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엔드로드 스포일러 주의
에고이스트(egoist) ·5
― 초임계
카린과 카린의 세계에 주어진 시간은 20년 남짓, 차원 항로에서는 더더욱 많은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관리국이 미처 챙기지 못한 유산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는 행운. 이것만으로도 관리국이 창설된 세계를 찾는 데에 아주 많은 시간을 단축하게 될 것이 확실했다.
“저는 당신이고, 당신은 저예요.”
이들이 터를 잡은 이 방주의 유예기간은 10년. 이대로 스러져 가는 것보다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발버둥. 막힌 길은 개척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인류의 희망과도 다름없죠. 그 자리의 무게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워도 감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 내려놓고 떠나라는 겁니까?”
“그 반대입니다. 나, 우리의 시간을 태워 희망을 찾기 위한 항해를 제안하는 거예요.”
“허⋯⋯.”
“각 세계와 차원의 시간 흐름은 아주 다릅니다. 차원 항로 속에서는 시간을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다르게 흐르죠. 어쩌면 제 머리카락이 모두 하얗게 세어버릴 때가 되어서야 찾을지도 모릅니다.”
카린은 주저앉아있는 카일에게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들고 있던, 이젠 빛바랜 작은 전술통신기를 돌려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없습니다. 세계의 성장단계보다 더 앞질러 자라난 기술은 결국 새로운 시련을 당기고, 멸망을 재촉하겠죠.”
“퍽이나 믿기겠군요⋯⋯.”
“제가 준 정보를 떠올려보세요. 저희는 ‘관리국’을 찾으러 떠나는 겁니다. 그 집단은 제가 가지고 온 기술보다 훨씬⋯ 아니, 이 슬레이프니르보다 더 뛰어난 기술력을 가지고 있겠죠.”
카린은 확신하듯 미간을 찌푸렸다.
“저는 눈 앞에 펼쳐진 위기를 외면할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그 구렁텅이에서 꺼내줄 수 있는 힘조차도 없죠. 하지만 그저 받아들이고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당신도 그렇기에 이렇게 남아 항전하고 있지 않나요?”
“하아⋯⋯.”
한숨 소리와 함께 건넨 전술통신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낚아채듯 가져간 전술통신기는 다시 카일의 오른쪽 귀로 빠르게 복귀했다.
“⋯!”
카린은 놀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장비를 챙기는 카일을 보며, 불현듯 강압적으로 인류를 선동하던 안토노프를 떠올린 듯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조급함에 독선적으로 말한 것은 아닌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신을 스스로 잘 안다고 생각하여 말했으나, 지금의 행동이 힘겹게 버텨가는 이 세계에 균열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카린도 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바이저, 다시 쓰고 따라오십시오.”
“대답은⋯ 보류하는 건가요?”
“말이 많군요. 같이 가줬으면 하는 곳이 있으니, 조용히 따라오면 됩니다.”
묘하게 달라진 태도에 카린은 의아한 표정으로 바이저를 바르게 썼다. 카일이 주는 사인은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았고, 의중을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갈 생각이죠?”
말없이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카일의 뒷모습을 향해 물었다. 역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툭 뱉은 말은 딱딱하기 그지없었다.
“민간인 보호구역으로 갑니다.”
***
“대, 대위님이 오셨어!”
“아이고, 카일 대위님⋯⋯. 한동안은 안전하겠지요⋯⋯?”
딱 한 번 발을 들였을 뿐이었다.
민간인들은 발소리만으로도 구세주인지 아닌지 구별이라도 하는 모양인 양 카일을 향해 우르르 버선발로 달려왔다.
“식사는 하셨나요?”
“대위님이 요 며칠째 통 안 오셔서 걱정했답니다.”
“밖에서 엄청나게 큰 소리가 들렸어요⋯⋯. 혹시라도 모두 죽었을까봐 모두 숨죽여서 울고만⋯⋯”
각자 한마디씩 해도, 사람이 수십명이면 수십마디였다. 순식간에 함선 거주 구역은 시장바닥이 되었고, 개개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제대로 모를 지경에 왔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차원 균열은 무사히 닫았습니다. 한동안은 아무 문제도 없을 겁니다.”
카일은 웃으며 답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용납하지 않았다. 이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오로지 카일만이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달려들었고,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저마다 그 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미 명을 다한 제 아들도 기뻐할 겁니다⋯⋯.”
참으로 견고한 기둥이었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모양이었다.
“⋯⋯.”
반드시 가야 하겠나, 소령?
인류의 결집을 위해서는 자네들과 같은 영웅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네.
저들과 다른 이방인은 바이저 너머의 풍경을 보며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카일은 아무런 답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으나, 이미 카린의 제안에 대한 대답을 보여주고 있었다.
“대위님 보고드립니다! 10-9번 거주 구역에서⋯⋯.”
“식량문제입니까, 보급 문제입니까. 아니면.”
“대위님! 긴급 보고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방주 북서쪽 방향 5000km에서 관측한 차원 균열에 대해서⋯⋯.”
“거주 구역 문제는 관측 보고부터 받고 가겠습니다.”
“예, 긴급한 사안은 아닙니다.”
이미 평범한 카운터라는 경지는 뛰어넘은 게 아닌가 하는 멀티태스킹이었다. 바이저 뒤의 카린의 표정은 씁쓸하면서도 허탈함이 담긴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결국 같은 운명 아래 저마다 씌운 주박은 달랐다.
카린은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진 남자가 돌아올 때까지 소란스러운 거주 구역의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 무렵, 카린의 옆으로 작은 꼬마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는 분⋯⋯.”
“안녕하세요. 꼬마 아가씨.”
흑갈색 단발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였다.
카린은 같이 인사를 하며 여자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앉았다. 예쁜 붉은색 눈이었다.
“언니⋯? 언니는 몇 번에서 왔어요?”
“저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망설였다. 거주 구역을 묻는 듯했다.
카린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 소녀는 대답은 바라지 않았다는 듯 말을 이어갔다.
“언니도 카운터예요? 워치가 있어요.”
“⋯네, 카운터예요.”
“저도 언니처럼 멋진 카운터가 될 거예요. 그렇겠죠? 저는 커서 대위님한테 도움이 될 거예요.”
카린은 더 이상의 대답 대신 말없이 소녀를 쓰다듬었다.
지금은 동결 수면 상태에 들어간 누군가를 떠올리며.
“이방인. 대위님이 돌아오셨다. 안내하도록 하지.”
***
지휘부라고 지칭했으나, 두 사람이 서 있는 곳은 슬레이프니르의 함교였다.
카일의 눈짓 한 번에 대원들은 가벼운 묵례를 한 뒤에 함교 밖으로 나갔고, 단둘만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대답은 충분히 들었습니다. 카일씨.”
“네, 이곳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저와 대원들을 보고 있습니다. 당신의 제안이 의심스러운 것도 있습니다만. 적어도 절 바라보는 사람들을 두고 갈 순 없을 것 같군요.”
거주 주민들은 지휘부와 대위의 존재가 곧 삶이었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은 신앙이었다. 그저 존재만으로도, 당장의 내일을 살아갈 희망인 셈이었다.
그러나 카린은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피와 시체로 쌓인 산 위에서, 부채 의식과 의무를 짊어지고 서있는다는 것이.
“저도 제 고향에서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위기를 넘기고, 저는 살아있는 재앙이 되었죠.”
“⋯⋯당신이 가져온 장비와 기술을 두고도, 재앙이라고 말하는 겁니까?”
“이걸로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면, 저는 관리국을 찾아 떠나는 항해는 하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여기로 가져온 모든 것은 그것 또한 이방인의 기술. 저는 유산과 숙명을 물려받은 것에 지나지 않아요.”
“그렇다면, 기술의 일부를 남겨달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겠군요. 맞습니까?”
카린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한 답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세계에 발생한 차원 균열이 몇 개인지 아십니까?”
카일의 질문에, 카린은 즉답을 내놓았다.
“최소 발견된 것만 2천 개 이상의 균열이 있겠죠. 맞나요?”
정확한 대답이었던 걸까, 카일은 소름이 끼친 듯 오른팔을 문지르곤 한숨을 내쉬었다. 카린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저희 세계에는 최소 5종급은 되는 침식체의 고치가 발견된 것만 2천 개가 넘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진 이 기술력으로 토벌하기엔 턱없이 모자라죠.”
“⋯⋯가능했다고 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까?”
“아니요. 설령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멈출 수 없어요.”
“어째서⋯⋯.”
“멸망은 필연적이고, 그 정해진 결말을 뒤집기 위해서 저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정답을 찾기로 한 겁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이 믿고, 보고 있기 때문에 항해를 시작했다. 그건 이미 쓰러져간 동료들의 몫까지 최선을 다해보고자 하는 의지,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결심이었다.
“쓰러져간 동료들을 위해, 저는 앞으로 더 나아갈 겁니다. 당신도⋯ 그럴 수 있지 않나요?”
‘나’라면 반드시 느끼는 바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다시금 솟아오른 이기심으로 내미는 마지막 제안이기도 했다.
그러나――
“거절하겠습니다. 멸망이 필연적이라면 더더욱 떠날 수 없습니다.”
카일은 허탈하게 웃으며 거부 의사를 내비쳤다.
여기까지인가. 카린은 넝마가 되어버린 카일의 전투복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심 이곳의 ‘나’를 도울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제안했지만, 결국 과한 부담을 지운 꼴이 아닌가.
“⋯⋯어차피 멸망할 세계라면, 불확실한 가능성에 그저 싸우다 죽는 게 나을 겁니다. 제가 떠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워프 마커를 설치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하, 당신은 그렇게까지도 해볼 여력이 남았다는 게 참 부럽군요.”
“⋯⋯죄송합니다. 제 이기심이었습니다.”
그건 포기 의사였다. 그것마저도 존중해야 했다.
카린에겐 남은 가까운 동료가 있었으나, 카일에겐 없었다. 우월한 기술력으로 인해 반드시 떠나야 할 정도의 재앙이 되었느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니까요. 그리고⋯”
“⋯죽은 동료들 때문인가요?”
카린은 의안이 있는 오른쪽 눈을 살짝 매만졌다. 대신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우연히 아포리아의 갑피를 부쉈던 날처럼.
“네, 끝없이 쌓여만 가는 부담감과 부채 의식으로 움직이는 이기적인 인간이니까요. 죽으면 그대로 동료들이 죽은 땅에서 묻힐 겁니다.”
“⋯그래서 그 전술통신기를 여전히 버리지 못했군요.”
“이미 오른쪽 귀는 사령관님이 전사하신 날부터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끼든 말든⋯⋯.”
더 이상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물기에 젖은 들숨만이 한번 들리는 것이 전부였다.
***
“그 꼬마가 좀 더 빨리 컸다면 달라졌을까.”
의미 없는 추론이었다. 애초에 그 꼬마가 자기가 아는 동료와 같은 사람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카린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위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은 위선이었을 뿐.
“⋯⋯슬레이프니르를 회수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상관없어. 이 정도의 정보여도 충분해.”
더 세밀한 위상측정으로 이 기약 없는 항해의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 희망을 품고 카린은 아이기스의 차원도약 다이브 시퀀스를 발동시켰다.
[차원 항해 개시 기준 13,439시간 경과.]
“고작 반나절 정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고?”
당혹감 가득한 표정과 함께 카린은 잠시 무슨 혼잣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거리다, 이내 긴 한숨과 함께 내뱉었다.
“⋯⋯당신을 기억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