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코뮌은 1871년에 파리의 민중이 기나긴 전쟁을 지속하는 와중에 극도로 무능하였던 정부에 반발하여, 혁명을 통해 기존 세력을 몰아내고 건설하였던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입니다. 아마도 위에 있는 이미지는 공산주의자 채널의 대표 이미지로서 사용되는 것을 보신 분 또한 계실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은 파리의 무산자 계급이 자신의 권리를 위해 3월 18일에 용감히 봉기해 수많은 역경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이상을 멋지게 빛냈던 파리 코뮌이라는 정부와 그 역사에 대해 알아보고,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보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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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70년, 보불전쟁 와중에 스당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대패, 나폴레옹 3세가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대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랑스 노동자 인민은 강대국이자 제국주의 열강의 면모를 보이고, 또한 침략과정을 수행했던 독일 제국과 프랑스 제2제국의 행태에 대해 심각한 분노를 느꼈으며, 또한 기존에 이어지던 노조 탄압, 노동자에 대한 끔찍한 착취행태에 대해서 거국적인 비판을 개시하였습니다.




 그리고, 파리 코뮌의 위대한 서막은 좌익 저널리스트 빅토르 누아르*Victor Noir*의 죽음이 그 신호탄이 됩니다. 나폴레옹 3세의 조카가 그를 살해한 것입니다. 봉건왕정이자 자본가들의 비호자의 인척이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명한 노동자들의 옹호자를 참혹하게 살해하자, 전 파리의 노동자는 일제히 분노하였습니다.


좌익 급진운동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를 중심으로, 파리의 노동자들은 그 분노의 불꽃을 "급진공화주의자들"이라는 이름 아래 모여 밝게 빛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대열에는 후에 프랑스의 총리가 될 조르주 클레망소와 같은 미래의 진보적인 인물의 거두가 될 기라성같은 인물들 또한 다수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파리의 노동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습니다. 제국주의적 마수의 선봉장이였던 독일 제국군이 파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고, 포로가 된 나폴레옹 3세의 정부를 이은 프랑스 제3공화국 또한 독일군을 상대로 장렬히 맞서싸웠던 의용군을 독일의 입맛대로 무작정 무장해제시키려 하는 등, 더러운 마수를 뻗쳐올 따름이였습니다.


 그 무장해제의 마수가 뻗칠 때, 파리의 시민들은 분연히 떨쳐 일어났습니다. 사실상 독일 제국의 부역자이자 우유부단한 자들이 정권을 잡은 제3공화국의 수괴들을 몰아내고, 파리를 자유와 평등, 새로운 세상의 기치를 향해 전진하는 노동자들이 장악한 것입니다. 제3공화국 정부들의 수괴들의 진압명령을 군인들 또한 듣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들의 신념을 위해서, 그리고 또한 자유와 평등이라는 하나된 기치 아래 제국주의의 부역자가 되지 않겠다 선언한 것입니다.


  이 파리 코뮌이 결국 3월 18일의 군민통합을 통해 역사적인 성립이 되었고, 이후 26일에 정당한 민주선거를 통해서 정부가 구성되었음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들은 끝까지 그들의 신념과 정의를 위해서 마지막까지 맞서 싸우기로 한 것입니다. 



 파리 코뮌의 노동자들은, 당시에도, 그 이후에도, 그리고 현대에도 참으로 많은 영감, 사상적 영향, 그리고 미래로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해주었습니다. 이들의 의의는 단시간만에 끝난 것이 아닌, 그 위대한 가치를 우리 시대에도 생생히 전한다는 점에 있을 것입니다.



수많은 어린이 노동자들이 희생당하던 시절, 그들은 아동노동을 폐지했습니다.


야간 노동 또한 폐지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자본가가 이를 혹사하다 죽는 노동자들이 수두룩했기에.


노동자들이 억울하게 부당한 조건, 어쩔 수 없이 져야 하였던 빚들 또한 탕감하고, 경제구조를 재조정했습니다.


능력과 현실에서의 실천능력을 기반으로 한 인사 또한 행해졌습니다. 이들은 포부와 의지, 능력을 보고 이전까지 칼끝을 겨누었던 독일 출신인 노동자를 정부요직으로서 선출하였습니다.



노동자들의 저항권과 단체조직권 또한 충실히 보장되었습니다. 정부에서 처리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들은 마음껏 이에 대해 항의하거나, 진솔한 협상을 할 수 있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의 권리 또한 지켜졌습니다. 여성의 정계 진출과 노동권, 투표권을 부여하고, 아이들의 교육권을 보장하고 강제로 교회로 가야 할 의무를 삭제함에 따라 이들의 알 권리와 인권을 더욱 더 존중하는 사회분위기와 시스템을 제도화하였습니다.


구질서에 대한 파괴 또한 이어졌습니다. 근처 교구의 빈민들과 노동자들에게 사회 분위기를 명목으로 반강제로 십일조를 착취해가던 악질 교회들, 황제가 자신의 위신을 보전하기 위해 국민의 혈세로 세운 건물들을 헐어버림으로서, 인간 중심의, 국민 중심의 평등한 세상을 문화 방면에서도 실천적으로 구현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반달리즘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조선총독부와 같은 것을 폭파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에서 어떻게 황제를 찬양하는 건물을 그대로 둘 수 있으며, 어떻게 무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선봉장이였던 집단의 건물을 그대로 둘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최후까지 투쟁했습니다. 바리케이드를 펼치고, 용전분투하여 수많은 진압군을 쓰러뜨리고, 함께 싸우는 전우들과 함께 결의를 다지며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숫자와 시대는 그들의 편이 아니였고, 결국 파리 코뮌은 시간이 지나며 제국주의자들과 복고주의자들의 군홧발에 짓밟혀 하나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의 의의는 그저 우리가 역사책을 넘기며 옆의 자투리에, 의도적으로 조그마하게만 언급되는, 그러한 작은 존재로 무시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들은 인류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였으며, 또한 우리 시대에 결여되어가고, 또한 잊혀져가고 있는 그러한 참으로 중요한 가치들을 그 당시 참혹한 자본주의 논리 속에서 착취되어가던 노동자의 권리를 일깨운, 그리고 이 시대에 다시 잊혀져가고 있는 그것을 일깨워줄만한 하나의 지침인 것입니다.


 혹자는 이들이 수십일 밖에 지속되지 못하였다고 무식하게 폄훼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정당한 비판이겠습니까? 우리들은 그것이 얼마나 오래 지속되었는지 단편적인 정보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파리 코뮌이라는 그 낭만과, 정의와, 자유와, 평등이 살아숨쉬게 하고자 하였던 그 19세기의 미약한 노동자들이 모여 만들어낸 거대한 하나의 시대의 물결. 그것은 단순한 숫자로서 치부될 만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자본주의 논리 하에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는 노동자들은 그 시절, 자신의 권리를 위해 함께 어깨를 맞대고 투쟁하였던 파리 코뮌의 이름이 지워진 노동자들의 정신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정신은 인류가 살아있는 한 계속 숨쉬었으며, 숨쉬고 있고 숨쉴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글의 끝을 제목을 다시 제창하며 끝내고자 합니다.


Vive la commune!

Vive la Revolution!

Vive la Paris commu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