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로이와 팬드가 서로 몸이 바뀌는 이야기

금방이라도 스파크가 튀어오를 것 같은 살벌한 분위기의 프리드웬 기관장실, 로이와 엘리자베스가 서로를 못마땅하게 노려보고 있는 상황 자체는 일상적인 풍경이었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한숨만 나오네요. 이걸 페리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귀족아가씨 특유의 고압적이고 도도한 말투, 하지만 그 목소리는 잔뜩 얼굴을 찡그린 로이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별수 있냐.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지.”


얼굴은 엘리자베스였지만, 찡그린 표정과 건들거리는 말투가 아주 로이를 빼다박은 여자가 투덜거렸다.


“역시 이렇다할 계획도, 뾰족한 생각도 없으신가보군요. 그러니까 괜히 나대다가 이런 상황이나 초래하게 되는 거겠죠.“


미확인 아티팩트를 회수하는 작업을 둘이 함께 수행하게 됐을때도,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직후까지도 이렇게 될줄 몰랐다. 


처리와 운반에 대해 옥신각신하다가 놓치는 바람에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아티팩트를 로이가 간신히 잡아챈것까진 좋았지만, 별안간 뿜어져나온 눈부실 만큼 밝은 빛이 두 사람을 덮치고 난뒤 눈을 감았다 뜬 그들은 자신의 얼굴을 거울 없이도 볼 수 있었다.


서로의 몸이 뒤바뀐 것이다. 


“...젠장.”


이렇게 된 경위를 되돌려 본 로이는 엘리자베스의 목소리로 나지막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 말고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분명 그녀의 말대로 ’이렇다할 계획도, 뾰족한 생각도 없이‘ 행동한 것은 맞았다. 


무슨 효과를 가진 건지도 미지수인 아티팩트로부터 엘리자베스를 지키려고 자신도 모르게 머리보다 몸이 앞섰던 것 뿐이었으니까.


다만 그 낯 뜨거운 이유를 입 밖에 내는 것은 그녀를 위해 행동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용기가 필요했던 관계로, 로이는 자신을 흘겨보는 날카로운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의자등받이에 거의 눕듯이 기대어 앉을 뿐이었다. 


“물벼룩, 그거 금지에요.”


엘리자베스는 곧바로 도끼눈을 뜨고 로이를 향해 손가락질을 하며 말했다. 


“왜, 뭐가?”

“당신이 지금 누구의 모습인지, 잊어버린건 아니겠죠? 그 상태로 속옷 뭐 입었는지 온세상에 자랑하듯 그렇게 적나라하게 다리를 쩍벌리는거 절대, 절대 용납 못해요.“


아 맞다, 그랬지.


로이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다리를 오므렸다.

확실히 가랑이 사이에 묵직한 무언가가 없으니 오므리는게 어렵지 않기는 했다.

하지만 태어나길 남자로 태어난 그는 아랫도리에 바람이 숭숭 드는 치마를 입는다는 것 자체가 영 께름칙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이렇게 불편한걸 뭣하러 입냐...”

“제 다리는 완벽하게 아름다우니까요.“


로이는 미친 자존감을 가진 이 여자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감상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우연히 눈에 들어올때마다 그녀의 다리는 치마를 입지 않는게 낭비일 정도로 예쁘긴 했으니.


..그런데 참 별것도 아닌 이유로 치마를 고집하고 있었구나싶었다.


아무래도 조신하게 다리를 오므리고 앉는 게 익숙하지 않은 로이는 최대한 치마 속을 보이지 않게 주의하면서 다리를 꼬았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좀 치켜뜨긴 했지만 지적까지 이어지진 않았고, 곧이어 기관장실 안으로 모건과 페리어가 들어와 로이에게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 


“푸흡.”


로이는 엘리자베스가 아니라 자신을 향해 고개를 숙이는 할배들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나와 손으로 입을 가렸고, 두 충실한 기사들은 난데없이 웃음보가 터지기 일보직전인 기관장을 이해하지 못한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들어올렸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모건과 페리어의 시선은 당연스럽게도 로이를 향해 있었다.

그들은 아직 엘리자베스 몸의 내용물이 로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크흠. 그 뭐냐, 사정이 좀 생겨서 기관장 아가씨는 지금 이 쪽..” 


로이는 헛기침으로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감추며 로이의 얼굴을 하고 분기탱천해 있는 엘리자베스를 가리켰다. 


”그 말대로에요. 제가 프리드웬 기관장, 엘리자베스 팬드래건입니다.“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몸으로 여성스러운 제스쳐와 말투로 우아하게 소개를 받는 것을 본 로이는 거울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의 표정이 어떨지 어느정도는 알 수 있었다.

실시간으로 구겨지고 있는 모건과 페리어의 똥씹은 표정이 지금의 자신보다 더하진 않을 것이기에. 


“..이해했습니다.”


로이의 입을 빌린 엘리자베스의 자초지종 설명을 들은 두 노기사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이의 제기 없이 기관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서 그들의 맹목적인 신뢰와 충성심이 엿보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표정관리까지는 힘들었던것 같다.


“..그래서 당분간 물벼룩과 저는 숙식을 기관에서 해결하며, 원래의 몸으로 돌아갈 수단을 강구할 예정입니다. 두 분께도 지금까지와 같은 협력을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페리어는 끝끝내 엘리자베스, 그러니까 로이의 푸른색 눈을 마주치지 못 한채로 대답했다.

아가씨라는 호칭도 가까스로 내뱉은 듯 했다. 

물론 아가씨보단 아저씨에 가까운 성별이긴 하니까. 거부감이 드는 것도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상황 설명이 끝난 뒤 두 사람이 물러난 기관장실엔 또 다시 두 남녀만 남게 되었고 로이는 엘리자베스에게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야, 근데 왜 기관에서 숙식을 해결해야 되는데? 너는 상관이라 모르겠지만, 상관이랑 함께 있는게 부하직원에게 얼마나 숨막히는 일인지 알아? 적어도 퇴근시간 이후의 자유를 보장해줘야 되는거 아니냐?“

”미쳤어요? 당신이 제 몸으로 뭘 할 줄 알고요?“


로이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엘리자베스는 성격이나 언행이 좀 유별나긴 해도 외모와 몸매만은 자타공인 톱클래스였다. 

그리고 지금 그 몸이 그의 수중에 있었다.

그걸 자각하고 나니 왠지 흉부의 지방덩어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엘리자베스는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의자에 신경질적으로 주저앉아 눈을 꽉 감고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기회는 지금뿐이다.


로이는 천천히 고개를 밑으로 숙였다. 

엘리자베스가 즐겨 입는 드레스의 앞섶이 푹 파여 있는 디자인덕분에  탱글한 두 젖가슴이 만들어낸 깊은 골짜기가 만든 아름다운 절경이 그의 눈 앞에 펼쳐졌다. 


“헉.”

”..뭐했어요, 방금?“


엘리자베스가 그를 날카롭게 노려본다.

다행히 심증만 있고 범행을 발각당한 것 같지는 않았다. 


“아니, 아랫도리가 너무 서늘해서. 진짜 치마 계속 입어야 하냐..?“

“말이라고 해요? 남자가 돼서 그 정도도 못 참나요?”


엘리자베스가 한심하다는 듯 경멸하는 눈초리를 보냈고 가까스로 얼버무린 로이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을 진정시키려는듯 찻잎을 우려내기 시작한 엘리자베스.

로이는 그 틈을 타 몰래 자신에게 달려 있는 젖가슴을 주물렀다. 


두 손에 가득 전해지는 아찔한 부드러움.

마약처럼 중독될 것만 같은 촉감이 그를 흥분하게 했다. 

물론 들키기 전에 언제든 딴청피울 수 있게 눈으론 엘리자베스를 쫓는 것을 잊지 않는 로이였다. 

걱정하지 마라, 손은 눈보다 빠르니까.


‘..진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다...!’


그 어느때보다도 독립이 간절해진 로이는 엘리자베스가 그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려는 낌새를 느끼자마자 옷매무새를 고치는 시늉을 했다. 


엘리자베스는 미심쩍은 눈치를 숨기지 않은채 로이의 찻잔, 그리고 자신의 찻잔 가득 홍차를 따르고 우아하게 의자에 앉았다. 


“...야. 홍차폭탄.”

“네. 말씀하시죠.”

“어째 평소보다 꺼내놓은 과자랑 케이크의 양이 많은 것 같다?”


엘리자베스는 못들은 것 처럼 척 보기에도 칼로리 폭탄처럼 보이는 케이크를 집어 들더니 망설임 없이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함에 전율을 느끼는 듯한 표정.

그 표정을 짓고 있는 얼굴이 평소의 엘리자베스의 얼굴이었다면, 그가 이토록 원초적인 거부감을 느끼진 않았을 텐데. 

모건과 페리어에게 이런 표정을 안 보인 것이 불행중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 엘리자베스는 쿠키를 한번에 두개나 입에 넣었다. 

분명 저 쿠키는 엘리자베스가 하루에 하나밖에 안 먹는 고칼로리..

로이는 눈깜짝 할 사이에 또 다시 하얀 슈가파우더가 왕창 뿌려진 숏케이크를 집어드는 엘리자베스의 손목을 낚아챘다.


”야, 너 그거 네 몸 아니라고 너무 막 먹는거 아니냐..?“

“글쎄요, 기분 탓 아닐까요?”


하여간 뻔뻔하기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여자답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럼 나도 네 몸으로 배터지게 먹어준다.”

“절대 안 돼요. 제가 체형관리에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아시나요? 그리고 남자는 살집이 좀 있어야 보기 좋아요. 당신은 무슨 멸치도 아니고, 삐쩍 말라서..“

”뭐? 잔근육이 아로새겨진 날렵한 몸이거든? 만져보던가!“

“잔근육이요? 이게요? 너무 말랑해서 푸딩인줄 알았네요.”


도발하듯 자신의 몸이 된 로이의 몸 이곳 저곳을 보란듯이 만지작대며 엘리자베스는 콧방귀를 뀌었지만, 그녀는 집었던 숏케이크를 내려놓았다. 

아무래도 로이의 협박이 먹히긴 한 모양이었다. 


괘씸하기 짝이 없는 여자다.

자신의 몸은 함부로 하지 말라면서, 자기 몸 아니라고 초고칼로리 간식을 냅다 먹어치우는 이기적인 여자.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케이크를 내려놓고 다소 움츠러든 엘리자베스가 왠지 조금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한 로이는 그간 그녀가 얼마나 참고 살았을까 하는 연민에 빠져 엘리자베스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음.. 홍차폭탄. 내가 생각을 좀 해봤는데, 그래도 남자 몸이 대사량이 높을거니까.. 평소보다 조금은 더 먹어도 되지 않을까.”

“..물벼룩.”


로이의 얼굴을 한 엘리자베스가 볼을 붉게 물들인 채 엘리자베스의 얼굴을 한 로이를 올려다 보았다.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