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도 사실 청나라 멸망하고 독립국가를 세우려고 노력은 했음. (아래 요약 있음)


 신해혁명 직후 종사당이 일본 및 몽골과의 협력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만주는 만주족의 만주”를 주장하였다. 동삼성 지방 정권은 민국 체제 하에 속해 있었으나 관내 다른 성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독자적인 행보가 가능하였다. 이는 지역 토착 만주족이 상대적으로 다수 지방 권력에 진출할 수 있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들 역시 한편으로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있었으며, 이는 9.18 사변 이후 동삼성의 빠른 이탈과 만주국 합류로 이어졌다. 여기에 소조정의 出宮 이후 천진으로 이주한 부의 역시 우대조건 회복 요구에 대한 국민당 정부의 계속되는 무시와 방기에 분노하여 만주국으로 합류하면서 새로운 국가의 구심점과 명분이 갖추어졌다. 

 그러나 동삼성은 종래부터 중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한 국제 사회의 대결 구도 하에 만주족, 한족, 일본인, 조선인이 서로의 명분과 이익을 위해 경쟁하던 곳이었다. 청조 존속 기간 동안 부재지주로서 토지를 장악하지 못했던 만주족의 자리는 서서히 한족과 일본인 및 조선인이 대체해 갔다. 만주족은 토착 세력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지위를 지켜 나갔으나, 일본의 침략 범위가 확대되면서 그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에 만주족은 일본과 협력하여 건설된 새로운 국가에서 왕도주의를 실현하는 오족협화의 구성원으로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滿係’라는 이름으로 만주족과 한족이 뒤섞이면서 만주족의 고유한 정체성과 특성은 공식적인 수치에서 은폐되었다. 여기에 계속되는 민족간 경쟁에서 밀려난 만주족은 삶의 기반을 상실하고 점차 그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었다. 

 다만 이들의 부흥 노력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첫째, 만주족이 청조의 입관 이래 관내 주방에 분산 거주하면서 민족의 독자적 거주지를 온전히 확보하지 못했던 점, 둘째, 민족의 구심점이 되어야 할 소조정이 일반 만주족과 유리되었다는 점, 셋째, 동삼성이 지니는 독자성을 활용하여 새롭게 근거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던 노력이 국가권력의 지원을 받는 민족들과의 경쟁 끝에 번번이 좌절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약

만주족도 독립국가 건설하고자 노력은 했음. 그러나 봉금정책(한족이 만주에 살지 못하게 막은 정책) 폐지 이후 만주는 이미 한족, 한국인, 일본인이 몰려와 사는 땅이 되었고 쪽수에서 너무 밀리니깐 결국 독립국을 건설하지 못한 결정타가 되었음.


출처

淸朝 멸망 후 滿洲族의 부흥 노력과 좌절, 1911~1937, 2022년, 정세련


만약 만주족도 몽골족처럼 독립국을 건설하는데 성공했다면 우리 입장에서 좋은건


1. 북한이 완충지대로서 중국에게 중요성이 비교적 떨어짐

2. 따라서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절에 그냥 무너지거나 냉전 종료와 함께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큼.

3. 설령 통일되어도 중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거나 접해도 비교적 짧아서 스트레스 덜 받을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