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화교들이 첫 발을 내딛다


인천광역시 중구 차이나타운, 화교들이 첫 발을 내딛으면서 형성된 이곳 차이나타운은 한국에서 중화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명동, 연희-연남동과 함께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화교 집결지라고 할 수 있다.


재한 화교의 시작은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파견된 청국의 군대를 따라 온 상인들이다.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 체결되고, 인천, 부산, 원산에 '화상조계지'가 설치되며 많은 화교들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화교, 그들은 누구인가


1911년, 중국 대륙에서는 민족, 민권, 민생의 '삼민주의'를 기치로 내건 '쑨원'에 의해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중화민국'이 수립된다.

그러나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이 대륙을 장악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다. 본토를 잃은 중화민국이 망명한 곳은 '대만 섬' 이었고, 그리하여 우리는 중화민국을 '대만'이라 칭하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건국된 '중화민국'이 지금의 '대만'인 것이다. 한때는 중화인민공화국에 대비하여 '자유중국'이라 칭하기도 했지만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중국 대륙의 주인은 바뀌었지만 화교들은 여전히 '중화민국'을 잊지 않았다. 이들의 국적은 여전히 중화민국이었고, 정체성 또한 중화민국에 있다.

이들이 모여있는 화교학교와 화교협회 등지에서는 중화민국의 상징물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2020년 10월 10일 중화민국의 국경일인 '쌍십절' 당시,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가 차이나타운의 길거리를 수놓았다. 중화민국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중화민국의 역사에 대해 안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중국'은 '중화민국'이기 때문이다.





화교들의 생활공간을 찾아서


인천 차이나타운은 화교들의 생활공간이라기보다는 한국에서 중국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관광지의 성격이 강하다. 하지만 필자는 관광지를 넘어, 화교들의 현실 생활공간을 탐사해보고자 한다.


화교들의 세는 약해져가고, 그들의 색채는 점점 옅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화교의 유산들을 찾아보도록 하자.





차이나타운 한켠에 있는 인천화교역사관.



 


이곳에는 재한 화교의 역사와 문화에 관련된 설명과 함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교과서와 졸업장 등 화교학교 관련 물품들. 



화교학교는 화교들의 정체성이 가장 잘 나타나는 곳이다. 중국어로 수업하고, 곳곳에는 정체자가 쓰여 있고, 중화민국의 여러 상징물들이 있는 화교학교는 화교들의 현실 생활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필자는 각지의 화교학교를 중심으로 하여 답사를 진행하고자 한다. 





인천 화교들의 생활공간


박물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인천화교학교가 있다. 화교학교로 향하는 길, 화교들이 운영하는 가게인 '화상(華商)'들이 곳곳에 보인다.



인천화교학교 옆, 보이는 건물은 '인천화교협회'이다. 



중화민국의 상징인 청천백일(青天白日) 휘장이 눈에 띈다. 



화교협회는 화교들의 결사체를 넘어 화교들을 위한 행정기관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곳곳에 쓰여있는 중국어는 이곳이 단순 관광지를 넘어선 '진짜' 화교들의 생활공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화교협회 바로 옆에는 화교학교 교문이 있다.




'인천화교소학'과 '인천화교중산중학'이 같은 부지를 사용한다.

'중산(中山)'은 중화민국의 설립자 '쑨원(孫文)'의 호이며, '소학(小學)'은 초등학교, '중학(中學)'은 중고등학교를 의미한다.





교내에 출입할 수는 없었지만, '충효' 라는 글자가 이곳이 화교학교임을 알려준다. 




문 닫는 화교학교


이외에도 전국 각지에는 화교학교들이 있다.

인천화교협회에 따르면 국내에는 총 27개소의 화교 학교가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교는 운영을 중단한 지 오래.

약해지는 화교의 세와 같이 학생수가 줄며 존폐 위기에 놓인 것이 현실이다.






충북 충주시에 위치한 충주화교소학교. 중화민국의 국기인 '청천백일만지홍기'가 붙어있다. 





문은 굳게 닫혀있고, 운동장은 밭으로 활용되고 있다. 



"예의, 염치"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 위 녹슬어버린 놀이기구. 세를 잃어가는 재한 화교의 현실을 반영하듯 을씨년스러운 모습이다. 많은 화교학교들은 학생 수 감소로 문을 닫거나, 존폐의 위기에 놓여 있다. 


"중화민국에 속해 있는 학교들을 전부 다 중공에 반납해야 하는데, 우선 아이들의 사상이 문제가 돼요."

화교 학부모 '모준방' 씨 - 1992년 8월 21일 MBC뉴스


1992년 중화민국과 대한민국의 단교,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과의 수교 이후, 대사관 등 중화민국의 시설들은 한순간에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뺏기고 말았다. 하지만 학교만은 지켜냈다. 화교들에게 화교학교는 나날이 거세져가는 중화인민공화국에게 대항할 최후의 보루인 것이었다. 그들은 교육으로 중화의 정통을 지켜내고 있다. 




필자는 다시 서울로 향한다. 대한민국의 심장 서울에서 살아 숨쉬는 '중화민국'의 숨결은 어떤 모습일까? 서울의 중심 명동에서 글은 이어진다. 


글 유철사

사진 유철사


도시본색 (都市本色)

우리가 사는 공간을 직접 발로 걸으며, 도시의 '본색'을 찾아나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