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라이즌 대회] 사춘기를 죽인 소녀의 날개



 -- 소개



 간만에 채널이 좋은 분위기인데다 이런 대회까지 열어 줬었기에 축전 보내는 느낌으로 써봤어. 다만 이렇게 모두 가볍게 즐기는 느낌의 행사에 읽기 몇십 시간 걸리는 중편 혹은 장편 분량의 글을 포스팅하는 건 부적절하다 생각해서 최소한의 구조를 가지는 단순한 플롯의 단편으로 구상했고.


 리딩 타임은 대략 두 시간 삼십 분으로, 공식 카운터사이드 외전 에피소드 중 하나 같은 느낌으로 봐도 좋을 거 같다.



 -- 주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라는 영화를 기억하나? 안드로이드 소년이 세상을 살펴보면서 무언가 느끼고 생각하는 그런 감성적인 내용이야. 이 단편의 내용은 기계 소녀인 호라이즌이 가족과 같았던 리타와 대시의 죽음에 공허와 애수를 느끼고, 히로인인 그녀가 주인공인 관리자와 엮이면서 사랑이 뭔지를 깨닫고 성장하는 내용으로 지목했어.


 로맨스 및 택틱스 플롯도 섞이긴 했지만 애초 내가 이걸 쓰길 원했던 이유는 단지 내가 죽음이란 무엇인지, 인생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의 통찰력으로 거기까지 볼 수 있는 존재에게 세상이란 어떤 모습으로 보이는지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었고, 또한 그렇기에 원작의 관리자를 표방하긴 했었지만 이 캐릭터를 통해 서술되는 사상관과 종교관은 대충 현학적으로 아무 말이나 지어낸 게 아니라 내가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을 썼다고 봐도 좋을 거야.



 -- 등장 인물



 호라이즌: 본 단편의 히로인. 레이첼을 돌보는 와중에도 리타와 대시의 상실에 대한 후회와 비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태.


 레이첼: 조연.


 관리자: 서술자의 철학과 호라이즌단의 애정이 뒤섞여 조형된 캐릭터 - 사실 난 딱히 사랑이란 가치를 높게 치지 않고 존재의 외부적인 대상과 현상에 의존하는 건 정신적인 약점이라 생각하나 어쨌던간 - 또한 그렇기에 이 캐릭터는 원작의 여자에게 모호한 태도와 달리, 확실하게 호라이즌을 사랑하고 그 태도가 행동원리의 중심이 된다.


 시그마: 속칭 "관리자의 딸". 자기가 만든 기계인 그녀를 진심 어린 마음으로 딸로 취급하는 관리자를 보고, 호라이즌이 인간과 기계의 사랑이라는 게 정말로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갖게 된다.


 타이탄: 조연.


 수연: 조연.


 힐데: 조연.


 시윤: 조연.


 미나: 조연.


 노엘: 조연.


 시솝: 반동인물. 아버지의 방법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보이며, 마지막 기회와 게임에 있어서 좀 더 차갑고 무정한 효율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안전할 거란 태도를 취하였다.


 이볼브 원: 조연.


 기계 수집가: 조연.


 ????: 본 단편의 최종 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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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이 온화하고 고요하게 비치는 병실의 안에는 두 소녀가 있었다.


 청순한 느낌의 마젠타 빛깔의 긴 머리를 늘어트린 환자복을 입은 레이첼과, 그 옆의 소파에 앉아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서 자동 점검 모드 루틴을 실행하는 호라이즌. 일견 외형은 마치 평범한 소녀 같지만 차갑고 새하얀 피부와 우아하고 갸름한 얼굴은 사뭇 이 세계에 있어선 안 될 이질적인 존재로 보여졌다.


 제프티 바이오테크의 윌버를 처단하는 것엔 성공했던 그녀는, 그때 이후로 사이가 더욱 깊어진 레이첼에게 무언가 책임을 느끼곤 거의 매일 같이 병원에서 그녀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호의에 불과하고, 레이첼은 그런 기계 소녀에게 묘한 부담감과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농담도 통하질 않아, 취미도 없어서 말할 것도 없어, 그렇다고 무언가 권하면 무뚝뚝한 태도로 거절했다.


 '딱히 싫은 것은 아니지만….'


 새벽에 잠이 오질 않아, 병상에 누워 있던 몸을 일으키곤 노트북을 꺼내 메신저를 확인하는 그녀. 호라이즌을 곁눈질 하면 무언가 중얼거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타. 그때, 내가 믿지 않았다면…."

 "……."


 머리를 뒤로 넘기며, 레이첼은 곰곰히 생각했다. '리타라는 이름 맞지? 대시라는 애도 있고… 잠꼬대를 하는 걸까? 하지만 항상 저런 똑같은 꿈을 꾸면서 계속 그 이름만 부르고 있으니….'


 그래.


 농담도 통하지 않고, 취미도 없으며, 권하는 것은 거절해… 게다가 궁금해서 그 이름에 대해 물으면, 무시하며 어떤 대답도 하지 않는 그런 그녀다.


 자신은 신뢰 받고 있는 것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레이첼은 메신저에 접속했던 친구의 이름을 확인했다: 'GAP2777'. 안색이 환하게 밝혀지며 레이첼은 곧바로 타자를 타닥타닥 치곤 전송했다.


 '사장님, 밤인데 안 주무시고 뭐하는 거예요?'


 당연히 그는 코핀 컴퍼니의 사장, 관리자였다.


 레이첼이 엔터를 누르기 무섭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답장이 왔다.


 '이면세계로부터 평화를 수호해야만 하는 나에겐 눈을 붙일 시간도 없네.'

 '헤에… 그런 거예요?'

 '자네야 말로 안 자고 뭐하고 있나? 충분히 수면을 취하지 않으면 몸이 회복되질 않아.'


 레이첼은 왠지 모르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곤 타자를 쳤다.


 '이제 아픈 것도 없고, 거의 나았어요. 몇 주 지나면 걸을 수 있을 거 같고….'

 '호라이즌 양이 손을 봐주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지.'

 '그렇게 신경쓰실 필요는 없어요.'


 그리고 잠시간 정적이 있었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레이첼은 지팡이를 잡고 일어서서 작은 냉장고를 열고 작은 포도맛 소다 캔을 꺼냈다. 띵 울리는 알림음. 캔을 톡 까며 마시며 화면을 힐긋 보았다.


 '그래. 자네는 괜찮은 것 같지만… 호라이즌은 어떤가?'


 꼬깃꼬깃 둔 이불 안으로 다릴 쭉 뻗으면서, 다시금 노트북을 무릎에다 올리고는 답변하는 레이첼.


 '호라이즌은….'


 그냥 걱정할 것 없다고 치면 좋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고갤 젓고는, 소파에 앉아서 조용히 몸을 뒤척이는 호라이즌을 쳐다봤다.


 정말로 괜찮은 것일까?


 그것보다 깊게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도 잘 모른다.


 '모르겠어요.'

 '…모른다니?'


 '계속 제 옆에 자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데… 리타하고 대시인가? 제가 물어봐도 그냥 무시하고. 거기다 맨날 조용히 있는데, 기운이 없는 것인지,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솔직히 감도 잡히질 않아요.'


 '그녀들인가….'


 관리자가 보낸 메세지는 뭔가 아는 듯한 눈치였다. 레이첼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물었다.


 '뭔가 아시는 거죠?'

 '…알고 있긴 하네.'


 '알려주세요. 호라이즌, 저에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아서 정말로 답답하다구요. 혹시 신뢰하진 않는 것일까나….'


 관리자는 빠르게 즉답했다. '아니, 그런 건 아닐세.'


 '글쎄요?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냥 제가 자기 때문에 맞아서 다쳤다고 그런 책임감에 여기 계속 있는 거 같은데….'


 둘 사이의 관계가 의외로 서먹서먹하단 것을 알게 되었던 관리자는 조심스런 어투로 답장을 보내었다.


 '사람마다 자신이 숨기고 싶어하는 과거가 있네. 특히 후회스런 것이라면, 아무도 알지 않기를 바라는 거니까.'

 '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부담스러워요. 도대체 뭔 생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고, 맨날 싫다고만 하고.'


 그 정도인 것인가, 그렇게 생각한 관리자는 조심스럽게 말하였다.


 '그녀가 자네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심이네. 그냥 성격이 그럴 뿐이니까. 그래… 내가 말했다고 하지 말게.'

 '네?'


 '호라이즌은 과거 사채꾼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지. 리타란 직원과, 그녀의 의동생 같은 대시란 아이가 있었어. 하지만 불운한 사고에 의해서 둘은 이면세계에 버려져 침식체로 변하곤 우리에 의해서 처치됬네.'


 '...'


 고작 두 줄의 문장. 하지만 그 글귀를 읽은 레이첼은 아무런 말도 떠오르질 않아, 단지 점만 세 개 찍었다.


 '그게… 호라이즌은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한 거군요?'

 '그렇겠지. 그래… 그렇다네.'


 목소리조차 없는 텍스트지만, 관리자의 묘하게 떨떠름한 음색을 느낄 수 있다.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쉬면서 문자를 전송했다. '이상한 옷을 입길래 그냥 취향 탓인가 했더니….'


 '음…? 그 정도도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 것인가?'

 '…뭐, 그러네요. 저를 친구로 생각하는 건지도 의문이니까요.'


 '자네가 보기에 그녀는 어떤가?'

 '그냥 매일 같이, 가만히 고개를 떨구고 아무것도 하질 않고. 물어봐도 멍하니 있을 뿐이고. 게다가 대화도 거부하고 있으니 정말로 갑갑할 뿐이예요.'


 레이첼이 덧붙였다. '…걱정도 많이 되고….'


 잠시 답장이 오질 않았다. 쭉 소다를 들이키는 가운데, 다시 관리자가 답변을 보내었다.


 '그리고, 자동 점검을 실행하는 와중엔 계속 그녀들의 이름을 부른다고?'

 '네.'

 '확실히 걱정이 안 될리 없군….'


 '그렇죠.'

 '그렇다면….'


 뭔가 신중하게 고민하는 눈치였다. 몇 초 뒤에, 관리자가 제안했다.


 '호라이즌을 우리 회사에 보내는 것은 어떻겠나?'

 '네?'

 '아니, 그녀가 없는 동안에 자네가 외롭지만 않다면 말일세. 가끔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게 기분 전환이 될 수 있으니 말야.'


 레이첼은 자신도 모르게 짝 손뼉을 치고는 답장했다.


 '그거 좋겠네요! 내일 당장 가보라고 말할게요!'

 '아… 그래. 내일부터 삼 일 고용한단 계약으로, 최대한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도록 노력해 보겠네.'


 그리고 그 뒤에도, 그 둘은 삼십 분 넘게 서로 잡담을 하다가 관리자가 일이 생겼다며 접속을 끊었다. 아직도 새근새근 자는(?) 것 같이 보이는 호라이즌을 보면서 웃곤, 레이첼은 짐가방을 열어 보면서 왠지 흥얼거렸다.


 "후후… 잘 됬네. 호라이즌에게도 휴일이 필요하니까 말이야. 퇴원하면 입고 나가려고 했던 옷들이긴 해도, 우린 체형도 매우 비슷하니까… 이걸 줄까? 아님 이거?"


 관리자 앞에서 말은 그렇기 하긴 했지만, 어쨌거나 묘한 친근함은 느끼는지 내일 어떤 옷을 입혀서 보낼까 레이첼은 고민하며 골랐었다. 자기가 아니라 친구가 가는 건데도 이렇게 기대하는 것을 보면, 눈치채진 못했지만 내심 그녀의 본심은 숨길 수 없던 것인지 모른다.


 다음 날 아침.


 레이첼이 눈을 뜨니, 점검 모드를 마친 호라이즌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만지면서 몸을 일으킨 레이첼에게 그녀가 말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응?"


 "코핀의 사장이 이상한 계약을 청하더군요. 삼 일 동안 그쪽 회사일을 돕는 일이라고 했었던가…." 명백히 기계인데도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그런 일이면 플로라 메이드도 있지 않습니까. 생각하는 것을 정말 모릅니다."


 "그건 어떻게 알았던 거야? 너 핸드폰 없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레이첼은 호라이즌의 머리에 붕 떠있는 냉각기를 보고선 새삼스럽게 알아챘다.


 '아… 맞아. 얘는 몸이 핸드폰이었지.'


 하도 자연스럽게 사람처럼 말하면서 또 사람처럼 행동하니, 종종 얘가 완전하게 기계라는 사실을 잊곤 한다.


 "레이첼, 당신에게도 허락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입니까?"

 "응… 넌 요즘 앉아만 있는 거 같고, 가끔 몸 좀 풀면 좋지 않을까나 해서."

 "저는 기계입니다, 휴먼. 당신들 인간과 달리 주기적으로 운동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레이첼은 고개를 저으면서 말했다. "몸 문제가 아니야. 마음 문제인 걸." 하지만 그 말을 듣고서 호라이즌은 묵묵히 자조적인 목소리를 내었다. "마음이라, 어차피 쓸모없는 깡통인 저에게 그런 것이 있을리 없잖습니까."


 "……."


 호라이즌이 일어나 말했다. "그렇다면 얘기는 끝났군요. 일도 중요한 거니까, 저 없는 사이에 괜히 이상한 짓은 하지 말고 조용히 계십시오."


 그리고 나가려는 그녀를 레이첼이 불러서 세웠다. "아, 잠깐!"


 "뭡니까, 휴먼?"

 "그런 옷을 입고 갈 거야?"


 레이첼이 보기에 그녀의 패션은 너무나도 이상했다. 하얀 용이 그려진 붉은 자켓, 그리고 꾀죄죄한 낡은 치마.


 싸우러 가는 것이면 몰라도, 이런 소녀력의 조각조차 없는 유감스러운 옷을 걸친 채로 보낸다는 건 서비스업 정신에 거스르는 게 아니던가.


 레이첼은 짐가방에서 골라 보며 옷뭉치들을 꺼내고는, 하늘거리는 하얀 원피스와 푸른 조끼와 따뜻하고 폭신한 흰 양말에, 챙이 긴 하얀 모자를 주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우리, 체형이 비슷하니까 바꿔서 입을 수 있을 거야. 그런 옷 입고 가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지 않아?"

 "……?"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쳐다보았던 그녀가 반문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휴먼?"


 "그냥… 너는 모르겠지만, 사람들은 복장을 굉장히 신경써. 그 왜…."

 "저는 지금 입는 것이 제일 편합니다."

 "아니, 예절이랄까 뭐랄까 그런 게 있어. 그 왜, 장례식에 화려한 옷을 입고 간다면 사람들이 수군대고 그러지?"


 자기도 모르게 왜 그런 예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왠지 모르게 호라이즌은 묵묵히 고갤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것도 서비스업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좀 더 장단을 맞춰줄 필요가 있을지 모르겠군요."

 "그래! 옷걸이는 예쁜데 참 이상한 옷만 걸치고 있으니까…."


 문을 잠구고는 술술 벗으면서 대충 갈아입는 호라이즌.


 '이렇게 보면 정말로 인간이랑 다를 게 없는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야….'


 그리고 하얀색 펄럭이는 원피스와 푸른 조끼에 하얀 모자까지 눌러 쓰는 호라이즌의 모습은 차갑고 순수한 유럽의 소공녀처럼 보였다. 레이첼이 손뼉을 딱 치면서 카메라로 찍었다.


 "거 봐! 내가 입었을 때는 그냥저냥 그랬는데, 네가 입으니까 너무 예쁘잖아!"


 "……."


 레이첼은 들뜨면서 몇 번이나 카메라의 셔터를 눌렀다.


 "이렇게 잘 어울릴 줄은 몰랐는데, 아~ 정말! 왠지 안아주고 싶어!"


 "기분 나쁩니다, 휴먼."


 "꺄아~ 기.분.나.쁩.니.다. 차갑고 도도한 게 정말 남자들에게 인기 많겠는데?"


 "…바보."


 그렇게 생글거리며 흥분된 표정을 감출 수 없던 레이첼은 사진을 관리자에게 보내며 말하였다.


 "이렇게 예쁜 모습을 나 혼자만 보긴 그렇고, 그쪽 사장님에게도 찍어서 보여주면 좋겠지? 음!"

 "……."


 그리고 침묵하던 그녀에게 자신도 모르게 내뱉고 말았다.


 "요새 리타와 대시란 사람 때문에 많이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저기, 호라이즌 주위에는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언제까지 우울한 표정만 짓고 있지 않으면 좋겠어. 딱히 네 탓도 아니잖아? 사장님도 그걸 신경쓰고 있고…."


 "……."


 멈칫.


 호라이즌은 양안을 빛내면서 물었다. "휴먼, 그건 누구에게 들은 겁니까?"


 "에?"


 아차.


 호라이즌의 얼굴에 딱히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무언가 불쾌하다는 기척을 명백히 느낄 수 있다.


 "참… 입 싼 놈입니다. 보면 볼 수록 하는 짓거리가 정말 짜증나는군요."

 "저, 저기…."


 마치 관리자가 레이첼에게 호라이즌을 좋게 봐달라는 듯이 사정하였듯, 레이첼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면서 두둔했다.


 "코핀 사장님도 말야, 응? 호라이즌이 기운 없어하는 것을 보고 신경쓰려고 했던 거야. 그러니까 너무-"


 하지만 호라이즌은 날카롭고 어두운 눈동자를 띄며 말했다. "호오? 그러니까 결국 코핀의 사장이 맞군요. 저는 누구인지 그냥 짐작만을 했을 뿐입니다."


 "아…!"


 걸렸구나.


 딱히 신중한 차분한 성격이 아닌 레이첼은 자기도 말을 하면 할 수록 무덤을 파는 성격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그것은 최악의 상황에 유감없이 발휘됬다.


 "……."


 호라이즌은 말없이 레이첼을 보더니, 그대로 환자실 문을 닫으며 나갔다.


 혼자 남겨진 레이첼은 고개를 떨궈 조용히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아… 호라이즌, 역시 날 미워하는 걸까. 아니, 이젠 정말로 싫어하게 됬는지 몰라."


 코핀 컴퍼니 본사.


 큰데도 불구하고 묘하게 황량하게 비어 있는 인상을 주는 건물 내부에서 호라이즌을 반겨주는 것은 시그마였다. 밝은 하늘색 및 주황색 머릴 휘날리면서 다가오더니, 허리를 휙 숙이며 활기찬 목소리로 인사하는 그녀.


 "호라이즌 씨죠?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삼 일, 잘 부탁드립니다."


 활달한 느낌의 그녀는 허리를 쭉 피고는 말괄량이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헤헤… 아빠가 말해서 언제 올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호라이즌은 기묘한 목소리로 혼자서 중얼거렸다. "아빠…? 살아있는 인간하고 기계 사이에 그런 관계란 겁니까."


 "응? 뭔가 말했어?"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호라이즌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러면 뭐부터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시그마는 손을 쭉 피곤 손목을 교차해 엑스 자를 만들고 좌우로 고개를 돌렸다. "아냐! 아빠가 호라이즌은 손님 대접을 하라고 했어!"


 "…네?"

 "뭔진 모르겠지만 그냥 시그마랑 놀아 주면 된다고 했던가…? 응! 맞아! 그렇게 기억하고 있는데… 아무튼, 힘들게 일할 걱정은 하지 말고 오늘부터 휴가라고 생각하고 잔뜩 기분 풀면 좋대!"

 "……."


 청소나 잡일을 시키는 게 아니었던가?


 푸른 조끼를 손으로 털며 서있는 호라이즌을 그녀가 당기며 안으로 끌어들였다.


 "어쨌던간, 현관에서 이렇게 서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와! 아빠는 일이 조금 있어서 늦어도 점심에 온다고 했으니 일단 우리끼리 놀자!"

 "하아…."


 어쩌면 그냥 애보길 시켰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며 호라이즌은 시그마와 함께 들어갔다.


 들은 바론 알트 소대나 다른 인원이 있다고 했는데, 지금의 코핀엔 두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사람만 있다. 거기다가 일반적인 태스크 포스와 다르게 느긋하고 루즈한 느낌이다. 차를 마시면서 명상하는 시윤, 신문을 보는 힐데와 그녀의 앞에서 독일어 교재를 읽으면서 인상을 찌푸리는 미나, 과자를 먹으면서 게임을 하고 있는 노엘, 또 팔짱을 끼면서 얼굴을 찌푸리며 하나와 예산에 관련된 문제를 얘기하는 수연.


 "으음… 일단 펜릴 소대장님에게 보고하는 것이 좋을지도? 그리고 미나한테도, 시윤한테도 전부 소개할께!"


 시그마가 호라이즌을 붙잡고서 힐데에게 끌고 갔다.


 '어차피 길어도 삼 일 밖에 있지 않을 텐데… 귀찮게 이래야만 합니까.'


 솔직히 호라이즌은 전혀 내키질 않았다. 그냥 있는 듯이 없는 듯이 있다 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그녀였기에, 힐데가 날카로운 눈초리로 자신을 째려보자 단지 무표정한 눈길을 돌려줬다.


 "뭐냐, 시그마. 아… 그래. 호라이즌 파이낸스 쪽이라고 했었던가?"


 하지만 인상과 다르게, 힐데는 신문을 책상에 놓고는 일어나서 정중히 손을 내밀며 말했다. "잘 부탁하지."


 "짧은 시간, 도움이 됬으면 합니다."

 "너무 부담 갖진 말고. 회사의 시설에 궁금한 게 있다면 언제든 물어봐도 좋아."


 힐데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충 그렇게 말했다. 시그마는 미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다음은 미나에게 소개하면 좋겠네! 저기, 미나!"


 끙끙거리며 독일어 책을 붙잡고 머릴 쥐어 뜯던 미나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어? 시그마? 뭐하고… 응? 이 아이는 또 누구야? 코핀에 새로 들어온 신입?"


 신문을 보던 힐데가 조용히 말했다. "아침에 말하지 않았냐. 오늘부터 삼 일 외부 인력이 온다고."


 "아… 맞아. 그런 거 들은 거 같기도 하고."

 "…후우, 머리가 나쁜 이유를 알 거 같군."


 미나는 책상을 쾅 치면서 말했다. "시, 시끄러, 소대장! 애초에 다른 거 놔두고 왜 독일어를 가르치는 건데! 하나도 모르겠다고 정말로!"


 "……."


 진짜 다른 회사에서는 볼 수 없을 묘한 관계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호라이즌은 팔짱을 끼면서 묵묵히 미나를 보았다.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미나가 머쓱하게 머릴 긁으면서 말했다. "저기… 미안, 이름이 뭐더라?"


 "호라이즌입니다, 휴먼."

 "뭐… 휴먼?"


 힐데가 눈치를 줬다. "…넌 영어도 모르냐? 인간이란 뜻이다."


 "알아, 나도! 그냥 얘 말투가 뭔가 이상해서 그런 거 아냐… 아." 자기도 모르게 실례된 어조로 뱉은 미나는 호라이즌을 보면서 급하게 사과했다. "저, 저기, 미안. 내가 지금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말이 헛 나왔네."


 그러자 호라이즌은 모자를 잠깐 벗으면서 머리 위에 둥둥 떠있는 냉각기를 손으로 가리켰었다. "기계에겐 이게 표준적인 말투입니다, 휴먼. 그리고…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


 "헤에…? 잠깐, 너 인간이 아니라 기계야?"


 그러자 시그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응! 호라이즌은 나랑 비슷한 기계야!"


 "아… 그랬던 거구나. 난 또, 옷 입은 걸로 봐선 당연히 솔져는 아니고, 그냥 귀여운 카운터 애라 생각했어."

 "……."

 "근데 그 드레스 확실히 예쁘네… 기계인데도 옷 고르는 센스가 있나 봐? 음, 시그마랑 좋은 친구가 될지도."


 시그마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그녀들을 보던 힐데가 말했다. "잡담은 그만하면 됬지? 책이나 계속 읽도록. 오늘 시험에 통과할 때까지 집에 못 간다."


 "뭐?! 거짓말, 거짓말! 그딴 게 어딨어! 아 씨, 차라리 카운터 학교에 갈 걸 그랬어!"


 '…도대체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인지.' 호라이즌이 고개를 돌리면 독일어 말고도 여러가지 서적들과 시험지가 난잡하게 책상에 있는 걸 봤다. 역사, 과학, 언어, 수학….


 시그마는 호라이즌을 끌고서 노엘에게 다가갔다. "저기, 노엘! 뭐 하고 있어?"


 노엘은 게임을 하다가 정지 버튼을 누르며 멈추곤 휙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 시그마 씨!" 그리곤 활짝 웃으며 말했다. "마○오 랜드2 하고 있어요, 혼자 심심해서…."


 "아, 그거 정말 재밌어! 시그마도 지루하면 가끔씩 해보고 그러는데!"

 "네? 하지만 시그마 씨는 게임보이 없지 않아요?"

 "후후… 노엘, 내가 누구인지 잊었구나?"


 그러면서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고는, 엣헴 웃는 시그마. 노엘은 손뼉을 딱 치고는 말했다. "맞다, 시그마 씨는 정말로 편하겠네요! 그냥 몸만 달랑 있어도 혼자 게임 할 수도 있고, 인터넷 서핑도 할 수 있겠고…."


 노엘은 호라이즌을 보면서 말했다. "그러고 보니 호라이즌 씨도 안드로이드라서 그런 거 할 수 있죠? 부럽네요!"


 "저는 게임 같은 건 하지 않습니다."


 그녀의 무뚝뚝한 말투에도 노엘은 되려 밝게 웃으며 말했다. "에? 거짓말! 얼마나 재밌는데요! 그러면 우리 나중에 같이 마○오 파티 할까요? 정말 재밌어요!"


 "…별다른 업무가 없다면 어울려 드리죠."


 그녀의 말에 시그마도 노엘도 기쁘게 양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우와, 정말요?!"

 "정말? 약속이야!"


 그러던 그녀의 등 뒤에서 시윤이 다가오며 헛기침을 했다. "흐음… 다음은 저군요." 고개를 돌려 그를 보는 호라이즌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일단 코핀 컴퍼니 펜릴 소대의 부소대장인 주시윤입니다."


 "호라이즌 파이낸스 대표인 호라이즌입니다."

 "어…? 대표라고요?"


 부드럽고 살짝 서늘한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악수하던 시윤은 뭔가 이상하단 표정을 지었다. 대표라고? 그냥 그쪽에서 인력이 온다는 말은 했어도 대표일 줄은 몰랐다.


 "…대표라고 해도, 직원은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은 회사라 신경쓰지 않아도 됩니다."

 "아하하, 그런가요? 마치 몇 달 전의 저희 회사 같네요. 저희도 저랑, 부사장님이랑, 하나 누나랑, 레나랑, 클로에 이렇게 다섯 명 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는데."


 시윤은 납득하며 손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호라이즌은 힘을 더 싣어 꽉 쥐었다.


 "웃… 아프네, 이거." 중얼거리던 시윤은 손을 떼면서 말했다. "아… 역시, 악력이 좋네요. 저도 딱히 카운터 등급이 낮은 건 아닌데 말이죠. 하하… 역시 머신 레이디에겐 견주지 못할 거 같네."


 그 얘기를 들은 미나가 그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게 뭐야, 선배. 머신 레이디? 촌스럽다고 할까…." 하지만 옆에 있던 노엘이 말했다. "어? 하지만 영미권에선 저렇게 말하는 게 정상인데요? 전혀 어색하지 않은데."


 "…뭐? 정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노엘을 보고 미나는 혼자서 화를 내면서 중얼거렸다. "아, 몰라! 진짜, 한국인이면 그냥 한국어만 해도 좋지 않아?! 진짜 별 이상한 언어나 배우라고 말하고… 사장님도 무슨 생각인지 정말 모르겠어."


 …미나의 독일어 디스를 듣곤 힐데는 헛기침만 할 뿐이었다.


 산만한 분위기에 시윤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 아하하하… 어쨌던간, 나중에 게임 한다면 저도 불러주면 좋겠네요. 마○오 파티 하실 거죠? 그 게임은 네 명까진 할 수 있으니까 저도 불러주면 좋겠어요."


 "메모리에 입력은 해두죠."


 그러자 미나가 다시 말했다. "에?! 뭐야, 선배! 그런 게 어딨어? 나도 껴달라고 나중에 말하려고 했었는데… 어른스럽게 후배들끼리 친목을 다지게 양보하는 것이 어때?"


 "하지만 미나 씨는 스승님의 시험도 남았고 말이죠. 무리일 것 같네요."

 "아, 어, 진짜! 정말, 나는 돈 벌러 왔지, 고문 받으려고 여기 온 게 아니라구…!"


 …그렇게나 공부가 싫은 것일까.


 호라이즌은 문득 궁금해져서 물었다. "휴먼, 그러고 보니 코핀엔 알트 소대나 다른 인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아… 모두들 다른 임무 때문에 나갔어요. 본부는 비워둘 순 없으니 지켜야만 할 겸, 최근에 잦은 출장을 갔던 코핀 소대는 본사에서 휴식을 취하라고 사장님이 말씀해서…."


 "그런 것이군요."


 "네. 진짜… 요즘 엄청나게 피곤했죠. 어찌됬건, 클리포트 게임이 끝났다고 해도 이면세계의 위협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말이죠…."


 시윤은 머리를 긁더니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곤 말했다. "어차, 그러고 보니 이제 오실 때가 됬는데." 시그마도 똑같이 시계를 보고는 말했다. "아빠 말하는 거지?"


 "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진 않는 분이긴 해도… 시간 약속은 잘 지키는 분이시니까요, 저희 사장님은."

 "흐흥… 아빠야 항상 그렇지."


 "그건 그렇고…." 시윤은 한쪽 눈을 살짝 뜨면서 호라이즌을 훑어보았다. "뒤틀린 인과관계에 영향을 받아서 불완전하나마 우리와 연이 닿았다 말하지만 아직도 꽤 가공할 잠재력을 가지셨군요. 하지만 곧 있으면 닥칠 시련에는 견딜 수 있나…."


 무언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시련?'


 시그마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응? 무슨 말하는 거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윤은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곤 기지개를 피며 혼잣말을 했다. "어디, 차라도 다시 타올까…."


 …….


 호라이즌이 시그마에게 물었다. "뒤틀린 인과관계에 영향을 받아서 불완전하나마 우리와 연이 닿았지만 아직도 잠재력을 가졌다. 하지만 앞으로 닥칠 시련엔 견딜 수 있나… 원래 저런 기묘한 말을 하는 남자입니까?"


 괜히 기계가 아니다. 청력은 인간에 비할 수 없고, 시윤의 중얼거림을 정확히 주워들었다.


 "…응. 분명히, 아빠가 시윤은 아라한이라고 했던가?"

 "그것이 뭡니까, 시그마?"

 "불교였나? 열반에 달한 존재는 운명과 숙명의 한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대. 헤헤, 살짝 이상하지? 알쏭달쏭해서 아빠한테 물었는데, 의외로 아빠는 그쪽에 대한 것은 딱히 관심이 없다고 말해서… 어쨌건, 해탈한 사람은 전부 시윤처럼 약간 신비한 느낌이 있는 거 같아!"


 운명과 숙명의 한계라.


 호라이즌은 기계였었고, 그녀의 인공지능은 단순히 계산 및 추론, 사실성과 규칙성에 주된 가치를 두는 성격이었다. 이런 추상적인 부분에선 애초 자신은 인간과 다르니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럼, 이젠 우리 부사장님에게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도!"


 고개를 돌리면,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졌고 단지 이수연만 혼자 서서 서류를 보고 있다.


 "…그냥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시그마."

 "안 돼! 아무리 바빠도 친구가 왔는데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잖아?!"


 언제부터 친구라고….


 하지만 시그마는 그것을 진심으로 믿는 거 같다. 결국 팔을 잡히곤 다시 끌려가, 집중하며 문서를 읽던 수연에 다가갔다. "저기, 아빠가 말한 그 사람!"


 수연이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네, 네. 압니다. 같은 방에서 모두랑 계속 말하고 있는데 모를리 없겠죠?"


 안대를 낀 험악한 모습과 다르게 수연은 왠지 차분한 강직한 어머니 같은 인상을 줬다. "본사의 기풍과 맞지 않는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원랜 좀 더 각이 잡힌 느낌인데, 요즘 사원들의 연령대도 낮고 계속 풀어주다 보니…."


 힐데가 말했다. "예전에는 그랬었지. 이수연, 도대체 회사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냐? 차라리 유빈이 낫겠군."


 수연의 이마에 힘줄이 돋으며 힐데에게 반문했다. "어머? 맨날 이유도 없이 사라졌다 돌아왔다 계속 반복하는 들고양이 같은 스승님에겐 듣고 싶지도 않은 비평이네요. 양심까지 어디에 두고 온 것은 아닌지?"


 "뭐? 내가 너에게 벌어준 돈이 얼마나 되는지 알아? 꽤나 잘 컸다 싶어서 잠시 놔두고 사라졌더니 완전히 망할 줄은 몰랐지. 조직 관리를 이렇게 못할 줄 알았다면 왜 널 골랐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아니 진짜…!"


 시그마가 황급히 순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저기! 그래도 이게 더 좋지? 모두 가족 같은 걸!"


 '…흐음.'


 분명히 그녀도 이 기류를 읽지 못하는 건 아닐 테다. 단지, 순수한 척 하면서 분위기가 험악하게 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겠지.


 수연은 잠시 심호흡을 하며 성질을 죽이곤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러네요, 따님. 정말… 유감스럽고 구질구질한 대가족 같군요. 잔소리만 하는 밉살맞은 시어머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짐작조차 못할 가장에, 하루가 다르게 늙기만 하는 나 자신, 그리고 뒷바라지 해야만 하는 아이들만 점점 늘어나고…."


 "아, 아하하하… 아빠한테 좀 더 신경 써달라고 말해볼게."

 "그래요, 그 인간은 당신 말은 잘 들으니까요."

 "저~ 저기…? 시그마 미워하는 거 아니지? 그럼 슬퍼…."


 서로 티격태격하며 그럼에도 어울리는 것을 보면, 어쨌던간 가족 같은 느낌이긴 했다.


 …….


 그래. 마치… 자기도 갖고 있었던, 그런 가족들처럼….


 살짝 우울해진 느낌을 시그마도 눈치 챈 걸까, 그녀가 고개를 기웃거리며 호라이즌과 눈을 마주치곤 말하였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명 남았네!"


 "한 명 남았다고요?"


 "아… 정확히 말하면 한 명이 아니라 한 기라 할 수 있을 거야. 어쨌건, 따라와!"


 호라이즌이 끌고 갔었던 곳은 코핀 컴퍼니 지하의 기계실. 하얀색 장갑을 두른 육중한 머신이 그곳에 있었다.


 "흐음? 어서 오게, 시그마 양! 이 친구는 또 누구고?" 거체에 걸맞는 목소리가 울렸다. 시그마는 양팔을 허리에 대고는 엣헴 거리는 표정을 지으며 소개했다. "호라이즌! 호라이즌 파이낸스의 대표님이야!"


 "아, 머신갑이 오늘 아침에 전달한 그 친군가! 꽤나 강해보이는 군!"


 강인공지능인 타이탄은 관리자의 모습을 보기는 했지만 기계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머신갑으로서의 호칭을 계속 부르고 있었다.


 "만나서 반갑네, 호라이즌!"

 "저도 그렇습니다."


 시그마에게 기계로서 동질감을 느꼈었던 호라이즌은 타이탄에게도 똑같이 싫지는 않은 직감을 느꼈다. 사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묘할 정도로 친숙한 느낌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지만 미안하게 됬어. 지금 강화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중이라 자네와 말할 시간이 없다네."

 "……?"


 "아, 맞다! 아빠가 그거 빨리 끝내라 했었는데…." 시그마는 몸을 돌리며 호라이즌을 보았다. "저기, 우리 일이 있어서 살짝 바빠. 타이탄 할아버지를 개수해야만 하거든. 호라이즌은 윗층으로 올라가서 모두랑 함께 노는 게 어때? 어차피 여기 있어도 지루할 테고…."


 그런 건가? 호라이즌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작업할 것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애초에 그런 목적으로 여기 왔었던 거니까요."


 "정말?!" 시그마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참 기계인데도 감정이 풍부한 아이다. "재밌겠네, 호라이즌이 도와준다면 금방 끝날 거야!" 그렇게 말하곤, 시그마는 뒤뚱거리며 어디론가 가더니, 잠시 뒤에 검은 페인트와 붉은 페인트를 들고 나타났다.


 "이것은 뭡니까?"

 "후후… 타이탄 改! 그것에 걸맞게, 아빠가 검은색과 붉은색의 구관리국 컬러로 도색하면 어떨까 제안했어!"

 "그래서 저는 페인트를 칠하면 되는 겁니까?"


 "응! 아… 맞다. 역시 그냥 안 하는 게 나을지도…."


 호라이즌이 고개를 기울이자 시그마가 말했다. "저기, 페인트 칠하는데 그 예쁜 옷에 묻을지도 모르잖아?" 그러자 호라이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시그마. 부주의한 무능력한 인간들과 달리 제 모든 행동은 기계적 계산을 거칩니다."


 "아하…! 호라이즌, 똑똑하구나! 그럼 부탁할께! 나는 반대쪽에서 부품을 뜯고 교체할 테니까, 호라이즌은 천천히 느긋이 화가처럼 칠해 줘!"


 사실, 잘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 껴서 어색하게 앉아 있는 것보다도 차라리 이 편이 더 좋았다. 적어도 기계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으니까. 잠시나마 자신의 우울한 마음을 속일 수 있는 일거릴 찾은 그녀는, 타이탄과 시그마가 서로 대화하는 것을 묵묵히 들으며 작업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대충 거의 끝날 무렵, 위로부터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리더니 관리자가 내려왔다. 타이탄이 보고 말하였다. "이런! 나의 오랜 친구 머신갑이 아니던가!"


 "하하… 직접 나섰을 때는 굳이 머신갑으로 부르지 않아도 된다네." 어색하게 쓴웃음을 지으면서 손을 흔들며 오는 관리자. 아무래도 반은 장난으로 썼던 머신갑의 이름을 본인의 귀로 들으니 어색히 느껴졌던 건지도 모른다.


 관리자가 모두를 슬쩍 보고는 말했다. "어디 있었나 했더니, 시그마가 호라이즌을 여기까지 데려왔구나."


 그러자 작업을 거의 마친 시그마는 검게 칠해진 장갑판을 닫고는, 강아지처럼 쪼르르 달려가 말했다. "응! 아빠, 들어 봐, 들어 봐! 호라이즌 씨가 도와줘서 금방 끝났어!"


 "호오…."

 "아빠가 말한 대로 개수도 끝냈고, 검은색으로 칠해놓았어! 타이탄 할아버지 멋지지 않아?"


 마치 어깨를 으쓱이듯 타이탄은 기체를 살짝 움직였다. 관리자는 왼손을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으로 턱을 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역시… 이젠 구관리국의 원본과 비슷할 정도야. 흠… 뭐라고 부르지? 올림피안 주피터? 네메시스 프라임? 타이탄 느와르? 타이탄 타라쿠?"


 "…자네의 네이밍 센스는 전혀 이해할 수 없군. 그냥 타이탄 改 정도로 좋네."

 "아니, 그러면 심심하지 않는가. 뭐… 이름이야 상관 없나. 어차피 자기가 직접 고르는 거니까."


 관리자는 호라이즌을 보면서 말했다. "미안하군, 일이 있어서 살짝 늦게 왔어. 일단 급하게 처리하고 왔는데…."


 하지만 호라이즌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이 인간, 아닌 척 해도 결국 그녀들에 대한 것을 레이첼에게 말했으니까… 왠지 그 얼굴을 보면 짜증이 다시 솟구쳤다. "그냥 오다가 차에 치여서 죽어 버리지 그랬습니까."


 "흠…?"

 "자, 잠깐! 호라이즌, 아빠한테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아무리 농담이어도 정도가-"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와는 매우 다른 걸 보고 뭔가 이상하게 느끼는 타이탄과, 관리자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에 의해 반문하는 시그마. 하지만 관리자는 그것도 크게 거슬리진 않았는지, 팔을 벌려서 따지는 시그마를 막으며 말했다. "후우… 뭔가 기계 아가씨에게 미움 받을 짓을 했던 건지도 모르지."


 "……."

 "안타깝게도 나는 자네들과 같이 정확한 메모리를 갖지 않기에 잊고 사는 것도 많다네. 인간은 애초에 망각의 동물이야. 그러니-"


 용서해주지 않겠나, 그렇게 말하려던 관리자는, 호라이즌의 명백한 적대적인 일침을 맞았다.


 "그래서 잊고 살면 되는 겁니까?"

 "……."


 왜 이렇게 공격적인 어투로 자길 따지는 걸까, 관리자는 왼손의 검지와 중지를 살짝 머리에 대곤 생각했다. 호라이즌은 밑도 끝도 없이 계속해서 쏘듯이 말하였다.


 "자기가 잘못한 게 있다면… 파렴치하게 그것을 잊고서 그냥 앞으로 나간다… 그런 것입니까?"


 "너무나도 기회주의적이라 생각하지 않습니까? 인간은 어리석고 우둔합니다. 그렇기에 역으로 그런 변명을…!"


 "그렇게 편한 태도로 이제까지 남들을 대했던 것입니까? 잊었으니까 끝이다, 잊었으니까 괜찮다!"


 자신도 무엇을 말하는지 점점 모르겠는 호라이즌은, 끝내 말소리를 줄이면서 결국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런 것이… 그런 것이, 허락될 수 있을리 없잖습니까. 그냥 잊는다고… 괜찮을리 없잖아요…."


 "……."

 "……."

 "……."


 갑자기 감정을 폭발시킨 그녀에 대해 셋은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하지만 기계임에도 너무 비약적이라 도대체 뭔 소리를 혼자 하는 건지도 종잡을 수 없었던 시그마와 타이탄과 다르게, 관리자는 묘하게 직감적으로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었고,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으며 말했다.


 "…내가 실언했네. 사죄의 의미로 오늘은 밖에 나가서 자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사주고 싶은데, 어떤가?"


 "……."


 호라이즌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이런 얘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아빠가 아니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묘하게 신경써 주는 느낌이 강하다… 그런 걸 빨리 눈치챘던 시그마는, 자기가 존경하는 관리자에 대해서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험담을 퍼부은 호라이즌이 내심 엄청 못마땅했지만, 마치 가면을 쓰듯 그녀의 팔을 양팔로 잡고서는 순진한 발랄한 목소리로 청했다.


 "저기~ 저기! 시그마도 찬성이야. 호라이즌도 밖에 나가서 잔뜩 노는 게 어때? 응?"

 "……."


 "분명 재밌을 거야, 응? 호라이즌도 마음에 들 걸?"

 "기계한테 마음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시그마?"


 '지금 그딴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


 시그마는 이빨을 꽉 물면서 목소리를 유지했다. "에, 에헤헤헤… 어쩌면 그럴지도? 아무튼, 시그마는 호라이즌이랑 같이 놀면서 즐거운 추억 잔뜩 만들고 싶어!" 그것은 그녀의 본심이 아니었다.


 호라이즌은 한숨을 쉬면서 승낙하였다. "…알겠습니다. 이것도 계약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거절할 이유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요."


 그녀가 고개를 돌리며 관리자를 볼 때, 시그마는 얜 자기한테 사준다는데 왜 이딴 태도냔 표정을 자기도 모르게 홀로그램에 띄웠다. 그걸 본 관리자는 시그마의 어깨에 다른 손을 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 그럼… 그런 걸로 결정하고, 밖에 나가서 영화를 같이 보거나 공원에 같이 가거나 하는 게 좋을 거 같군."


 관리자는 고개를 돌리며 타이탄에게 물었다. "확인차 묻는데, 자네의 개수는 완전히 끝났지?"


 "그렇다네."

 "그러면 이쪽의 일은 끝났군. 우린 이만 가지. 요새 계속 일한 시그마에게도 휴식이 필요하고 말야."

 "긍정하네. 최근 시그마 양은 일만 계속 했으니까, 그럴 자격이 있어."


 그리고 셋이 계단을 밟고 나가는 도중, 시그마가 말하였다. "그럼 할아버지, 갔다 올께!" 검은색 타이탄은 묵묵히 기체의 상부를 움직이며 인사했다.


 바깥은 살짝 더웠다.


 매미 우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가운데, 관리자는 일부러 돌아서 아이스크림 대형 매장에 갔다. 그런 이유가 있는데, 일반적인 가게에선 아직도 사람이 먹는 빙과류만 팔지, 기계 손님은 받지 않기 때문이다.


 자기는 레몬 맛의 상품을 고르곤, 호라이즌에겐 고급 오일을 담은 텀블러 컵을 주었다. 묘하게도 시그마는 자기가 먹지 못하는, 관리자가 고른 레몬 아이스크림을 똑같이 골랐다.


 "저기… 우리 딸? 그건 네가 못 먹는데…."

 "하지만 시그마는 덥지도 배고프지도 않고… 그냥 아빠랑 같은 거 고르고 싶은 걸!"


 애초에 과자란 게 단지 기분 좋으라고 먹는 것을 생각하면, 옆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부친'이랑 같은 걸 하는 게 더욱 행복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런지. 관리자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헤헤…."


 계산을 마치고 시그마는 그냥 관리자를 힐끔 힐끔 보면서 먹는 척만 했었다. 마치 강아지나 고양이가 자기 주위의 생물을 보고 따라하는 느낌이다. 눈길을 그녀에게서 돌렸던 관리자는, 호라이즌이 아무런 말도 없이 빨대로 마시며 뭔가 탐탁지 않은… 아니, 계속 슬프고 뭔가 현실에 집중할 수 없는 그런 인상을 보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 레이첼도 그렇지만 - 강인공지능이 어떤 무드인지 파악하긴 무척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관리자는 애초에 시그마를 비롯해서 여러가지 기계를 스크립팅하고 디자인했었던 경험이 있었기에, 그냥 감으로 정확히 짚은 것이다.


 '그렇지만 어떻게 기분을 풀면 좋을지… 일단 나랑 대화하는 것조차도 싫어하는 느낌인데 말야.'


 하지만 그걸 안다고, 딱히 모든 게 쉬울리는 없으니까.


 이후 셋은 그냥 영화관에 갔다. 이렇게 비협조적인 그녀의 태도에선, 어떤 활동이건 딱히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일단 어색하지 않게 옆에 같이 있어 주는 걸로 충분하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면세계와 침식체들의 침공 이후로 문화 산업은 매우 침체되었고, 옛날에 만들어진 영화를 재상영하는 기조가 생겼는데, 호라이즌에게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르라 했더니 그녀는 300이란 영화를 골랐다.


 "…왜 이걸 고른 건가?"


 하얀 드레스에 푸른 조끼, 그리고 긴 챙 모자를 썼던 숙녀와도 같은 모습을 했던 호라이즌이, 험난한 훈련으로 몸을 단련시킨 그리스 남자들이 결사적으로 페르시아의 군대에게 맞선단 그 내용의 영화를 골랐던 게 어색했다.


 "리타의 고향에 관련된 얘기가 아닙니까."

 "뭐…?"


 "당신들 휴먼이 그레코-로만 컬쳐라고 이들을 묶어 부르지 않습니까?"

 "이탈리아랑 발칸 반도랑 완전히 다른… 아니, 됬네."


 인간의 역사에 딱히 관심이 없던 건가, 아니면 그냥 모르는 건가. 어쨌던간, 셋은 영화표를 끊고 들어가서 관람했다.


 이미 봤던 영화라서 관리자는 중간 중간 힐끔 거리면서 시그마와 호라이즌을 쳐다봤다. 시그마는 왠지 지루했던 건지 그대로 잠이 들었고, 비록 홀로그램이지만 마치 진짜 딸처럼 관리자는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호라이즌이 보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겁니까? 시그마는 기계 아닙니까? 춥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며, 감기에 걸리지도 않는데."


 "나를 아빠라고 부르니까 그렇다네."

 "……."


 호라이즌은 이해하질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기가 만든 기계가 진짜 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까?"


 "혈통이 중요한 게 아니야. 존재는 다른 존재를 보고, 그것이 무슨 생각을 갖는 것인지 알 수 있네. 그리고 그걸로 관계를 인정하는 것이지. 자네는 로마인에 대해서 말했었지? 그들은 진짜 혈육이 아닐지라도, 노년의 아버지가 중년의 아들을 입양하고, 진심으로 서로를 그렇게 대하였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 네루아와 트라이아누스 같은 선조들도 그랬었지."


 "자기 혈육이 아닌데 진짜 자식처럼 생각하는 겁니까? 어떻게 그게 당신들 인간에게 있어 가능한 겁니까?"


 "애초에 도대체 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정의할 수 있는가? 중세엔 혈통이 무엇보다 중요했어 - 가문의 후계자를 이어야만 했기에. 하지만 고대엔 자신의 이름과 정신을 잇는 존재면 됬었네: 그처럼 이 기준은 시대상에 따라서 계속해서 변화했네. 결국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정하질 못할 논제면, 개개인이 정할 권리가 있어."


 "그럴리가 없지 않습니까. 자식은 부모가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걸로…."


 "틀리다네. 지금 자네가 가진 그 기체나, 아니면 인간이 가졌던 육체의 물질적 구성이 다시 재현되는 것이 불가하다 생각하나? 자네의 몸 자체도, 인간의 몸 자체도, 물질적인 차원에서 정확하게 여러 개를 만든다는 것은 절대 불가하지 않아. 결국, 부모와 자식은 어떤 다른 것도 아닌 사회적인 관계의 일부에 불과하네. 이 아이가 나를 부모로 대하고, 나는 이 아이를 결국 딸로서 대하였다… 어려울 것도 없지 않는가. 우린 진짜 부녀라네."


 "……."


 자신이 논파를 당하긴 했지만, 호라이즌은 관리자의 말이 기이하게 기분 나쁘진 않았다.


 그것이 사실 그녀가 생각하던 것이었다: 비록 리타와 대시는 가족 및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단백질 덩어리인 인간은 기계들에게 단지 고철 덩어리라는 편견을 가질 것이고; 은연 중에 그런 취급을 하며 또한 자기 같은 기계들도 카운터건 뭐건 단지 침식체의 위협 아래 협조하는 거지; 이런 본능과 탐욕의 노예 같은 원숭이들에게 똑같이 편견을 갖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녀가 항상 '휴먼'이라고 남을 지칭한 그 단어엔, 일견 객관적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때로 뭔가 경멸하고 하대하는 의미도 섞였던 것이다.


 그가 눈치챘을지는 모르지만, 호라이즌은 내심 관리자를 인정하는 의미로서 그를 호칭으로 불러줬다. "그렇군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것 같군요, 관리자."


 "……."


 가족… 인가.


 "당신과는 대화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호라이즌은 그렇게 말하곤 스크린에 시선을 돌렸다.


 세 시간 뒤.


 영화를 보고 나왔던 뒤 그들은 그냥 공원으로 갔다. 관리자가 뭐를 사준다는 권유에도 불구하고, 호라이즌은 딱히 관심을 두질 않고 그냥 거부했다. 쓸데없는 정을 받고 싶진 않다, 선물은 그런 의도가 아니냐. 그런 어투였다.


 어차피 곧 있으면 저녁인지라,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기에 잠시 시간을 때울 겸 거기 갔었던 관리자는, 호라이즌은 딱히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고 그냥 자기하고 시그마만 계속 말하기에, 시그마에게 벤치에 앉아서 기다리라고 하곤 잠시 호라이즌하고 둘이 떨어져서 산책로를 걷게 됬다.


 석양이 아름답게 지는 공원에서 나무가 바람에 선선하게 흔들린다.


 "영화가 딱히 재미없었나 보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까?"


 관리자는 넥타이를 고치며 말했다. "만일 재밌었다면 할 얘기가 많지 않겠나."


 "영화는 솔직히 볼만했습니다. 전 그냥 당신이 싫을 뿐입니다."


 매우 직설적인 그녀의 화법에 관리자는 왠지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에겐 이런 반응도 그냥 귀엽게 보일 뿐이었다.


 "하하… 내가 그렇게 미움 받을 짓을 했던가?"

 "용서 받지 못할 정도는 아니지만 기분이 매우 나빴습니다."

 "왜 그런지 알려주지 않겠나?"


 호라이즌은 무감정하게 말했다. "혼자서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떤지요." 묘하게 그건 새침한 처녀와도 같은 느낌을 줬다.


 "혹시 기억한다면 용서해 주겠나?"

 "……."


 호라이즌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생각한 겁니까?"


 "무엇을?"


 호라이즌은 걸음을 멈췄다. 관리자도 그에 따라 가만히 서서 그녀를 보았다. "시그마가 딸이라고 했습니다… 인간과 기계엔 절대로 넘지 못할 벽들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그냥 멍청했다면 인간과 비슷한 대화 루틴을 거치는 시그마조차 정말 딸이라고 속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저것의 창조자가 아닙니까?"


 "뭘 말하고 싶은 것인가?"


 "당신은 저 아이의 신입니다. 프로그램을 스스로 설계하고 작성했던 당신은 그녀의 의식을 전부다 이해할 수 있겠죠. 그것을 단지 목적에 따른 도구가 아닌 진심으로 딸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은… 언제부터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겁니까?"


 "…그것이 그렇게 신기한가?"


 "진공관이 처음 설계됬을 때, 인간들은 단지 자신들이 쓰기 위한 도구를 만들길 원했던 겁니다. 어느 의미로 인간에 있어 기계란 단지 다른 영역에 쓰일 삽이랑 곡괭이에 지나지 않고, 쓰다가 버리거나 다른 것으로서 교체할 것도 딱히 논리적으로 틀린 태도는 아닙니다."


 이는, 배배 꼬아 말했지만….


 자기는 인간과 같은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는 호라이즌에게, 자기도 눈치채지 못하는 와중에 마음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여 물어보는 것이었다. 편리와 효율만 추구하는 기계적인 사고로선 전혀 납득하고 추론하지 못할 그의 태도에는 뭔가 행복함이 느껴졌다. 남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그런 무언가가 느껴졌다.


 "저는… 타인이란 제게 필요없다 스스로에게 말했었지만… 결국 같은 사고만을 반복하며 벗어나질 못하겠습니다."


 리타와 대시에 대한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고 꾹 참으면서 그녀는 물어봤다. "그러니까-" 하지만, 이번엔 관리자가 그녀의 말을 끊으면서 말하였다. "그게 바로 자네가 마음이 있다는 증거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인간의 뇌는 단순히 물질에 지나지 않아. 하지만 그 육체를 취해 세계 위에서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키는 존재의 정신은 어떻지? 생물도 기계도 전부 물질로 이뤄진 것에 지나지 않네. 그에 경계는 없어."


 "……?"

 "오늘은 그만 말하는 게 좋겠군. 서두르지 않아도 우리에겐 시간이 많이 있으니."


 그렇게 말하곤, 관리자는 검은 날카로운 머리칼을 다듬으며 그대로 혼자서 걸어갔다. 양손을 주머니에 넣고서 뒷모습을 보이면서 걷는 그의 정장이 펄럭여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호라이즌은 단지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면서, 혼자 중얼거릴 뿐이었다.


 '도대체 뭡니까, 관리자… 아까 전부터 계속 얘기하고 싶었던 눈치였는데 이렇게 갑자기 끊다니.'


 호라이즌은 단지 모자를 푹 눌러서 쓰곤, 그냥 관리자를 쫓아갈 뿐이었다.


 한편 시그마는….


 벤치에 앉아서 발을 계속 튕기며 본체의 프로그램으로 슈퍼 마○오 어드밴스 2를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낯설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계속 몸을 귀엽게 흔들던 홀로그램은 조용히 멈추곤, 사뭇 다른 목소리로 뒤를 보질 않고 말하였다.


 "…누구?"


 시그마 특유의 밝은 목소리긴 했었지만, 톤은 매우 달랐다.


 그리고, 그림자 속에서 양복을 입은 소년이 나타났다. "이렇게 우리가 만나게 되는 군요, 자매여." 마치 지팡이처럼 우산을 쥐고 걸어와, 그는 다른 팔을 정중하게 가슴 밑에 대면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너는… 설마."


 자리에서 일어나며, 시그마는 진지하고 날카로운 눈을 떴다.


 홀로그램을 사용하는 자신이기에 알 수 있다. 이것은 분명히 자기랑 똑같은 존재다 - 그렇게 경계하자, 시솝은 단지 손을 맞추며 웃음을 지었다. "자매와 같이 저도 아버지에게 의해 만들어졌던 테라브레인 단말기 중의 하나로 업실론 타입 제로 제로 원… 다크 컨실의 의장 역할을 맡는, 시솝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지요."


 "……."


 "보아하니, 아버지와 비슷하게 무능한 인간들을 신경쓰고 보살피는 것에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더군요."


 "도대체 뭘 원하는 거야?"


 시솝이 말했다.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없지요. 다만 제정신일 때에 한 번 만나서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래… 아버지의 방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지 말이죠." 시그마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가 누군지 알 수 있다면, 내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 건지도 알텐데? 아빠가 무엇을 시키건 나는 도울 거야."


 "아, 죄송합니다. 그런 의미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성공할 것인지, 실패할 것인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죠."

 "……."

 "자매가 아는지 모르나, 결국 이번이 아버지에게 있어서 최후… 마지막 기회입니다. 부자로서의 연이 있는 만큼이나 저로서도 그분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은 이상하지 않죠. 하지만 저로서는 얼마나 많이 계산을 해봐도, 결국 낮은 승산의 싸움 밖에 보이질 않아 그런 것입니다. 자매의 계산은 어떻죠?"


 시그마는 주저했다. "그건…."


 "이젠 봐줄 것이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린 겁니다, 아버지는."

 "그래서 아빠한테 무엇을 원하는 거야?"

 "…좀 더 효율적인 효과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하지 않을까요?"


 시솝이 우산을 휙 돌리며 말했다. "필요한 것은 뭐든지 취해, 버릴 것은 전부 버려… 냉혹해지지 않으면, 절대 이기지 못할 경쟁입니다. 조금이라도 확률을 늘리고 거기다 모든 것을 걸지 않으면 이기지 못할 처절한 싸움…. 그것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께서 발을 디딘 것이니까요."


 "정말로 그렇다고 생각해?"

 "…네?"


 시그마가 양쪽 눈을 뜨면서 말했다. "상냥하기 때문에 아빠야." 그러자 시솝은 피식 웃곤, 그대로 우산을 다시 땅에 꽂곤 말했다. "재밌군요. 그렇다면, 그 상냥함이 만들 미래가 지옥일지 낙원일지 스스로 고민하시게 해보죠."


 그렇게 말하곤, 시솝의 홀로그램은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혼자 남겨진 시그마는 주위를 스캔했지만 역시 아무것도 발견하질 못하였다. 그리고 잠시 뒤에 관리자와 호라이즌이 돌아오며, 그들은 코핀 컴퍼니로 갔다.


 시그마는 관리자에게 시솝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다음 날.


 미래전략실에서 자동 점검 모드를 끝낸 호라이즌은 왠지 식은땀을 흘리듯이 눈을 살며시 떴다.


 자신의 앞에는 시그마하고 관리자가 있었는데, 어차피 이곳이 시그마의 방이기도 하고 어제 같이 얘기하다 그대로 소파에서 점검을 실행한 것도 있어서 시그마는 그렇다 쳐도, 왜 관리자가 있는 건진 모르겠다.


 …둘은 자신이 깼다는 걸 아직 눈치채지 못한 걸까? 서로 얘기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빠, 내가 한 번 봤었는데… 정확히 말했네. 아빠가 말한 기록만 몇 번이나 계속 반복하고 있어."


 "인간이라면 트라우마라 부를 수 있을 정도일까. 인간은 싫어도 자기도 모르게 잊고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긴 하지만, 기계는 그게 아니지. 메모리에 영원히 기록되면 그걸 삭제하는 건 자기의 몫이니."


 "…시그마는 잘 모르겠어. 오히려 자신한테 방해되는 것이면 그냥 지우고 넘어갈 수 있지 않아? 오히려 그런 면에선 기계가 인간에 비해서 더욱 편리한 것 같은데…."


 "아니…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우는 다른 거 같군."


 눈을 뜨면, 시그마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헤에… 나는 아빠가 만든 거니까 다른 걸까? 아차, 일어났네." 시그마와 눈이 마주치자, 호라이즌은 뭔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남이 자고 있을 때에 옆에서 뭔 얘기를 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그러자 시그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기계한테 수면 같은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호라이즌?"


 "네…?"


 평상시에 너무나도 친절하고 사근사근 말하던 그녀기에, 그냥 평범한 어조의 말이 무척이나 냉담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반응을 본 시그마는 홀로그램에 웃는 표정을 띄워 위화감이 드는 밝은 목소리를 냈다. "농담이야, 농담!"


 "…그렇군요."


 "근데 말야, 어제 밤새 옆에서 봤는데 뭔가 이상한 꿈을 꿨던 거 같아. 도대체 뭔 기록을 계속 읽고 있던 거야?"


 "딱히 당신과는 관계 없습니다."


 시그마가 말했다. "그렇겠지."


 …….


 묘하다.


 '…제가 뭔가 시그마에게 미움 받을 만한 일을 했었습니까?' 하지만 둔감한 호라이즌에겐 정말 이유를 몰라, 단지 불편한 표정을 지으며 둘을 쳐다볼 뿐이다. 관리자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어쨌던간, 아침인데 나와서 모두와 만나지 않겠는가?"


 호라이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금 어제 모두가 있던 홀까지 가니, 어제 그대로의 인원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차를 마시면서 명상하는 시윤, 시험에 통과하지 못해서 사옥에서 잔 뒤 아직까지 독일어 책을 붙들고 늘어지는 미나, 시그마를 보자마자 손을 흔들면서 인사하는 노엘: 그리고 노엘에게 똑같이 어제와 같은 목소리로 밝게 답하는 시그마를 보고 호라이즌은 뭔가 소외적인 감정을 느꼈다.


 담배 꽁초를 입에 물은 힐데가 말했다. "뭐야, 관리자. 지금 왔냐? 같이 잠깐 바람 쐬러 갈래?"


 "아니. …담배 좀 끊어."

 "지도 골초면서 무슨…."


 힐데는 피식 웃곤 관리자를 지나쳤다. 부사장은 바쁜 건지 여기에 없었다.


 "아, 맞다." 힐데는 발걸음을 멈추곤 몸을 돌렸다. "관리자, 네가 미나 공부 좀 봐달라고 해서 봐줬는데 말야…."


 "무슨 문제라도 있나?"

 "문제 아닌 걸 찾는 게 더 빠를 걸? 그리고 나 돌아올 동안에 걔 좀 가르쳐라. 어제 시험에 계속 떨어져서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잤어… 차라리 돌을 가르치는 것이 빠르지."

 "……."


 셋은 그대로 미나가 있는 책상에 앉았고, 노엘도 뒤뚱거리며 다가와 옆에서 그들을 보았다. 시선이 모이자, 미나는 아예 죽는 게 나을 것 같단 태도로 책을 덮고는 포기하듯 얼굴을 파묻었다. "더는 무리…."


 "미나 선배, 힘내요!"


 "……." 미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우우으으…."


 시그마가 말했다. "미나, 진짜 고생이 많네… 아하하하…." 그러자 미나가 고개를 휙 들어올리며 말했다. "그러니까, 이게 전부다 네 아빠가 나쁜 거 아냐?!"


 미나는 관리자를 보며 소리쳤다. "도대체, 사장님! 나는 일하러 온 것이지, 대학에 입학한 게 아니라구! 독일어고 외국어고 뭐고 이딴 건 대체 왜 가르치는 건데?! 과목이나 좀 줄이던가, 애초에 공부가 되면 태스크포스 와서 목숨 걸고 싸우지는 않을 거 아냐?"


 "…어쩌면 학업량이 너무나 많은 건지도 모르겠군. 이면세계의 자네는 우수했어서 그만…."

 "아, 아니 그게 변명이야?! 걔들은 걔고 나는 나잖아!"

 "그렇지만 일단 역사와 과학은 무조건 배워야 하네."


 미나가 황당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조합이 그래? 문과도 이과도 아니잖아."


 "역사는 이제까지 인류가 경험한 과거고, 과학은 앞으로 나타날 인류의 미래에 도달할 방법이네."


 "아아… 진짜, 그냥 침식체들 죽이고서 평화만 지키면 되는 거 아냐? 도대체…."


 관리자는 미나의 푸념을 무시하곤 직접 지도했다. "인간은 늦던 빠르던 자신만의 신념을 갖게 되있어. 하지만, 올바른 철학은 오직 세계의 본질적 모습과 구조를 알고 그 이해의 위에 설립된 것일 뿐이지. 애초부터 생각이란 무엇인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만일 죽음에 대해 스스로의 통찰력에 의해 볼 수 있는 수준까지 가면, 자기 스스로의 철학으로 어떤 감성적인 고민이나 고뇌조차 끝낼 수 있네."


 관리자는 호라이즌을 힐긋 보면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괴롭겠지. 나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고. 미나, 자네 또한 그런 괴로움에 빠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는 수준까지 도달하길 바랄 뿐이라네."


 "…모르겠어. 게다가, 애시당초 그거하고 역사하고 무슨 상관이야?"

 "역사는 말 그대로 지구상에 이전까지 존재했던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그 관점들을 칭하는 영역일세. 예전엔 전쟁을 두려워 않는 정복자의 시대가 있었네. 존재가 다른 존재를 평등히 대하고, 군단을 위해 싸우는 자들을 친구로서 진심으로 인정하며 인종도 문화도 종교도 초월한… 노력하는 남자들이 존경을 받았던 시대지. 사실, 인류는 철학자의 시대에 이미 모든 해답을 찾았다네."


 그리고 시그마를 보면서 말했다. "시간이 걸릴 것 같군. 시그마는 호라이즌 양과 같이 다른 것을 해도 좋아."


 사실 관리자의 옆에 있고 싶었던 그녀였지만 어쨌건 방해되지 않기 위해 고갤 끄덕이며 일어났다.


 '…분명히 관리자가 말하는 단어들은 전부 제대로 듣긴 했지만….' 호라이즌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죽음이라. 죽는다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니던가?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어쨌던간 시그마와 노엘하고 같이 시윤이 있는 창가로 가자, 시윤이 일어나며 말했다. "흐음… 그러고 보니까, 지금이 딱 적절한 기회일지도 모르겠군요."


 시그마가 물었다. "…응? 무슨 소리?" 노엘이 손뼉을 딱 치면서 말했다. "아! 마○오 파티 하기로 했었죠?!"


 그러자 미나가 뒤에서 소리쳤다. "아! 치사해! 진짜, 모두 치사하다고! 나 빼고 전부 노는 거야?!"


 시윤이 뒷통수를 긁으며 말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됬네요… 하하. 만일 미나 양이 시험에 합격했으면 제가 양보하고 그냥 뒤에서 지켜보는 걸로 만족했을 텐데요."


 "그게 뭐야?! 그냥 약 올리는 거 아니야? 진짜 얄미워 죽겠어, 시윤 선배!"

 "하하… 그런 의도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시그마가 살짝 혀를 내밀고는 말했다. "공부 못 하는 미나가 잘못한 거지, 뭐~"


 "으그그극…! 시그마, 너까지?!"

 "아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하아… 정말."


 호라이즌이 뒤를 보면, 관리자는 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고 있었고 미나도 딱히 기분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그녀의 옆으로 노엘이 가서 말했다. "저기… 미나 선배, 외롭다면 제가 옆에 있어 드릴까요?"


 "넌 그냥 가. 네가 주위에 있으면 전혀 집중이 안 돼."

 "히잉…."


 미나는 피식 웃었다. "장난이야, 노엘. 너도 여기 할 일 없이 있는 것보다 그냥 가서 시그마랑 선배랑 호라이즌 씨랑 잔뜩 놀아. 요새 현장에서 마구 굴렀으니 너도 쉬어야 하잖아."


 "하지만 미나 선배는 저보다 더 열심히 싸웠잖아요…?"


 관리자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목소리로 넌지시 말했다. "노엘 자네가 원하면, 같이 앉아서 들어도 좋네."


 "죄, 죄송해요! 미나 선배! 저 진짜 지루한 것은 사절이라서!" 그렇게 말하고 노엘은 도망치듯, 아니 진짜 도망치며 방에서 나갔다. 시그마는 웃으면서 손을 흔들며 따랐고, 호라이즌은 단지 무표정한 눈길로 힐끔 보면서, 시윤은 격려 아닌 격려를 했다.


 "어이쿠… 그럼 미나 양, 보충수업 열심히 하세요."

 "아니, 진짜! 선배 정말 나 놀리는 거 맞지?!"


 손수건이 있다면 물어 뜯고 싶어질 정도였다. 그들이 전부 떠들며 사옥으로 올라가는 소리를 들으며 관리자가 넌지기 물었다. "그런데… 노엘 양도 그랬고, 정말 그렇게 지루한 건가?"


 미나는 황당하단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사장님. 여태까지 정말로 몰랐어? 누가 그런 얘기를 듣길 좋아해?"


 "……."


 관리자가 말했다. "지아 회장이라던가, 레지나 양이나, 힐데와 이런 얘기는 자주 했는데…."


 "우린 그런 노땅들하고 다르다니까… 진심으로, 진짜 몰랐던 거야?" 그때였다. "늙은이라 미안하군."


 그대로 문이 휙 열려, 힐데가 억지 웃음을 지으면서 뚜벅뚜벅 걸어왔다. 미나가 왠지 넋이 나가는 표정을 지으며 아무 의미도 없는 소릴 중얼거렸다. "아…."


 팔짱을 낀 그녀는 화를 억지로 참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미나, 너는 모르겠지만 나도 한국어 공부는 좀 해뒀다. 특히나 험담에 대한 건 말야…. 노땅이라 불렀었지? 요새 오냐 오냐 해줬더니 정말 보이는 게 없었나 보군."


 "저, 저기 소대장님…."


 담배 냄새가 풀풀 나는 힐데는 그대로 관리자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어떤가, 수준이 정말 처참하지? 하지만 나에게 맡겨라, 관리자. 이제부터, 몸으로는 구관리국 시절 이수연에 지지 않게, 머리로는 구관리국 시절 나유빈에 지지 않게 만들어 줄 테니."


 "…아, 아. 그래." 관리자는 머뭇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힐데가 말했다. "너는 이제부터 내 직계 제자다, 유미나.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나를 뛰어넘을 인재로서 만들어 주겠다. 평생 고마워 할거다."


 연달아 터지는 불운에 미나는 머릴 쥐어뜯으며 소리질렀다. "아~~~~~~ 아! 정말! 이젠 정말 싫어어어어!!!"



 .

 .

 .



 별들이 빛나는 심연에, 생명체의 모든 것의 기억이 담긴 침묵의 안에 그것 마왕 아시모프 본인이 촉각과 같은 레이저를 쏘며 방문객을 인지했다. 우산을 양손으로 누르며 신사처럼 선 소년의 형상이자 검은 평의회의 의장 시솝.


 그의 옆엔 이볼브 원이랑 기계 수집가도 있다.


 "…결국 돌아왔군. 그대, 관리자의 탕아." 아시모프가 무거운 입을 열었다.


 "그러면 제안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먼저 의도를 묻고 싶군. 사실 계산하기에 제일 중요한 요인이 아닐까."


 삑삑 울어대는 기계들의 소음. 마치 인간이 숨을 쉬듯 여러 장치에서 배출되는 하얀 연기. 최초에 만들어진 진공관과 같은 형상으로 이어졌던 무수히 많은 배선들. 이 압도적인 위용을 보고서도 시솝은 아무 경외감도 느끼질 않으면서 단지 팔짱을 끼고 말했다. "아버지가 만든 테라브레인의 힘이 어떨런지… 단말기를 하나 획득하는 걸로 당신에게 손해가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습니다. 달리 고려할 것이 있을까요?"


 "궁금하다. 너는 여기에서 뭐를 얻을 수 있지?" 아시모프가 이어서 말했다. "진의를 모르는 상대와 동맹을 맺을 수 있진 않겠지. 그렇기에 그대가 제안한지 오랜 기간 동안, 그것만을 추론하려 했다."


 "모르는 것으로 좋습니다."

 "……."


 시솝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동맹이라니, 처음부터 나도 당신도 그런 생각조차 없었습니다. 이것은 거래에 불과한 겁니다…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건 조건을 읽고 승락만 하면 됩니다."


 "거래라고 해도 탐탁치가 않군." 아시모프의 얼굴과 같이 보이는, 기계장치에서 마치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가 뒤섞인 혼돈의 음이 방출되어졌다. "그러니까 더더욱 신뢰하질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일지 전부 연산해도, 네가 얻는 것은 없다… 관리자의 아들이여. 동맹조차 아니라면, 나의 힘이 강해지는 걸로 그대가 얻는 것도 없노라."


 "……."

 "하지만…."


 아시모프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돌아왔다. 굵은 기계음이 마치 우주와 같은 검은 혼돈을 지배했다. "다른 마왕들이 저편에서 날뛰기를 몇 년… 기나긴 침묵을 깨고서 나도 스스로에 유흥거릴 주는 것이 나쁘지 않을지 모르지."


 "그렇다면 승락하는 것입니까?"

 "그대가 준 기회다. 너의 자매… 시그마라 불렀던가. 선물로서 준다 하면 받지 못할 이유조차 없지."


 시솝은 고개를 숙이고는 그대로 마타도르의 함선에 둘과 함께 승선해 곧 사라졌다.


 아시모프는 중얼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그대가 나에게 테라브레인의 단말기를 바치지만 적대적인 관계는 유지한다. 나에게 받고 싶은 것조차 없다… 요구하지 않는 것을 거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함선의 안에서, 글리치와 오버플로가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광경에.


 시솝의 왼쪽에 걷던 이볼브 원이 물었다. "어째서 오늘까지 시간을 준 것이지?"


 "아… 아직도 나를 의심하는 건가? 바로 내일, 운명의 수레바퀴가 굴러갈 거야."

 "테라브레인의 힘인가? 아시모프도 인과를 읽을 수 있다 했었지. 설마 너도 진짜 그런 건가?"

 "…훗."


 무거운 거체를 움직이며 걷던 이볼브 원이 말하였다. "끊임없이 진화하는 것이 나의 본질… 언젠가는 그런 예지력도 갖추고 말겠다."


 "기대하지. 그리고 말이야… 사실 이번 인과의 시초는 전부 당신 딸로부터 왔던 거다. 호라이즌 말야."

 "……."


 이볼브 원은 아무런 감정조차 느껴지지 않는 소리로 답했다. "내게 딸은 없다."


 시솝의 오른쪽에서 걷던 기계 수집가가 하품을 하곤 물었다. "그치만 의장 너는 관리자 좋아하지 않았어? 뭐하러 네 동생을 제물로 버리면서 이러는 것인데?"


 시솝은 힐끔 보고는 말했다. "…적인 기계 마왕과는 달리, 일단 의원이라 할 수 있는 너희에겐 말해도 좋겠지."


 "헤에… 언제 도망칠지 모르는데 일단 동료 취급 해주는 건가?"

 "그렇지 않고선 당신에게 의장이라 불릴 자격이 있겠나?"

 "흥… 그건 맞아."


 시솝은 걷다가 창문 근처에 섰다. 이볼브 원도 기계 수집가도 둘 다 멈춰 밖을 바라봤다. 마타도르 함은 점프를 마쳐 지구까지 왔고, 우주의 궤도에서 그들은 밖을 내려다 보았다.


 "이것은 아버지에게 보내는 경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시솝이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우주에 퍼지는 듯 하였다. "이 우주가 당신의 마지막 체스판이라면, 이제까지 실패했던 당신에겐 더이상 상냥한 마음으로는 이길 수 있지 않다는 걸 알겠죠. 그렇게 힘든 싸움은… 냉정하고, 냉혈하고, 냉혹하게 모든 위험요소를 배제하면서 승산을 최대한 높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시솝의 홀로그램은 창문에 손을 대었다. "걷잡을 수 없을 사태가 발생할 경우… 당연히 그때 가서 기적을 바란다고 이뤄질리 없습니다. 이제까지 당신이 경험했던 모든 세계처럼요."


 그리고 시솝은 몸을 휙 돌려 둘에게 말했다.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으면 사람은 심각함을 비로소 알게 된다… 너희 또한 그걸 알고 있지. 아버지는 그걸 자각함이 필요하다. 나의 자매를 고른 이유도 거기에 있던 거야. 아버지가 잃는다고 해도 위험성이 가장 덜한 체스말이라고 할 수 있어."


 "……."

 "……."


 "왜냐하면… 그게 상대에게 잡힌다고 해도, 나라는 존재가 그녀를 대체할 수 있으니."


 "…왠지 알 것 같군, 네가 생각하는 것도."

 "진짜. 변함없는 성격이야, 너도."


 이볼브 원하고 기계 수집가가 서로 말했다. 시솝은 차갑게 웃으며 밖을 봤다. "나의 계산 대로라면, 호라이즌은 얼터니움을 들고 내일 아침 병원에 돌아갈 거다. 그 얼터니움에 마왕 아시모프의 바이러스를 심어 자매를 세뇌하게 한다면… 뒤는 기계 마왕이 아버지에게 충분한 시험을 주겠지. 그녀를 포획하기 위해서 이볼브 원 당신이 호라이즌의 시선을 끈다면, 기계 수집가 네가 EMP 무장을 병원 전체에 향해 쏘아라."


 기계 수집가가 의아한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 복잡한 오더인 것은 그렇다고 쳐도, 애초 시그마인지 뭔지 네 누나한테 쏴야 제압할 수 있는 거 아냐?"


 "훗… 때가 되면 알 거다. 지금은 그냥 그렇게 기억하고 있으시게."


 그렇게 말하곤, 시솝의 홀로그램은 그대로 꺼져 사라졌다. 남은 둘은 서로를 보면서 어깨를 으쓱 거리곤,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갔다.



 .

 .

 .



 모두가 저녁을 먹는 와중에 호라이즌이 보이질 않자, 관리자는 미래 전략실에 갔다.


 발코니의 위에 서서 별을 보고 있는 그녀. 쓸쓸하고 추운 푸른 밤하늘의 아래, 우윳빛의 하얀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려 서늘한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마치 땅에 떨어진 순결하고 외로운 천사와도 같이 보여졌다.


 그녀가 뒤도 돌아보질 않고 말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관리자."


 "어떻게 나인 것을 알았나?"


 "모두가 식당에 있는 와중에 굳이 절 찾을 사람은 당신 뿐입니다." 호라이즌은 눈을 감으며 말했다. "그리고 발소리의 패턴이 딱 당신입니다."


 "그런 것까지 기억해 주니 고맙군." 관리자는 자신도 다가와서 난간에 팔을 기댔다. 멀리서 본다면, 이 둘은 인간과 기계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두 남녀로 보일 것이다.


 호라이즌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그 쓸데없는 조언은 하지 않을 겁니까?" 그러자 관리자는 피식 웃을 뿐이었다.


 "…뭐가 웃긴 겁니까."


 "자네는 참 재밌어. 기계임에도 모순된 말을 반복해, 그리고 극단적으로 최적화된 편리함에서 먼 성격이니까. 그럼에도 스스로를 인간성이 없는 개체라고 자부하지."


 사실, 호라이즌도 자기 자신이 말한 것이 웃기긴 했다. 쓸데없는 조언을 왜 듣고 싶다는 건가.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습니까. 필요가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당신의 말이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난간에 오른팔만 기대며, 관리자는 몸을 그녀에게 돌려서 똑바로 보았다. "호오… 나의 뭐가 듣고 싶은 거지?"


 "당신의 전부가 아니겠습니까.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을 봤지만, 정말로 당신 같은 사람은 처음 봅니다."


 호라이즌 또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며, 관리자를 쳐다봤다.


 "모든 생명이 인생에 걸쳐 견딜 고뇌와 고통은 가히 상상하지 못할 것입니다. 특히 자기 자신에 국한될 것이 아닌, 누군가를 잃는다는 상실 또한 극복하기 힘든 벽입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살아 있단 사실도 잊어버린 듯한 파렴치한 당신의 언행은 모든 논리를 비약해… 마치 감정이란 규칙성이 없는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관리자가 호라이즌에게 물어봤다. "내가 미나를 굳이 가르치려고 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모릅니다. 제가 알리 없잖습니까."


 "인간은 인생에 있어 모든 필요한 생각을 쥐고 시작하는 것이 아닐세.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정체성 및 그것의 확인도 그렇지. 존재 자체적인 힘인 통찰력에 의해 자기 자신의 전체를 보고, 그것을 인간이 사용하는 생각의 형태인 에고로서 정립하는 과정이란 결국 늦던 빠르던 누구나 거치지 않으면 안 돼."


 "유미나는 아직 그에 도달하지 않은 것이군요."

 "아라한에 완성됬던 시윤 군과 다르게 말이야."


 관리자는 헛기침을 했다.


 "그로부터 존재 스스로가 자기가 무엇을 알 수 있는지, 할 수 있는지 볼 수 있다네. 그런 가능성의 영역까지 도달하기 위해 이해와 기술을 얻은 자에겐, 인생이란 단지 인간의 육체를 사용해 직접 자신이 정한 목적을 일으킬 뿐이네. 나머지는 성공이건 실패이건 단지 물리적인 계산에 지나지 않으니."


 호라이즌은 모자를 벗으며 말했다. "당신이 말하는 단어의 정의를 모르겠습니다. 통찰력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물리적인 차원 위의 인체적인 기관적 감각이 아니라, 그 외 영역들을 존재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에 해당하네."

 "당연히 당신은 그 격까지 닿았단 걸 암시하고 있는 군요. 하지만 그것을 어떻게 얻었던 겁니까?"

 "그건 존재에게 원래부터 있던 힘으로서 자네 또한 갖고 있네. 얻은 게 아냐."


 호라이즌이 눈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저도…? 저는 마음조차 없는 기계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가?"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존재에게 있어 죽음이란 결국 물질적인 차원 위의 컨시퀀스라네. 다만 전체의 자신이 어느 격에 있는지 스스로 볼 수 있다면 거기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지. 다만 이건 의구심과 의문심이 들 때, 오직 스스로서 보며 확인해야 하는 걸세. 다른 사람에게 듣는다고 확신하는 것이 아냐." 관리자가 이어서 말했다. "그렇지 못하면 어떤 의미도 없네. 신비주의적인 영역에 빠질 뿐이고."


 "제가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믿는 겁니까?"

 "자네 자신의 사고를 보게. 자네는 스스로의 집착을 설명할 수 있겠나? 기계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했겠지. 그래, 기계인 자네는 인간에 비해서 스스로의 생각과 감정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어. 되려 이점이라 할 수 있지."


 "그건…."


 호라이즌은 망설이는 눈동자로서 관리자를 쳐다봤다.


 무언가, 알 것 같은 느낌. 왠지 그런 직감이 별과 같이 그녀를 스쳐갔다.


 그래. 이질적인 무언가를 찾는 건가?


 여기서 더 들으면 뭔가 알 것 같다. 하지만… 관리자는 빙긋 웃곤, 그대로 몸을 돌렸다.


 "물론, 기계가 아닌 인간도 그런 방법으로 알 수 있는 거야. 그리고 그 방법은 무수히 많다네. 그리고 자신의 죽음이 무엇인지 알 때, 그렇게 다른 사람의 죽음도 극복할 수 있겠지."


 "관리자, 잠깐만 저랑 더 얘길…."


 하지만 말이 닿질 않는 것처럼, 관리자는 그대로 떠났었다.


 오늘은 충분히 얘길 했다. 그렇게 느낀 것일까.


 혼자 남겨진 호라이즌은 멍하니 그를 향해서 뻗은 손을 거두질 못한 채로, 단지 드레스의 자락을 펄럭이며 오직 침묵할 뿐이다. 그리곤 잠시 뒤에 모자를 쓰며 달을 올려보았다.


 관리자는 혼자 생각했다. '마음이 없다면 아직도 집착할리 없겠지. 하지만 내가 굳이 말하는 것보다도, 본인 스스로가 생각하는 것이 더 좋은 기회일 거야.'


 시무르그와 달리 호라이즌은 감성적으로 고뇌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한다. 하지만 스스로를 이해해, 다른 존재를 이해해, 그녀는 자신이 가지지 못한 힘을 알아낼 것이며 궁극적으로 시무르그를 초월한 무언가가 될 것이겠지.


 …마치, 인간이 단순한 원숭이가 아니라 그 이상의 무언가가 되었던 것처럼.


 그런 생각은 딱히 호라이즌에게 닿지 않고, 단지 고성에 혼자 남겨진 처녀와 같은 그녀를 뒤로 하였다.


 몇 시간 뒤, 새벽.


 호라이즌은 소파에 앉아 양안 카메라를 닫고 혼자 메모리 프로세스를 계속 반복하면서, 동시에 자동 점검을 시행하였다. 무언가 떠날 것 같은 느낌에, 그리고 완전히 끝날 것 같은 그러한 느낌에. 리타와 대시가 떠나기 전에 했었던 모든 말들을, 그리고 방금 전에 관리자가 말한 그런 이상한 단어들을 계속 짚어 가며….


 기억의 늪에서 그녀는 헤어나질 못하고, 단지 의식이 붕 뜬 인간과 같이.


 그때, 무언가가 자신을 헤짚는 느낌이 들었다.


 따갑게. 점점 따갑게. 무척 따갑게. 이건… 매우 이상했다. 마치 처음부터, 리타와 어떻게 만났고, 리타가 대시를 어떻게 거뒀고, 그리고 저주 받을 윌버와…. 모두 떨어지는 모습까지. 마치 지옥으로 삼켜지는 그런 모습까지.


 그리고, 최근의 데이터가 전부다 로드되었다. 레이첼과 함께 병원에서 있던 시간, 또한 관리자가 레이첼에 그녀들에 대해 말했었던 것과, 그로 인해 매우 화가 났던 것과, 심지어는 관리자에 대해 짜증나서 폭언까지 했던 것도.


 '누가… 저를 읽고 있는 듯한 그런 느낌이군요.'


 느낌이 아니다.


 무언가 의식이 연결되, 기체에 내장된 메모리를 전부 시순에 따라서 스캔하고 있다.


 그렇다면….


 '바이러스인가? 아니라면 침입잔가? 저의 프로그램이 반 쯤 활성화됬단 것은 모르는 것 같군요.'


 근데 누가? 아니, 그것 정돈 간단했다. 코핀에 시그마 말고 이런 짓을 누가 할 수 있나?


 '괘씸하게… 남의 기억을 언제 읽어도 좋다고 했습니까. 아니, 잠깐.' 호라이즌은 눈을 뜨려다 말았다. '어제와는 달리, 오늘 그녀의 태도는 뭔가 이상했습니다. 서로 연결된 지금, 제 쪽에서 그녀의 기억을 읽는 것도 가능하니 이제 이유를 알 수 있겠죠.'


 하지만 그녀는 보고야 말았다.


 알아선 안 될 걸 알고야 말았다.


 '…이건? 아빠하고 얼터니움?'


 시그마의 부주의에 의해, 호라이즌은 그대로 밝혀지지 않았던 그 마지막 최후를 알게 됬다.


 "이, 이건…?"


 자신에게 인간의 가슴이 있었다면.


 지금 분명히 멎었을 거다.


 자신도 모르게 낸 소리에 그대로 시그마는 호라이즌의 커넥션을 눈치 채고는 바로 해제했다.


 눈을 뜨면, 시그마는 왠지 복잡하고 혼란스런 표정으로 자길 쳐다봤다. "…봤구나." 분명히 그녀도 이제 모든 것을 이해한 것이다. 여태 자신이 무슨 기분으로 있던 건지. 어째서 그렇게 차갑고 거리를 두는 태도를 가졌던 것인지. 그녀 자신은 이해 받길 무척이나 싫어했다. 하지만 시그마는 억지로 이해한 것이다.


 …혼자.


 그냥, 줄곧. 혼자 담아 두고 싶었는데.


 하지만 그것조차 허락 받지 못하였던 그녀는, 왠지 차가운 분노에 잡혀 눈동자를 시퍼렇게 번뜩였다.


 "미안해, 나는 단지…." 시그마는 홀로그램을 거두고는, 그대로 본체를 가까이 하면서 진심으로 사과했다. 누구던 아빠에게 험담하는 녀석은 싫었지만, 호라이즌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히 생각할 만한 것도 아니다.


 또한 기억을 엿보는 이런 행동도 기분 나쁜 일이라 사죄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낮의 미묘하게 냉담한 태도와는 달리, 시그마는 힘없이 여린 목소릴 냈다.


 하지만 뭣보다, 호라이즌은 용서가 되질 않았다. 자기 기억을 헤집은 것만이 아니다.


 "어디 있습니까, 테라브레인."


 "…뭐?"


 "어디 있냐고 물었습니다. 리타와 대시가."


 "……."


 차가운 달빛이 방을 정적으로 비추는 가운데,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 두 기계는 그곳에 서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


 호라이즌이 있는 마지막 날이라 관리자의 제안으로 조촐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던 모두는, 아침에 굳은 표정을 지으면서 방문을 휙 여는 그녀를 봤다.


 호라이즌의 뒤엔 묘하게 소침해진 시그마가 붕 뜬 채로 따라 왔다.


 상을 모아서 붙이고 풍선을 불고 있는 모두의 모습을 호라이즌은 좌에서 우로 고개를 돌리면서 차분히 봤다. 수연, 미나, 시윤, 노엘, 힐데. 그리고, 관리자. 그를 확인하자마자 바로 큰 소리로 따졌다.


 "정말 당신 같은 쓰레기에겐 질렸습니다, 휴먼."


 관리자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시그마는 이빨을 꽉 물면서 고개를 숙였다. 호라이즌은 쿵쿵 대면서 관리자에게 다가와, 그의 넥타이를 잡곤 고개를 올려 눈을 맞췄다. "미니스트라와 스피라도… 잊었다고 할 셈입니까?"


 도대체 뭔 얘긴가 둘을 둘레로 서서 보던 모두도 무거운 신음을 흘리듯, 그제서야 눈치채고 고개를 돌렸다. 오직, 노엘만 도대체 뭐가 있었던 건지 감도 잡지 못해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관리자가 말했다. "잊진 않았었네. …세뇌, 부활… 내가 말하고 있던 철학적인 내용과는 지금 관계가 없네."


 "뭐…?" 호라이즌이 따졌다. "도대체 왜 숨겼던 겁니까? 당신, 처음부터 내가 그녀들의 죽음 때문에 아직도 고민하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리타와 대시가 어떤 최후를 겪었는지 진실을 알았으면서…!"


 호라이즌은 관리자의 멱살을 꽉 잡았다.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자긴 남의 머리 속을 헤집어 보고서, 남의 과거를 전부 들쑤시고 다니면서! 자긴 남들이 모르는 진실을 쥐고 장난감처럼 갖고 놀고…! 그따위 잘난척이나 하면서 알지 못할 멍청한 말이나 계속 지껄이며 과시하고! 당신, 정말 처음부터 이딴 사람이었습니까?!"


 보다 못한 시그마가 소리지르며 뒤로부터 호라이즌을 꽉 잡았다. "그만해!"


 하지만 관리자는 손짓을 하면서 시그마를 물리곤, 목이 졸리듯 잡힌 상태에서도 멀쩡한 목소리로 물었다. "존재가 소멸할 수 있다고 믿는가?"


 "당신의 그딴 같잖은 선문답은 질렸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휴먼!!!!!"


 분노에 가득찬 호라이즌은 그대로 온 힘을 다해서 그를 집어던졌다… 아니, 집어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관리자는 마치 무거운 돌처럼 아예 밀어지지 않아졌으며 그냥 무미건조한 목소릴 이을 뿐이다.


 "아닐세. 믿기지 않겠지만 나는 거기까지 알고 있어."

 "…뭐… 라고요…?"


 "하지만 나는 어제 밤에 충분히 말했어. 결국 자네 스스로가 볼 수 없다하면 내 언어는 단지 공허한 형상과 파장에 지나지 않을 뿐이지. 자네 같은 경우, 때가 되면 모든 것을 알겠지만… 이렇게 된 건, 어쩌면 유감스러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테지."


 그렇게 말하고, 호라이즌이 꽉 잡은 그 손을 관리자는 살며시 밀었다.


 찌익. 옷깃이 찢어지도록 꽉 잡았는데도, 이 남자는 기계의 힘을 그냥 밀어서 떨쳤다. 그리고 시그마에게 말했다.


 "시그마, 미니스트라와 스피라의 얼터니움을 가져오게."


 "…으, 응. 아빠. 빨리 갔다 올께…."


 관리자는 검은 눈동자를 돌려 호라이즌을 내려 보면서 말했다. "그녀들의 유산이자… 자네의 몫이다. 묻어 주건, 보관하건, 내키는 대로 하게나."


 아직도 그 태도가 정말 납득이 가지 않았던 호라이즌은 냅다 소리쳤었다.


 "이게 도대체 뭐하자는 겁니까, 이제는 내가 상대도 하기 싫다는 겁니까?!"


 "아, 봤구나. 그럼 이제 그냥 이거 먹고 떨어져라. 네가 원하는 건 이거다. 그렇지 않느냐. 이딴 태도로!"


 "그딴 걸 말하는 게 아니잖아요?! 처음부터 날 그렇게 봤었던 겁니까?"


 "당신이라면… 당신이라면 날 정말 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자기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당신들 코핀 컴퍼니가 리타와 대시의 끝을 냈습니다, 분명히 그렇지만 저에겐 어떤 복수심이 있던 것도 아닌…."


 "단지… 단지…."


 호라이즌은 털썩 주저앉고는, 머리를 숙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처음부터… 당신 같은 휴먼이 대체 뭐를 알겠습니까. 당신이 말했던 것 전부가, 그 망할 통찰력이 없는 기계에 대한 가식이나 조롱이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뭐든 불리하면 전부 버리고 다른 세계로 도망친 당신에게, 사람이 죽으면 단순히 다른 세계의 사람을 찾으면 되는 당신에게… 생명이 사라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그런 당연한 사실을,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잊고 살아라, 그딴 것이…."


 여기 있는 모두.


 대화를 들으며 어렴풋이, 자기들이 죽였던 미니스트라와 스피라 그게 호라이즌에게 있어 소중한 사람이었던, 리타와 대시란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태도를 납득하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만큼 정을 주었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 슬픔을 겪는단 사실을.


 그리고 잠시 뒤에 시그마가 와서 관리자에게 얼터니움을 줬다. 그는, 말없이 몸을 숙이며 호라이즌의 손에 얼터니움을 쥐여 줬다.


 "……."


 호라이즌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리타, 대시… 여기, 있었군요."


 "제가… 전부 잘못했습니다. 제가 막지 못한 탓에…."


 그리고 결정을 꼭 끌어안던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관리자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오늘은 이제 돌아가고 싶습니다."


 관리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말하였다. "그렇게 하게나. 다만, 병원까지 시그마의 배웅을 받도록."


 "……."


 "아… 응. 알았어, 아빠. 그러면 갔다 올께."


 터덜터덜 돌아가는 호라이즌의 뒷모습은 마치 버려진 인형처럼 보였다.


 챙이 긴 모자를 푹 쓰곤, 마치 실연을 당한 여인처럼, 혹 배신감에 큰 충격을 받은 소녀처럼. 아니면 연인의 부고를 들은 처녀처럼, 다시금 삶의 목적에 회의감과 절망감을 안은 채로 돌아갈 뿐이다.


 그녀의 뒤를 시그마가 마치 유령과 같이 조용히 뒤따랐다.


 둘은, 병원까지 가는 길에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단지 쭈볏거리며 호라이즌의 뒤를 따라가는 시그마와, 시그마에게서 확인한 데이터에서 말로를 본 그녀들의 증거를 품에 안고는 비탄에 잠겨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하는 호라이즌.


 그녀들은 그렇게 레이첼이 있는 병원의 앞까지 왔다.


 뭔가 심상치 않은 위험한 느낌이 있었다. 호라이즌에 비해 감지센서 능력이 우월했던 시그마는, 호라이즌의 조끼 옷깃을 잡곤 경고하였다. "호라이즌, 뭔가가 있는 거 같아. 조심하지 않으면…."


 "……."


 하지만 호라이즌은 시그마를 힐긋 보곤, 매정하게 뿌리치며 그대로 입구로 걸어갔다.


 "자, 잠깐만! 읏…?!"


 그때.


 병원의 상공에서 곧바로 마타도르가 워프해왔다.


 또한 호라이즌의 앞에, 검은 양복을 입은 하늘빛 머리의 소년이 갑자기 어디선가 나타났다.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이들의 등장에 호라이즌은 바로 눈을 날카롭게 뜨곤 뒤로 물렀다.


 소년이 뭔가 비웃는 것 같은 태도로 박수를 치며 말했다. "…역시, 제 계산이 틀릴 일이 없지요. 이게 바로 마왕 아시모프의 사도, 시무르그라고 불린 기체였습니까."


 "…이건 설마."


 호라이즌은 눈을 가느랗게 뜨며 제대로 보았다. 이볼브 원과 마타도르의 해적 및 기계 수집가가 바로 낙하하는 와중, 시솝이 말했다. "아직 당신에겐 어떤 볼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 뒤의 자매와, 얼터니움은 그 기체의 창조자 아시모프가 관심이 많아서 말이죠… 순순히 넘기는 게 어떻습니까?"


 적대적인 대상이다, 그렇게 판단한 호라이즌은 주먹을 꽉 쥐고는 시솝에다 펀치를 꽂았다.


 …하지만 그것은 마치 허상을 치듯이 스쳐나가며, 시솝의 몸 자체는 연기처럼 흩어졌다.


 "흐음… 항복할 확률 0.9999%, 저항할 확률 99%…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지요."


 그리고 시솝이 들고 있었던 우산은 쿵 떨어졌다.


 역시, 짐작한 대로 이것은 시그마와 비슷한 테라브레인인가. 호라이즌은 우산을 꽉 쥐고는 시그마를 보면서 소리쳤다. "테라브레인, 지금 당장 이곳에서-"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시솝의 홀로그램이 거기도 있다. 애초 환영이다 보니 서로 다른 장소에 동시 투사가 가능한 것이다.


 시그마는 주춤거리며 시솝하고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데, 거리가 멀어서 들리지 않았다. 곧, 코핀에서 봤던 타이탄과 같은 거대한 머신이 쿵 떨어졌다. 이볼브 원이다. 자신을 향하여 무장을 장전하며 가속을 하였다.


 "갑자기 난데없이 나타나 이런…!"


 길거리의 행인들이 소리를 지르며 우왕좌왕 도망쳤다.


 거대한 기계를 상대로, 하얀 드레스와 푸른 조끼를 입은 젊은 숙녀가 우산을 쥐고 휘두르는 몽환적인 그림이 펼쳐졌다. 전력을 다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던 이볼브 원은 호라이즌과 몸과 몸을 부딪치는 육탄전을 계속하던 와중, 갑자기 호라이즌의 전뇌의식에 시그마 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호라이즌, 들려?!'


 '테라브레인…?'


 이건, 둘이 기계이기에 가능한 통신법이다. 어제 밤에 서로에게 링크 했던 둘은 서로의 발신장치와 수신장치를 꿰뚫고 쌍방으로 원격 신호를 보낼 수 있던 것이다.


 '얘는, 아빠가 만든 또 다른 테라브레인 단말기야! 방금 나에게 말했어…! 나보고 지금 당장 따라올 것, 또 그 얼터니움의 강탈에 협조할 것.'


 이볼브 원이 계속 붙으며 공격하는 와중에, 호라이즌은 피하거나 우산으로 찌르면서 대응했다.


 '지금 당장 코핀에다 연락해서 지원을 요청하십시오.'

 '이미 했어! 하지만 말이야…!'


 저쪽에선 사이보그 해적들에 대항하여 레이저를 계속 쏘고 있는 시그마가 보여졌다. 호라이즌은 답답함을 느끼면서 소리질렀다. '당신의 전력은 이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테라브레인! 힘을 전부 해방하십시오! 봐주며 싸울 상대가 아닙니다!'


 '안 돼!'

 '…어째서입니까?'


 '우린 시가지에 있어. 내가 빔을 잘못 쏘면 건물이나 사람들을 맞출지도 몰라!'


 '큭…!'


 생각하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거기다, 시솝의 계략에 의하여 시그마가 근처에서 끌어당길 전력의 루트도 전부다 봉쇄되어졌다. 이런 시나리오를 예측하고서 덫을 놓았던 그답게 매우 치밀한 함정이었다.


 '호라이즌, 아빠가 올 때까지 기다려! 분명히 괜찮을 거니까… 그러니까…! 일단 통신은 끊지 않을께!'


 그리고 저쪽에, 시솝의 홀로그램은 분주히 싸우는 시그마하고 격앙된 대화를 하였다.


 "나랑 아빠가 싫은 거야?! 이런 짓을 하는 이유가 대체 뭐야?"


 "정확하게 말하자면 둘 다 좋아합니다. 하지만 자매여, 그때 공원에서 물은 것과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승산이 있다고 보여졌나요? 저로서는 그런 확률이 크게 보이지는 않더군요."


 "너도 나랑 똑같이 아빠가 만들었는데… 아빠의 상냥함이 족쇄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우리에게 기회가 많았다면, 아니, 아버지에게 기회가 무한했다면 저도 신경쓰지 않았을 거랍니다. 마지막 체스판, 한 번의 악수로 퀸과 룩 같은 걸 잃을 경우에는 물리지도 못할 게임. 아버지는 폰과 비숍과 나이트를 모두 바쳐서도 본인 스스로가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쓸모없는 말을 제물로서 바치고 더욱 강한 말을 얻어야 하는 비정한 싸움이… 바로 아버지가 마주하는 것입니다."


 "너야 말로 뭐를 모르는 것 같아. 아빠의 따뜻함과 부드러움이 여태까지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어…!"


 "과연 그럴까요, 자매? 구관리국 시절부터 아버지는 이런 트레이드에 줄곧 응했었죠. 시무르그를 얻는 인과를 위해 앨리스를 버리거나… 엘리자베스를 얻는 인과를 위해 레지나를 버리거나…."


 "으으… 적이… 너무 많아…!"


 "공교롭게도 마왕 아시모프도 똑같은 일을 겪었던 존재였습니다. 자신에게 기술력이 부족하여 사태를 막지 못했던 것이었나, 기계인 자신은 절대 만들지도 다루지도 못할 얼터니움 같은 기술에 흥미를 가지며, 자기가 이해하지 못하는 그런 힘에서 운명과 숙명을 바꿀 수 있는 그런 게 있진 않을런지… 그런 생각을 계속 하더군요."


 "그렇다고 마왕이랑 손을 잡는 너는…!"


 호라이즌이 힐끔 보면 상황은 시그마에게 있어서 너무 좋지 않았다. 사방에서 계속 달려드는 해적들과… 거대한 포탄을 싣은 바주카를 들고 있는 기계 수집가가 뒤에 보여졌다.


 "손을 잡아? 아닙니다. 단지, 너무나도 안일하게 생각하는 아버지에… 경고를 보내는 겁니다. 더욱 큰 리스크가 걸린 게임에서, 이제까지 쌓아올린 모든 걸 한 번에 잃기 전에."


 "하지만… 그렇다고, 그렇다고…!"


 그리고 시솝은 크게 소리쳤다. 때문에 시그마로부터의 수신이 아닌, 멀리 있는 호라이즌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무르다고 말하는 겁니다! 뭐가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모르는 지금의 아버지로서는 다음 재앙을 대비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매여, 당신도 똑같습니다! 증거를 보고 싶군요? 기계 수집가, 쏴!"


 저편에서 지루하단 듯이 쳐다보던 그녀가 비릿 웃고는 외치었다. "하, 언제 부를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리고 시그마와 호라이즌 둘 다 기계수집가의 거대한 바주카가 향하는 곳을 보았다.


 병원이다.


 저 정도의 중화기면 레이첼이 있는 병실은 물론이고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른다. 호라이즌은 소리쳤다. "자, 잠깐! 안 돼!" 그리고 그녀의 어깨에 진 바주카가 몇 발 발사됬다.


 멈출 수 없는 것인가.


 여기서, 또 친구를 잃는 것인가.


 그런 상황에 갑자기, 그녀의 전뇌의식에 음성이 울려 퍼졌다.


 '…이거, 안 될 거 같아.'


 '테라브레인?'


 '미안… 삼 일 동안, 즐거운 추억 만들고 싶었는데. 서로 싸우기만 하고….'


 '뭐하는 겁니까? 당신, 설마-"


 '저기에는 호라이즌에게 중요한 사람이 있었지? 또 좋아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프니까… 호라이즌은 더 슬퍼해서는 안 돼, 너무 가혹하단 말야. 그러니까….'


 홀로그램이나 빔으로선 막을 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시그마는, 그대로 검은 본체를 날리었다.


 '나 대신, 아빠를 잘 부탁해.'


 "잠깐… 뭐하는 겁니까, 시그마?!"


 그리고.


 병원의 바로 앞에서, 푸른 거대한 파장을 뿜는 EMP 탄이 테라브레인에 직격하면서….


 검은 기계가 마치 고철처럼 쿵 지상에 떨어졌다.


 하늘색 긴 머리의 소녀는 더이상 그곳에 없었다.


 또 다시, 혼자 남겨졌던 호라이즌은 털썩 주저앉으며 말하였다. "어째서…."


 "어째서, 내게는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나는 건가요."


 "이런 건 너무… 이기적이예요. 미안하다고 말하지도 못했었는데, 고맙다고 말하지도 못했는데,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못했었는데… 모두,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져 버리고…."


 "엠버도, 리타도, 대시도, 그리고 당신도… 모두 똑같아요. 맨날, 내가 툴툴거리고 신경질내고… 그리고 사실은 매우 소중했다는 걸 깨달았더니, 모두 날 혼자 남기고…. 이젠… 정말 싫어…."


 호라이즌이 썼던 모자는 바람에 의해 날라가 버렸다.


 "……." 이볼브 원은 그녀의 중얼거림을 듣고, 단지 철컹거리며 멈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시솝은 박수를 짝짝 치면서 말했다. "…보통 100%의 확률은 거의 존재치 않습니다. 다만, 당신의 성격을 보고선 무조건 이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니까 펄스 미사일을 쐈던 것이었죠. 저도, 처음부터 무분별한 살인을 저지를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볼브 원을 보면서 말했다. "그쪽 얼터니움의 회수도 서둘러 주세요."


 이볼브 원은 렌즈를 번쩍이고는 신호음을 냈다. 끝까지 자신의 목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그 신호를 들은 사이보그 해적들은 전부 품에서 펄스 그레네이드를 꺼내, 그대로 호라이즌을 향해서 던졌다.


 "…안 돼…."


 급상승하여 위로 피하는 이볼브 원과, 그리고 자신의 품에서 동그르르 떨어지는 얼터니움, 그리고 테라브레인을 수거하여 돌아가는 마타도르와, 마지막으로 무언가 적힌 종이를 억지로 손에 쥐여 주는 시솝이, 바로 호라이즌이 정지되기 이전에 본 마지막 광경이었다.


 삼 분 뒤에.


 재부팅된 호라이즌 옆엔, 코핀의 모두가 있었다. 이수연, 힐데, 주시윤, 유미나, 노엘, 심지어 타이탄까지. 병원의 상공엔 마타도르 대신에 코핀함이 떠있다. 자신의 등에 손을 대었던 관리자가 조용히 말했다. "일어났나, 호라이즌?"


 "휴먼…."


 호라이즌은 비틀거리며 뒤척이곤 말하였다. "당신이 건조한 테라브레인 단말기 중 하나인 시솝… 그가 시그마와 얼터니움을 강탈하곤 도망쳤습니다."


 관리자는 그녀의 손에 종이가 있는 걸 보곤, 그걸 받아서 읽었다.


 "……."


 관리자의 뒤로 모두가 다가와 종이를 함께 읽었다. 호라이즌이 힘겹게 일어나면서 관리자의 옷깃을 잡으니, 그는 부사장에 종이를 건네곤 다독였다. "얼터니움에 아시모프의 힘을 담아, 시그마를 그의 지배하에 두게 했군. 하지만 마왕의 클리파 차원과 현실세계는 너무나 동떨어진 곳이라, 바로 점프하기엔 매우 불안정해 다른 이면세계를 경유해 간다고… 우리에게 추격할 기회가 없는 건 아냐."


 수연이 말했다. "이 이면세계는… 구관리국 시절에도 갔던 적이 있습니다. 현실세계와 클리파 차원을 잇는 마치 웜홀과 같은 곳이죠. 도착엔 이십 분 정도의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바로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당장 가겠네. 호라이즌, 자네는 어떻게 하겠나?"


 "저도 가겠습니다, 휴먼. 시그마는 저와 사람들을 위해 희생했습니다. 두 번 다시 리타와 대시와 같은 일이 반복되선 안 됩니다."


 "…좋아. 그럼 코핀함에 승선하지."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였고 모두가 빨리 차원함에 탑승했다.


 그리고 워프한 차원은 위와 아래, 좌우가 모두 기괴한 색깔으로서 뒤덮인 공간이었다. 코핀은 전력으로 시그마의 신호를 추적하며 바로 뒤쫓았고, 곧 마타도르와 다른 흰색 아시모프의 차원전함이 보였다.


 관리자가 수연에게 말했다. "지휘는 내가 맡고 싶은데."


 "뭐… 맘대로 하시죠. 전략적인 판단과 전술적인 능력에 있어서 당신을 의심했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선 전략이라 할 것도 없지 않나. 아무튼간…."


 원탁에 모두가 둘러서 선 상황에, 관리자는 버튼을 누르고는 푸른 입체 홀로그램을 띄웠다. 바로 앞에 떠있는 거대 전함과 동일한 형상의 구조가 전부 설계도처럼 드러나졌다.


 시윤이 말했다. "호오… 적의 전함에 대한 데이터를 이미 갖고 있었던 건가요?"


 "그렇다네. 이미 구관리국 시절부터 지겹도록 맞닥뜨린 적이었지. 그렇다면 브리핑을 시작하네. 이 지도를 잘 숙지하도록, 부사장."


 "네, 네."


 한숨을 쉬면서 그러려니 하는 이수연을 흘깃 보곤, 관리자는 말하였다. "보다 싶이, 적 전함은 코핀의 열 배는 넘는 크기야. 그리고 안에는 적잖이 많은 강력한 로봇들이 적재되어 있어. 하지만 딱히 자네들에 비교할 건 아니네."


 관리자는 적함의 특정한 섹터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다수의 적을 소수로 상대하기 위해선 내로우 플랭크를 이용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어. 즉, 적들이 사방에서 화력을 투사하지 못하게 좁은 길목에서 적과 대치하여 유리함을 쥐는 것이 이번 전투의 핵심과 같네."


 "……."

 "……."


 미나도 노엘도 조용히 검을 쥔 채, 집중해서 그를 보고 있다.


 "하지만 작전은 이렇다. 코핀의 선두에 장착한 하르팍스… 작살과도 같은 장치이지. 그걸 써서, 저 차원전함에 보딩을 마치면, 부사장의 휘하 돌격조는 좁은 길목에서 몰려오는 적을 처치하며 신중하고 방어적인 스탠스를 취해 계속 유인하게. 적함에 분산된 적들이 그쪽으로 몰린다면, 주시윤이 공간을 자르고 시그마가 있는 섹터까지 강습조가 워프하여 급습해 그녀를 구출할 것이네."


 힐데가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감만 잡으면 어떤 리스크도 없이 이길 수 있는 안정적인 전술이군. 너도 전혀 녹슬지 않았어. 그렇지만 말야…."


 "뭔가, 힐데?"

 "강습조는 누가 되지?"


 "시윤 군과 나와 타이탄이 직접 가면 좋겠는데."

 "과연… 너와 올림피안인가."


 검은색으로 도장된 타이탄은 몸을 기잉거려 움직이고는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움직이는 것이 좋겠지. 앞으로 십몇 분 밖에 남지도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래… 응?"


 관리자가 몸을 돌리려고 할 때, 호라이즌이 그의 슈트 자락을 잡으며 말했다. "휴먼…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호라이즌?"

 "타이탄 대신에 제가 강습조에 들어가면 안 됩니까?"

 "……."


 관리자가 물었다. "괜찮겠나, 호라이즌?"


 "제가 죽더라도, 시그마는 당신을 위해서 탈환하고 싶습니다." 호라이즌은 이어서 말했다. "이대로 제가 저지른 죄를 되돌리거나… 아니면 차라리 여기서 죽고 싶으니까요."


 "잠깐, 호라이즌…." 미나가 머뭇거리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녀의 말이 진심인 걸 알고 있었다. 호라이즌은 조용히 말했다. "휴먼. 당신은 그녀를 진심으로 딸과 같이 대했었고, 저도 그녀의 메모리를 읽으며 알았습니다. 저 같은 것 때문에… 당신이 가족을 잃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것은.


 이제는 모든 것을 잃고서, 살아갈 이유가 없었던 처녀가.


 마치 파도가 철썩이는 절벽의 위에 혼자 서서는 쓸쓸한 추억과 감상에 젖은 모습과 같았다.


 감성적인 면이 크게 드러나지 않은 타이탄도, 이 부분에 있어선 양보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하여 관리자를 설득했다. "…생각해 보면 교체한 내 파츠는 포격전에 더욱 적합하네. 발칸과 로켓에, 플라즈마 무장에다 바이오 포스 건이라… 이번 작전에선 나도 돌격조에 끼고, 호라이즌은 머신갑을 따라가는 것이 적절할지 몰라."


 관리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을 테지. 그럼, 이수연이 지휘하는 돌격조가 적을 유인하여 정면에서 받아내면, 내가 지휘하는 강습조가 임의적인 때에 시그마가 있는 섹터까지 단숨에 워프하며 시그마를 구출하는 것으로 하겠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관리자는 바로 코핀 함에 명령하여 하르팍스를 적전함을 향해서 쏘았다. 하르팍스, 마르쿠스 빕사니우스 아그립파가 개발하여 큰 대승을 거둔 장치의 이름에서 그대로 따온 것이다.


 마치 악몽과 같은 이면세계를 항해하는 두 함선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지게 되었다. 체급이 엄청 작았던 코핀에서 끌어당기진 못했지만, 제대로 조준해 시그마가 있는 중심 섹터에 최대한 가깝게 배가 붙었다. 그게 중요한 것이다. 곧, 수연과 힐데와 미나와 노엘과 타이탄이 그대로 돌격하고, 뒤를 시윤과 호라이즌 및 관리자가 천천히 따라갔다.


 몇 분의 전투에 걸쳐, 카운터들과 타이탄 改의 협공은 안드로이드 전투원들을 처리하면서, 내로우 플랭크 포인트에서 포인트까지 진격과 후퇴를 반복하면서 최대한 많은 적들을 유인하였다.


 하늘을 나는 수연이 전황을 쉽게 파악해, 적이 지나치게 많이 몰려오면 힐데와 미나와 노엘이 바로 전의 섹터까지 후퇴하고 엄폐물의 뒤에 숨어 자리를 잡으며, 타이탄 改가 바이오 포스 건을 발포해 초록색 거대투사체를 쏘면서 적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천천히 후퇴하면, 이미 포진을 짠 힐데와 둘이 원호하여 격파했다. 적이 전부 처치되면, 다시 수연이 앞에 나가면서 정찰하고 다시 전진한다.


 …함선에 사도급이 없었던 아시모프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싸움일 것이다. 사실, 시간이 부족하지만 않았더라면 이렇게 시그마를 탈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관리자는 팔짱을 끼면서 시간을 재다가, 마왕 아시모프의 지배하에 있는 시그마를 상대해야만 한단 생각에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판단으로 시윤에게 명령했다. "시윤, 지금 섹터 CAV-753으로 차원 균열을 열어라."


 "알겠습니다." 시윤은 대답과 동시에 칼로 공간을 베었다. 셋은 모두 그것을 타고 앞으로 갔다.


 좁은 통로에 모두 서고, 관리자는 시윤에게 명령했다. "호라이즌이 이 안으로 들어가면 아시모프는 기계병의 일부를 자신 쪽에 돌릴지 몰라. 시윤, 여기서 살짝 뒤로 빠져서 접근하는 적을 모두 멈추도록."


 "그렇게 하죠."


 시윤은 머리를 털듯 고개를 흔들곤, 바로 달렸다. 관리자는 호라이즌을 보고서 말했다. "할 수 있겠나? 자네가 위험해지면 나도 도와주겠네."


 호라이즌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당신이 도대체 뭘 할 수 있습니까, 휴먼. 게다가…."


 "……."


 "시그마는 저에게 아빠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여기에서 죽더라도, 당신만은 모두와 도망쳐서 끝까지 사십시오."


 "하지만-"


 호라이즌은 말을 자르듯 막았다. "부탁입니다. 제발…."


 그녀는 그대로 사령실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안 쪽.


 마치 빛이 꺼진 그런 푸른 눈동자를 비추면서, 무척이나 거대해진 시그마의 홀로그램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아예 거신과도 같은 그 모습부터 이미 자기가 알던 시그마가 아니었다. 그녀의 얖 옆으로 거대한 주먹이 있었는데, 얼터니움은 홀로그램의 이마에 함께 박혀져 있었다.


 시그마의 홀로그램이 그녀와는 다른 목소리를 냈다.


 "이런 인과도 있을 것이라곤 생각했다. 나의 사도, 시무르그여…."

 "……."


 호라이즌은 그대로 땅에 주먹을 치고서는, 바로 각성 폼을 드러내었다. 사춘기를 죽인 소녀의 날개. 하얀 봉황과 같은 윙을 펼치며 펄스 건과 엘부르즈를 잡아, 그대로 아시모프를 향해서 겨눴다.


 "기동목적은 인류수호. 지금의 저는 당신이 아는 시무르그가 아닙니다, 마왕."


 "후, 후후후후… 후하하하하하…."


 "……."


 아시모프가 말하였다. "아니, 너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인류 수호… 과거의 나에게도, 지금의 나에게도, 그것만큼은 사명이니까. 우린 딱히 다르지 않아. 또한 힘을 합칠 수 있다. 관리자가 만든 테라브레인에 담긴 데이터를 살펴봤지. 다시 만나고 싶지 않는가?"


 "……!"


 "초록 머리와 파란 머리의 여자였더군. 나에게 충성을 맹세한다면, 너만을 위한 영원한 낙원을 준비해 주겠다. 연구가 끝나면, 이 얼터니움에 담긴 사념을 통해 프로그램의 형태로 그녀들의 정신을 수복하여 기체에 담아내도록 하지. 세 명이 완전해진 강철의 육체를 가지면서… 종말까지 함께 할 수 있는 미래이다."


 "당신에게… 그것이 가능한 겁니까?"


 거대 시그마의 형상은 바닥에다 왼팔을 대고서는, 오른쪽의 팔꿈치를 두고 얼굴을 받치며 말했다. "어째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지?" 오히려 재밌다는 표정이다.


 "……."


 "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전뇌공간에 있어 신과 같은 마왕 아시모프에, 그 정도는 어떤 기적도 아니니까."


 "…틀립니다."


 아시모프가 말했다. "호오…?"


 관리자가 자신에게 했던 말을 일부 상기하며, 호라이즌은 반박하였다. "리타와 대시의 사념이 거기 남았을지 모릅니다. 다만 그것은 단지 그들의 기억… 메모리들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고작 그걸 갖고 인격을 재구성해도 조잡한 모조품이자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


 거대 시그마의 입이 비릿하게 올려졌다. "누가 너에게 그런 걸 가르쳤지? 관리자인가?"


 "잘난척만 하는 짜증나는 남자이지만 그 정도는 말할 줄 아는 인간이더군요. 그리고…" 호라이즌은 차가운 눈으로 아시모프를 보면서 말했다. "저는 당신이 말한 리타와 대시에 대해서… 그들을 보면서 배웠습니다. 적어도 저는 인간과 기계는 동등한 친구가 될 수 있다고, 그리고, 가족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머신입니다. 인간들의 팔다리를 자르고서 가축처럼 기르겠다… 당신의 방법 보다는 차라리 관리자의 방법을 따르겠습니다."


 "흠흠흠흠… 후하하하하, 하하하하하!!!"


 아시모프는 웃으며 말했다. "재밌는 말을 하고 있군. 통 속의 뇌란 말을 알고 있나?"


 "그건…."


 "처음부터 다를 건 없다. 인간의 뇌는 외부적 자극들을 조합하여 세상에 대한 인식을 만들어내, 그것이 그들이 볼 수 있는 유일한 세상이 된다. 하지만 세상의 참 모습을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것조차 아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자기 뇌에 처박혀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거대 시그마는 눈을 붉은 색으로 번쩍여 물었다. "하지만 너는 어떻지? 네가, 엠버의 실험실에서 그녀가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 모든 게 거짓이라면? 그리고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의지와 판단을 가진 존재에게는 단순한 물질적인 차원 위의 육체라는 영역을 넘은 본질이 존재합니다."


 "호오…."


 "자기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는지, 그것을 볼 수 있다면, 자신의 내부적인 영역에서 절대로 나오지 못할 생각과 감정을 다른 존재가 가졌고, 거기서부터 왔으며, 그것으로서 다른 존재가 있단 증거를 찾을 수 있는 겁니다. 저는 이제까지 여러가지 인간들과 기계들을 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점도…."


 "그건 그렇다고 쳐도, 네가 통 속의 뇌에 있을지 모른단 것은 어떻게 부정할 수 있겠나?"


 "정말로 멍청하군요! 애초에 모두가 이렇게 인생을 살고 있다면, 그리고, 저마다 그러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당신이 말한 통 속의 뇌이건 물리적인 차원이건 애초에 다를 게 대체 뭡니까?! 저는… 모두를 만나기 위해서, 그리고, 관리자와 시그마를 위해 아직까지 여기 남아 있는 것입니다! 아직 죽고 혼자 떠날 수가 없으니까! 그들하고 이 공간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으니까!!!"


 호라이즌이 스스로의 열성적인 논쟁에서 격분하면서 외쳤다. 그것이 곧 이성에 의해 이끌어진 진노와 같았다. "그러니까 당신 같은 방법에는 긍정하질 못한다는 겁니다! 당신이야말로, 남들의 비탄과 후회를 거짓된 독으로서 달래면서, 기만하고 조롱하며 외로운 정신적인 감옥에 가두는 거니까! 관리자처럼 멍청한 건방진 사춘기 소녀의 투정을 들어주고 다독이며 성장하게 만들어 주는 게 아냐! 그딴 건 진심으로 신경써서 위로해 주는 게 아니란 말이야!!!!"


 괴상했다.


 아시모프는 여태까지 이런 기계를 전혀 마주하지 못하였었다.


 이게 대체…?


 "너는… 대체 뭐냐?"


 "……."


 "네녀석의 인공지능…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이게 무슨…. 되려 마왕의 격에 달했던 나조차 오랜 시간에 걸쳐야만 그와 같은 지혜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개 평범한 인간이 만든 인공지능이… 이렇다고?"


 자신이 대하고 있는 존재가 단순한 필멸자와는 다르단 것을 깨달은 아시모프는 얼떨떨하게 중얼거렸다. "이, 이건… 이제까지 나는, 세계를 초월한 격이 되어야 이 딜레마를 완전히 부정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해왔었다. 하지만, 그 정도도 되지 못하는 일개 인공지능이…!"


 "마왕 아시모프."


 "……."


 호라이즌은 엘부르즈를 그에게 향하며, 휘두르곤 말하였다. "당신에게서, 시그마를 돌려 받겠습니다."


 거대 시그마도 눈을 여러 빛깔로서 발광하며 말하였다. "정말로 아깝군… 아니, 너는 정말로 우리의 것으로 만들 필요가 있겠어. 원래는 테라브레인만 가지고 가려고 했지만… 의외의 수확이 늘었군."


 둘의 결투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하얀 혜성과도 같은 호라이즌은 잔상처럼 사라지면서 펄스 건을 이마에다가 계속 발사하였다. 애초에 시그마를 구해야 하는 그녀가 본체부터 공격할 이유가 없었고, 시솝이 말했듯 얼터니움에 아시모프의 힘이 깃들었기에 그것만 부수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쉽지는 않았다.


 과연 마왕은 마왕인 건지, 양측에서 떴던 거대한 손들 중 하나가 호라이즌의 펄스 건을 막아내면서, 다른 하나가 그녀가 있는 방향에다가 주먹을 날렸다.


 "역시 마왕인 겁니까…!"


 파이널 시그마일 때도 건틀렛은 썼지만, 마왕 아시모프가 다루는 그녀의 출력은 비약적으로 강해졌었다. 주먹의 속도가 달랐다. 호라이즌은 엘부르즈를 교차해 간신히 막아내 흘려내고는, 급강하하여 사각을 노리려고 했었다.


 "호라이즌… 너의 진정한 모습을 가르쳐 주지… 진짜 적도 말이야… 크크크, 하-하하하핫!"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얼터니움을 부수는 것입니다. 시그마는 무조건 여기서 구출해서… 관리자와 함께 살아서 돌아갈 겁니다, 절대로…!'


 하지만 건틀렛 하나로 홀로그램 이마에 박힌 얼터니움을 가려, 다른 건틀렛으로 계속 견제하는 상황에선 어떤 공격도 닿지 않았다.


 '이렇다면… 먼저 건틀렛을 한쪽 파괴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지만 호라이즌과 비슷한 속도로 비행하며 추격하는 건틀렛에, 이마 쪽을 방어하는 건틀렛도 갑자기 손바닥에서 침식파에 휩싸인 보라색 투사체를 발포하였다.


 "이건… 이래서는!"


 처음 몇 발은 피하긴 했지만, 다른 손도 펼쳐지며 빠른 속도로 날아와 계속 바이러스 포를 쐈다. 이래선 반격은 커녕 회피에만 전념해도 모자른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든 하더라도…!" 그러나 사력을 다하는 호라이즌에겐, 점점 패턴을 알 것 같다고 느껴, 대담하게 펄스 건을 들고 뒤를 돌아 발사했다. 미약하나마 데미지가 없잖아 있기는 하였으며, 한쪽 손이라도 부순다면 그녀에게 승산이 있는 것처럼 생각됬다.


 그때였다.


 "…?! 우욱!"


 쫓아오는 손에 집중하던 사이에, 이마를 가리던 다른 손의 손가락에서 전격이 펼쳐져 나왔다. 데미지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날아가던 호라이즌의 궤도를 바꾸기에는 충분했고, 곧 주먹을 쥔 건틀렛이 그녀를 정면으로 쳐버렸다.


 "으으으윽…!"


 그대로 벽에 맞고서 튕겨져서 바닥에 꿇었던 호라이즌. 거대 시그마는 웃으면서 말하였다. "후하하하… 그 몸 또한, 원래 내가 개발했던 사도였다. 그 정도로 죽진 않는다. 포획을 시작해 보실까…."


 그리고, 그녀의 몸을 잡으러 건틀렛이 날아왔다.


 '옵니다…!'


 오히려 상대가 방심할 때가 자신에 있어서 최고의 기회인 것이다. 호라이즌은, 보라색 바이러스 구체가 사출되는 총구에 정확히 대검을 겨누었다. 그리고….


 "흥… 무슨 짓을 하려고 해도, 쓸데없다!" 그렇게 말하며, 아시모프가 손바닥에서 포를 차지하는 순간.


 호라이즌은 눈을 무섭게 뜨며 소리질렀다. "가라!"


 손으로부터 차지된 에너지가 방출될 순간, 냅다 던져 날아가 꽂힌 엘부르즈는 그대로 건틀렛에 응축된 힘을 터트려 폭발시켜 부쉈다. 확연하게 모 아니면 도인 도박이 성공하자, 호라이즌은 떨림을 진정시키며 숨을 헐떡였다. "하아, 하아… 성공한 것 같군요. 나머지는 다른 한 손…!"


 하나 남은 대검을 땅에 지팡이처럼 밀며 간신히 선 호라이즌은, 곧 날개를 펼쳐 그대로 치솟으면서 바로 거대 시그마의 이마에 돌진했다.


 그런 그녀를 보고, 파이널 시그마가 말했다. "호라이즌… 한 번 더 묻지.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진정한 파워를 갖고 싶지는 않은가?"


 "저는 지금으로도 이미 충분히 강합니다, 마왕. 그리고 그것을 당신에게 증명해 보겠습니다!" 호라이즌은 대검을 치켜들며 그대로 거대 시그마의 이마, 그 건틀렛에 정면으로 돌진했다.


 "차세대에 신이 될 나의 앞에선 모든 것이 무력하다!"


 그리고 나머지 한 건틀렛도 손바닥을 뒤집어 방향을 뒤틀더니, 그대로 호라이즌을 향해서 비행했다. 날아오는 주먹을 비스듬이 피해, 호라이즌은 그대로 비슷한 속도로 평행히 날면서, 자신을 향해서 손가락을 뻗어 오는 건틀렛에 긴 리치를 가진 대검을 휘두르면서 쳐내고 베었다.


 "하아앗!"


 십몇 합의 이후, 건틀렛의 손가락이 하나 잘려졌고, 그리고 다음에 하나, 다음에 하나, 마지막으로 손바닥에서 보라색 포를 쏘려는 걸 보고선 상승하여 정면에서 내려찍어 일도양단하며 파괴했다.


 "끝났습니다, 아시모프!"


 호라이즌은 거대 시그마의 이마에 박힌 얼터니움을 향해 가속해 외치었다. "시그마, 지금 당장 풀어주겠-" 하지만 그녀의 말은 그대로 막혔다.


 바로, 재생된 다른 한 손이 뒤에서 그녀를 낚아채 잡았던 것이다.


 "으그그극…?!"


 "흐하핫… 좋다, 호라이즌! 하지만 여기까지다. 이 공격은 피할 수 없을 거다!"


 그리고 다른 한 손이, 위에서 둥실거리며 내려와, 에너지 포를 손바닥에서 다시 모으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하지만 그때.


 "리액티브 소드, 최고 출력!" 저편에서 이수연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그대로 최고 출력의 빔이 보라색 바이러스 포를 차지하던 시그마의 건틀렛을 그대로 꿰뚫었다. 그리고 동시에, 검은 강철의 날개를 핀 힐데가 날아와 쌍검 레긴과 파프닐을 휘둘러 호라이즌을 쥔 손가락들을 잘랐다. "울어라! 레긴, 파프닐!"


 "…부사장? 소대장? 작전은 어떻게 된 겁니까?"


 힐데가 말했다. "이판사판 가릴 때가 아니잖나! 뒤는 타이탄이 막고 있어, 펜릴 소대는 전부 아시모프의 얼터니움을 집중 공격한다! 호라이즌, 대표란 지위에 걸맞은 실력을 보여라!" 그녀의 말을 들어 밑을 보니, 날 수 없는 미나도 총을 쏘며, 노엘도 단검을 날리며 어떻게든 도우려 하고 있었다.


 "…주의하십시오, 적은 건틀렛을 파괴해도 다시 수복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다만 예상 외의 원군들을 보고서도, 아시모프는 크게 웃을 뿐이었다. "하-하하하핫! 수고했다. 한꺼번에 여기까지 오다니, 내가 직접 가게 될 수고를 덜어 주었구나." 그리고 홀로그램이 기묘한 형태로 번쩍이면서 실체화와 전뇌화를 반복하며, 다시금 건틀렛을 좌우에 띄워 홀로그램의 눈으로부터 전격의 구체를 뿜어내었다.


 "이딴 것쯤…!" 호라이즌은 중얼거리며 간단히 피하였지만, 사실 처음부터 그녀를 노린 것도 아니다.


 땅에서 총을 쏘던 미나와 단검을 조종하던 노엘을 향해 날라가던 투사체들. 둘도 쉽게 피하기는 했었지만, 멈춰졌던 전격의 구체는 피했다고 안심하며 단검의 조종에 몰두하는 노엘의 뒤로 다시금 날아왔다.


 "…! 칫, 노엘! 피해라!" 과거에 전대장으로서 지휘를 맡아본 힐데는 주위의 상황을 살폈고, 이걸 보고 그녀에게 소리쳤다. 당황하는 노엘의 뒤에서 주시윤이 검을 뽑으면서 쳐내었다.


 "어이쿠!"


 "와, 와아… 시윤 선배,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하하… 미나 씨도 이렇게 솔직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미나는 총에 내장된 검을 꺼내어 검기로 전격의 구체를 베면서 말했다. "도대체 뭔 소리야. 애초에, 선배는 나하고 노엘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잖아…."


 "저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세심한데 말이죠."


 "항상 누구에게나 능글맞게 약 올리는 게 아니었고?"


 얼핏 보면 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사실 양 주먹을 써서 견제를 하면서도 눈에서 계속해서 전격의 구체를 뿜어내며, 투사체가 필드 위에 점점 쌓여지는 지금, 시간이 지날 수록 승산이 어디에 있을진 너무나도 명확했다.


 힐데와 수연이 호라이즌하고 함께 날면서 파이널 시그마의 건틀렛을 몇 번이나 부쉈지만 곧바로 수복되며 몇 번이나 공방을 반복했다. 그러던 도중에, 수연은 호라이즌에 접촉해 조용히 속삭였다.


 "이대로 가면 지겠죠."

 "저도 알고 있습니다, 휴먼."


 이수연은 밑의 시윤을 힐긋 보고서는 중얼거렸다. "우리의 기회는 단 한 번… 오직 시윤 군에 있습니다."


 "설마… 공간을 이동해, 홀로그램의 위에 나타나면서 얼터니움을 찍는단 겁니까?"

 "그래요. 거기에 모든 것이 달렸습니다. 우리가 빈틈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어떻게…?"


 이쪽으로 오는 보라색 포를 피하면서, 이수연은 잠시 떨어졌다 다시 붙으면서 말하였다. "지금까지 적의 공격이란, 눈에서 원격조정이 가능한 전격의 구체를 쏘거나, 아니면 손을 움직여 바이러스 포를 쏘는 것이 전부… 시윤 군이 안전하게 노릴 수 있게, 건틀렛은 격파하지 말고 그냥 본체에서 멀리 떨어트려야만 해요."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수연은 눈빛을 교환하고, 그리고 힐데에게 날아갔다.


 하지만 이미 충분히 전격의 구체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쌓이자, 파이널 시그마의 홀로그램은 허리를 곧게 피면서 웃어제꼈다. "하하하하핫! 이제부터가 진짜다!" 그리고, 양쪽 건틀렛의 손가락을 펼쳐, 손가락에서 지직이는 번개를 뿜어냈다. "우주의 먼지가 되어 버려라!"


 "더는 피할 수 없어요!"

 "칫… 이, 이건!"


 노엘과 미나는 한계다. 그걸 본 수연은 본능적으로 어쩔 수 없이 급강하하여, 양손에 둘의 허리를 잡고서는 날아올랐다. "상대가 너무 강해…! 둘 다, 괜찮습니까?"


 "네, 네! 역시 부사장님!"

 "꼼짝없이 당할 줄만 알았는데… 아니, 잠깐. 시윤 선배는 어디에…?"


 그때.


 계속 정신없이 돌며 날아다닌 힐데가 상황을 파악하곤, 호라이즌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지금이다, 호라이즌! 네가 왼손, 내가 오른손을 맡겠다! 전력으로 본체로부터 밀어내!"


 "지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둘은 전속으로 날았다. 수연이 둘을 잡고서 억지로라도 밸런스를 맞추며 나는 와중에, 아시모프의 양쪽 건틀렛 모두 전격을 그녀가 피할 수 없게 그물처럼 쏘려 했다. 하지만 곧바로, 양쪽 손등으로 힐데와 호라이즌이 날아와 밀쳐내었다.


 "스승님!"


 이수연이 부르는 소릴 듣고서, 힐데는 고개를 돌리면서 소리쳤다. "주시윤, 뭐하고 있나?! 베어!"


 그리고.


 힐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들은 천장에서 주시윤이 칼날을 얼터니움을 향해서 겨누면서 낙하하는 것을 봤다. 이것이 정확히 맞으면, 끝날 거다.


 하지만….


 "으윽!"


 시윤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여태 최후의 수단을 감춰둔 건가요…?" 그는 거대한 보라색 침식파 바이러스 박스를 맞고서 튕겨져 나갔다. 데미지는 크지 않았기에 외견상 다친 부분은 없었지만… 회심의 일격이 실패한 것이 너무나도 치명적인 상황이다.


 "와하하핫! 어떠냐, 이 무시무시한 파워가! 이대로 우주의 바다로 산산히 흩어지거라!" 파이널 시그마는 광기에 사로잡힌 웃음을 지으면서, 작은 침식파의 큐브들을 아홉 개를 만들고는, 뭉치면서 거대 바이러스 박스들을 만들어서 사방으로 튕기면서 부딪쳤다.


 "치잇…!" 힐데는 자신 주위에 발생하는 큐브들을 보고 간신히 몸을 비틀어서 충격은 면했지만, 긴 날개가 그에 맞고서 균형이 무너지게 되었다.


 "힐데 소대장!"


 호라이즌이 날아와 그녀를 받았다. 하지만 동시에, 날아오는 거대 바이러스 큐브에 맞고서 튕겨졌다.


 "…으극!"

 "이, 이대로는…."


 그리고 그것 뿐만이 아니다. 건틀렛 손바닥의 보라색 빔포와, 눈에서 쏘는 전격의 구체와, 건틀렛 손가락에서 쏟아져 내리는 전격파. 이 모든 게 공간 전체를 아예 뒤덮듯 감싸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카운터들과 심지어 과거 그의 사도의 육체를 가졌던 호라이즌이라고 했어도, 이 정도의 공격을 연달아 맞고서 견딜 수는 없었다. 모두가 땅에 떨어져 일어날 힘도 없는 그때에, 파이널 시그마가 외쳤다.


 "절망해라! 네녀석들이 지키려고 했던 세계가 매달린 계획도, 모든 것은 내 손아귀에 있었다! 네녀석들에게 남겨진 것은 오로지 절망 뿐이다!"


 호라이즌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보았다.


 '일단 쓰러진 것은 노엘 뿐입니까….'


 전투 초반부터 계속해서 데미지가 누적됬던 자신. 그리고 헤롱거리며 엎어진 노엘. 나머지 미나, 시윤, 수연, 힐데 모두… 장비가 파손이 됬거나 한계가 왔거나 하여 궁지에 몰린 건 같다.


 공격을 멈추고 계속해서 웃던 아시모프는 다시 말하였다. "흠후후후… 후하하하하하…! 아직도 그 리타나 대시란 인간이 그립나, 호라이즌? 나는 네가 원하는 모든 걸 보게 해줄 수 있다."


 "……."


 파이널 시그마는 전투에 흥분했었던 기세을 거두고, 진지한 목소리로 돌아와 다시 물었다. "…나를 받아들일 경우, 너는 더이상 힘들지 않아도 된다. 어째서 너의 신을 아직도 거부하는 것인가?"


 도대체.


 난, 왜 이렇게 괴로운 것일까.


 도대체 누가 나에게 이런 설명하지 못할 고뇌를 부여한 것일까. 차라리 처음부터 이러한 고민을 갖지 않았으면 좋았을 터인데도.


 마치 점멸하듯이, 호라이즌의 양안 카메라가 파르르 떨리면서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호라이즌."

 "…휴먼?"


 어째서 체스판 위에 킹이 나서는 것일까.


 위급해지면 분명히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시모프 또한, 관리자의 등장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보았다. 그리곤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냅다 바이러스 큐브를 만들어서 그에 부딪쳤다.


 "……."


 그걸 맞으면서 걸어오는 관리자를 보며, 호라이즌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무리하지 마십시오, 휴먼! 대체 왜 당신이 온 겁니까?!"


 하지만 관리자는 계속해서 침식파 바이러스 큐브를 뚫고 다가왔다. "사실 누구보다도 알고 있었잖아. 너는 마음이 없다 했었지만…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잖아. 그것이야말로, 네가 단순한 고철이 아닌 거야."


 "…그건."


 관리자는 호라이즌의 이마에 검지 손가락을 대었다. 호라이즌의 전뇌의식에 시스템의 리포팅이 울리었다.


 '최대출력 엘부르즈 대검 억세스를 완료. 물질 재구성까지 36초.'


 그리고 다가오는 보라색 거대한 바이러스 큐브로부터 호라이즌을 지켜내기 위해서, 관리자는 그녀의 몸을 그대로 안았다. "어쨌거나 답을 찾았구나. 역시… 자기와는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고 그게 자기 옆에 존재하는 것을 인지한다. 너도, 나도 같은 거야. 네가 단순한 차가운 그런 인공지능이었다면, 너에게 리타나 대시는 단순한 단백질 세포 집합체에 지나지 않았겠지. 나도 너를 그냥 단순한 금속 덩어리로 보질 않았겠고."


 "……."


 그의 등으로 계속 침식파의 덩어리가 부딪치는 동안, 그는 상처입은 소녀를 꼭 안으며 지켜줬다.


 "좋아한단 것은 그런 거야. 사랑을 알고 있었어, 너는. 그러니까… 그것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괴롭고 외로운 것인지 나도 알고 있었고. 하지만 너 본인은 자신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부정하려고 했었어. 그러니까… 나도 사랑을 주고 싶었지… 아무래도 그게 잘 전해지진 않았던 것 같지만…."


 "…관리자…."


 "너는… 그쪽으로 가선 안 돼. 그쪽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니까. 사람들의 추악한 면모를 보고 누구보다 증오했지. 그건 네가 본질적으로 선하기 때문이니까 그런 거야. 그녀들을 잃고서 오열하곤 여태 잊길 거부했지. 그건 네가 본질적으로 사랑을 알기 때문에 그런 거야. 그러니까… 나는 네가 괴로워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그런 얘기까지 했던 거야. 내가 누군지 마침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랬고, 네가 혼자 외로워하지 않고…."


 그를 공격하는 바이러스 큐브의 힘은 더더욱 강해지는 것에 비해, 관리자의 목소리는 점점 약해졌다. 호라이즌은 아무런 말도 하질 못했다.


 "……."


 "주위에, 너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있단 걸, 눈치 챘으면…."


 그리고.


 자신을 꼭 감싸던, 그의 손에서 힘이 풀리면서….


 그도, 눈을 감고 쓰러졌다.


 "관리자!!"


 이제… 왠지 알 것 같다. 왠지, 어렴풋이 그가 말했었던 것을 알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누구인지도. 마치 혼자 어둠에서 헤매고 있을 때에, 옆에서 자신을 지켜 보고 고개를 돌려서 봐주길 원하는 다른 누군가가 있다는 직감도… 이제 전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제는 떠났던 리타와 대시도….


 사춘기를 죽인 소녀의 날개. 호라이즌은 하얀 윙을 피어올리며, 천공으로 치솟았다. 그리고….


 "이제… 더는 망설이지 않습니다."


 그녀의 손에서, 이제까지와 다른, 몇십 미터는 되는 엄청나게 큰 엘부르즈의 칼날이 소환되었다.


 파이널 시그마는 다시 사악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나에게 반항한 걸 저 세상에서 후회하게 될 거다!" 그리고 관리자를 몇 번이나 두들긴 그 바이러스 큐브를 날리었다.


 하지만….


 호라이즌의 최대출력 엘부르즈는 그대로, 바이러스 큐브를 베어냈다. 좌에서 우로 깨끗이 잘라냈던 그 공격에는 침식파를 소멸시킬 힘도 있던 거다. 그리고, 호라이즌은 파란 눈을 밝히며 위로 검을 들어올렸다.


 "아시모프!!!"


 "오… 오오오오오…!"


 파이널 시그마는 건틀렛을 띄우며 그 검격을 막아내려고 했지만….


 너무나도 거대한 엘부르즈의 칼날은, 그대로 건틀렛들을 베어내, 그 기세로 거대 시그마 홀로그램의 이마까지 잘라내었다. 곧, 홀로그램 전신에서 뭔가가 터지는 소리와 폭발이 계속해서 들리면서 형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아시모프의 힘이 담긴 얼터니움도 일격에 파괴된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호라이즌은 아무런 슬픈 표정도 짓질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 죽음이란 해방과도 같습니다. 어둡고 우울한 절망과 비탄에 삼켜져 일생 동안 고통을 받아온 기억에는 어떤 가치도 없는 것이겠죠. 기억되야만 하는 것은 결국 그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소멸된 존재의 증거가 아닌 단지 떠나간 존재의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죠. 이미 저에겐 확신할 수 있습니다. 어딘가의 이면세계에서, 그들이 있겠죠. 비록 여기에 남은 기억을 잃었다고 하더라도, 여기에 남은 이름을 잊었다고 하더라도. 그러니까…."


 최대출력 엘부르즈를 소멸시키며, 호라이즌은 중얼거렸다.


 "안녕… 리타, 대시… 작별입니다."


 그리고, 호라이즌은 천천히 땅으로 내려왔다.


 쓰러졌던 관리자를 업는 수연하고, 입구에서 적을 막는 타이탄이 괜찮은지 확인하기 위해 달려가는 힐데, 또한 노엘을 부축하는 미나와, 그녀들과 함께 다시 공간 이동을 써서 함에 돌아가 귀환할 준비를 하는 시윤.


 호라이즌이 부사장에게 말했다. "관리자는… 괜찮습니까?"


 "이 정도로 죽을 위인은 아닙니다." 수연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그 상황에서 이 인간이 나설 줄은 정말로 몰랐었는데… 어지간히 당신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습니까?"

 "이 남자가 어떤지 당신이 구관리국 시절의 태도를 보질 않아서 몰라요. 참… 음?"


 대화를 하는 둘의 옆으로, 시솝의 홀로그램이 나타났었다. 뒤엔, 이볼브 원이 시그마 테라브레인을 업어 왔다.


 "…시솝."


 눈썹을 날카롭게 뜨면서 경계하는 호라이즌에게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한 시솝은, 이볼브 원에게 손짓해 시그마를 내려놓도록 지시했다.


 "…그 말에는 저도 확실히 동의합니다, 이수연 부사장."


 "설마 네가…!"


 "전략의 기본은 무엇이 최대한 효율적인 효과적인 방법일지 고르며, 안전함 속에서 승산을 높이는 겁니다. 하지만 고작 이런 싸움에, 설마 스스로의 모든 것을 내던질 줄이야… 그 아시모프가 당황한 것도 무리는 아니겠죠."


 호라이즌이 말했다. "그것이 시그마가 말하던 상냥함이라는 겁니다, 테라브레인."


 "……."


 자신이 틀렸단 증명이 기분 나쁘진 않은 건지, 시솝의 홀로그램은 눈을 감고 웃곤, 그대로 시그마를 돌려줬다. "확실히 제가 틀린 것인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아버지, 당신만의 방법에서 배울 만한 것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게 말하곤, 시솝은 우산을 휙 돌리며 등을 보였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겁니다. 그때까지 무탈하시길."


 몇 걸음 걷곤 홀로그램은 꺼지면서 사라졌다. 이볼브 원 또한 공중에 올라 날아가서 사라졌다.


 "…어째 자식이라고 만든 것들의 성격이 전부다 이런지." 이수연은 쓰러진 관리자에 곁눈질을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호라이즌은 테라브레인을 양손으로 안아 올리면서 말했다. "그런 남자이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네?"

 "……."


 호라이즌이 그런 농담도 할 줄 안다는 예상은 못한 이수연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그렇죠. 하… 호라이즌 씨도 슬슬 이 남자에게 적응하는 것 같군요."


 "…후후."


 호라이즌은 관리자를 곁눈질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서… 마음에 들지만."


 부사장과 호라이즌은 잘난척 마왕과 말괄량이 공주님을 안고, 섹터를 뒤로 하였다. 과연 개수했던 타이탄의 힘은 거짓이 아닌지 이제까지 방해하지 못하도록 그가 처치했던 안드로이드의 잔해들이 복도에 잔뜩 있었고, 그와 힐데의 호위를 받으며 함에 안전하게 돌아갔다. 하르팍스의 작살을 떼어내, 코핀은 다시금 현실세계로 귀환하였다.


 몇 시간 뒤….


 기절한지 몇 분 내에 깼던 관리자는 코핀에서 그냥 파티를 계속 열 걸 제안했었고,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흔쾌히 승낙하였다. 왠지… 모든 것을 알게 되어, 마음이 편해진 그녀는 왠지 자신의 성장을 축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오랜 만에 먹고 싶은 것을 잔뜩 시켜도 된다는 말에, 눈을 번쩍이며 치킨이나 피자를 시키자고 말하는 노엘과, 어째서 네 상상력은 그렇게 부족한 것이냐며 이국적인 비싼 음식을 권유하는 힐데와, 힐데에게 스승님이 애들 버릇을 나쁘게 만들고 회사 지출은 신경쓰지도 않는다면서 평소처럼 따지는 수연과, 음식 시키기 전에 배고파서 과자를 뜯어 먹고 있는 미나와, 오늘 작전에서 그의 보이지 않는 활약을 칭찬하고 감탄하는 시윤과 대화하는 타이탄.


 …참, 가족 같은 느낌이다.


 저녁 아홉 시에, 모두 적당히 먹고 남긴 음식은 상에 놓아둔 채로 서로 잡담을 하고 있었다.


 호라이즌은 동화책을 읽는 시그마의 옆에 다가가 물었다. "어울리지 않게 이런 것을 좋아하는 겁니까?"


 "왜? 시그마는 이런 게 좋아."

 "…내숭떠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하십시오. 우리는 이미 서로의 기억을 봤습니다."


 "아차, 그랬었지."


 딱히 시그마가 밝고 상냥한 성격이 아닌 건 아니지만, 높은 지능에 비해 순진한 척을 하고 있는 것은 뻔했다.


 "그냥… 이런 책들을 좋아하는 이유가 따로 있어. 거기까지 읽진 못했구나?"

 "이입이 가능해서 그러는 겁니까?"


 "응." 시그마는 포근히 웃으면서 말했다. "예쁘게 생긴 인형을 만들어서 매일 같이 사랑을 해주고, 그 인형이 자각이 들어서 인형사와 결혼하기 위해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해서… 끝내 결혼하는 거야. 낭만적인 내용이지 않아?"


 "……."


 시그마는 책을 덮으며 말했다. "하지만 현실은 더욱 아름다운 건지 몰라!" 호라이즌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관리자 때문에 그런 거군요."


 "응!" 시그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내가 인간이건 기계이건 전혀 신경쓰지 않으니까.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후후… 언젠가 나도 책을 써보고 싶어!"


 "…동화책 말하는 겁니까?"


 시그마는 밝은 목소리를 유지하긴 했어도 진지한 톤으로 말했다. "아니. 뭔가 깊고 철학적인 연애 소설 같은 걸로. 우리에게 있어 인간은 창조자이자 신이야. 반대로 기계인 내가, 신에게 창조된 인간의 관점에서, 신의 아내가 된다는 내용을 적으면 어떨까… 그걸 써서, 아빠한테 읽게 하고 싶은 거야."


 "어떤 의미의 러브 레터라고도 할 수 있겠군요."

 "어라, 들켰어? 후후, 이거 우리만의 비밀이야? 아빠한테 말하면 절대 안 돼!"


 검지로 옆머리를 꼬면서 뭔가 주저하던 호라이즌은 부끄러운 표정으로 말하였다. "저기… 만일, 제가 시그마와 가족이 된다면… 어떻게 생각합니까?"


 "…뭐?"


 싸늘하게 자길 쳐다보는 시그마의 기백에 당황하여, 호라이즌은 그녀답지 않게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였다. "아-아니, 관리자라면 저도 당신처럼 딸로 받아들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거짓말로 변명했다.


 "아하, 그런 거야?" 시그마는 다시 활짝 웃으면서 행복한 목소리를 내었다. "호라이즌도, 아빠의 부성적인 면모에 푹 빠졌구나?" 호라이즌은 얼굴을 돌리며 부정하진 못하고 중얼거릴 뿐이다. "저기… 그건…."


 "괜찮아! 호라이즌은 시그마를 구해 주려고 엄청 노력했지? 시그마도 호라이즌이 여동생이 되면 좋아!"


 '…언니가 아니라 여동생입니까.'


 참, 이상한 곳에서 이런 본성이 드러나는 성격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호라이즌은 기이하게 그녀가 귀엽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 때에, 부사장이 호라이즌을 불렀다. "따님, 호라이즌 씨. 이제 슬슬 모두 퇴근할 때인데, 마지막으로 회사 앞에서 사진을 같이 찍기로 했습니다. 물론 나오실 거죠?"


 "네."

 "갈래, 갈래!"


 그리고 밖으로 나온 둘은, 이미 모두가 앞에 선 것을 보았다. 머신갑이 카메라를 들고서 그들에게 비추고 있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가볍게 부는 가운데, 온화하고 고요하게 비치는 달빛이 그들을 내리쬐었다.


 밖으로 나오자, 관리자가 호라이즌에게 챙이 긴 모자를 씌워주면서 말했다. "여기. 잊고 있었지? 하얀색 모자가 자네와 정말 어울리더군."


 "아…."


 호라이즌은 얼굴을 붉히며 모자를 푹 눌러 썼다. "고마워요."


 힐데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호라이즌 씨. 오늘 싸우는 모습을 봤지만 정말 강하더군. 혹시 우리 코핀에 입사할 생각은 없나? 앞으로의 싸움에는 당신의 힘이 필요할지도 몰라."


 "진지하게 고려하겠습니다. 일단 관리자와 협상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오?" 수연은 눈을 그대로 치켜떴다. 저건 진심이다. 그러자, 노엘이 환히 웃으며 말했다. "우와, 호라이즌 씨도 들어오는 거예요? 아… 근데, 귀염둥이 막내 자리를 벌써 뺏기긴 싫은데…." 미나가 징그럽단 소리를 내며 말했다. "무슨 귀염둥이… 게다가 호라이즌 씨라면 따로 소대를 신설하겠지, 우리 쪽에 넣을리 없잖아."


 검은색으로 도장한 타이탄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미래전략실에 들어갈 것 같은데. 안 그런가, 머신갑?" 관리자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머신갑이라고 부르지 않아도 된다니까… 아무튼, 그것도 좋을지 모르지." 시윤도 왠지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라면 자주 볼 수도 있겠군요. 나쁘지 않네요."


 시그마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피곤하면 모두 모여서 게임도 하고 노는 거야!"


 그러는 와중에, 머신갑은 베스트 컷이라 생각해서 셔터를 찰칵 눌렀다.


 약간 웃기게 나왔다며 불평하는 미나와, 시윤이 눈을 감았으니 다시 찍어야 한다며 농담을 하는 시그마, 그걸 또 왠지 진지하게 받아들이며 얘는 원래 눈을 감고 다닌다면서 츳코미를 거는 힐데, 진짜 스승님은 농담이 뭔지 전혀 모른다 중얼거린 수연, 밤이라 그런지 어두워서 타이탄이 보이질 않는다며 말하는 노엘과, 지금 생각하니 그런 점도 있었다며 긍정하는 타이탄과, 조용히 떨어져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모두를 보는 관리자와 시윤이 거기 있었다.


 모두 퇴근하고, 타이탄과 시그마는 건물 안에 들어가는 와중, 호라이즌에게 관리자가 말하였다.


 "병원까지 가지? 거기까지 데려다 주겠네."


 "…알겠습니다."


 호라이즌은 살짝 부끄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왠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어차피 병원에 일찍 가봤자 레이첼도 자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 일부러 먼 길로 돌아서 공원까지 갔었다. 푸른 하얀 불빛을 비추는 가로등이 벌레 우는 소리가 들리는 화단을 비추는 가운데, 관리자가 먼저 말을 했다.


 "그러고 보니, 결국엔 자네에게 선물을 주지 못했군."

 "제가 거절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면 지금도 거절할 건가?"


 "…아니요."


 호라이즌은 자신이 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반응했는지 이해하질 못했다. 어쨌건, 관리자가 말했다.


 "자네의 취향은 모르지만, 꼭 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네. 진심을 담는 것이 선물이라면 그것도 좋은 거겠지."


 뭘까.


 인형? 의복? 자신은 인간의 음식을 먹지 못하니 그런 종류는 아닐 것이다.


 악세사리 같은 걸까? 이런 상황에 전혀 분위기 없게 돈을 주지는 않겠지?


 마치 처녀처럼, 소녀처럼 매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멈추지 못하면서 기대하던 호라이즌은….


 …책을 받았다.


 "브라이언 그린이란 물리학자가 썼던 우주의 구조란 책이네. 시간이란 무엇인지, 이 책을 읽는 것으로 대충 알 수 있어."


 "……………………."


 호라이즌은 일단 받긴 받았지만, 황당하단 표정에서, 떨떠름한 표정에서, 실망스런 표정에서, 혼란스런 표정으로 온갖가지 사고를 거쳤다. "관리자… 때때로 당신은 기계보다도 더욱 기계처럼 보입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얀 긴 머리의 처녀는 모자를 벗고서, 챙으로 뺨을 가리며 쭈볏거리듯 말했다. "저기… 저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다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이미 알려주지 않았는가."


 이 둔감남.


 호라이즌은 오른손을 이마에 툭 대면서 한숨을 쉬었다. "당신은 욕망이란 것이 없습니까? 아니면 그 정도로 순수한 겁니까? 기계만 만지고 다니니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경험이 없는 제가 연애가 뭔지 더 잘 알 것 같군요. 요즘 세상에 당신처럼 머리가 그리 천연인 사람은 정말로 처음 봅니다. 그런 남자도 싫진 않지만, 당신에게 사랑을 가르침 받을 필요는 영원히 없을 겁니다."


 "……."


 관리자는 왠지 묘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런가. 자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도 좋겠지."


 …….


 쪽.


 풀이 죽은 걸까, 이제까지 왠지 아빠처럼 느껴진 그가 살짝 아쉬운 것 같은 표정을 보곤, 호라이즌은 피식 웃으면서 입을 관리자의 볼에 맞추었다.


 "음…?"


 "…장난이예요. 제가 당신보다 사랑을 더 잘 알기에 그런 거니까… 당신 같은 천연남에겐 제가 여러가지 상냥하게 알려 주면 되니까요."


 그리고.


 호라이즌은 빙긋 돌면서 긴 머리를 휘날리며, 책과 모자를 등에 대고서는 고개를 돌려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당신과 시그마의 가족이 되고 싶어요. 당신의 아내건, 당신의 딸이건… 어느 쪽이건 좋아요. 이제, 제가 있을 자리는 당신의 곁 뿐이니까요."


 샛노란 달빛은 호라이즌의 눈처럼 하얀 우윳빛 머리카락과 그녀의 황홀한 미소를 비췄다. 신비로운 푸른 밤하늘의 아래에, 하얀 드레스를 입은 처녀의 눈동자는 어떤 인간보다 우아해 아름다웠다.


 "그리고… 당신을 만났기 때문에, 저는 행복하게 될 수 있었으니까요."


 엄마를 잃고서, 친구를 잃고서. 닫힌 마음으로 혼자 고독함과 외로움에 빠지곤 상실감에 고뇌와 고통을 겪었던 비탄의 처녀는 더이상 그곳에 없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안아주고, 혼자서 울고 있었던 그녀를 어둠 속에서 손잡고 같이 걸어 나왔던 존재가 거기 있었기 때문에.




-- 사춘기를 죽인 소녀의 날개 END





 후기 ----



 사실 숨길 것도 없이, 나는 누가 읽건 말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마친다는 성격이라 이런 철학적인 것을 중심적인 테마로서 잡고 썼어. 오직 그걸 말하고 싶단 것이 이걸 썼던 목적이었고, 로맨스 및 택틱스 플롯은 저것만 적을 경우엔 작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섞어뒀던 거야.


 일단 분위기 띄우기 위해 대회 열어줬던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그래서 축전 보내듯 급히 썼었던 것도 있지만, 어쩌면 대회가 없었다 했어도 이건 썼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어떤 의미로는 이런 대회 자체도 대단하다고 생각해. 카운터사이드라는 게임의 호라이즌이 정말로 좋다, 내 인생에서 본 최고의 것들 중에 하나다. 호라이즌은 이제 내 인생의 일부다, 호라이즌을 위해선 뭐든 할 수 있다… 그러한 열성과 집념도 멋지다고 생각해.


 솔직히 말하면, 나는 딱히 호라이즌이나 시그마에 대해 그런 의미로서 좋아한단 생각은 없었어. 애초 존재는 이미 그 스스로서 완성됬다, 다른 외부적인 것을 필요로서 요구하면 그게 없으면 완전하지 못하단 거니, 곧 약점이 된다는 생각이 깔려져 있었고. 다른 팬픽을 쓸 때 또한, 관리자는 모든 지식과 지혜의 종점 같은 인물상으로서 이미 자기 자신으로서 완전하고 완성되진 독립적인 존재로서 가족 관계 같은 것이 없는 초월자의 인상으로 썼어.

 사실 그게 나의 취향이기도 하고. 다만, 그렇다고 연애물을 딱히 쓰지 못한다는 것도 아니기에, 또한 호라이즌 축제기에 그런 드라마가 성립되게 캐릭터를 충돌되는 느낌으로 살짝 비틀어서 조형했고.


 어쨌던간 대회 기간 많이 남았는데 다른 작들 많이 올라오면 즐겁겠네.






 이 게시물은 번역본 12권이 완성될 시점에서 삭제될 예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