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 : https://arca.live/b/commission/57267668

"후후... 언니? 지금의 모습, 굉장히 비참하군요?"

자신의 언니를 향해 온화하지만 차가운 웃음을 보내는 적안의 소녀.

"으... 아... 안 돼... 제발...!"

쓰러진 채로 거친 숨을 헐떡이는,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만 같은 청안의 소녀.

백발과 흑발, 청안과 적안, 승자와 패자, 빛과 어둠.

언니와 동생.

둘은 정확히 대척점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나름대로 노력하신 것 같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는답니다. 언니는 저를 이길 수 없어요."

머지않아 어둠의 손에서 빛을 삼켜버릴 주문의 기운이 새어나왔다.

"크윽... 루...!!"

하얀색의 절규는, 어둠이 내뿜는 빛에 의해 덮어씌워져 사라졌다.






한 순간의 정적의 뒤에는



'K.O!'

정적을 깨는 전자음과,

"으아앙! 또 졌어!!"

엎드려서 바둥바둥거리는 백발의 소녀, 엘리나와

"언니 정말 연습 많이하셨네요~ 하지만 아직이랍니다."

여유롭게 웃음지어보이는 흑발의 소녀, 루가 있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엘리나와 루는 평소처럼 집에서 격투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전적은 103전 4승 99패. 엘리나는 루가 처음 알려줄 때 접대 두 판과 버튼 하나를 누르지 않고 플레이하던 판 중 한 판(거기서도 10판 중 한 번 이겼다.), 
그리고 '이번 판 지는 사람이 화장실 청소하기에요~' 라고 하던 루의 장난스러운 내기에 갑자기 각성했던 한 판밖에 없었다. (물론 루가 이겼어도 화장실 청소는 루의 몫이었다.)
 
"대체 왜 널 이기지 못하는 거야! 영상도 엄청 보고 왔는데! 한 번 더 지면 백 번째잖아~~"

마치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엘리나. 이럴 때 보면 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 구분하기 힘들었다.

"언니한테 처음 이 게임을 알려준 건 저잖아요? 그리고 언니가 더 잘하는 게임도 분명 있을 거에요."

루는 떼를 쓰는 어린아이같은 자신의 언니가 마냥 귀엽게만 느껴지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마안~~ 이번에 팔꿈치님 대회에서 우승하는 거 보고 엄청 연습했단 말이야! 주캐도 바꿨는데!"

뾰루퉁하더니 아예 엎어진 엘리나. 컨트롤러와 함께 바닥에 나뒹구는 모양새가 됐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인기 격투게임 '쇠권 8'. 엘리나는 최근 그 게임의 대회 방송을 보고 감동을 받은 모양이었다.

엘리나가 평소에 하는 일은 그녀의 과거를 생각하면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집에서 놀고 먹으며 게임하거나 방송을 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이 글을 보는 당신이 원하는 삶이다.

엘리나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이 이런 엘리나의 모습을 본다면, '천재 음양사'의 현재를 본다면 어떤 반응이었을까.

"아직 주캐로 절 이기는 것도 힘들어하시면서, 그런 어려운 캐릭터를 주캐로 하신다뇨. 언니도 참."

그만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며, 루는 게임기와 컨트롤러를 정리한다.

"으, 됐어! 원래 하던 캐릭터나 해야되나...?"

하늘처럼 파란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무엇이 잘못됐는지 되돌아보는 엘리나.

"솔직히, 지금 고른 캐릭이 예전에 하던 캐릭보다 까다로웠어요. 아마 숙련만 좀 더 되면 절 이길 수도 있지 않을까요?"

루는 엘리나가 기운을 낼 수 있도록 약간의 거짓을 섞어 조언을 해줬다.

"흐응... 그렇단 말이지..."

엘리나는 고민했다. 까다로웠다. 숙련이 되면 이길 수도 있다. 숙련... 숙련......

"좋아! 결정했다!"

무언가 확 깨달은 듯, 엘리나는 벌떡 일어났다.

"네? 뭐가요, 언니?"

"루! 같이 오락실로 가자!"

뜬금없는 오락실 선언. 

아까 엘리나가 K.O당했을 때와 같은 정적. 이번엔 마치 루가 K.O당한 느낌이었다.

"어... 언니..."

뭔가 감동받은듯한 루.

"내가 루, 너를 이기기 위해서! 오락실에서 다른 사람들이랑 대련해서 실력을 키울거야! 숙련된 모습으로 다시 너와 싸우겠어! 그러니까 같이 가서 조언 좀 해줘!"

엘리나의 각오를 듣고, 루는 여러가지로 감동했다.

자신을 위해 실력을 갈고 닦으려는 모습, 새로운 것에 부딪히고 노력하려는 모습. 그리고 무엇보다...

"언니가... 밖에 나간대...!"

"거기서 놀라는 거야?!"

가장 감동받은 부분이 입 밖으로 나왔다.


엘리나는 한동안 계속 집에 박혀 히키코모리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마 과거의 자신이 가족에게 받은 상처, 그리고 자신이 타인에게 준 상처 등의 영향이 있었으리라.

그녀는 자신만의 번데기를 만들었다. 나비가 되기를 포기한 채, 그저 갇혀있었다.

루는 상처투성이 애벌레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는 애벌레처럼, 단순히 가문이라는 이름 하나를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히던 존재들에게 괴롭힘당했다.

그녀는 번데기에 갇혀졌다. 스스로 그 번데기가 되어, 다른 번데기 속 고립된 상처받은 애벌레를 꺼내어 자신의 품 안에 품었다.

외부의 상처와 내면의 상처, 타의에 의해 갇혀진 자와 스스로를 가둔 자, 타인에게 피해받은 자와 타인을 피해준 자, 애벌레와 번데기.

'이단'과 '괴물'.

둘은 대척점에 있는 것 같지만, 서로 다른 아픔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루... 집에 돌아가자... 너무 더워..."

"...언니? 아직 집에서 8걸음밖에 안 나왔어요."

마치 새우처럼 등이 굽어져서 '나 기운없소' 를 온몸으로 표현하는 엘리나와 옆에서 부채를 부쳐주는 루가 있었다.

바깥의 기온은 31도. 햇볕이 쨍쨍하고 도로에는 아지랑이가 일렁이는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엘리나는 대학생이었지만 급작스런 전염병이 나돌아다니는 이유로 학교를 온라인 수업으로 진행하고 있었고, 그러다보니 집에 뒹굴게 된 시간이 많았다.

게다가 지금은 방학기간이니 더더욱 집에서 나갈 일이 없었다. 평소 집안일과 돈벌이는 루가 해줬기에.

그렇게 냉온방 잘되는 집안에서 하루종일 있었으니, 밖의 날씨를 알 터가 있나.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신의 백발이 타서 루처럼 흑발이 되진 않을까 걱정됐다.

오락실에 가서 쇠권을 하겠다던 엘리나의 의지는, 쇠처럼 달궈진 아스팔트 바닥에 의해 흐물흐물해지고 있었다.

"으으... 진짜 죽을지도 몰라... 녹아버릴거야... 타버릴거라고..."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을 몸소 깨닫게 되는 엘리나였다.

"언니! 힘내요! 모처럼 밖에 나왔는걸요! 오락실도 집에서 별로 안 멀어요!"

"얼마나 가야되는데..?"

"한 1키로정도?"

"죄송합니다! 오락실에 간다고 까불지 않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게 해주세요!!"

거의 울부짖는 엘리나. 루는 그런 엘리나도 귀여웠지만, 오랜만에 사랑하는 언니와 외출하는 행복을 더욱 누리고 싶었다.

"언니, 쇠권의 최강자가 되기로 한 저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건가요? 세기의 강자들과 대련해서 얻은 실력으로 절 꺾으셔야죠!"

"우우... 그치만..."

"이런 나약한 모습을 팔꿈치 선수께서 보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파... 팔꿈치님이...?"

엘리나는 존경하는 선수의 이름, 그의 경기, 명장면 등을 떠올리고 의지를 불태웠다. 눈동자는 더욱 반짝이고 불타오르는 의지가 몸을 가득 채웠다.

"난 이겨내겠어! 이 더위를! 그리고 증명해내겠어! 나는 강하다는 걸! 가자, 루!"

"좋아요! 바로 그 마음가짐이에요, 언니!"

씩씩한 걸음으로 걸어가는 엘리나, 이젠 더위는 두렵지 않았다.

"으에에... 더워..."

사실 두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오락실에 도착한 둘. 엘리나에게도 다행히도 오락실 안은 시원했다.

오락실 안은 다양한 기계로 즐비해 있었다. 인형뽑기, 스포츠 게임, 리듬 게임, 마구 연타하는 게임 등. 각자의 빛과 소리로 오락실을 찾아온 사람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오! 찾았다!"

그중에는 엘리나가 이곳에 온 목적인 쇠권 8또한 있었다. 맞은편에선 다른 사람이 게임 중인 모양이었다.

"게임하시는 동안 뒤에서 지켜볼게요. 그리고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알려드릴테니 화이팅이에요!"

"좋아, 팔꿈치 님, 지켜봐줘요!"

그렇게 한동안, 엘리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쇠권을 즐겼다.

루와 할 때는 만나보지 못했던 캐릭터, 전혀 모르는 기술, 그리고 그것들을 파훼하는 맛.

자신보다 약한 상대, 자신과 비슷한 상대, 자신보다 강한 상대. 다양한 상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언제부턴가는 루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이 가족에게 칭찬받기 위해 수련을 거쳐오던 것처럼, 집중하고 있었다.

"언니 멋져요! 이제 거의 마스터하셨겠는데요?"

뒤에서 응원하는 루. 엘리나가 게임하면서 즐거워하고,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기쁘고, 예쁘고, 사랑스럽다. 마치 아이를 보는 어머니처럼...

아니, 루의 어머니라는 인간은 루를 사랑스럽게 생각했던 적이 없었다.

미워하고, 수치스럽고, 증오했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처럼.

과거에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이 안타까운 듯, 자신처럼 혼자인 언니를, 사랑하고 있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대등한 상대에게 아쉽게 지고 나서 복수를 위해 동전을 넣으려던 엘리나의 어깨를 툭툭 치는 루.

"언니.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저녁 준비도 해야 하고."

"앗, 벌써 그렇게 됐어?"

정신차려보니 시간은 꽤나 많이 지났고, 엘리나를 녹일 것처럼 따갑던 햇살도 어느덧 저물어가고 있었다.

"그럼 슬슬 돌아가자!"

해가 저물자 선선한 바람도 불어와 소녀들의 귀갓길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아, 미안해, 루. 나 혼자 너무 게임한다고 몰두하고 있었네. 뒤에서 구경만 하느라고 심심하진 않았어?"

이제서야 아무 말도 없이 조용히 뒤에 있던 루가 신경쓰였던 엘리나, 그러나 석양같은 붉은 눈동자는 그저 웃어보였다. 

"후훗, 언니. 구경만 하다뇨. 저랑 재밌게 놀았잖아요?"

"어? 나랑 게임도 했었어?"

"평소에 안 하던 랜덤으로 몇 판 했어요. 그것도 눈치 못채고 있었어요?"

랜덤으로 덤비는 건방진 상대가 몇 있었지만, 그게 루일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헤헤... 너무 집중했나봐. 그래서 몇 판 했어?"

"5판 해서... 할 줄 아는 캐릭터가 하나도 안 나와서 언니가 다 이겼어요!"

"오오! 그럼 집가서 찐막 한 판만 할까? 나 지금 완전 자신있어!!"

"네? 그렇게 많이해놓고 또 한다구요? 게임 너무 많이하면 몸에 안 좋아요!"

"아까 살인적인 햇빛이 더 몸에 안 좋아! 진짜 딱~ 한판만! 중요한 거란 말이야!"

"아휴 참... 그럼 저녁 먹고나서 딱 한 판만이에요?"

"오케이!" 

방금 루가 말한대로라면 현재 전적은 9승 99패. 엘리나 개인에게는 아주 중요한 시합이었다.

10승을 먼저 찍느냐, 100패를 먼저 찍느냐의 분기점. 게다가 오늘 습득한 것으로 더욱 자신감이 붙어서,

'절대 질 것 같지 않아...!'

이길 거라는 확신이 충만한 상태였기 때문에, 반드시 한 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럼 언니한테 처음 쓰는 주캐로 상대해줘야겠다~'

엘리나를 '사랑'하는 루가 전적이 어떻게 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아무래도 엘리나가 루를 상대로 10승을 찍는 일은 꽤 먼 미래의 일이 될 것 같다. 






청안과 적안, 흑발과 백발, 언니와 동생, 괴물과 이단, 음과 양,

푸른 나비와 붉은 나비.

대척점에 서있는 두 사람의 이야기? 아니.

그저 온전한 나비가 되고 싶은

상처투성이 애벌레 둘의 이야기.


일상물같지만 일부 과거가 들어간 이 기분

너무나 좋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