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야아, 너 뭐 하구 있냐?

뭐하긴, 일하지.

그래? 그러면 이따 나와서 밥이나 먹자.

뭐? 언제?

너 일 끝나면…… 다른 애들한테두 연락하려구. 오랜만에 얼굴들 좀 보게.

어딘데?

막 서울루 올라왔다.

야아, 아서라, 애들두 다 일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취업한다구 뿔뿔이 흩어져서, 부른대도 하루 만에 올 놈은 아무도 없다. 것보다, 너 입대하지 않았냐? 뭐, 탈영이라도 했나?

탈영은 무슨, 휴가지 휴가……. 그래, 알았다.

어어. 그래? 휴가? 며칠 짜린데?

알아서 뭐 하게?

뭐, 날짜 맞으면 봐서 얼굴 좀 보려 그러지…….

됐다. 치워라……. 언제 또 나오겠지.

그래? 또 나올 수 있나? 어디 후방에라두 배정됐나?

그런 건 아니구. 그냥 뭐 죽기야 하겠냐는 뜻이지.

야, 모르는 일이다. 요즘 또 흉흉하더라.

네 일 아니라구 그렇게 말하기 있냐?

예민하구만, 우리 정 신부. 그래, 팔다리 멀쩡히 돌아오기만 해라.

신부는 무슨……. 그래, 끊어라.

 

정 신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입대 전 술집에서 만난 친구들, 쌈짓돈을 쥐여준 어머니,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동생…….

석 대가 나란히 놓인 공중전화 부스 안에는 정 신부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공중전화 쪽을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 신부는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고, 의미 없는 번호를 누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연락할 이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허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굳이 연락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이렇게 부스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깝기도 해서, 정 신부는 수화기를 전화 위에 올려놓고, 남은 돈은 누군가 쓰지 않겠는가, 하는 심보로,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공원 어귀마다 놓인 벚나무에 꽃이 피었다. 제각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짝이 있어 뵈기도 하고, 홀로 걷는 이는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여 그들 사이를 걷는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져 정 신부는 공중전화 근처에 잠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통화는 끝났습니까?”

 

묻는 말에 놀라 돌아보니, 은발 위로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를 목뒤에서 느슨하게 묶은, 낯선 소녀가 바라보고 있었다. 정 신부는 소녀의 질문에 머뭇거리다 그렇노라고 대답했다. 이어 정 신부가 소녀에게 묻길, 혹 전화를 사용하려고 기다렸는지.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얼 보고 있었습니까?”

 

정 신부는 그저 풍경과 사람을 보고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소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신부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절 아십니까?”

“거의 모릅니다.”

“예?”

“오늘 처음 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말을 거신 겁니까?”

“그냥, 눈에 띄어 그랬습니다.”

 

밤톨 같은 머리도 그렇고, 철 지난 공중전화를 쓰는 것도 그렇고,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게 눈에 띌 수가 없었다고. 정 신부는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허나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소녀는 질문을 이어갔다.

 

“군인이십니까?”

“예, 뭐…….”

“부대 밖으로 나와도 되는 겁니까?”

“휴가 나왔죠.”

“얼마나 남았습니까?”

“알아 무에 쓰려 그럽니까?”

“궁금하면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만서도, 그러면은 거꾸로 묻겠습니다. 제가 대답해야 합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잠깐 대답을 궁리하던 소녀는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말하길,

 

“제 이름은 호라이즌입니다.”

 

그것이 무슨 명쾌한 해답이라도 되는 둥 말하는 모습이었다. 때아닌 자기소개는 물론이거니와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정 신부가 주저하는 사이, 호라이즌은 단호히 선언했다.

 

“저는 저에 대한 사실 하나를 알려드렸습니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입니다.”

 

정 신부는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논리에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내 문득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여, 무엇이든 좋으니 자신에 대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친구들은 저를 정 신부라 부르곤 합니다.”

“딱히 궁금하지 않습니다.”

“무어, 당신이 이름을 말할 무렵의 저도 매한가지였습니다.”

“거짓말이군요.”

“확신하십니까?”

“예. 제 이름은 세상 모든 이들이 절대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니까요.”

 

정 신부는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고, 대신에,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물은 질문에 호라이즌이 대답하길, 예. 당신은 세상 모두가 궁금해하나 일부만이 아는 사실…… 어쩌면 비밀 혹은 값진 정보라도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가진 제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것은 하잘것없는 별칭 하나뿐이 아닙니까. 이는 공정하지 못한 거래입니다. 정 신부는 그 논리에 물음을 던지지 않고,

 

“본디 세상 이치가 불공평하더랍니다.”

 

짧지만 명쾌한 대답에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불공평한 세상살이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다면 조금 더 사소한 것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예에.”

“왜 정 신부입니까?”

“제가 신학과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에 신부를 붙이고, 제 성을 앞에 놓아 정 신부라 부르곤 합니다.”

“실지로 신부인 것은 아니고?”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정 신부가 말하길, 신부가 되기 위해선 졸업뿐만이 아니라 많은 절차(진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루하기만 할 뿐만이 아니라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고 덧붙이며)를 거쳐야 하고, 설사 모든 과정을 밟는다 하더라도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정 신부라 불리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과 걱정이 담긴 별칭이라고.

 

“성공,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보통은 그리 말하곤 하지요.”

 

보자,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질문에 정 신부는 대답하지 않고 호라이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불쑥 말했다.

 

“얼마나 더 대화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것만은 잘 모르겠군요.”

“짧지 않은 시간이리라 짐작되는데, 이곳에 서서 계속 얘기할 심산인지?”

 

이만하면 날씨도 나쁘지 않고, 저기 벚꽃이 보이기도 하여 풍경도 좋으며, 주변에 행인도 드무니 대화하기 좋은 자리가 아니냐는 의문에, 정 신부는 목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데…….”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