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은 5대 궁궐중 하나로 광해군에 의해서 지어진 궁궐이다.

이 터는 원래 선조의 5남인 정원군의 집이 있던 곳이지만 광해군이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몰수하고 궁궐을 지었다.

이것은 정원군의 아들인 인조와 광해군의 원수관계의 많은 이유중 하나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조선의 왕이 경복궁에서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경복궁은 임진왜란때 불타서 흥선대원군에 의해서 중건될때까지 왕들은 창덕궁과 창경궁에 살았다. 이 체제 하에서 경희궁은 왕들에게 사랑받는 이궁으로 기능했다. 숙종이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정조가 이곳에서 즉위하기도 했다. 


이름에서 추측해 볼 수 있듯이 경희대학교도 이곳 경희궁에서 이름을 딴 것이다. 

양란을 극복한 조선 후기와 같이 한국전쟁의 폐허도 극복하자는 마음으로 임란 이후 지어져 조선 후기를 함께한 경희궁으로 이름을 땄다고 한다.


경희궁은 많은 수난을 겪었다. 

흥선대원군은 폐허가 된 경복궁을 재건하고자 했고 이를 위해 숭정전, 회상전, 정심합, 사현합, 흥정당 5개 전각을 제외한 100개의 나머지 전각이 모두 철거되어 경복궁 중건 자재로 사용되었다.

남은 5개도 조선총독부에 의해서 민간에 매각되어 뿔뿔이 흩어졌다.  


남은 자리에는 경성중학교가 세워졌으며 해방 이후에 서울고등학교가 되었고 서울고등학교가 강남개발계획에 의하여 서초구로 이전하자 비로소 복원이 계획될 수 있었다.


빈땅은 당초 서울특별시에 의해서 현대건설에 매각되었으나 역사깊은 이곳을 개발한다는 것에 반대여론이 폭발하자 결국 다시 서울시로 넘겨진다. 그후 흥화문, 숭정전, 자정전, 태령전이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초 원래 크기대로 더 복원할 계획이었으나 이미 서울역사박물관 등의 건물이 세워져 계획은 흐지부지되었다.


정문은 흥화문의 모습


안쪽으로 들어가면 숭정전이 보인다.


원본은 어이없게도 지금 동국대학교에 있다. 

앞서 말했듯이 전각이 민간에 팔렸는데 일본 사찰 조계사가 이를 인수하여 법당으로 개조했다가 그 절에 동국대학교가 세워져 지금 대학안에 숭정전 원본이 있게 된 것이다. 


내부는 옥좌를 고증해 두었다. (지금보니까 사진이 죄다 기울어짐)


궁궐 필수품 잡상


뒤로 가보면 자정문이 있다.


들어가면 임금이 신하와 국정을 의논하는 편전인 자정전이 있다.

하지만 나중에는 관이나 위패를 임시로 보관하는 빈전으로 사용되어 현재는 소실된 흥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흥정당은 용산 광운사에서 매입했다는데 소실된 듯 하다. 


경희궁은 복원된 전각이 적어서 몇분이면 다 둘러볼 수 있다.


서울 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하니 경희궁에서 사용했던 우물이 있다.


고려대의 석탑도 있었다.


서울 역사박물관에 들어가니 먼저 이산가족 관련 전시물이 보였다. 

KBS 레전드 프로그램 "이산가족을 찾습니다"의 생생한 흔적이었다.


이북의 지명들이 많으니 한때 하나의 나라였음이 실감되었다.


경성이라는 말을 일제시대 말로 오해하지만 사실 그냥 수도의 의미로 자주 쓰였다. 


엄청나게 큰 강북의 지도


서울시장(관선) 임명장


광화문 앞 행차


북악산과 한양


조선시대 한양 인구


한강 수운이 활발하던 시절


황토색 배


사람들이 4군 6진 가는걸 싫어한 이유

이때는 교통사정이 더 열악해서 더 그랬을 것이다.


인플레이션을 일으킨 동전


경복궁 중건을 위한 모금


조선판 VR ㄷㄷ


조선은 후대에도 예법을 알 수 있도록 자세한 가이드를 항상 적어놨다.


알다시피 초기 태극기는 현대의 형태와는 약간 달랐다.


독립신문 원본


대한제국의 여러 훈장들


약간 일본화풍이 적용된 듯 한 고종 초상화


꽤 힙한 선글라스가 있었다.


경성부청에 게양되었던 일장기와 하켄크로이츠

역사가 실재했음을 눈앞에서 보게 된다.


내선일체 표어


조선보병무훈


국민정신총동원 깃발


모리나기우유 간판과 아지노모토(미원)


화신, 미나카이, 히라타 백화점

인력거


철도로 만주로 갈수 있던 시대


일제 치하에서도 국민들은 태극기를 잊지 않았다.


일본이 그린 경성의 모습

경복궁 앞 날일자 조선총독부가 보인다.


한국병합기념장 실물



뭔가 전근대와 근대의 과도기적인 디자인의 조선총독부법령전서


일본군 주둔기념 술잔


조선식산은행 창립 20주년 기념 사진첩

조선통독부 통계엽서

꽤 현대적인 디자인인듯


경성일보기와 일본경찰도


김영삼 정부에 의해서 철거된 조선총독부의 원형 주두가 있었다.


더 많은 잔해들은 독립기념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산업화 시대의 비교

남산의 조선신궁이 보인다.


50년대 서울 항공사진의 사진


사람들이 실제로 거주하던 한옥마을

바르셀로나가 아니다.

뭔가 객가의 토루가 연상되기도 한다. 


중앙청 뒤의 북악산


1956년 경향신문사 앞 선거발표 속보판


아마도 이 사진에 찍힌 사람들은 모두 돌아가셨을 것이다.


뭔가 판도가 왜곡된 서울특별시전도


삼표 연탄


세운상가도 이제 역사가 되었다.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과 평화시장 


나훈아 ㄷㄷ

사진이 흔들려서 아쉽지만 잠실이 원래 섬이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포화상태인 강북을 대신하여 강남을 개발하고자한 계획은 초과달성되었다.


약간 북한의 표어가 생각난다.


방첩반공


산업화로 인한 급격한 이촌향도는 서울에서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다.


그것이 폭발한 것이 광주 대단지 사건일 것이다.

알다시피 당시 경기도 광주는 지금의 성남시, 하남시, 강동구, 송파구, 강남구, 서초구, 의왕시, 군포시, 수원시, 화성시, 남양주시에 걸친 거대한 행정구역이었다.


서울의 빈민들을 집단 이주시키기 위해서 광주대단지가 조성되었으나 그곳은 사실상 인프라가 없는 황무지나 다름없었고 속았다는걸 깨달은 사람들에 의해서 사태가 터져버렸다.


결국 서울시가 주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성남시가 설치되며 성남시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박물관 안에 방금까지 영업하던것 같은 식당이 있다.



마지막 전시관에는 현대 서울의 모습이 있었다.

과연 앞으로의 서울은 어떤 모습일까?


박물관 앞에는 콘크리트 광화문이 있었다.


뭔소리인고 하면, 알다시피 광화문은 일제에 의해서 다른 장소로 이전되었고 한국전쟁때 석축만 남고 불탔다. 그래서 2010년 광화문이 복원되기 전까지는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광화문이 서 있었다.


의외로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듯?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가 또 있었다.


아현고가와 홍제고가 였던것도 있었다.

모든것이 역사다 ㄷㄷ



문인석


한국 시티뱅크 본사와 전차


88 올림픽 의전버스

흥선대원군 친척 묘비


시전행랑유구는 계절 이슈로 보지 못했다.


옛 서울시 로고


덕수궁에 있었다고 하는 돌


주변에는 옛날처럼 꾸며놓은 작은 시설들이 있었다.



자유중국, 유고슬라비아 있는거 보니 지구본도 옛날꺼가 맞다.


이제 은퇴한 주판


서대문인 돈의문터가 있다고 했는데 너무 작아서 약간 헤맸다.

서대문도 언젠간 복원될까?


온김에 경희궁 뒷편의 국립기상박물관도 박문했다.

약간 지대가 높은 곳에 있다. 기상관측상의 이유인듯 하다.


조선시대의 기상청인 관상감이 통감부에 의해서 측후소로 격화되고 옛 이름을 살려 광복이후 중앙관상대가 되었고 그 후 기상청으로 승격되었다. 

기상청이 이전한 이후에는 서울 기상 관측소가 되어 현재도 서울의 날씨와 기후의 기준점 역할을 하고 있으며 2020년 국립 기상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건물 자체는 1932년 지어진 것으로 당시에는 경성측후소였다.


경성의 저 하늘에 바람이 불어오고 구름에 비가 싸여 온다. 래일은 맑고 치웁다! 그날 그날의 창공과 긔압과 더부러 날을 보내는 경성측후소는 20년이나 오랜 락원동의 살림사리에서 지난 1일부터 인왕산 기슥 해발 87미돌의 송월동 마루턱이에 약1천평 긔지에다가 내화벽돌과 철근 콩크리트르 겸용하야 평가85평의 ‘모던’ 청서를 지어 이사를 하얐다 총공비는 3만 5,000원이다. 


1932년 11월 10일 동아일보


기상관측의 시작이라 항상 나오는 측우기


대구경상감영측우대



어디에나 있는 백엽상


일제시대 조선기상 자료들



그리고 현대의 자료들


일제시대 경성측후소 건물을 뜯어서 전시해놨다.


일본인 철수 이후로 인수인계가 안됐는지 발굴해서 발견된 듯 하다.


건물 자체가 100년전꺼다.


방문 자체는 이번 일본 지진이 발생하기 전에 했지만 현재 이슈과 관련이 있는 지진계실.

일제시대에는 조선도 일본 지진관측망의 일부였다.


지진계


건물 자체가 유물이다.


하지만 이곳은 실제로 국가 임무를 수행하는 곳이다.


여러가지 계절관측 표준목이 있다.

복숭아, 단풍나무, 매화, 왕벚나무, 진달래가 있었다.


지진 관측소도 있었다.


서울의 기상을 관측하는 곳이다.


뒤에는 막혀있어서 못올라온다.


한때 기상청 본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것으로 여정을 마치고 귀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