 자원 수송을 위한거였다. 부가적으로 도시와 그곳에 위치한 정부는 철도 건설을 통한 수출 활성화와 중앙 집권화를 시도한 것은 덤이었다.

19세기 당시 노선도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Brazil_provincial_railroads.jpg (퍼블릭 도메인)


다시 축구로 돌아와서, 당시 철도를 부설한 지역에서 철도를 건설할 적절한 노동력과 엔지니어가 부족했기 때문에, 영국 이민자들이 유입되었고, 당시 영국에서 유행하던(지금도 여전히 유행하는) 스포츠인 축구도 들어오기 시작했다.


상파울루의 경우, 1894년 영국계 이민자의 아들이자, 영국 유학생인 찰스 밀러(Charles William Miller)가 축구를 소개한 것이 시초이며, 주로 영국계 자본과 연관된 회사인 가스회사, 런던은행, 상파울루 철도회사 간부들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리우에서는 영국계 이민자의 후손인 오스카 콕스(Oscar Alfredo Cox)는 스위스 로잔에서 축구를 배워서 리우로 돌아왔고, 1901년 위의 상파울루의 팀과 경기를 가졌고, 1902년 리우 시에 인기있는 축구구단 중 하나인 플루미넨시 FC를 결성했다.

Tmi: 플루미넨시는 22년에 3위를 기록했고 4회 우승했다.


더 남부로 내려가서, 히우그란지두술의 경우,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 철도 부설 노동자들의 영향으로 국경지대에서 축구를 시작했으며, 유럽계 이민자들의 영향이 지대했다. 단적으로, 이 지역에 노부 암부르구(Novo Hamburgo), 뉴함부르크라는 지역이 있을 정도로 독일계 이민자들이 많았고, 축구 클럽을 결성했다.

다만, 이 시기에 축구 구단의 경우, 철도 엔지니어와 노동자 계층이 참여한 것은 맞지만, 1900년에 창단된 AA 폰치 프레타(Associação Atlética Ponte Preta)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팀이 비백인의 가입이 제한되었다. 펠레와 같이 흑인, 물라토 선수의 출현은 1930년대에 집권한 제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정권의 국가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정책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브라질에서 두번째로 오래된 클럽인 AA 폰치 프레타



아르헨티나의 경우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철도 건설을 이미 시작했다. 

1857년 수도 부에노스 아이레스 근교에 10km 길이의 철도를 부설했으며(Ferrocarril Oeste de Buenos Aires), 1914년에 이미 총 연장 33,355km에 길이에 달하는 당시 라틴아메리카 최대의 철도망을 개통했고, 1945년에는 그 길이가 약 47,000km에 달했다. 하지만, 현재는 아르헨티나의 경제상황 등 다양한 요인으로 철도가 줄어들었다.


1950년 당시 노선도(아르헨티나의 리즈시절)

사진출처: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Red_Ferro_Arg.jpg (퍼블릭 도메인)


철도가 부설되면서 자연스럽게 영국을 비롯한 유럽계 이민자들이 물려들었으며, 이러한 이민자들이 축구를 도입했다. 

이미 1867년에 두 명의 영국인 이민자인 Thomas와 James Hogg에 의해 축구 클럽을 창단했지만, 다만, 잉글랜드 축구 협회(The Football Association)이 창립된지 겨우 4년이 지났기에, 럭비와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기에, 그 당시 통용되던 럭비의 규칙도 사용했다. 당연히 경기도 크리켓 구장에서 진행했다. 시간이 지난 이후, 잉글랜드에서 축구 규칙이 정립된 이후, 아르헨티나의 축구도 이런 규칙을 맞쳐서 진행되었으며, 1891년 이미 축구리그가 개최되었지만, 이러한 리그에 관여하는 협회가 다시 해체되었고, 다시 1893년에 스코틀랜드 출신 교사인 알렉산더 왓슨 허튼(Alexander Watson Hutton)이 아르헨티나 축구협회를 만들었고, 이게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작년 카타르 월드컵 이후 쓰리스타로 진급한 아르헨티나 축구협회


이러한 이민자들과 철도와 연관된 클럽들이 현재, 아르헨티나 축구 리그에도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영국 출신 교사, 아이작 뉴웰이 설립한 뉴웰스 올드 보이스(Newell's Old Boys), 철도 노동자와 연관이 깊은 라싱 클루브(Racing Club), 영국계 철도회사 Central Argentine Railway의 노동자들이 창건한 로사리오 센트랄(Rosario Central), 그리고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 의해 설립된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를 예시를 들 수 있다.

*라싱 클루브는 두 개의 팀이 병합되면서 만들어졌고, 그 중 한 팀이 철도 노동자들의 요청에 의해 영국계 철도회사인 Buenos Aires Great Southern Railway사에 의해 만들어졌다. 


          

각각 뉴웰스 올드 보이스, 라싱 클루브, 로사리오 센트랄, 보카 주니어스의 로고.

Tmi: 메시가 유소년 시절 뛰던 팀은 뉴웰스 올드 보이스다.


결국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의 경우 철도와 이민자들로 인해 해당 국가에서 축구가 시작되었으며, 이러한 영향이 각 국가의 명문구단의 역사로, 이름으로 남겨져 있다. 이러한 사례는 칠레, 페루, 에콰도르, 멕시코 등 다른 라틴아메리카 국가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까? 만약 아니라면, 어떠한 차이점이 있었으며, 그리고 이러한 국가들의 축구의 역사는 누구로 인해 시작되었을까?


다음 장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