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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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면세계

좌표 211.380.xxx

알카소바스 섹터


터벅, 하고 무거운 발걸음이 이면세계의 대지를 딛는다.


검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넓은 대형을 유지한 채로 앞을 향해 기동했다. 헬멧에는 9라는 숫자가 붉게 떠올랐다.


메이즈 전대원들은 조심스럽게 이면세계 탐색을 진행했다. 병사들의 움직임에는 전부 기운이 넘쳤고, 눈은 어느 때보다 예리하게 사방을 훑어나갔다.


"당소 바실리, 보고. 침식체의 흔적 없습니다."


"당소 예고르, 보고. 이쪽도 이하 동일합니다."


"당소 세르게이, 보고. 거주지로 보이는 지역에 진입합니다."


"당소 세묜, 보고. 이상 없습니다."


한 이면세계에서 코핀 함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일련의 소동 이후로 3달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오랜만에 실전에 투입됐는데도 메이즈 전대원들은 만전의 컨디션을 유지했다. 그 때의 사건 때문에 침식화가 됐었던 까닭에 현실의 공기보다 이면세계의 공기가 더 살갑게 느껴졌다.


베이스 포인트에 있는 류드밀라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전대원에게 명령을 내리는 목소리가 한결 기운찼다.


"확인했다. 관리자님께서 직접 지시하신 임무다. 탐색을 허투루 진행하지 말도록."


""알겠습니다!""


류드밀라는 베이스 포인트의 차원함선 내부에서 전황을 실시간으로 살폈다. 


총 여덟 방향으로 넓게 펼쳐진 메이즈 전대가 빠른 속도로 류드밀라에게 탐색 결과를 보고해왔다. 홀로그램 지도에 메이즈 전대가 탐색한 지형 정보들이 속속들이 그려졌다.


대형이 넓어질수록, 소부대간의 거리가 멀어질수록 침식체를 만났을 때의 위험성이 커진다. 류드밀라도 그걸 모르고 있지는 않아서 침식체 보고가 올라오는지 예리하게 전황을 감시했다.


침식 증후군도 거의 극복했겠다, 류드밀라에게 관리자는 찾고 싶은 것이 있다며 가급적 깊은 이면세계로의 다이브를 주문했다.


타기리온의 봉인을 재조정한 이후 현실세계 뿐만 아니라 이면세계에도 듣도 보도 못한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앞으로의 활동을 위한 근거가 필요해요.' 라는 이유였다.


류드밀라는 즉각적으로 관리자의 요청에 응했다. 전대장으로서의 명예가 그녀의 몸과 마음에 다시 풀무질을 했다. 생명을 준 그의 부탁에 전심을 다해 임할 작정이었다.


"기운이 넘치네. 오랜만에 보는 전대장다운 모습인걸?"


뒤에서 류드밀라를 지켜보며 알렉스가 싱긋 웃었다. 


엄마같은 포근한 말투가 들려오자 류드밀라는 쾌활한 미소를 지었다.


"간만에 찾아온 실전이니까. 게다가 이면세계이기도 하니,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힘이 더 나는 것 같아."


"기분 탓은 아닐걸. 나도 그러거든. 애초에 우리 모두 한 번씩 침식을 겪은 몸이잖아? 현실의 공기보다 이면세계 공기가 오히려 고향에 온 것 같은데."


알렉스가 기지개를 켰다. 우웅 하는 늘어지는 소리와 함께 한결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


고향이라. 류드밀라는 어린 시절을 보냈던 도시를 떠올렸다. 


그녀의 집안은 전통에 익숙해서 겨울이 되면 페치카를 데우고 사모바르에 불을 올려놓은 뒤 차를 끓여서 마시곤 했다. 


도시화가 진행될 대로 된 시대에 왠 구식 겨울나기인가 싶었지만, 현대식 난방의 혜택도 함께 누렸으니 딱히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 시절이 좋았지. 눈을 감고 생각하면 어머니께서 타주셨던 코코아의 그윽한 향기가 금방이라도 코를 간지럽혔다.


"그 때가 그립군."


"있잖아. 추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이 있다는건 어떤 느낌이야? 혼자만 그런 표정 짓는거 보니까 좀 부러운데."


"그러고보니 알렉스 넌 클론으로 태어나서 어린 시절이라고 할 것이 딱히 없겠군."


"응. 애초부터 신체 연령도 10대에 맞춰서 만들어지니 물리적으로도 어리지 않고, 태어나면서 본 것들도 전장과 실험장의 냉혹한 기억들 뿐인걸." 


별로 좋은 기억들도 아니어서 알렉스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호기심과 그리움이 섞인 눈을 하고 알렉스는 함선 밖 풍경을 응시했다.


"후후. 이렇게 말하니까 왠지 노병 같네. 답지 않게."


"그런 말 말도록. 내가 보기엔 알렉스 네가 우리 전대에서 제일 어려보이니까."


"흐음... 그건 전대장으로써 기를 세워주려는 멘트야? 아니면 친구로써 하는 진심어린 칭찬?"


알렉스는 류드밀라를 향해 뒤돌아보았다. 길게 늘어지는 말투와 간드러지는 목소리. 누군가를 놀리고 싶을 때 나오는 알렉스 특유의 말버릇이었다.


류드밀라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둘 다이다."


알렉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류드밀라를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착한 아이네, 류드밀라는. 상으로 오랜만에 잘했어요~ 하고 토닥여줄까?"


누군가는 혹하며 달려들 것 같은 제안이 류드밀라의 귀를 간지럽혔다. 물론 류드밀라는 질색을 하고 기피했지만.


"그, 그럴려고 말한 게 아니다! 토닥인다니, 누굴 어린애로 보는 건가!"


"뭘 그래.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보는 눈도 딱히 없잖아? 자자. 이리로 온."


류드밀라의 말이 점점 빨라졌다. 손짓이 점점 많아졌다. 누가 봐도 당황하고 있다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아예 표정까지 어색하게 웃음기를 머금고 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별 말이 다 나왔다.


"이리로 온은 무슨, 애완견 같은 말은 그만두게! 어어? 왜 이쪽으로 서서히 오는 거지? 알렉스? 멈춰! 포옹 멈춰!"


"싫~어."


믿거나 말거나지만 이후 메챠쿠챠 쓰담쓰담 당했다고 한다.


알렉스에게 꼼짝없이 잡혀 쓰다듬을 받는 채로, 류드밀라는 계속 볼맨 소리를 내었다. 


명색이 전대장인데 어린이 취급 받는 것이 영 마음에 안든다는 둥, 어린이로 불릴 나이는 한참 지났다는 둥.


궁시렁대는 말이 들려올 때마다 알렉스는 "그래 그래, 네 말이 다 옳아." 하면서 류드밀라를 가만히 안고 있었다.


"혹시, 류드밀라 삐졌어?"


"그런건 아니지만... 날 너무 어린이 취급하는건 전대원들의 기강 차원에서도 영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되는 바이다."


"얼굴까지 빨개졌네. 후후."


"알렉스!!"


알렉스는 웃는 얼굴로 류드밀라를 놀려먹었다.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류드밀라가 그만하라는 듯 퉁명스럽게 쏘아붙혔다.


"아이 참. 알았어, 알았다구. 지금은 작전 중이니까 적당히 할게. 대신 네 곰돌이 좀 빌려줄래?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마음이 따스해지거든."


"이전에도 말했지만 이건 곰돌이가 아니라 솔개다."


"응응. 그래. 솔개. 그러니까 곰돌이 좀 빌려줘."


"아니 솔개라고 말했는데..."


류드밀라는 말하면서도 은근슬쩍 작전 현황판에 신경을 집중했다.


작전 중에 이렇게 꽁트를 이어가고 있어도 괜찮을 정도로 이면세계 탐사는 별 이상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심도가 깊은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별다른 보고가 없다. 이것부터가 너무나 이상할 정도로 이상이 없었다. 그 점이 계속 신경쓰였다.


유클리드 섹터같이 안전지대일 수도 있겠지만 이 곳, 알카소바스 섹터는 아직까지 검증되지 않은 구역 중 하나였다.


혹여나 이 섹터가 안전지대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고심도의 이면세계일수록 안전지대의 존재 가능성이 옅어진다. 


알카소바스가 안전지대일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배제할 수 없다 정도이지, 확신을 걸 수 없다.


너무 평온하다. 운수가 좋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류드밀라는 알렉스와 티격태격하면서도 진지하게 전황을 생각하려 들었다.


침식체가 밥 먹듯이 튀어나오는 것이 보통의 고심도 이면세계일 터인데 아직까지 아무런 침식체의 징후가 없다?


도대체 어째서?


아니, 만에 하나의 가능성이지만,


만약 이것이 의도된 현상이라면?


날카로운 감각이 쇳소리를 내며 류드밀라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류드밀라는 알렉스를 뒤로 하고 패널 앞으로 가 통신 채널을 열었다.


"당소 센트럴. 속도가 늦춰져도 좋으니 경계를 더 철저히 하라. 최전방에 있는 분대는 정지. 후속 인원들을 기다릴 것."


류드밀라는 전대 전체의 진격 속도를 일부러 늦추었다. 분대 간의 간격이 지나치게 벌어진다면 돌발 상황에 대처하기 더욱 힘들어진다.


그저 일말의 가능성에 불과하지만, 여긴 이면세계이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할 건 없다.


그리고 류드밀라가 명령을 내린 직후였다.


"당소 발레리! 침식체 군집을 확인!"


역시인가. 류드밀라는 즉각 발레리의 통신에 응했다.


그러나-


"여기는 센ㅌ..."


"당소 니콜라이! 침식체 군집입니다!"


"당소 세묜! 이쪽도 확인했습니다!"


"당소 드미트리! 여기도..."


"당소 콘스탄틴..."


수도 없이 침식체 발견 보고가 기함에게로 흘러들어왔다. 보고에 따라 홀로그램 지도에 침식체 세력이 붉은 색으로 표시되어갔다.


붉은 색 점은 계속해서 늘어갔다. 군집이 아니라 움직이는 침식체도 나타났다. 최전방에서 날아오는 통신은 끊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홀로그램 지도의 한 면이 새빨갛게 명멸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단 4초.


4초만에 침식체 집단이 북서쪽 방향 앞에 전개되어 있었다.

 

"전 대원, 즉시 퇴각하라! 최전방의 부대는 전방 부대와 합류해! 다른 방향도 상황 보고할 것!"


갑작스런 침식체 군세의 등장에 류드밀라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처럼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키고 지시를 내렸다.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침식도 겪었던 메이즈 전대원들의 전투력은 인간일 적을 훨씬 능가한다. 심지어 이면세계라면 그 전투력은 더욱 올라간다.


부대가 나뉘어 있긴 해도 고작 침식체의 군세에 짓눌릴 만큼 개개인의 힘이 약하지는 않다. 소부대끼리 합류하여 질서정연히 퇴각시키면 된다. 오히려 질서없는 퇴각은 군세의 밥이 될 뿐이다.


계획대로만 된다면 말이다.


"당소... 치직.... 니콜...■이..."


계획대로 되는 일이 현실에도 없는데, 이면세계라고 오죽하겠는가?


무언가에 방해된 것처럼 통신이 불안정해졌다. 동시에 함선 내부의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엄청...■식파가 느껴 다!! 전방 ...치직... 인  ■...발견...."  


'경고. 경고. 침식파 레벨의 급상승을 감지. 침식파와 관리국 데이터베이스간의 대조 실시.'


"침식파가 급격히 올라갔어?"


"그것 뿐만이 아니야. 류드밀라. 침식체 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어. 뭔가 이상해."


류드밀라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니콜라이가 보내온 통신의 내용을 곱씹었다. 분명 인간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다. 침식체의 군세에서 인간이 있을 리는 없다.


단 하나의 사실이 류드밀라의 머릿속에서 번뜩였다. 그리고 그것이, 냉철하게 추가 지시를 내리려던 류드밀라의 생각을 일순간 정지시켰다.


"인간형 제 3종..."


'대조 결과, 그림자형 제 3종 침식체, 식별명 네르비에.'


육안으로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저 압도적인 침식파가 이곳까지 퍼지며 류드밀라와 알렉스를 비롯한 모든 메이즈 전대원의 피부를 자극한다.


모두가 같은 광경을 마주했다. 저 너머에 칠흑색의 드레스를 입은 창백한 여인이 서 있다. 


불결한 역십자가의 물체로 둘러쌓인 채 여인은 눈 앞에 보이는 이들을 하나 하나 눈에 담았다. 곧 스러질 생명에 대한 애도라도 되는 양, 여인의 입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 ■  -" 


침식체가 입을 열어 노래한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음이 세계를 울린다. 


죽은 자들의 소리를.


산 자들의 절규를.


" 나라-"


침식체가 노래한다. 저승의 음계가 생명을 뒤흔든다. 땅이 뒤흔들린다.


일어나라.


죽은 자들의 원한이여.


산 자들의 공포여.


"저주은...신이여... 산 자■게 을... 선■니라....."


땅 한 가운데에서 침식체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아니, 만들어진다는 표현이 맞았다. 시간이라도 거꾸로 돌린 것처럼 침식체들이 역으로 조립되며 생겨났다.


저 3종 침식체는 기존에 있던 침식체 개체들로도 모잘라서 더 많은 침식체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 많은 붉은 점들이 지도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아까 보였던 점들이 200~300구의 침식체였다면 지금은 단위가 아예 달라졌다.


듣기만 해도 끔찍한 침식체들의 절규에 가까운 괴성이 지천을 뒤흔들었다.


군단이, 전대의 앞을 가로막았다.


구 관리국 시절에도 여간 힘든 상대였던 3종이 군세와 함께 이렇게 버젓이 나타난다? 그것도 탐색 작전을 하느라 부대 간격을 극도로 넓게 벌린 상태에서?


그야말로 대재앙이다. 더 지체했다간 전대원들이 큰 피해를 보게 될 것이다.


류드밀라의 한쪽 눈자위가 검게 물들었다. 보랏빛의 눈동자가 번득이며 함선 내부가 점차 어둠에 잠겨갔다. 그녀의 고유 능력인 그림자 세계가 차원함선을 주축으로 서서히 열려갔다.


"전 대원, 작전 종료다. 역소환에 들어갈 테니, 빠르게 퇴각하도록!"


메이즈 전대에게 다행스런 소식이 있다면, 그들이 류드밀라의 그림자 세계로부터 소환되었으니 거꾸로 다시 소환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점이다.


다만 류드밀라 본인은 아직 이 능력이 익숙하질 않은 탓에 전대원들을 역소환하는 것에는 좀 시간이 걸렸다.


더욱이 몇몇 부대가 멀리까지 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좌표를 포착해서 소환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얄궂고 모순적이게도, 안전한 철수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당소 콘스탄틴. 이만한 인원들의 복귀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전대장님! 너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세르게이가 아까 발견했던 SR 포인트까지만 오면 돼. 점점 포착 사거리를 늘려나갈 거다. 멀리 떨어진 대원들도 내 능력이 닿는 거리까지 퇴각하라. 당장!”


마음 같아서는 바로 출전했을 것이다. 류드밀라는 직접 뛰쳐나가 상대와 대결한다면 충분히 압도할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개인의 싸움과 집단의 싸움은 개념부터가 다르다. 개인의 싸움과 달리 집단의 싸움은 희생을 전제로 한다. 

 

저 3종 침식체-네르비에의 격퇴 가능성을 따지기 이전에, 전대장으로서의 사고는 그림자를 격퇴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전대원이 희생될지를 먼저 고려했다.

 

결론은 간단하게 도출됐다.

 

애초에 이번 다이브는 이면세계의 탐색이 주목적이다. 피할 수 있는 교전이라면 소중한 전대원들을 위험에 처하게 할 이유가 없다.


전력을 다해 포착 범위를 늘린다. 염동력과 그림자의 힘을 한데 모아 전대원 각각의 공간 위치를 연산한다.


하지만 전대원 모두를 포착하기까지 침식체 군단이 가만히 놀고 있을리가 없다.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을 어떻게....

 

쿵 하고 알렉스의 플라즈마 포신이 함선 바닥을 울렸다.


"시간이 필요한거지? 내가 나갈게."


"기다려 알렉스! 아무리 너라도 저걸 다 상대하는건 무리야."


류드밀라는 놀라서 알렉스를 제지했다. 그 방법을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알렉스에게 너무나 가혹한 방법이다. 쓸 수 없다.


하지만 알렉스는 되려 장난기 어린 말투로 류드밀라를 달랬다.

 

"시간을 벌겠다 했지, 상대하겠다고 말한 적 없는데?"

 

"지금 와서까지 말장난이야? 3종 침식체만 있는게 아니라 군단이 있어. 혼자 저걸 버틸 수 있다고 생각하는거야? 너무 위험해. 허락할 순..."


"당장 진격해올수도 있는 상황이야. 고민할 시간에 포착 범위부터 늘리는게 더 효율적일걸? 그리고 그걸 위해서 내가 나가겠다는 거고."


"하지만..."


알렉스의 단호한 말이 류드밀라의 생각을 꿰뚫었다. 날카로운 지적에 류드밀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걱정 마. 죽을 생각 요만큼도 없으니까."

 

"...미안하다."

 

“미안하면 돌아가서 간식거리 준비해줄래? 마카롱이라는게 그렇게 맛있다고 들었는데."


이런 상황에서까지 농담인가. 류드밀라는 쓴웃음을 지었다.


"좋아. 얼마든지. 그러니 부탁할게 알렉스."


"네네~ SR 포인트로 문 열어줘."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림자가 그녀를 잠식해 들어갔다. 곧 류드밀라의 옆에서 알렉스는 사라지고 없었다.


침대에서 일어나는 느낌과 함께 다시 눈을 뜨니 알렉스는 바깥의 SR 포인트에 나와 있었다.


재빠르게 알렉스는 통신 채널을 열어 전대원들에게 전파했다.


"얘들아. 부전대장이야. 시간 없으니까 두 가지만 말할게. 내가 군세를 막을 동안 최대한 소환 범위 안까지 전력으로 퇴각할 것, 거리가 너무 멀면 안전지대를 찾아 대기할 것. 이상."


전대원들로부터 통신이 빗발쳤다. 위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미끼를 자처하겠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었다.


"당소 세묜. 엄청난 규모의 침식체들입니다. 차라리 최전방에 있는 제가 미끼를-"


"당소 드미트리. 저희 분대가 미끼가 되겠습니다! 다른 녀석들 먼저..."


눈물겨운 전우애였다만, 알렉스는 그런 걸 들어주려고 나온 것이 아니었다. 


픽션의 이야기는 전우애로 고난을 극복한다지만 현실은 냉혹하다. 전우애랍시고 얼마나 많은 생명이 전장에서 스러져 나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알렉스가 그런 요청을 들어줄 리도 없었다.


"토 다는 아이들은 돌아가서 등짝 한대씩 때려줄거야?"


사근사근한 경고 한 마디에 모든 미끼 자원 이야기들은 쏙 들어가버렸다. 


"바로 퇴각하겠습니다."


"퇴각합니다!"


"하지만 언제든지 부르십쇼!" 


"바로 뒤돌아 달려가겠습니다!"


이의제기가 한 순간에 사라지자 알렉스는 내심 흡족해하며 웃었다. 역시 우리 아이들이야. 누굴 닮아서 그런지 말도 잘 듣는다니까.


"당소 예고르.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부전대장님?"

 

"그럼. 괜히 부전대장을 맡고 있는게 아니라는걸 보여줄게. 이따가 봐. 얘들아.”

 

전대원들을 뒤로 하고 알렉스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붉은 눈이 몰려오는 침식체 대군을 조용히 응시했다.


호기롭게 말은 했다지만, 자신도 천 단위의 대군을 혼자 맞서 싸워보는 것은 도박수였다.


몸 성하게는 못 돌아간다는 것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일반 침식체들이야 한주먹거리도 안된다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저 3종 침식체 네르비에 정도.


3종 침식체에 그림자형이라면 카운터 한 명과 싸우는 수준이다. 상대는 침식으로 인해 7배는 강력해진 카운터라고 생각하면 된다.


알렉스 본인도 침식을 겪었던 탓에 보통 인간일 시절보다 훨씬 강해졌다지만, 1대1이 아니었기에 승부를 장담할 수는 없었다.


장담할 수 없음에도, 암담한 전황에도, 알렉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다. 무기로서 만들어진 그녀의 본능이 점화되어 간다.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해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전투를 앞두고 영문 모를 희열이 얼굴을 데우는 것을 느꼈다. 알렉스는 플라즈마 캐논을 호기롭게 한 번 휘둘렀다.  


"서둘러. 류드밀라. 돌아가서 우리 애들이랑 마카롱 먹고 싶으니까."


어디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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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달 전에 만든 글인데 이제서야 다시 꺼내옴 아 ㅋㅋㅋ


못쓰겠다 하고 때려치웠는데 문예대회가 있더라. 올리고 날른다 ㅅㄱ


알마망 최고야 너무좋아 사랑해


관심을 위해 나중에 대회탭으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