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야아, 너 뭐 하구 있냐?

뭐하긴, 일하지.

그래? 그러면 이따 나와서 밥이나 먹자.

뭐? 언제?

너 일 끝나면…… 다른 애들한테두 연락하려구. 오랜만에 얼굴들 좀 보게.

어딘데?

막 서울루 올라왔다.

야아, 아서라, 애들두 다 일하느라 바쁘다. 게다가 취업한다구 뿔뿔이 흩어져서, 부른대도 하루 만에 올 놈은 아무도 없다. 것보다, 너 입대하지 않았냐? 뭐, 탈영이라도 했나?

탈영은 무슨, 휴가지 휴가……. 그래, 알았다.

어어. 그래? 휴가? 며칠 짜린데?

알아서 뭐 하게?

뭐, 날짜 맞으면 봐서 얼굴 좀 보려 그러지…….

됐다. 치워라……. 언제 또 나오겠지.

그래? 또 나올 수 있나? 어디 후방에라두 배정됐나?

그런 건 아니구. 그냥 뭐 죽기야 하겠냐는 뜻이지.

야, 모르는 일이다. 요즘 또 흉흉하더라.

네 일 아니라구 그렇게 말하기 있냐?

예민하구만, 우리 정 신부. 그래, 팔다리 멀쩡히 돌아오기만 해라.

신부는 무슨……. 그래, 끊어라.

 

정 신부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이제 또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하나. 머릿속에 익숙한 얼굴들이 떠오르다 사라진다. 입대 전 술집에서 만난 친구들, 쌈짓돈을 쥐여준 어머니, 무얼 하고 있는지 모를 동생…….

석 대가 나란히 놓인 공중전화 부스 안에는 정 신부뿐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공중전화 쪽을 향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정 신부는 오랫동안 수화기를 들었다가 놓고, 의미 없는 번호를 누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연락할 이가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아무래도 허망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굳이 연락한다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이렇게 부스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 아깝기도 해서, 정 신부는 수화기를 전화 위에 올려놓고, 남은 돈은 누군가 쓰지 않겠는가, 하는 심보로, 천천히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공원 어귀마다 놓인 벚나무에 꽃이 피었다. 제각기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짝이 있어 뵈기도 하고, 홀로 걷는 이는 목적지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여 그들 사이를 걷는다는 사실이 생경하게 느껴져 정 신부는 공중전화 근처에 잠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통화는 끝났습니까?”

 

묻는 말에 놀라 돌아보니, 은발 위로 옅은 보랏빛이 감도는 머리를 목뒤에서 느슨하게 묶은, 낯선 소녀가 바라보고 있었다. 정 신부는 소녀의 질문에 머뭇거리다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어 정 신부가 소녀에게 묻길, 혹 전화를 사용하려고 기다렸는지. 소녀는 고개를 저었다.

 

“무얼 보고 있었습니까?”

 

정 신부는 그저 풍경과 사람을 보고 있었노라고 대답했다. 소녀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신부는 자신을 바라보는 푸른 눈동자에서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절 아십니까?”

“거의 모릅니다.”

“예?”

“오늘 처음 봤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말을 거신 겁니까?”

“그냥, 눈에 띄어 그랬습니다.”

 

밤톨 같은 머리도 그렇고, 철 지난 공중전화를 쓰는 것도 그렇고,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으로 돌아다니는 것도 그렇게 눈에 띌 수가 없었다고. 정 신부는 마땅한 대답을 돌려주지 않았다. 허나 소녀 또한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는지 질문을 이어갔다.

 

“군인이십니까?”

“예, 뭐…….”

“부대 밖으로 나와도 되는 겁니까?”

“휴가 나왔죠.”

“얼마나 남았습니까?”

“알아 무에 쓰려 그럽니까?”

“궁금하면 안 됩니까?”

“안 될 거야 없지만서도, 그러면은 거꾸로 묻겠습니다. 제가 대답해야 합니까?”

“어려운 질문이군요.”

 

잠깐 대답을 궁리하던 소녀는 이내 고개를 번쩍 들고 말하길,

 

“제 이름은 호라이즌입니다.”

 

그것이 무슨 명쾌한 해답이라도 되는 둥 말하는 모습이었다. 때아닌 자기소개는 물론이거니와 무슨 숨겨진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하여 정 신부가 주저하는 사이, 호라이즌은 단호히 선언했다.

 

“저는 저에 대한 사실 하나를 알려드렸습니다. 이제 당신이 말할 차례입니다.”

 

정 신부는 이와 같은 허무맹랑한 논리에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지만, 이내 문득 유쾌한 기분이 들기도 하여, 무엇이든 좋으니 자신에 대한 사실 하나를 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제 친구들은 저를 정 신부라 부르곤 합니다.”

“딱히 궁금하지 않습니다.”

“무어, 당신이 이름을 말할 무렵의 저도 매한가지였습니다.”

“거짓말이군요.”

“확신하십니까?”

“예. 제 이름은 세상 모든 이들이 절대적으로 궁금해하는 것이니까요.”

 

정 신부는 무슨 소리냐고 묻지 않고, 대신에, 그것이 의미가 있습니까? 물은 질문에 호라이즌이 대답하길, 예. 당신은 세상 모두가 궁금해하나 일부만이 아는 사실…… 어쩌면 비밀 혹은 값진 정보라도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한 가치를 가진 제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들은 것은 하잘것없는 별칭 하나뿐이 아닙니까. 이는 공정하지 못한 거래입니다. 정 신부는 그 논리에 물음을 던지지 않고,

 

“본디 세상 이치가 불공평하더랍니다.”

 

짧지만 명쾌한 대답에 호라이즌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좋습니다. 불공평한 세상살이에 불평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그렇다면 조금 더 사소한 것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예에.”

“왜 정 신부입니까?”

“제가 신학과를 전공하고 있기 때문에 신부를 붙이고, 제 성을 앞에 놓아 정 신부라 부르곤 합니다.”

“실지로 신부인 것은 아니고?”

“부끄럽지만 그렇습니다.”

 

정 신부가 말하길, 신부가 되기 위해선 졸업뿐만이 아니라 많은 절차(진로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지루하기만 할 뿐만이 아니라 이해하기도 힘들 것이므로 설명을 생략한다고 덧붙이며)를 거쳐야 하고, 설사 모든 과정을 밟는다 하더라도 신부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니, 정 신부라 불리게 된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냐는, 친구들의 짓궂은 놀림과 걱정이 담긴 별칭이라고.

 

“성공, 인생의 성공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보통은 그리 말하곤 하지요.”

 

보자, 그렇다면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질문에 정 신부는 대답하지 않고 호라이즌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다 불쑥 말했다.

 

“얼마나 더 대화할 생각입니까?”

“글쎄요, 그것만은 잘 모르겠군요.”

“짧지 않은 시간이리라 짐작되는데, 이곳에 서서 계속 얘기할 심산인지?”

 

이만하면 날씨도 나쁘지 않고, 저기 벚꽃이 보이기도 하여 풍경도 좋으며, 주변에 행인도 드무니 대화하기 좋은 자리가 아니냐는 의문에, 정 신부는 목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커피 한 잔이 생각나는데…….”

“……좋습니다.”

 

골목마다 놓인 것이 커피 파는 집이니 자연히 둘의 걸음은 멀리 가지 않았다. 호라이즌은 요구하지 않았으나 정 신부는 커피 두 잔을 주문했고, 곧 두 사람의 앞에 김이 올라오는 커피 두 잔이 놓였다.

 

날이 좋습니다.”

 

정 신부가 제 앞에 놓인 커피를 홀짝이며 건넨 말이었다. 호라이즌은 턱을 괸 채 창밖을 내다보다 단답만을 남겼다. 예. 오가는 대화 없이 침묵만이 둘 사이의 공간을 채운다. 호라이즌은 곧 바깥 풍경에서 눈을 떼고 정 신부를 바라봤다.

 

그것보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공이 궁금합니다.”

 

정 신부는 대답 대신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의도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저보다 한참 어려 보여서, 그것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별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 신부가 이유를 묻자, 호라이즌이 대답하길,

 

당신이 묻는 말의 아래에서, 저를 연공서열로 핍박하고자 하는 음험한 의도가 엿보였기 때문입니다.”

제 의도를 곡해하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들렸을 뿐입니다.”

 

정 신부는 한참이고 호라이즌을 바라보다가, 알았다. 그래도 네가 한참이고 어려 뵈니 말을 놓겠다. 호라이즌은 담담하게 대꾸했다.

 

제가 싫다고 한들 무어 달라지겠습니까? 편할 대로 하시죠.”

 

그것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언제 하실 생각입니까. 호라이즌의 재촉에 침묵은 길어진다. 정 신부는 커피잔을 반 이상 비우고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생각하는 성공이란, 누구나가 생각하는 일반적인 성공에서 그 궤를 크게 벗어나지 않아.”

일반적인 성공이라 함은?”

 

인생에서의 성공을 말하자면, 먼저 인생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을 빗대어 좌에서 우로 뒤돌음 없이 달음박질치는 곡선 따위의 무언가로 말하노라면누구나가 곡선이 위를 향하길 바라기 마련이다허나 누구나가 바란다는 것은 그것을 이루지 못했을 뭇사람들의 눈초리혹은 그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자격지심 따위를 느낄 있다는 뜻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당신은실패하지 않는 삶을 원한다는 말입니까?”

어쩌면은자세한 대답은 보류해 둘까 하는데…….”

 

이유라 한즉일전에 네가 말한 대로나는 나에 대한 사실을 하나 알려줬다이제 네가 말할 차례다호라이즌은 그대로 답하길,

 

이름은 호라이즌입니다.”

 

아니다나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호라이즌은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말을 인용했던 대로 또한 당신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세상은 본디 불공평한 아닙니까또한 불공평을 차치하더라도 이름은 매우 값진 사실이니당신에 대한 사소한 진실 가지쯤은 갈음할 있습니다침묵을 지키던 신부는 입을 열었다.

 

너는 가치를 입에 담았지만가치란 본디 상대적인 아닌지당장에 앞에 놓인 커피 잔도 그러하지 않은가.”

 

하여 본즉 호라이즌의 앞에 놓인 커피는 조금도 줄지 않았으니이는 네게 커피란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있겠다내게 있어 너의 이름이 그와 같다호라이즌은 지루한(표정의 변화가 적어 확언할 없으나 분위기상 미루길표정으로 대꾸했다.

 

당신의 케케묵은 논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그러한 논리로 저를 설득하려 들지 마십시오.”

 

또한 당신이 어떠한 사실을 캐내려는 행위는대화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 아닙니까정녕 그러한 의도가 없었다고 말할 있습니까호라이즌의 말에 신부가 되묻길너는 다른가호라이즌은 당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로지 하나의 투명한 의도호기심만으로 당신을 대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한?”

유추해 보시지요?”

 

보자개인에 대한 호기심은 쉽게 생각하여 개인에 대한 호감으로 짐작할 있겠다.

불쾌하군요.

그렇다면음습한 의도…… 가령 사이비 종교나 장판 따위의 판촉을 위함이 아닌지?

틀렸습니다.

말하고자 함은 욕구가 아닌 이성으로 나를 대하고 있다 이건가?

비슷하군요그러나 착각하지 말지인데제가 말하고자 하는 이성은 이성(異性) 아닌 이성(理性) 뿐입니다.

 

신부는 말없이 한참이나 앉아 있었다잔은 비어있다침묵을 것은 신부였다.

 

응당 사람이라 함은 누구나가 굴곡을 기다린다거대한 변화의 물결을 기다린다 번의 번득이는 사건으로 이전의 부정적인 자신을 탈피하기를 원한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번쯤 찾아오지 않을까 고대하는 번득이는 사건……. 그것으로 자신이 완전히 뒤집히고하여 끝으로는 남들과 같이 인생의 궤적을 그릴 있길 바란다그리하면 성공했다 말할 있으리라.

 

호라이즌은 신부의 말을 끝까지 듣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흥미가 사라졌습니다.”

 

호라이즌은 무슨 말이냐며 되묻는 신부를 지나쳐카페 밖으로 나가기 덧붙였다.

 

원론적인 이야기 따위로 당신에게 설교하지 않겠습니다다만 당신 같은 이는 수없이 보았으니그다지 궁금증이 생기지도 않을 뿐입니다.”

 

하며호라이즌은 카페 거리로 사라져 버렸다 신부는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원체 걸음이 빠른지라 하얀 머릿결의 끝자락조차 찾을 없었다 신부는 하는 없이 카페로 되돌아왔다탁자 위에는 언제 놓였는지도 모를 쪽지 하나가 있었다펼쳐 보니 종이에는 전화번호로 짐작되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그녀의 자리에 있던 커피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커피 잔을 계산한 신부는 밖으로 나와 잠시 있었다밖의 거리는 변함이 없었다길을 채우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름 없는 하늘도 멀리 언뜻 보이는 공원 입구의 벚나무도 그대로였다어디로 갈지 몰라 방황하던 발걸음이 결국 향한 곳은 공원이었다 신부는 인적 없는 전화부스 안으로 돌아갔다.

 

신부는 전화부스 안에서 오랜 시간 생각에 빠졌다대부분은 쓸모없는 것이었고언뜻 떠오르는 것은 아직 연락하지 못한 가족이었고끝으로 생각나는 것은 호라이즌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신부는 수화기를 들었다.

 

여보세요?

지냈고?

누구……?

형이다.

오랜만이다부대인가?

아니…… 휴가 나왔지.

휴가휴가 나왔으면 집에나 들어올 것이지……. 그래서 ?

아니학교는 다니고 있나 궁금해서 그랬지.

군대 들어간 달이나 됐다고……. 벌써 자퇴했을까 그러나?

 

한참이고 동생 목소리를 듣던 신부는그래알았다 찾아가마하는 소리를 끝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았다이대로 호라이즌에게 연락하지 않으면 한순간의 사건으로 지나갈 일이었다.

 

신부는 다시 수화기를 들었다수신음이 울리고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하시죠.

호라이즌 전화가 맞습니까?

.

 

 

 

너는 내게 흥미가 떨어졌노라며 떠나갔다나와 같은 이는 수없이 보았다고…….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그러나 네게 거짓으로 고한 것이 있다.

들어보겠습니다.

인생의 곡선이니 굴곡이니 있어 뵈는 것들을 말했지만어쩌면 나는 그러한 것들 따위는 안중에도 없을지도 모른다그보다 중요한 것이 인생에 있는 것은 확실하다그러나 그것은……. 고작 처음 만난 사이인 네게 털어놓을 종류의 것이 아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너는 입으로 말했다가치 있는 정보에는 응당 보답이 따라와야 한다고그러니네가 먼저 말해다오.

 

주제에 거래를 청하는 겁니까세상은 본디 불공평하다 말하던 이는 어디로 것인지……. 좋습니다그렇다면 먼저 말하겠습니다귀를 열고 똑똑히 들으십시오.

 

이름은 호라이즌입니다.

 

무릇 이름이란 남에게 불리기 위해 지어진 것이라 대개는 남이 지어주는 경우가 많습니다호라이즌이란 이름 또한 매한가지요 미루어 짐작건대 호라이즌이라는 이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에서 태어난 이라 있겠습니다.

 

호라이즌은 설명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암묵적 약속에 따라 이제 신부의 차례였다.

 

나는 처음부터 신학에 뜻을 두고 공부한 것이 아니다심지어는 종교와는 거의 무관한 삶을 살았다 봐도 과언이 아니리라그렇다면 무슨 거창한 꿈이 있었느냐아니다나는 변변찮은 꿈도 없이 살아왔다하면 무슨 연유로 신학과에 들어갔는가.

 

  신부는 한참이고 침묵했다.

 

처음의 꿈으로는 아마 대통령이나 과학자 따위였을 것이다다음으로는 대기업 사장직원고등학교 말에 가서는 그저 명망 있는 대학에 들어가길 바랄 뿐이었다어째서 신학과였는가그것이 내가 선택할 있는 가장 이름 높은 대학이었기 때문이다학과는 아무래도 좋았다그러니 학문에 성실히 임할 리가 없었다.

 

남들은 4년이면 졸업할 대학 생활이거늘나는 기약도 없이 5년째를 보내고 있다기실 졸업이야 다가오고 있다지만서도 결국에는 변변찮은 학점을 가진 취업 준비생을 하나 만드는 것으로 끝장이 나지 않겠는가……. 이것이 나의 배경이라 있겠다.

 

수렁과도 같은 젊은 시절이라그런데도 인생의 굴곡에 관심이 없다는 말입니까?”

어쩌면.”

 

좋습니다처음보다는 훨씬 흥미롭군요.

 

호라이즌은 다음 오후 시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보자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끊었다 신부는 요란한 소리로 통화가 끝났음을 알리는 수화기를 한참이고 바라봤다.

 

바깥의 풍경은 여전하여 개인의 변화 따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신부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비라도 내렸다면 위로가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하늘은 구름 없고해는 기울어간다 신부는 한참이고 전화부스에 기대어 서서 개밥바라기가 뜨고 지는 것을 지켜봤다.

 

서쪽 하늘 끝으로 해가 자취를 감추고 신부는 곳을 찾아 도심 속으로 떠났다아마 다음날이면 무언가 결정 나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품은 채였다.

 

 

*

 

 

구름 날이었다전날 새벽에 한바탕 비가 내렸는지 벚꽃은 대부분이 길거리에 뿌려져 전날만큼의 모습은 찾기 힘들었다 신부는 전화부스 앞에 호라이즌을 바라봤다심드렁한 얼굴이다.

 

만나자고 거지?”

첫째로는 당신이 중요하다고 말한 무언가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는?”

그건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달라지겠죠.”

 

대답이 지체된다 신부는 천천히단어 글자씩 끊어가며 말했다.

 

지난밤…… 통화가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 봤지과연 내가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론을 내리기 힘들었어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사회에서의 성공은 아니었지…… 그렇다면 내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그것조차 모르겠어 손으로 이룬 것이라고는 대학 합격증뿐이니까……”

가족은 어떻습니까?”

글쎄.”

그렇다면?”

인생을 되짚어가며 생각해 봐도내게 남은 것은 의혹 하나뿐이었어그것이 중요한가는 지금도 모르겠지만…….”

무엇에 대한 의혹입니까?”

 

신부가 대답하길그것은 우리의 신에 대한 의혹이다내가 제대로 바라보지 않고 외면해 왔던 신에 대한 의혹.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함입니까?”

 

아니다나는 무신론을 주장하고자 함이 아니다나는 신이 실존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다만 궁금한 것이 하나 있을 뿐이다어째서 신은 나를 나아가 우리를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었는가더불어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힘없는 민중이 괴로움에 떨고 죽어가며 아우성인데우리의 신은 무얼 하고 있는가?

 

신이 우리를 구원해야 한다 말하는 것입니까?”

 

아니다나는 무조건적인 구원을 바라지 않는다다만 가르치기를우리의 신은 기적을 내렸고 증거가 지천으로 널려있다고 말하였다허면어찌하여 신은 구원하지 않되 다만 그러한 시늉만을 하고 있는가.

 

하여 정리해 보니첫째로는 우리 존재의 어쩔 없는 연약함에 대한 의문이었고다른 하나는 가르침에 대한 의혹이었다호라이즌의 정리에 신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고방식을 보니 이단의 그것과 거의 유사하군요당신은 신부가 되긴 글렀습니다.”

애초에 깊게 관심을 가진 적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지.”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것이 하나 있습니다당신은 정녕 교리와 신에 대한 공부에 열과 성을 다했는지요그들이 말하고자 함을 모두 알며그것의 모순과 괴리를 짚어낼 있는지요누군가 신과 교리를 묻는다면 저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설명할 있는지요그러한 이해를 바탕하지 않은 의혹과 의문은 다만 어린아이의 호기심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당신은 이를 알아야 합니다.”

 

신부는 대답하지 않았다호라이즌은 표정에 낯선 꿈틀거림(아마도 웃음일지도 모른다) 띄우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당신은 운이 좋습니다저는 당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언지 정확하게 알고 있으니까요.”

뭐지?”

삶의 이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타인에 대한 관찰로 채울 있을 것입니다 신부는 그녀의 말을 이해할 없었다호라이즌은 굳이 설명하지 않았고다만 묻길남은 휴가가 얼마나 되느냐 신부는 답했다엿새뿐이 남지 않았다.

 

충분합니다.”

 

설령 부족하다 한들어찌하겠는가탈영이라도 해라성공 따위에 목매지 않는다면……  중요한 것을 구할 있다면 그쯤이야 아무래도 좋지 않은가하여 신부는 홀린 호라이즌의 푸른 눈동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그길로 항구 도시를 향하는 직행열차 자리를 끊었다열차 플랫폼에는 사람들이 오고 가기가 마치 밀물 썰물과 같았다이제 오후 시가 넘어갈 무렵이라 해는 꼭대기에 걸려 있었지만 구름 날씨 탓에 바깥 풍경은 회색 조에 가까웠다 오는 다음의 흐린 날씨는 축축하고 서늘했다 신부는 습기 공기에 까닭 모를 익숙함마저 느끼고 있었다.

 

익숙한 경적과 함께 열차가 출발한다. 창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풍경이 멀어진다. 광경을 묵묵히 바라보던 신부는 불현듯 깨달았다. 축축함과 서늘함이 모인 날씨가 마치 반절 이상 지나간 이십 대의 삶과 같지 않았는가……. 그러나 그것이 진실인지, 혹은 착각이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도시에 어느 하나 남겨둔 것이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