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감귤




"저희 딸아이를 오늘 하룻밤만 재워주시겠습니까."


밤의 한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태양이 끝내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춰버린 시간.


현관문 앞에 선 금발의 남성이, 진지한 얼굴로 내가 말했다. 서양 영화에서나 볼법한 중후한 외모를 가진 그의 엄숙한 눈빛에, 나는 나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킨다. 


"......" 


이윽고 바짝 말라가는 입을 겨우겨우 떼고, 나는 목소리를 쥐어짜낸다.


"싫어요."


"아니 제발요!" 남자가 (말그대로) 나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졌다. 



*



"아 싫다니깐요!"


나는 내 다리를 부여잡은 남자를 떼어내려 안간힘을 쓰며 외쳤다. 그런 나를 따라 질질 끌려오는 남자에게선 방금 전의 근엄함은 티끌만치도 보이지 않았다. 


"저 바쁘다구요!"


"그냥! 그냥 옆에 두기만 하면 되니까!"


남자는 기다란 검은 코트가 바닥에 더렵혀지는 건 신경도 쓰지 않고 내게 매달려 간청했다. 


"하루만 맡아주십쇼!"


"아 그러니까 왜 하필 저냐구요! 다른 맡길 사람 없어요? 그리고,"


나는 행여 이웃에게 들릴까 목소리를 아주 조금 낮췄다.


"걔처럼 어린 뱀파이어는 애초에 밖에 나가면 안된다면서요."


뱀파이어. 전설과 픽션 속에서나 등장하는 흡혈귀들. 


정신 나간 소리같지만, 지금 처절하게 내게 부탁하고 있는 이 헐리우드 배우 같은 남자와 그 딸은 바로 그 뱀파이어다. 


물론 모든 소문들이 전달되며 과장되듯이, 이 부녀도 그런 이야기 속에서 등장하는 뱀파이어들만큼 무섭고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다. 그들은 피 이외의 음식도 섭취할 수 있고, 국가에서 주기적으로 피를 보급해주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인간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는 존재인가?


"그치만 어떻게 밤에 그 어린 애를 혼자 둡니까? 냉혈한도 아니고."


그건 절대 아니다. 


"아니 누가 누굴보고 냉혈한이라고......"


남자의 완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확인한 나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여전히 바닥에 코를 박고 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걱정되면서 어딜 가려는 거예요?"


자신을 떼어내려는 내 움직임이 멈춘 것을 느낀 남자가 곧바로 방금 전의 댄디한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몇 년에 한 번 있는 뱀파이어들의 사바스(sabbath)입니다."


"사바스?"


"전세계에 있는 뱀파이어들이 한 데 모여 안부를 묻고 정보를 교환하는 일종의 연회 같은 겁니다. 모든 성인 뱀파이어들은 의무적으로 참석해야 하지요."


"그래서 거길 가긴 가야겠고 애는 걱정되고 해서 저한테 부탁하러 오셨다?"


"딸아이가 가족 외에 아는 어른은 선생님 한 분 뿐이고, 또 선생님께선 저희 정체를 알고 계시니......"


남자가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나더니 내게 허리를 굽혔다. 


"부탁드립니다. 나중에 사례는 꼭 하겠습니다."


"......하아."


나는 지끈거려오는 이마를 부여잡고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할 일도 많이 남았는데......"


내일은 모처럼 출근을 하지 않는 날이지만, 그래도 회사일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


남자는 여전히 허리를 숙인 채 묵묵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


유독 길게 느껴지는 짧은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아 알았아요 알았어."


내가 결국 머리를 긁으며 항복을 선언했다. 


"제가 맡아둘게요. 어차피 이렇게 돌려보내봤자 저만 찝찝할테고."


"정말입니까?" 남자가 환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감사를 표하며 내 손을 잡고 붕붕 흔드는 남자의 표정을 보며, 나는 문득 생각했다. 


어쩌면 맨날 회사일에 시달리는 것도 이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은 아닐까 하고. 



*



"안녕하세여 아저씨!"


그로부터 몇 분 뒤. 


현관문 앞에는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할 법한 나이의 여자아이가 서서 내게 해맑게 인사를 건냈다. 


"그래......"


발목까지 내려오는 복슬복슬한 금빛 머리. 장미처럼 빨간 눈. 우유처럼 새하얀 피부와 순백의 원피스.


"헤헤~"


그리고 도무지 피를 먹는 흡혈귀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저 순진한 표정.


"그럼, 우리 딸아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송복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나를 찾아온, 내가 만난 첫 번째 뱀파이어.


"복실이도 아저씨 말 잘 듣고 있어라." 


"네~" 복실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폴짝폴짝 뛰며 대답했다. 


복실이의 아버지는 나를 바라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다. 


"내일 동이 트기 전까진 꼭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말하고 남자는 몸을 돌려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박쥐로 변해서 날아가는 걸 내심 기대했는데."


멀어지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리는 나는 옷소매를 잡아당기는 느낌에 고개를 돌렸다. 


"히이~아저씨 아저씨!"


복실이가 헤실헤실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이제 들어가두 되여? 네?"


그러보니 뱀파이어는 초대받지 못한 집에는 들어갈 수 없다고 했던가. 


"그래 그래 들어와 들어와."


"우와~"


내 말이 떨어지자마자 복실이는 팔을 활짝 펴고 현관을 우다다 달려갔다. 


"아, 야! 넘어진다 그러다!"


"와~헤헤헤!"


복실이는 내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대로 내 침대로 달려가 몸을 날렸다. 가벼운 몸이 침대에 내려앉자 이불이 폭신하게 복실이의 작은 몸을 감쌌다. 복실이는 그 감촉이 좋은지 까르륵 웃으며 이불을 몸에 둘둘 말고 침대 위를 뒹굴었다. 


"......벌써부터 피곤해지기 시작했어."


그렇게 중얼거리며 문을 닫고 들어오는 나를 향해 복실이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아저씨! 나 피 주세요!"


"안돼."


"엑."


내가 단칼에 거절하자 복실이는 금방 울상이 되어 움직임이 멈췄다. 


"왜요......?"


"왜긴. 어릴 때부터 피에 맛들리면 나중에 큰일 난다면서."


"지난 번에 만났을 땐 줬잖아요!"


"그게 준 거냐! 손가락 베인 데에서 나는 걸 니가 멋대로 먹은거지!"


"히잉......"


내가 물러설 기색을 보이지 않자 복실이가 실망한 듯이 고개를 푸욱 숙였다. 


"너 그거 때문에 그렇게 신나있었던 거냐?"


"아니에요."


복실이가 전혀 아니지 않다는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래......"


시무룩한 얼굴에 순간 또 마음이 아파왔지만, 나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다시 책상 앞에 앉았다. 


복실이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뱀파이어들이 어릴 때 피 맛을 알게 되면 사춘기 시절에 그 충동을 참기 어려워진다고 했다. 


'괜히 불쌍해서 줬다가 애 망쳤단 소릴 들을 순 없지.'


스스로를 그렇게 설득해가며 나는 눈 앞에 쌓인 회사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내일 조금이나마 편하게 일처리를 하기 위해선, 오늘 밤을 새서라도 이 일을 끝내야 했다. 


"......히잉."


"......"


"......심심하당......"


"......"


"......배고푸당......"


"너 안 자?"


뒤에서 자꾸 뒹굴거리면서 중얼거리는 걸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빙글 의자를 돌리며 물었다. 


"그치만 잠이 안오는 걸요?" 복실이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리고 배가 꼬르륵 꼬르륵 거려서 자고 싶어도 못 잘 거 같아여."


"으으......"


여덟 살밖에 안된 주제에 마치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추욱 쳐져있는 걸 보고 있자니 도저히 일감이 손에 잡히지 않을 것 같았다. 


"아오 알았어!"


아빠와 자식이 어떻게 저리 똑 닮았을까. 


"우와앙!" 내 말에 복실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운차게 몸을 일으켰다. 


"피 줄 거에요?"


"그건 안돼."


"히잉......"


"대신."


나는 또 푸쉬쉭 가라앉으려는 복실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대신, 다른 거 맛있는 거 사줄게."


"다른 거?"


"그래."


원래라면 밖에 나가면 안되는 아이를 데리고 나가는 것도 안될 일이지만, 이것마저 안하면 밤새도록 칭얼거리겠지. 


"너, 편의점은 가본 적 있냐?"


이정도의 비행이라면, 별 문제 없을 것이다.



상하라고 나눌 것도 없이 짧은 단편이지만 그래도 흐름상 끊어감


사실 2시라서 잘려고 끊음ㅎ

다음껀 언제 나올진 아무도 몰라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