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것은 무엇인가? 

역사 속에 스러져간 수많은 현인들과 지략가들이 이 질문의 답을 구하기 위해 평생을 바쳐왔다. 

더러는 그 해답이 지형이라고 했다. 누군가는 묘술과도 같은 진법이라고 했다. 단순하게 병사와 무기의 수가 해답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 중에는 '전쟁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열쇠는 흐르는 물처럼 일정한 형태를 가지지 않아 시간과 상황에 따라 그 답은 늘상 바뀌기 마련'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들이 만약 현재에 있었다면 이 난제에 대해 이러한 대답을 제시했을 것이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은 바로 무림인(武林人)이다' 라고.

*

귀쟁국의 왕 양곤은 승리를 확신하며, 천막 앞에 서서 곧 피바람이 불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전쟁이라고 부를 것도 못되었다. 이건 단순한 정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비록 귀쟁국이 천하를 호령할만큼 거대한 국가는 아니었지만 들판 끝에 보이는 저 작디 작은 성읍을 삼켜버리기에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첫 술에 어찌 배가 부르랴. 오늘 이뤄낼 이 작지만 확실한 승리는 앞으로 귀쟁국이 걸어갈 패권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양곤은 마음 속에 자신의 야망을 다시 한 번 새겨넣으며 말 위에 올라탔다. 

"주군."

마침 정찰을 보냈던 척후병이 양곤에게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고하라."

성읍의 전력은 이미 파악을 끝내 둔 상황이었지만 양곤은 만에 하나의 경우조차 대비하기 위해 척후병을 보내 전장에 나온 병력을 가늠해오라고 시켰었다.

일단 최소한의 예를 갖추어 며칠 전에 선전포고(양곤은 속으로 '정복통보'라 하는게 더 어울릴 것이라 생각했다)는 해두었으니, 그 사이에 친분이 있는 이웃 성읍에게 도움을 요청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정찰보고에 따라 병력을 얼마나 보낼지, 어떤 전술을 펼칠지 정하리라.

"그것이......" 그러나 자신만만한 양곤의 표정과는 다르게 척후병의 얼굴에는 당황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성읍 앞에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뭐라?"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에 양곤이 날카롭게 되물었다. 

"성을 버리고 다들 줄행랑이라도 쳤단 말인가?"

"성문이 닫혀있는 것을 보아선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성문 앞에 웬 계집 하나가 앉아 있었습니다."

"허......"

양곤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 숨을 내뱉었다. 

노리개라도 받고 물러가달라는 뜻인가? 어차피 성읍을 함락시키면 읍내의 모든 여인들은 다 자신의 것이 될 터인데.

맞서 싸우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으면서 이런 얄팍한 회유책을 쓰려고 했다는 사실이 양곤은 괘씸했다.

"출정이다." 양곤이 말의 고삐를 쥐며 명령했다. 

"예 주군." 양곤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관이 즉시 고개를 숙였다. 

"병력은......"

"전 병력을 총동원한다. 지금 바로 각 막사로 달려가 전달하도록."

"주군?" 

"약소한 성읍이라 손대중을 해주다 항복을 받아낼 생각이었거늘, 저들이 짐의 얼굴에 침을 뱉는구나."

양곤이 부관을 바라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전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없이 고작 계집년 하나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저 오만방자한 가축에게 내릴 자비 따윈 없다. 전력으로 단숨에 성문을 부수고 들어가 성 안의 모든 여자들을 한데 모아 겁탈하고, 남자들은 그걸 지켜보도록 한 후에 죽일 것이다. 왕의 처자식들은 내가 직접 왕 앞에서 취하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분노와 정욕으로 가득찬 자신의 주인의 얼굴을 본 부관은 두 말 없이 명을 받들고는 돌아서서 외치기 시작했다. 

"전군! 출정이다!"

*

"저 계집인가?"

성문과 불과 수백 보 거리만을 남겨두었을 때 양곤의 시야에도 예의 그 계집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빛의 머리가 허리 밑까지 물결치며 내려오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몸을 소복이 덮은 검은 의복은 밤하늘의 강물과도 같아 청명한 기운을 뿜어냈다. 

다가오는 대군의 소리를 들었는지 여인이 눈을 뜨고 호박석과 같은 눈으로 양곤과 그의 병사들을 응시했다. 

"......"

여인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세걸음 양곤을 향해 다가왔다. 양곤이 허리춤에 달린 흰색과 검정색의 칼집이 태양빛을 받아 번뜩이는 걸 보았을 때, 여인이 크게 숨을 들이키더니 이윽고 온 들판에 여인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울려퍼졌다. 

"귀쟁국의 왕 양곤은 들으라!"

작은 형체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져있건만 여인의 목소리는 바로 코앞에서 소리를 지르는 것마냥 크게 들렸다. 

"본녀는 비류가의 여식 소소라 하오. 내 이 성읍의 주인과 이전부터 연이 있어 자주 이곳을 방문했었는데, 마침 어제 그로부터 귀쟁국이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리 만나러 왔소이다."

양곤은 저 멀리서 비류소소가 가슴에 손을 얹고 예를 취하는 것을 보았다. 

"세력을 넓혀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자 하는 왕의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나, 이 성읍은 보기만큼이나 작아 쌓아놓은 재물도 없고 백성들도 그저 하루하루 소박하게 살아가는 보잘것없는 마을이오. 그러니 부디 넓은 아량을 베풀어 이 성읍을 향하는 발걸음을 돌려준다면 본녀 비류가의 이름을 걸고 반드시 보답하겠소이다."

여인의 말을 듣고 있던 양곤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한입거리도 안되는 성읍 따위가 끝까지 나를 우롱하는구나! 계집년 하나의 부탁으로 말머리를 돌리는 군주가 어느 역사에 있단 말이냐!" 

멀리 떨어진 비류소소에게 들렸을지 모를 고함을 지르고는 양곤이 뒤를 돌아봐 호령했다. 

"구황!"

"예 주군!" 거대한 체구와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사내가 양곤 앞으로 나아왔다. 

"당장 가서 저 계집년의 비명소리가 온 성읍에 울릴 때까지 강간하고 끌어와라! 산채로 매달아 화살받이로 쓰겠다."

"존명!"

*

비류소소는 저 멀리서 거구의 사내가 말을 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역시, 이런 모습으로 돌아가달라고 해봤자 설득력이 없나."

혹여나싶어 한껏 격식을 차린 말투로 말해보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던 모양이다. 

"왜들 전부 싸우지를 못해 안달인 건지."

그렇게 투덜거리고 있으려니 남자는 말에서 내려와 험악한 웃음을 지으며 비류소소에게 말을 걸었다. 

"흐흐, 가까이서 보니 훨씬 더 귀여워 보이는 년이군. 겁도 없이 까부는 것을 보니 제정신은 아닌 것 같지만 제대로 가지고 놀아주마."

"......"

남자의 위협에도 비류소소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허리춤에 찬 흰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칼집과는 정반대로 내리쬐는 햇빛마저 흡수하는 듯한 묵빛의 도신을 보자 남자는 호오, 하며 작은 탄성을 흘렸다. 

"미친년이 칼 하나는 제법 괜찮은 걸 들고 다니는구나. 옷의 천도 고급져 보이는 게 꽤나 사는 집의 여식이었나? 큭큭, 가져다 팔면 제법 돈이 되겠어."

"혓바닥이 길구나." 비류소소가 차갑게 말하며 스윽, 몸을 낮추고 자세를 잡았다. 

"네놈은 그 혀로 칼을 휘두르는 게냐?"

"네이년......" 비류소소의 도발에 얼굴을 찌푸린 남자가 대검을 빼들었다. 

"그렇게 일찍 뒤지고 싶다면 소원대로......"

그렇게 말하는 남자는 일순 눈 앞의 여성의 손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을 보았고, 

"......커억......"

그것이 남자가 살아서 본 마지막 장면이 되었다. 

비류소소는 남자의 입에 꽂아넣은 칼을 빼고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혀가 길다고 말한 게 바로 방금 전이거늘, 주의력이 부족하구나."

*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

양곤은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구황이 여자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그 다음 순간 여자의 칼이 구황의 머리를 꿰뚫고 나오더니, 구황은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냔 말이다!"

주인의 당혹스러운 외침에 병사들 또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장수 중에선 가장 강력한 구황이 고작 저런 계집아이 하나에게 쓰러졌다고?

모두가 아직 혼란을 겪고 있을 때, 저 멀리서 여인은 여전히 칼을 빼 든 채로 병사들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 막아라!"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양곤이 소리쳤다. 

"전군 돌격! 고작 계집년 하나다! 가서 죽여! 죽여버리라고!"

양곤 근처에 있던 나팔병이 다급히 나팔을 불었고, 병사들은 무리의 함성으로 개인의 두려움을 좇아내며 힘차게 달려나갔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주군!" 무언가를 눈치 챈 부관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그의 말은 나팔과 함성소리에 묻혀 그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았다. 

*

비류소소는 자신을 향해 몰려오는 병사들의 무리를 보며 혀를 쯧, 찼다. 

"결국 더 많은 피를 봐야겠다는 게로구나."

비류소소가 칼에 기를 불어넣자 검은 도신에서 흑청색의 그림자가 불길처럼 피어올랐다. 

"달그림자의 춤, 1식." 비류소소는 달리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채 한 바퀴 회전하며 마치 눌린 용수철처럼 몸을 움츠렸다. 

"그림자 쓸기."

투콱-!

회전력을 그대로 실어 가로지르는 검의 궤적을 따라 부채꼴로 넓게 퍼져나가는 그림자가 땅을 타고 내달리더니 달려오던 무리의 가장 앞에선 병사들 앞에서 마치 방파제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터져나가며 그들을 덮쳤다. 

"으아아아악!"

그림자의 급류에 그대로 온 몸이 부서지며 날아가는 병사들의 비명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류소소는 그대로 움츠렸던 몸을 튕겨 하늘로 높게 솟아 무리의 한가운데 위로 우아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활, 활을 쏴라!"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활을 든 병사들이 고개를 치켜들었지만, 그들은 중천에 걸린 태양 아래에 있는 비류소소를 맞추기는 커녕 제대로 눈을 뜨지도 못하였다. 

"2식." 비류소소는 칼자루의 끝을 손바닥으로 받치고 스읍, 숨을 들이쉬며 기를 응집시켰다. 

"장대비 그림자."

발 끝에서 그림자가 폭발하며 비류소소는 엄청난 속도로 땅을 향해 추락했다. 

마치 떨어지는 유성과도 같은 파괴력으로 무리의 한가운데 떨어진 비류소소를 중심으로 굉음이 울리며 모래먼지와 땅의 파편들, 그리고 수십의 병사들의 마치 가을 바람 앞의 낙엽마냥 날아갔다. 

"괴물, 괴물이다!"

"으아아아아! 죽어! 죽어 이 괴물년아!"

공포에 사로잡힌 병사들에게 더 이상 전열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마구잡이로 여자를 향해 칼과 창을 휘두르며 그저 소리를 빼액빼액 지를 뿐이었다. 

비류소소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창칼을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피하며 칼에 다시 그림자를 두르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땅을 밟는 비류소소의 보법은 차츰 빨라지더니, 이내 병사들의 눈에 그녀의 형상이 여럿으로 나뉘어 보일 정도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3식." 혼돈 속에서도 투명하게 울리는 비류소소의 목소리를 들은 한 병사는,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털썩 무릎을 꿇고는 그대로 바지를 적셔버렸다. 

"그림자 잔치."

비류소소의 말과 동시에 무릎을 꿇었던 병사의 목이 공중으로 날아갔다. 

보법을 밟던 그녀의 잔상은 실체가 되었다. 비류소소의 형상을 띈 무수한 그림자들은 검은 번개가 되어 온 방향으로 뻗어나갔다. 쉬익! 하는 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지나간 곳에는 종이처럼 잘려나간 병사들의 신체와 붉은 피, 그리고 찢어지듯 울리는 병사들의 절규만이 남을 뿐이었다. 

여인의 모습을 한 검은 재앙이 수천의 목숨을 앗아가는데 걸린 시간은, 찻잔의 차가 식는 데 걸리는 것보다도 짧았다. 

모든 병사를 학살한 비류소소는 그대로 강물처럼 흐르는 피와 시체의 언덕을 너머 마지막 사냥감, 양곤을 향해 내달렸다. 

"4식." 그녀의 눈에 공포에 질린 양곤의 표정이 비쳤다. 

"그림자 승ㅊ......"

사선으로 칼을 쳐올리려는 비류소소는 순간 무언가를 눈치채고는 순간적으로 검의 궤도를 틀었다. 

카앙!

공기를 울리는 금속음과 함께 그림자를 두른 검은 칼이 튕겨져 나갔고 비류소소는 한 두 걸음 물러났다. 

"......거기까지다."

양곤 옆에 서 있던 부관이 식은 땀을 흘리며 납도된 기다란 검의 자루에 손을 얹은 채 말했다. 

"주군에게는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할 거다."

"......" 비류소소는 무표정한 얼굴로 부관을 잠시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무림인이군."

부관은 비류소소의 말을 넘겨들으며 말을 이었다. 

"네년의 무술이 뛰어난 것은 인정하지만, 나 또한 피를 토하고 살을 깎아 무림의 경지에 다다른 몸. 네년은 날 이길 수 없다."

"그렇게 실력이 뛰어나다면, 왜 진즉 저들을 돕지 않은 거지?" 비류소소가 시체들의 산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내 임무는 주군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지." 부관이 칼자루를 쥐며 으르렁 거렸다. 

"이제 죽기 싫음 물러나라. 내 검격을 피하는 요행은 두 번 다시 없을테니."

"......과연, 극태도발도술(極太刀拔刀術) 사용자로구나." 비류소소 또한 부관의 말을 넘겨들으며 말했다. 

"......"

"후후, 그래. 제법 괜찮은 검술을 익힌 것은 칭찬해주마."

비류소소가 이제껏 한 번도 잡지 않았던 검은 칼집의 칼자루로 손을 가져갔다. 이윽고 칼집에서 피보다 붉은 색의 도신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대가로, 내 전력을 다한 일격을 마지막으로 네게 보여주마."

검붉은 기운이 일순 여인으로부터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부관은 마른 침을 삼키며 온 힘을 다해 꽉 잡은 칼자루와 칼집에 자신이 가진 모든 기를 불어넣어, 자신이 뽑아낼 수 있는 최강의 경도와 날카로움을 가진 일섬(一閃)을 짜올렸다. 

"......그대, 이름은?"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비류소소가 나지막하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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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 간지 좋네요!! 멋진 글을 써주신 페르소나dh작가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