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업을 하다보면 밤 낮이 뒤바뀐다. 이 업계는 늘 그랬다. 컨펌을 하고, 마감에 쫓기다보면, 해는 저물어 있고, 달은 내 친구고 그런다.

시간대가 들쭉 날쭉 하는 통에 오늘이 며칠인지, 몇 달인지 잊고 살곤 했다. 그녀에게 시간이란 그런 것이었다. 2주에서 3주 간의 마감 기한 속에 갇혀 살았고, 그 삶을 다시 반복하기만 하는 인생이었다.

혼자서 살아가는데 돈은 왜 이렇게 많이 깨지는지, 식비랑 전기세 밖에 안 내는데 항상 쪼들리는 삶이었다.

신혜라는 두 팔을 쭉 뻗었다. 엎드려서 한창 작업 하다보면 몸이 굳어버리기 일수였다. 온 몸에서 뼛 소리가 뚜둑 거렸고, 자세를 잘 못 잡으면 허리가 한 동안 고생하긴 했지만 드디어 완성이다.

신혜라는 씨익 웃었다.

- 클라이언트 님 작업 다 끝냈어요~♡

- 정말요?

사진을 보내자 한 동안 대답이 없었다.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시간이었다. 선이 튀어나왔네요, 처음 것이 좋겠네요. 좀 더 색깔이 화했으면 좋겠네요. 같은 디자이너들에겐 너무나 무서운 말들.

- 좋네요.

신혜라는 날아갈 듯이 기뻤다. 한 번에 통과하기란 쉽지 않은데 이번에는 운이 너무 좋았다.

"그럼..."

신혜라는 혀를 내밀어 입 맛을 다셨다.

"오늘 나랑 만날래?"

또 대답이 없었다. 신혜라는 입술을 비쭉 내밀었다. 사람과 사람의 약속은 시간을 고려한다. 한 사람이라도 사정이 생기면 취소 되는 게 약속이었다.

"우리 쪼꼬미 자기야. 오늘 나랑 만날래?"

- 네. 1시간 뒤에 봐요.

신혜라는 킥킥 웃었다. 남자는 결국 애교에 질 수 밖에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만나면 계속 쓰다 듬어 줘야지~."

신혜라는 엉덩이를 씰룩 거렸다.

옷장 속에 박혀 있던 옷들을 꺼내 늘어보고, 하나 하나 들어올려 거울에 비추어 본다. 레깅스, 스타킹, 짧은 치마, 긴 스커트. 혹은 블라우스.

"어. 떤. 걸. 로. 할. 까. 요?"

입술을 톡톡 두들기며 말해본다. 옷걸이가 옷걸이인지라 뭐든 잘 어울린다. 그는 분명 그렇게 말하겠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

썬글라스를 낄 지, 윗 옷은 남색으로 할까. 분홍색으로 할까. 오늘의 컨셉은 뭘로 갈까. 고민하고 또 고민해본다. 머릿속은 계속 헝클어진다. 바닥에 옷은 산더미처럼 많았지만, 입을 옷은 그닥 많지 않았다.

"뭘 입지... 뭘 입을까... 뭘 입을까나..."

고민해도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시계를 보았다. 약속 시간이 코 앞이다.

"으으... 미안해 남친 씨... 그냥 아무 거나 입고 갈게!"

신혜라는 옷을 입었다.

의상으로 끝나지 않는다. 화장도 하고, 구두도 골라야 하니까.

결국 약속 시간을 한창은 오버했다. 그래도 상관 없다.

네가 어떻게 내게 뭐라고 하겠어?

사람들이 경악하며 쳐다본다.

당연하다. 이런 여자는, 이런 미녀는 잘 없거든.

은근히 떨어지고, 스쳐지나가면 놀라서 다시 뒤돌아보게 만드는.

질투와 시기를 불러 일으키는 여자는 잘 없거든.

"아... 혜라... 씨?"

그는 머릿속이 정지된 것 같았다. 팜므파탈을 불러일으키는 검보랏빛 드레스. 갈라진 천에 흘깃 보이는 하얀 허벅지. 모델같은 하이힐 워킹.

모두 다

너를 위한 거야.

"우리 쪼꼬미! 나 기다리느라 힘들었지?"

"어... 아뇨... 저도 늦게 나와서..."

거짓말. 한 시간은 일찍 왔잖아.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그럼 오빠야..."

이제 화려하게 보여줄게.

신혜라는 그에게 윙크했다.

여자의 변신은 무죄.

02

"오빠야라뇨... 혜라 씨가 연상이시잖아요."

"아이 참..."

신혜라는 고훈민의 한 쪽 팔을 붙잡았다.

육식녀와 초식남의 조화.

그게 우리 커플이야. 사람들은 맨날 이야기 해.

훈민이가 유약해서, 훈민 씨가 여려서.

그치만 나는 이런 훈민이가 정말 좋은 걸?

내가 리드할 수 있잖아. 간혹 날 끌어주길 바라긴 하지만.

어떤 남자가 날 채 갈까봐 전전 긍긍하는 것도.

이게 다, 내.가.예.뻐.서.야.

"그치 그치 오빠?"

"응? 뭐가?"

"이렇게 섹시하고 아름다운 여자가 눈 앞에 있는데?"

아닌 척 하면서도 괜히 가슴에 시선 모으고 있잖아.

다 보인다고. 순진한 양처럼 아무 관심도 없어 보이지만

사실은 알잖아? 다 큰 남녀끼리 왜 그래?

그러니까 오늘 밤은 나한테 맡겨.

착한 오빠야는 그냥 얌전히 있으면 돼.

아무 것도 모르는 오빠는 가만히 있으면 돼.

내가 다 알아서 해줄테니까.

"훈민 오빠. 나 안 좋은 일 있는데..."

"네? 안 좋은 일이요? 또 클라랑 싸웠어요?"

"응 응! 진상 만나서 싸워쏘... 훈민이가 위로 해주면 안 돼?"

"오늘은 영화관 가려고 했는데..."

영화관 말고.

더 어두운 데 가고 싶은데?

혜라는 혀를 핥짝였다.

"우리 술 먹을까?"

훈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이요? 지금 백주 대낮인데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여친이 슬프다는데 싫어?"

혜라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자 훈민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럼... 딱 한 잔만이예요?"

남자는 여자에게 약하다.

조금이라도 여자가 노출을 하면 거기에만 시선이 쏠리고.

은근하게 스킨십 하면 기뻐서 어쩔 줄 몰라한다. 술을 쏟아서 대신 닦아주겠다느니. 엉엉 울면서 힘들다고 안긴다던가. 품에 안아서, 어깨를 빌리면서 있다보면. 사랑은 더욱 커지고, 더욱 매력적으로 생겨 보인다.

혜라는 오빠의 팔을 잡으면서 결심했다.

"오빠. 그거 알아?"

취기에 용기를 내어 전했던 그 말을.

"내가 얼마나 오빠를 많이 사랑하는지."

"당연히 알죠."

첫 고백도, 첫 키스도.

전부 다 내가 했잖아 오빠.

괜찮아. 오빠는 착하니까.

혜라가 나빠지면 되니까.

밤이 깊어지도록 마시고, 취했다.

혜라는 고주망태가 되어 비틀거렸다.

아이씨. 이게 아닌데. 망했다.

저번처럼 토하면 안 되는데.

"오빠... 나 속 아파..."

"어 어엇..."

훈민은 사색이 되었다. 저번에 토한 일이 떠올라서 였을까.

"그... 봉투 가져올까요? 요 앞에 편의점 있으니까..."

혜라는 오빠의 소매를 붙잡았다.

오빠는 뒤를 돌아보았다.

"오빠는... 늘 여전하게, 바보고, 둔치네."

"어... 미안해요."

"괜찮아. 그래서 마음에 드니까. 오빠... 졸린데 조오기 모텔에서 자면 안 될까?"

"모텔? 안 돼요! 부모님이 일찍 오라고..."

"오빠는 마마보이야? 폰 내놔."

혜라는 신경질적으로 폰을 뺏어들었다. 그녀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왜 훈민아?

"저기요. 저 훈민 오빠 여친인데요. 오늘 섹스하고 들어갈꼬고든요?"

"혜, 혜라 씨!"

- 뭐? 너 누구야! 훈민이 어딨어!

혜라는 폰을 꺼버렸다. 그리곤 씨익 웃으며 브이 표시를 날렸다.

"혜라 씨...!"

"그러게 얌전히 따라오면 됐잖아. 응? 가자~ 내가 풀코스로 대접해줄게~"

혜라는 딸꾹질을 하며 훈민을 끌어 당겼다.

기세에 못 이겨 둘은 모텔의 구석진 방을 차지했다.

혜라는 방 문을 열자마자 훈민을 침대에 자빠트렸다.

"오빠는 가만히 있어. 혜라가 다 알아서 해줄게."

혜라는 훈민의 위에 걸터 앉았다. 불끈 선 사타구니가 혜라의 고간에 맞닿았다.

봐라? 아닌 척 하기는.

혜라는 웃으면서 검은 드레스를 위로 벗어 올렸다.

"어 어엇... 혜라 씨! 혜라 씨 술 취한 거예요. 이러면..."

혜라가 검은 드레스를 벗어 던지자 보인 건 핑크빛 브래지어와 풍만한 가슴이었다. 취기로 붉게 달아오른 홍조가 오늘따라 예뻐 보였다. 혜라는 말했다.

"오빠. 계속 요즘 맨날 혜라 가슴만 쳐다보더라?"

"그... 그게..."

"솔직하게 말해 봐. 혜라 가슴으로 해줄까?"

혜라는 탱탱한 가슴을 한 껏 모았다.

"가... 가슴이 무슨..."

"에이... 파. 이. 즈. 리. 오빠도 뭔지 알잖아?"

혜라는 혀를 낼름 내밀었다.

"그럼 각오해 오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