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Commune de Paris"


"파리코뮌"


이번엔 파리코뮌에 대한 역사를 다뤄볼까 한다.

파리코뮌이 남긴 업적은 무엇일까?

바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란 것이다.

하지만 업적을 설명하기 전에 왜 생겼는지

결과,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탄생하게 된 이유


1851년,프랑스는격동과 발전의 시기였다

산업혁명의 축복으로 많은 생산품이

쏟아져 나왔고 

무역이 증가했으며 특히 중화학공업이

최전성기를 달리던 기술발전의 시대였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당시 하청,즉 가내수공업이나 중소생산업체는

돈도 못벌고 늘 빡센 근무환경에 휘둘리기 일수였으며

산업에서 나온 부는 죄다 프랑스의 금융귀족 즉

부르주아,자본가들이 다 가져가기 일수였다.


특히,노동자들을 착취하며 얻은 부는 쓸데없는

투기에 꼴아박는게 일상이였고

자본가들은 사기,투기로 농민들의 땅을 빼앗거나

다른나라의 전쟁에 돈을 대주는 등

"돈 퍼날라 버리기"같은 행위를 반복하였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보여주는 사례까지

보여줬는데


프랑스의 여러 가문들이 금융관련,주식,채권등을

소유하고 1869년에는 20억 프랑어치에 달하는자본을 소유하기에 이른다.


특히 그들은 저런 자본을 가지고 돈놀이를 하기

시작했는데 프랑스 2 공화국에

정부대출,보조금 및 정부 관련 지출에 돈을

빌려주면서 2공화국은 사실상

"자본가를위한,자본가를 위해,자본가만의공화국"

이 되어버리는 처지에 되어버렸고

프랑스 2공화국이 비대한 빛더미에 깔리게 돼는

원인을 준다


2.곳곳에서 터지기 시작한 문제점들.


방금전 말했다시피 투기및사기로 땅을 잃은

빈민과 농민은 먹고살기 위해 파리로 몰려가기 

시작하였다 허나,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노동환경 및 근무조건은

더더욱 가혹해지기 시작했으며

모든 산업분야에선 월급이 낮아졌고

병이나 노령으로 일을 못하게 되었거나

일을하다 부상을 당했을 시에는

그 어떠한 복지나 혜택을 받을수 없었고

여성의 평균 임금은 남성보다 2-3배낮았다.


그럼 근무환경은 어땠을까?

작업환경은 10-12시간(이 중 2시간은 밥을 먹거나

쉬는시간)이였고 어떨때는 14-16시간을 일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저 모든 작업환경이 파리시민

절반이 저렇게 일하는 정도였다!


1867년 파리박람회 노동자대표들은

"진보인 요소인 기계가 노동자들에게 빈곤을

초래하고있다"라고 말할정도로 노동자들의

취급은 "언제든지 버려도 되는 일회용도구"정도로

취급받게 되었다 특히, 기계의발전은 

노동자들에게 큰 위기로나타나였는데 

노동자들 사이에선

"혁신기술은 자본가에게만 이익을 준다"

라고 말할정도로 위기감이 매우 컸다.


한편,1869년 프랑스의 대도시에선 선거가 열렸다.

여기에서 공화파 야당이 많은 지지세를 보이면서

공화정부가 세워질것만 같았다,하지만.....


3.프로이센의 침략


유럽변방에서 별볼일 없던나라,프로이센

곧바로 독일을 통일하였다

프로이센의 재상,오토 폰 비스마르크

날카로운 외교력은 프랑스를 고립하는데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 멕시코 원정에 실패한

프랑스는 군사력손실+위신손상이라는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


불안해진 프랑스 정세와 나폴레옹3세는

프로이센을 침공하였다 하지만,이래봐도 독일을

통일하면서 숙련되고 준비를 해온 프로이센군은

프랑스군을 파리까지 밀어넣었으며

1870년 9월4일,프랑스는 항복하면서

나폴레옹3세는 권자에서 물러나고

프랑스에 공화정이 도입되었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시련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지만 

프랑스의 상징,"자유,평등,우애"는 들어서지

않았다 공화정부는 부르주아 편이였고

노동자들은 여전히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다.


한편,파리에서는 프로이센을 막고 포위하면서

파리에는 굶는 사람이 넘처였고 실업자는

파리시민 절반이상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분노하여 뭉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독일군의 파리입성"고작 탄생한지

반세기도 안지난 국가가 우리나라를 침공한것도

모자라 문화와 프랑스의 정수,파리에 입성하다니!

이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자존심을 열받게

할수밖에 없었다 하지만,더 열받게 하는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독일이 요구하는 조약들이였다.


알자스-로렌지방의 할양,50억프랑의 전쟁배상금

독일군의 파리입성등 말도안되는 조약들이

기득권을 유지할려는 공화파들에 의해

채결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이에대한 저항과

불만표출을 시작했다.


5.혁명의 전조


그들은 분노했다,무능한 공화파 정부에 이어

치욕스러운 조약채결까지.


그들은 들고일어나기 시작하였다

1870년10월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871년 1월10일에 정부 전복시도가 일어났다.


하지만 정부는 그들을 잔인하리만큼 진압했다

그들은 "터지기 직전인"민중들을 뒷전에

앉힌 채 프로이센과 비밀협상을 시작했다


파리시민은 분노했다.

수치스러운 항복협상 때문에? 아니!

겨우 파리를 지켰것만 어떠한 책임없이

고통을 파리시민들에게 떠넘기고 

포위되어 굶어죽어가는 동안 어떠한 대책도

세우지 않은 부르주아 정부에 대해 분노하였다.


한편 공화정부는 기득권을 유지하고 

항복협상을 빠르게 하기위해 조기총선을 실시하였다

급박하게 변하는 상황덕에 파리좌파들은

어떠한 행동을 해보지도 못한채 선거에서 졌다.


이 선거결과로 왕정복고주의자가 대거 당선되었고

부르주아 정부에 대한 분노가 하늘 끝까지 닷기

시작하였다.....


6.혁명의 시작


1871년 3월 18일,정부군은 몽마르트 언덕에

있는 국민방어대,파리를 지키던 의용군들의

대포 227문을 압수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러한 대포들은 프랑스 시민들의 성금으로

사들인 대포였기에 파리시민들은

강하게 반발하며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국민방어대를 시작으로,파리시민부터,급기야는

여성과 아이들까지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급기야 정부군 일부는 시민들 편에 합류하여

저항하였다.


이러한 혼란스러운 상황에 공화파 인사들과

정부수반은 빠르게 파리 외곽으로 도망쳤고

파리는 시민들의 것이 되었다.


7.노동계급이 파리를 주도하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이다,처음으로 기득권이 아니라

파리시민들의 손으로 파리가 넘어온 것이였다.


그리하여 곳 그들은 파리를 다스릴

선거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로인해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정부,"파리코뮌"이 탄생한

것이였다,그들은 급진적이고 민주적인 정부를

구상해나가기 시작했다

 모든 관료들은 낮은자 높은자 가릴것없이

민주적으로 선출되었고 특권도 폐지되었다

또한,국가라는 구성체가 노동자를 착취하는

대신,노동자를 해방시키는 어찌보면

노동계급을 위한 정부이기도 했다.


사회전체에도 많은 영향이 나오기 시작하였는데

모든 생산수단의 소유는 폐지되었으며,

야간노동이 금지되었고 여성의 권리가 보장되었다

아동들에게는 무상교육이 제공되었으며

동시에 교회랑 엄격한 정교분리가 이어졌다.


코뮌은 반권위주의를 나타내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승기념탑을 무너뜨렸고

독일인 노동자를 노동부 장관으로 선출시키는등.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이상을 보여주며

공산주의의 이상을 보여주는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8.공화파군의 습격


3공화국은 어떻게든 다시 파리를 수복해야만 했다

그래서 그들은 프로이센과 손을잡아

파리에 있는 코뮌들을 몰아내기 위해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침내 1871년 5월21일,

피에 굶주린 공화파군은 파리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식이 평의회에

들이닥치자 코뮌 군사위원회 대표

샤를 들레퀴리즈는 이러한 호소문을

파리시민들에게 알렸다.


"군국주의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금술을 달고 군복의 솔기를 금빛으로 장식한 참모장교는 이젠 싫다. 민중에게 자리를 양보하라. 혁명을 알리는 종소리는 울려 퍼졌다. …<중략>… 시민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싸우고, 필요하다면 여러분과 함께 죽을 것이다"


이러한 호소문에 더붙여 파리시민들은 바리케이트를

설치한다던가,남녀노소 할거없이 무기를 들고

저항하기 시작하였다.


시내에 입성한 프랑스군은 인정사정 할것없이

움직이는건 가리지 않고 발포하였다.

역시 파리코뮌도 프랑스군을 향해 발포하였다

이렇게해서 파리코뮌의 운명을 건

피의 일주일이 시작되었다.


9.코뮌의 몰락


프랑스군의 힘은 막아낼수 없었다

그결과,인류최초의 공산주의 정부이자

휴머니즘의 이상을 보여주었던 파리코뮌은

불과 70여일도 안되어 역사속으로 흘러가버렸다.


10.사후의 영향


파리코뮌의 영향은 노동계급이 권력을 얻어

사회를 변화시킬수있단걸 보여주었다.

마르크스는 유일한 노동자계급이 일으킨

최초의 혁명이라고 평가하였고


레닌은 세계최초로 벌어진 노동계급의

사회주의 예혱연습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또한,자본주의 아래에선,상상도 할수없었던

진정한 민주주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으며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자본주의를 대채할

새로운 국가라는 비전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우리는 항상 전진해야 한다

파리코뮌당시에 보여주었던 이상을 향하여,

그들이 자유로운 사회를 향해 치루었던

희생이 헛되지 않게,항상 전진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사회변화의 이상을 위해


이글을 읽어준 동지들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다음에도 좋은글을 기고하도록 노력을 다하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