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군은 서울 강북을 점령하고 3일이나 시간을 지체하며 한강 이남으로 가지 않았음. 여기에는 아래와 같은 설이 제기됨. 




제한전쟁설


수도 서울만 점령하여 통일정부를 구상하려고 했다는 설. 


수도 점령하면 곧 대한민국 정부를 점령할 수 있으니,

서울을 점령하여 대한민국 국회를 소집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의 통일을 법적으로 통과시키려고 했다는 주장임. 


하지만 정부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남쪽으로 내려가자 이 작전은 실패하고 전열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고 본 것. 




인민봉기 기대설



수도 서울을 점령하면 대한민국 전역에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인민봉기가 일어나고, 결국 ‘계급해방’을 통해 ‘민족통일’이 일어나리라 봤다는 설. 


남로당을 좌지우지하던 박헌영은 남조선의 지하당원들이 선동하면 농민들도 금새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했음. 


하지만 한국에서는 엄청난 반공활동으로 남로당 지하당원의 씨가 말라 있었고

전쟁 직전에 유상몰수 유상분배 토지개혁이 일어나 농민들이 사회주의에 매력을 느낄 동기가 사라져버렸음. 아직 토지분배는 못 했지만, 본인 이름으로 나온 토지대장이 있는 상태에서 굳이 공산주의 농촌테제에 관심이 없어진 것. 




스탈린 & 마오쩌둥 개입설



스탈린과 마오쩌둥이 미국의 적극적 개입을 저지하고자 의도적으로 남하를 저지하고 퇴로를 열게 했다는 설임. 


스탈린은 미국의 적극적 참여로 인한 제3차 세계대전 개전을, 마오쩌둥은 중국군의 참전을 우려했음. 





춘천 전투설



인민군이 춘천 전투에서 지체한 탓에 서울에서도 더 남하하지 못했다는 설. 


인민군은 위와 같은 전쟁 계획으로 한달만에 남한 점령을 마무리할 계획을 갖고 있었음. 


인민군 육군 1사단이 서울로, 2사단이 춘천으로 진격하고 이들이 수원에서 만나 수원에 국군을 포위시켜 섬멸하고 빠르게 부산과 목포로 진격하는 것이 목표였지. 


하지만 춘천 전투에서 인민군이 매우 큰 피해를 입었고, 며칠간 진격도 지제되었으며, 많은 무기와 병사를 잃었음. 


이로 인해 수원에서 국군을 포위섬멸하려는 작전은 포기해야 했고, 서울 강북에 있던 1사단도 한강 이남으로 내려올 수 없었다는 것임. 


이는 소련 해체 후 비밀문서 해금으로 밝혀진 비교적 최신 설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