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송룡시(후포퇴 프로젝트)



삼국시대

동예의 속국 중 하나인 오료국이 위치해 있었다. 본래 송룡도에는 오료국과 하라국 두 개의 나라가 있었으나 455년 영안왕이 하라국을 멸망시키며 오료국이 송룡도를 지배하게 된다. 오료국은 고구려와 국교를 맺고 고구려와 왜 사이를 연결하는 중계무역을 통해 커다란 부를 얻었다. 신라에 대해선 적대적인 노선을 취했는데, 468년 장수왕이 이끄는 고구려군과 협공하여 신라 북쪽 변경의 우유성(현재의 울진군)을 함락시켰다. 영안왕은 자신의 무덤을 송룡도에서 가장 높은 산인 태석산 정상에 묻어 죽어서도 오료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겠다는 유언을 남기며 476년 사망했고, 그의 유지를 받들어 태석산 정상에 그의 업적을 기린 비문을 세우는데, 이것이 영안릉비이다. 영안왕의 바램과는 다르게 그의 사후 오료국은 빠르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국 510년 신라에게 멸망한다.

신라에 흡수된 송룡도는 한동안 오료군으로 불리다가 경덕왕 대에 신라의 동쪽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라는 의미로 청룡군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며,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청룡진이 설치된다.

 

         고려시대

후삼국 시대에는 청룡 호족 최광이 섬을 점거하였으며, 931년 고려에 흡수된다. 

1011년 여진 해적이 100여척의 배를 이끌고 쳐들어와 섬이 초토화 된다. 많은 사람들이 섬을 떠났으며 남은 사람들 또한 산 속으로 들어가 생활하게 된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의 침입을 받았는데, 거듭된 지원 요청에도 조정이 신경을 쓰지 않자 양완이란 자가 난을 일으켜 옥로국을 세우고 왜의 속국을 자처했다. 옥로국은 왜구의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약탈한 물자의 일부를 양도받으며 크게 성장했다. 하지만 조선이 건국되며 나라가 안정되고, 압해국이 지지하던 남조가 요시미츠의 북조에 흡수되며 지원이 끊기게 되자 옥로국은 고립되고 만다. 결국 양호란 장수가 압해국왕을 살해하고 섬을 탄압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선에 항복하며 옥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조선시대

그 후 조선시대에는 하례군, 임화군 총 두 개 군으로 나뉘게 되었으며, 강원도에 속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조용했으나 경상좌수영 소속 송포만호 정환이 전선을 이끌고 조선 수군에 합류,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칠천량 해전에서 전사한다.

1806년 임화군수 최연상이 만구면 일대의 하천을 정비하고 평야를 개간하여 농업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다. 만구면이란 이름은 여기서 유래하였으며, 만 명의 식구를 먹여살리고도 쌀이 남을 정도였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의 아들 최정온은 평소 지리에 관심이 많았는데, 송룡도 일대를 답사하며 임화도지를 편찬한다. 영안릉비의 발견 또한 그의 업적이며, 그가 없었다면 풍화로 인해 글자를 더욱 알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근현대

1895년 23부제 시행당시 강릉부 소속이었으며, 1901년 임화군이 송룡군으로 바뀌게 된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당시 북쪽의 하례군이 송룡군에 흡수된다.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의 중요한 곡창지대 중 하나로서, 일본 본토와 가깝고 동해 재해권 장악에 유리한 이점을 갖고 있었기에 다양한 투자가 이루어졌다. 진남동이 이때 개발되었으며, 강북의 구도심 지역은 상대적으로 미온한 투자로 인해 조선인들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강북의 소산동과 강남의 진남동의 갈등은 갈수록 격해져 1923년에는 두 곳을 연결하는 다리가 모두 끊길 정도였으나 1931년 송룡군수로 임명된 모리 타케히로가 갈등을 적극적으로 중재하며 완화되었다. 이를 기념하여 진남동과 소산동을 연결하는 인연의 다리가 설치되었다.

6.25 전쟁 당시 국군이 낙동강까지 밀리게 되자 송룡군은 최후 병참기지로써 가치가 상승하게 된다. 평지가 많았던 만구면, 임화면 일대에 비행장이 건설되고, 인천상륙작전의 양동작전을 위해 곡포에서 출항한 학도병이 장사에 상륙하여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기도 했다.

송룡의 가치를 눈여겨본 박정희 전 대통령은 국군이 다시 낙동강으로 밀릴 경우에 대비해 송룡군을 송룡시로 승격, 호양산업단지를 건설하였고, 이는 현재까지도 송룡시 경제의 버팀목이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임화면에 있던 임화비행장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송룡국제공항으로 재탄생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