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지만, 한편으론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한 빛에 휩싸였던 아르카네아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뜨고 인지한 첫번째는 하얀 세계였다.


그리고 이어서 보인 먼발치의 두 인영. 두 인영을 보자 마자 그녀는 이곳이 어디인지, 왜 이곳으로 오게 되었는지 눈치챘고, 또 둘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아...."


이성이 이곳은 현실이 아니며, 사자(使者)의 권능으로 만들어진 일시적인 세계라 일깨워줬지만... 작별인사조차 못하고 떠나보낸 둘과 만날 수 있다면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저 둘이 비록 현실의 둘이 아닐지라도....


아르카네아는 홀린듯이 둘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겼던 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몸이 떨려와 걷는 것 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떨리는 몸을 추스르며 걸어 둘과의 거리가 10미터까지 좁혀지자,


"어서와, 아르카네아."


"와줄꺼라고 믿고 기다렸어."


이쪽을 등지고 있던 둘이 동시에 아르카네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니... 리아...."


단 두 마디에 목이 메이고, 눈물이 그렁그렁해져 참느라 애써야 했다. 눈 앞의 둘은 한 달여 전, 둘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




"오랜만...까지는 아니려나?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라면 여기까지 오는데 그리 오래걸리진 않았을테니까. 얼마나 걸렸니?"


"엿...새...."


길게 말을 하면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아 간신히 한문장만을 쥐어짜내듯 내뱉었다. 이 대답에 아르미드는 옅은 미소를 지어주곤 리아를 슬쩍 바라본다. 그녀가 무얼 원하는지 단번에 눈치챈 리아는 천천히 바퀴의자를 밀어 아르카네아의 바로 앞,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와주었다.


"오기까지 마음 고생 많았지? 미안해, 아르카네아. 결혼식 와주기로 약속해놓고 이렇게 만나게 되어서."


손을 뻗어 자신의 손을 잡아주며 하는 언니의 말에 아르카네아는 살레 살레 고개를 저었다.


"으응, 아니야. 언니가 그래도... 나 약혼하는건 봐줬잖아. 요근래 언니 몸 상태가 빠르게 안좋아지고 있어서... 나도 조금 마음의 준비를 하긴 했었어. ..이렇게 일찍일줄은 몰랐지만...."


여기까지 말한 아르카네아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아르미드의 손을 마주 잡아주었다. 따뜻하다. 언제나와 같은 그 손이다.




"...... 여기 에린이 아닌거... 맞지...?"


대답은 아르미드의 뒤에서 들려왔다.


"맞아. 여기는 에린이 아니야. 시간도 흐르지 않아."


"...."


"작별인사를 위해 만든 공간... 이라고 생각하면 될꺼야. 미안해. 우리 둘 모두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서."


아르카네아는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괜찮아... 말했다시피 마음의 준비는 하기 시작했었는걸. 내가 곁에 없을때 떠나보내서 괴로웠었는데 오히려 기뻐. 최소한 이렇게라도 제대로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으니까."


"후훗,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는 언제나 어린아이 같았는데 오늘은 좀 의젓하네?"


"마지막까지 그러고싶진 않은걸."


"마지막이라고 하니까 생각났는데 트림으로 다시 왔다는건 결국 떠나기로 한거니?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했던 말보다 매우 이른걸? 결혼식은 여기서 안하는거니?"


아르카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보다 일찍 떠나기로 했어. 결혼식은... 트림에서 간소하게 하고 떠날려고. 미안... 더는 묻지 말아줬으면 해. 마지막에 이런걸 자세히 말하고 싶진 않아...."


자신들이 죽게된 것 외에도 무언가 더 안좋은 일이 있었다는걸 깨달은 아르미드는 더 이상 묻기를 그만두고 대신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럼 그 물음은 그만두고, 아르카네아, 요정의 숲을 보고 싶지 않니?"


"가고싶어. 어머니의 나무 곁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야. 하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어서 갈 수가.... 어, 어라?"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그럼 이곳에서나마 잠시 즐겨보자."


아르미드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하얀 세계에 변화가 찾아왔다. 주변은 나무로 가득차기 시작했고, 그녀들의 왼편에는 거대해 그 끝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높으며, 신성해보이기까지 한 나무가 자라나고 동시에 호수가 나타났다. 거대한 나무 위에서부터 물이 굽이쳐 흘러내리기 시작한다. 수직으로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성질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떨어지다 말고 몇 갈래로 갈라져 휘고, 몇몇은 위로 솟아오르기도 하고, 이리 저리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마치 무희들의 춤을 보는 듯 한 느낌을 주는 폭포였다. 그 주위는 물안개가 뿌옇게 피어 올라 약간 시야를 가려 더더욱 신비한 느낌을 연출했고, 그녀들이 있는 공간 모든 곳에 마나가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여긴 설마... 요정의 숲?"


"내 기억을 토대로 재현해봤어."


아르카네아가 놀람을 감추기 못하고 있을 때, 리아가 운을 떼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리아는 말을 이었다.


"요정의 숲 모든 곳이 기억에 새겨져 있어서 해본거야. 가고싶다고 하길래. 다른 점은 전혀 없을꺼라고 자신해. 뭐... 황폐화되기 이전의 기억으로 재현한거니까 지금의 요정의 숲과는 차이가 심하겠지만, 그래도 파괴되기 전의 숲이니까 더 좋겠지?"


말을 마치며 리아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요정의 숲에서 어머니의 나무의 따스한 마나를 느껴보는건 정말 오랜만이네. 역시 요정의 숲의 마나가 제일이야."


"리아도 그런걸 따져?"


"기분이 좋다는 얘기야. 나에게 그런건 의미없어. 저쪽으로 이동할까?"


리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쫓았다.


"아, 저기는... 응. 오랜만에 가보자."


셋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그리 멀지 않았기에 잠시 걸어 도착한 곳은 어머니의 나무가 있는 공터에서 가장 가까운 나무 중 하나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나무였으나, 나무의 앞쪽 스텔레(Stele)에 '시피아나' 라고 적혀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녀들이 살았던 집이다.


모두는 서로를 한번씩 보고는 집으로 들어갔다. 마법이 걸려 있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넓어 대저택에 필적할 정도의 내부공간은 매우 오랜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어제까지도 이곳에 있었던 양 너무나 익숙했다. 하지만 마치 하나의 생명인 양, 의자를 제외한 집 내부를 구성하는 모든 가구들이 나무로 이루어져 바닥에 붙어있는 광경은 언제봐도 신비로웠다.




"그립네... 이때의 요정의 숲을, 아버지의 집을 다시 볼 수 있을꺼라곤 상상도 못 했었어. 떠난 이후로는 안좋은 일 때문에 잠깐 들린게 전부고, 그 일 때문에 망가져서 다시는 이때를 볼 수 없을꺼라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면, 우리를 양녀로 받아주신 아버지가 우리를 처음 만났던 날 이런 말을 했었지. 너희 둘 중 한명에게는 크나큰 운명의 흐름이 느껴진다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까 정확하게 맞추신 것 같은걸?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정말 위대한 사람이 되었잖아."


"음... 그러게? 요정왕일 시절의 아버지가 정말 예지 능력이라도 있으셨던건가...?"


리아가 끼어들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끔 발현되는 예지라 원할 때 미래를 본다거나 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있었어. 요정왕이라 지닌 능력은 아니고, 현명한 자였기에 얻은 일종의 은혜에 가까워. 그는 가장 현명하며, 가장 위대한 요정이니까. 마나난을 전후로 그보다 더 위대한 요정은 나오지 않을꺼야."


이 말에 그녀를 바라보며 마주 고개를 끄덕여준 아르카네아는 다시 몸을 돌려 집 밖으로 걸어나갔다.


"역시 아버지는 대단하시네. 다른 곳에 가보자. 우리가 검술을 연마했던 그 공터로 가볼까? 그곳에서의 추억이 제일 많아서 한번 가보고 싶어."


"알았어. 천천히 가볼까?"


앞서 나가는 아르카네아의 뒤를 리아가 아르미드의 바퀴의자를 밀며 따라나갔다. 공터까지의 거리는 꽤나 있었기에 잠시 걷던 아르카네아는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렸다.


"참, 여기에서 언니는 이제 피곤하지 않은거야? 평소에는 금방 피곤해 했잖아...."


아르미드가 미소짓는다.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언니 걱정 해주니까 기분이 좋네? 여기라서 괜찮아. 사실 일어나는 것 또한 가능할꺼야. ..아마도?"


"그래? 리아, 사실이야?"


리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해. 오랫동안 걷지 않았으니까 어색할 순 있겠지만, 불가능하진 않아."


리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아르미드는 손을 들어 멈춰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서서히 걸음을 늦춰 멈춤과 동시에 아르미드는 옆에서 나란히 걷던 아르카네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부축해달라는 뜻으로 이해한 그녀가 언니의 손을 잡아주며 살짝 당겼고, 아르미드는 못이긴 척 몸을 일으켰다.



바싹 긴장했던 아르카네아는 긴장이 탁 풀려 자신도 모르게 아! 하는 탄성을 내뱉었다. 아르미드가 쓰러지지 않은 것이다. 현실이었다면 그대로 쓰러졌을테지만, 리아의 말대로 그녀의 두 다리는 굳세게 버텨주었다. 물론, 오랜만에 선 탓에 다리가 쉴새없이 떨려댔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여기서나마 일어나보네.... 아직 어색하다.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부축해주면 공터까지 걸어갈 수 있을지도?"


아르카네아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언니의 부탁인데 당연히 부축해줘야지."


잠깐의 대화를 끝으로 셋은 걷는 것에 주력했다. 공터까지의 거리가 꽤나 있기도 했지만, 아르미드의 걸음이 어색한 덕에 도착하는데까지 반 오라가 걸렸다.


모두는 도착하자 마자 제일 가까운 곳에 있는 큰 바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곤 공터를 바라보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검술을 훈련하던때가 엊그제 같네."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굉장히 힘들어하던게 생각나."


"그야 아버지조차도 내가 익힌 검술은 사용할 수 없다고 했으니까. 지도해줄 스승이 없었으니 당연했지 뭐."


아르미드는 대답해주는 아르카네아에게 손을 뻗어 머리를 한차례 쓸어주었다.


"스승조차 없이 혼자 기술서만 보고 독학한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악몽'을, '검은 공포'를 무찌르고, 플리다이스의 요새에서도 엄청난 활약을 했다는게 정말 대단하네."


"이 몸이 누구의 동생인데 당연하잖아?"


"푸후훗, 그런가? 그럼, 어디로 떠나는건지 얘기해줄래?"


"응? 갑자기?"


"얘기해준적 없잖니. 듣고싶어서 그래. 아니면, 이것도 비밀이니?"


"음... 딱히 비밀은 아니니까...."


약간 뜸들이던 아르카네아는 이내 어디로 가려는지 운을 떼기 시작했다. 본래는 이번 안니에 개최될 물의 축제에 모두와 함께 구경하고, 결혼식을 하고, 얼스터 지방 통일 기념 엘레데아의 선언을 들은 뒤 은퇴할 예정이었으며, 지금은 다 틀어져 마이어와 둘이서 물의 축제에 구경하고, 서얼스터를 조금 여행한 뒤 북쪽으로 향할 것이란 말을 해주었다.


"북쪽? 거긴 왜?"


아르카네아의 마지막 말에 아르미드가 고개를 갸웃한다. 자신이 알기로 북쪽에는 그다지 특출날게 없었기 때문이다.


"음... 특별할게 없는 곳이긴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그쪽으로 향하려고. 거기서 은둔해서 지낼꺼야. 얼스터와 코나흐타 사이의 완충지대는 아무도 관심이 없더라고. 그래서 그곳에 여행자나 상인들을 위한 여관 같은걸 지어서 운영할까 생각해. 뭐, 나와 마이어에게 상인의 재능같은건 없으니까 실질적인 운영은 다른 사람이 맡겠지만? 돈대주는 얼굴마담 같은거랄까?"


구체적인 계획에 아르미드가 놀랍단 표정을 지었다.


"뭐야, 그 표정은? 내가 그렇게 못미더운거야? 이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아르미드가 푸흡, 하고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아니야.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가 그런 일을 계획하고 있을 줄은 몰랐어서 놀란 것 뿐이야."


"...진짜?"


"그럼. 언니가 거짓말할 이유가 뭐있니?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라면.... 뭔가 평범한 일은 안할꺼라고 생각했는걸?"


"날 도대체 뭐로 보고 있던거야....?"


아르카네아의 황당하다는 표정과 말에 아르미드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푸후훗, 표정봐. 장난이야. 여기도 봤으니까 다시 어머니의 나무 옆으로 돌아갈까?"


"왜? 혹시 몸이 불편해?"


걱정스런 표정으로 묻는 말에 아르미드는 살레 살레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니까 걱정하지마. 여기서는 아프지 않은 것 같아. 리아가 설마 이곳을 만들어내면서 나를 아프게 만들었겠니? 그냥 어머니의 나무 옆이 가장 아름답고 따스한 마나 덕분에 기분 좋아서 가자고 한거야."


리아도 옆에서 거드는 말을 한다.


맞아. 언니의 몸은 '악몽'에게 당하기 이전의 수준이야. 조금만 더 익숙해지면 혼자서도 걸을 수 있을껄? 마지막 만남이 될텐데 아픈 몸으로 만나게 할꺼라고 생각한거야?"


언니를 부축한채 대화를 나누며 돌아가던 아르카네아가 우뚝 걸음을 멈춘다.


"왜 그러니?"


"마지막... 혹시 내가 조금 더 강했다면... 내가 더 열심히 수련해서 언니에게, 리아에게 힘을 나눠줬다면 그랬다면 언니가 더 오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랬다면 분명...."


이 말에 리아가 후우, 하고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르카네아, 너는 정말 이거 하나는 고쳐야겠어."


아르카네아가 고개를 갸웃한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모르겠어? 자책하고 있잖아. 확실하게 말해줄께. 네가 수련에 수련을 몰두해서 지금보다 열 배는 더 강해졌다고 치자. 그렇다면 언니의 수명을 연장시켜줄 수 있었을꺼라고 생각해? 내 대답은 아니, 야. 네 힘과 내 힘은 근본적으로 달라. 너는 신계, 천상에 계신 아버지 알라스티르님과의 연결이 없어. 나는 직접적인 사용 권한을 박탈당했을 뿐, 연결 자체는 남아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르미드의 생명을 유지시킬 수 있었던거야. 그분의 힘은 에린의 법칙을 초월한 힘이니까. 그러니까, 자책하지 말아. 네가 자책하면 나도 그렇지만 언니가, 아르미드가 더 슬퍼해. 넌 언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 그렇잖아?"


이 말에 아르카네아가 고개를 끄덕끄덕 했다.


"리아가 거짓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알았어. 자책하는거... 고치고 싶긴 한데 마음처럼은 안되네."


"진짜 그거 고치는게 좋아. 나때문에, 나때문에 그러는거 너한테도 안좋지만 네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한단 말야. 뭐, 예전엔 자책 아니라고 그러던거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네. 돌아가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아르카네아는 언니를 부축한 채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그러길 잠시,


"참, 네가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서 정정해주는건데, 나는 안죽었어. 알라스티르님께 빌어 잠시 받은 권능으로 이 공간을 만드느라 한계까지 사용해서 잠에 빠지긴 했지만.... 뭐... 너한테는 죽은 것과 같으려나? 네가 살아있는 동안 내가 깨어나는건 볼 수 없을테니까."


죽지 않았다는 말에 눈이 동그랗게 되었던 아르카네아는 금새 풀이 죽어버렸다.


"결국엔 혼자라는 말이네..."


"혼자는 무슨. 마이어가 있잖아. 언니가 없어지면 마이어가 가장 큰 행복 아냐? 벌써 미래까지 다 계획해놨으면서. 그러니까 잘 살아봐. 혹시 알아? 나중에 내가 깨어나서 네 후손을 만나게 된다면, 너희가 어떻게 살다가 갔구나 하는걸 듣고 즐거워할지?"


"너무 먼 미래를 얘기하니까 조금 어색하네."


"그런가? 아무튼, 여기서 원없이 이야기하고 가. 그러라고 만든 공간이니까. 여기서 시간은 흐르지 않으니까, 에린으로 돌아가도 네가 마지막으로 있던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잠시도 흐르지 않았을꺼야."


"알...았어."


무언가 마음에 안드는지 대답이 느렸기에 리아는 아르카네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말없이 걷는 것에 주력할 뿐이었다.


그렇게 걷고 또 걸어 다시 어머니의 나무 곁으로 돌아온 셋은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이야기를 했을까,


"잠깐 걸을까? 다시 걸을 수 있는데 이렇게 앉아만 있으니 좀이 쑤시는 것 같아."


갑자기 하는 말에 아르카네아는 고개를 갸웃했지만 곧장 몸을 일으켰다.


"부축해줘?"


아르미드가 고개를 젓는다.


"이제 괜찮을 것 같아. 북쪽으로 가보자."


몸을 일으킨 셋은 아르미드의 말에 북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걸은지 잠시,


"보이니?"


밑도 끝도 없는 말에 아르카네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언니를 바라보았다.


"뭐가?"


아르미드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 아르카네아의 시선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숲과는 이질적인 빛무리가 존재했다.




"아르카네아, 우리의 시간은 여기까지야."


"...."


일부러 그 화제는 꺼내지 않으려 노력했으나,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언니가 먼저 작별을 말해 아르카네아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여기서부터는, 너의 길을 가렴."


"저 빛을 통과하면... 다시는 언니랑 리아를 못 보는거야?"


대답은 리아에게서 들려왔다.


"한시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니까, 네가 사라지면 이곳도 사라져."


"그럼 이어서... 에일리흐에서 알고 지낸 모두에게 작별을 제대로 이야기하는거 잊지말렴. 모두가 걱정할꺼야."


아르카네아는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내 대답했다.


"응."


"아버지한테는, 이렇게 갑작스레 떠나게 되어서 죄송하다고, 그동안 정말 감사했다고 대신 전해줄래?"


"..그럴께."


"참, 탈틴의 리세리스 언니한테도 편의를 봐줘서 고마웠다고 전해주렴."


"리세리스 언니가 많이 신경써줬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지."


"엘레데아에게는, 정복전쟁이 바쁜건 알지만 백성들을 위하는 좋은 군주가 되길 바란다고 전해줘."


"나도 동감이야."


"마이어에게 아르카네아 울리면 꿈에서 나타나 혼내줄테니까, 평생 행복하게 해주라고 전해주고."


"마이어는 지금도 그러고 있는걸?"


"마지막으로,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네 스스로에게... 난 영원히 네 곁에 있다고 말해주렴."


"......"


이 말에는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아르미드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너무 신경쓰지마."


여기서 잠시 말을 끊은 뒤, 손을 뻗어 아르카네아의 머리를 한차례 쓸어주며 잇는다.


"꿈이었다고 생각해. 꿈에서 깨어나면, 네 갈 길을 가야지. 이별을 너무 두려워하지마. 이별을 통해 성장하고, 아픔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어."


"알아... 언니. 나도 다 알고 있어...."


아르카네아는 양손에 힘을 꽉 주었다.


"미안해... 미안해, 언니.... 이럴땐... 웃으면서 작별해야 하는거 나도 다 아는데... 리아가 준 작별의 기회를 제대로 받았으니까... 웃으면서 저 빛으로 걸어나가 현실을 마주해야 하는거 나도 다 아는데...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들어. 내가 저 빛으로 지나가지 않으면 이곳에서 영원히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이 순간에서 계속 함께일 수 있지 않을까... 아직 하고 싶은 말도 너무나 많은데...."


똑-


한방울의 눈물로 시작되어, 샘솟듯 계속해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지도 못하고 아르카네아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언니 말대로 이건 꿈이야... 꿈은 깨는게 맞아. 현실로 돌아가서... 붉은기사단과 검은바람은 여기서 끝이라고 할꺼야. 엘레데아, 클리아나, 리타, 엘틴... 모두에게 안녕이라고 말할꺼야. 그런 뒤 마이어랑 행복하게 살꺼야. 하지만 이 모든걸... 언니랑 리아가 함께 봐줬으면 좋겠어...."


여기까지 말한 아르카네아에게 아르미드는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꼭 보고 있을께.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네가 원한다면 난 언제나 함께 있어. 나는 네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갈테니까."


"...."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잠깐 하늘을 올려다볼래?"


재차 눈물을 닦아주며 하는 말에 아르카네아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이니? 빛나는 별이?"


아르미드의 말대로, 하늘의 한켠에 태양의 밝은 빛을 비웃기라도 하듯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별이 하나 보였다.


"그 별이 나야.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 나는 언제나 저기에서 지켜보고 있을께. 태양마저 빛을 잃는다 해도, 저 별은 너의 앞길을 밝혀줄거야. 그러니까, 두려워하지마. 나는 떠나는게 아니야."


"..알았어..."


"지금껏 많은 힘든 일을 이겨내왔어.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는 강하잖아? 지금처럼 이번 일도 이겨내는거야. 앞으로도 어떤 힘든 일이 우리 사랑스런 아르카네아를 괴롭힐지는 모르겠어. 하지만 그럴때, 무너질 것처럼 힘들때면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그곳의 별을 올려다봐. 언제나 그곳에서 가장 밝은 빛이 되어 너를 비춰줄께."




"..... 고마워, 언니."


아르카네아의 말이 끝남과 함께 빛무리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슬슬... 가야할 때라고 알려주나봐."


"응. 어서 가렴. 앞으로 나아가는거야, 아르카네아. 지금까지처럼, 씩씩하게. 영원히 너를 축복하고, 지켜줄께. 넌, 나의 가장 소중한 동생이니까."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에 아르카네아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핫, 정말... 내가 더 울지 못하게 하려고 열심이네."


말을 마치곤 아르미드와 리아 모두를 번갈아보며 말을 잇는다.


"언니의 가족으로 태어나서 정말 기뻐. 리아를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영광이었어."


"나도 영광이었어. 이제 갈 때야, 아르카네아."


"응, 안녕 리아. 안녕 언니!"


동시에, 점차 확장해가던 새하얀 빛무리는 아르카네아의 전신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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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소설 삽화 형식으로 진행한 짤임당


@마론 님이 작업해주셨습니다 :)


언제나 이쁜 짤에 감사드려요!



기회가 된다면 다음엔 진짜 만화 커미션을 한번 더 해보고 싶은데 해주실 분이 계실려나....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