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코핀 컴퍼니의 위대한 사장, 머신 갑은 사장실의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전에 주변을 휘휘 확인하는 꼴에서 꼭 밀회를 즐기려는 사람 같은 오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물론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정육면체 기계와 그런 이유로 밤중에 만나려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리가.

 

, 뭘 했길래 이제야 들어오는 거지? 감히 날 기다리게 하다니.”

 

그러니 사장실을 차지한 선객의 목적이 적어도 머신 갑의 동체는 아닐 것이었다.

 

불이 꺼진 사장실은 어두웠으나 창가로 비쳐 들어온 달빛 덕에 형체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머신 갑은 기계 팔로 입력장치를 마구 비볐댔다. 당연하게도 그런다고 손님이 없어지는 일은 없었다.

 

그 못 볼 걸 봤다는 듯한 행동은 뭐지? 그동안의 헌신을 봐서 이번 한 번만은 용서해주겠지만, 다음은 없을 거야.”

 

업무용 책상에 앉아있던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다리를 꼬았다. 커피색 스타킹에 감싸인 다리가 하늘로 솟았다가 살며시 반대쪽 무릎에 안착했다. 스윽 슥. 기다란 옷가지가 서로 스치며 난 소리가 유난히 크게만 들렸다.

 

『…….

 

말이 없는 걸 보니 새삼 내 매력을 다시금 깨달았나 봐? , 너도 이걸 좋아했었지? 원한다면…… 거절하진 않을 생각인데.”

 

소녀는 도발적인 미소를 띠고는 앞으로 향한 발을 까딱거렸다. 살짝 올라간 치마 틈으로 보이는 통통한 허벅지와 쭉 뻗은 종아리. 그 끝에서 유연하게 흔들리는 발로 이어지는 라인까지. 이 모든 게 합쳐져 자아내는 유려한 곡선은 예술적일 정도였다.

 

. . . 무슨 말인지 전혀 모르겠군.

 

그러나 깡통 로봇일 뿐인 머신 갑에게 그런 심미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머신 갑은 단조로운 웃음을 출력하며 사장실에 불법 침입한 사원에게.

 

자네의 해고는 정당한 절차를 거쳤어. 이런 식으로 항의해봤자 본인에게만 불리할 뿐이야.

 

아니, ‘사원이었던소녀에게 말했다.

 

……,”

 

머신 갑의 말에 소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그래, 이렇게 뻔뻔하게 나온다 이거지? 그럼 이쪽도 생각이 있지.

 

화륵!

 

소녀의 손에서 자줏빛 불꽃이 피어났다. 순식간에 치솟는 온도에 머신 갑이 화들짝 놀라며 경고 메시지를 뱉어냈다.

 

경고! 경고! 기온 급속 상승 중!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빌면 넘어가 줄 아량은 있었어. 이 도시랑 함께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싫다면 당장 내 앞에 나와. 사장 ……아니, 관리자.”

 

『…….

 

머신 갑 너머의 어둠을 바라보는 소녀의 눈빛은 타오르는 손아귀의 불꽃 못지않았다. 연신 호들갑을 떨던 머신 갑의 기동이 멈췄다. 동시에 하고 머신 갑의 동체에 손 하나가 얹어졌다.

 

소녀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하무인인 줄은 이미 알고 있었네만, 이 정도로 막 나갈 줄이야.”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구라고 생각해?”

 

하하, 남 탓은 좋지 않아. 일단 그 불 좀 꺼주겠나. 불장난할 나이는 진작에 지났잖나.”

 

…….”

 

소녀의 손에서 불꽃이 사라졌다. 머신 갑 뒤에 숨어있던 관리자는 그제야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달빛에 길게 늘어진 소녀의 그림자가 관리자를 집어삼키듯 일렁였다.

 

잠시 창밖에 눈길을 던진 관리자가 입을 열었다.

 

오늘 밤은 만월이로군. 이 시간에 달구경이라도 하러 나왔나? 일찍 자야 키도 클 텐데 말이야.”

 

언제는 이 정도가 딱 좋다고 하더니. 그새 취향이 바뀐 거야?”

 

세상에 영원한 건 없는 법이네.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조차 영원하지 않은데, 취향이야 쉽게 바뀌는 게 당연하지 않겠나?”

 

, 웃기지도 않는군. 벌써 잊었어? 먼저 영원을 입에 담은 건 그쪽이었어.”

 

소녀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신 근로 계약서.’ 감히 평생을 함께하자는 약속이 담긴 종이에는 로자리아 르 프리데라는 이름과 관리자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사본인가? 이거 놀랍군. 클리포트의 마왕이 고작 종이 쪼가리 하나에 연연할 줄이야.”

 

분명 처리했을 종신 계약서를 본 관리자가 과장되게 너스레를 떨었다. 관리자는 일그러진 로자리아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렇게나 역할극이 마음에 들었나? 하지만 이젠 꿈에서 깰 때라네. 곧 게임이 시작된다는 걸 자네도 알지 않나. ‘탐식자도 최초의 인형도 떠났네. 아직도 이곳에 남아 있는 마왕은 자네 하나뿐이야. 마왕, 아스모.”

 

로자리아.”

 

…….”

 

로자리아라고 불러.”

 

청산유수처럼 흐르던 관리자의 말이 멈췄다. 관리자는 어느새 책상에서 내려와 제 앞에 선 로자리아를 내려다봤다.

 

로자리아가 다시 종신 계약서를 들어 올렸다.

 

아스모데우스가 아니야. 벌써 잊었어? 내 이름은 로자리아 르 프리데. , 여기에 적혀 있을 테지. 이게 내 이름이야. 이건 네 이름이고. 감히 내게 일생을 맡기라고 한 남자의 이름이란 말이야. 그런데, 이제 와서.”

 

계약서를 잡은 로자리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계약서는 바스락 소리를 내며 점점 뭉그러졌다. 제 몸에 담긴 의미를 감당해 내기엔 계약서는 고작 종이일 뿐이었다.

 

로자리아는 영원을 믿지 않았다. 고작 종이 쪼가리에 적힌 단어를 믿은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약속을 믿었다. 처음으로 느껴본 진심을 믿었다.

 

……관리자.”

 

로자리아가 구겨지다 만 계약서를 관리자에게 보였다. 관리자의 눈길이 계약서에 닿자 로자리아는 들고 있던 종이를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흩뿌렸다.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지던 파편들은 모두 땅에 닿기 전에 불타 사라졌다.

 

, 이게 네가 원하는 거겠지.”

 

…….”

 

이제 난 네 회사원이 아니야. 부인은 더더욱 아니겠지. 더는 증명할 수 없으니까. 너희 인간들은 서류를 참 좋아하잖아? 서류에 따라서 있는 것도 없어지고 없던 것도 생겨나고……. 드라마에서 이혼이나 당하는 여자를 보며 비웃었는데 이젠 내가 그 꼴이 됐군.”

 

거기까지 말한 로자리아는 양팔을 벌렸다. 마치 아이가 포옹을 조르는 듯한 모양새였다.

 

안아 주거라. 숨이 막힐 정도로 강하게.”

 

…….”

 

고작 종이 한 장에 넣을 수 있는 게 마음이었으니 나머지는 모두 이 몸에 받아 가겠다. 설마, 부인의 마지막 부탁도 들어주지 못할 만큼 배포가 작은 남자는 아니겠지?”

 

담담한, 그래서 더욱 애달프게도 들리는 말이었다.

 

말하고도 제 꼴이 웃겼는지 로자리아는 키득키득 웃음을 흘렸다. 관리자는 그런 로자리아를 바라보다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래, 그렇게.”

 

그리 크지 않은 몸이 관리자의 품에 쏙 들어왔다. 불을 다루기 때문인지 로자리아의 체온은 인간보다 높았다. 꼭 불꽃을 껴안고 있는 거 같다고 관리자는 생각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느냐?”

 

불쑥, 로자리아가 입을 열었다.

 

원하는 건 빼앗았고 마음에 안 들면 짓밟았지. 무언가에 싫증 나는 것도 금방이야. 그랬던 내가 지금은 고작 인간 하나에게 얽매여서 애정을 조르고 있군.”

 

.

 

로자리아의 이마가 관리자에게 닿았다. 관리자는 정수리만 보이는 로자리아를 내려다봤다. 뜨거운 숨결이 가슴팍을 간지럽혔다.

 

이런 건, 역시 이상한가?”

 

…….”

 

관리자는 잠시 침묵했다.

 

클리포트의 마왕, 신성 침식체.

 

마왕 아스모데우스. 세계를 불태우는 자.

 

소녀는 그런 존재였다.

 

대답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다.

 

이상하지. 정말 이상하고말고.”

 

관리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그런 대답도 예상한 듯 로자리아는 작게 웃었다.

 

후후, 그렇지. 이상한 일이지. 이상한 녀석을 만나서, 이상한 경험을 한 끝에, 이상해져 버렸어. 고장나 버린 거야. 누구도 아닌 바로 너 때문에.”

 

.”

 

넥타이가 잡아당겨져 상체를 숙인 관리자의 목을 로자리아의 두 팔이 휘감았다. 동시에 따뜻하고도 축축한 혀가 귓바퀴를 가볍게 훑었다. 그 기묘한 감각에 관리자의 몸이 움찔 떨렸다.

 

쯔읍, 물기 가득한 소리가 스쳐 가고 이번엔 달콤한 속삭임이 빈자리를 채웠다.

 

세계는 따분하고 무의미해. 벌레가 아무리 널려있어도 없는 거나 다름없지. 이 세상이 바로 나의 지옥이었다. 네가 지옥을 깨부수기 전까진.”

 

…….”

 

네가 올 시간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 닫힌 문을 몇 번이고 힐끔거리다 보면 어느새 가슴이 뛰고 있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관리자의 뺨을 간질였다. 그는 이미 로자리아의 세계를 이루는 요소였다. 관리자가 없는 세계는 이제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마치 주인이 주는 사랑이 삶의 전부인 강아지처럼.

 

나는 길들여진 거야.”

 

…….”

 

너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스며들었지.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강렬하게. 잔불이 다시 피어나듯 그렇게 타올랐어. 그런 너에게 나는 스스로 목줄을 가져다 바친 거다. 날 길들인 너에게.”

 

그러니 네가 원한다면.’

 

로자리아가 잠시 말을 멈췄다. 바로 코앞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관리자는 가만히 로자리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네가 무슨 말을 하든 소용없다는 듯 무심한 눈동자였다.

 

그 눈을 보고 비로소 로자리아는 깨달았다. 이 남자의 마음은 어떤 조건을 걸더라도 되돌릴 수 없음을.

 

첫 만남부터 예견된 결과였다.

 

남자가 관리자인 한. 그리고 로자리아가 마왕인 한.

 

……그래, 그렇군.”

 

로자리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어떻게든 가장하고 있던 여유가 무너졌다. 푹 숙인 고개와 일그러진 표정이 그 사실을 여지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마왕. 결국 마지막엔 그 이름이구나.

그렇다면 네가 바라는 대로 해주마. 네가 보는 나의 모습대로.

 

! 얼간이 같으니라고. 기껏 이 몸을 옆에서 보필할 기회를 줬건만 굴러들어온 복을 제 발로 차버리는군!”

 

로자리아는 평소처럼 큰소리를 쳤다. 여지가 없음은 확인했다. 아마 이렇게 만나는 것도 오늘 밤이 마지막.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 시작된 게임의 규칙을 따라야겠지.

 

마왕과 관리자, 서로의 양극단에 서 있는 그 규칙을.

 

지금까지의 헌신을 봐서 특별히 목숨을 빼앗는 건 봐주지!”

 

그래도 아직은, 이 밤이 지나가기 전에는.

 

하지만 날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영 좋지 못한 형벌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야. 알아들었으면 얼른 움직이거라! 숙녀를 에스코트하는 게 네 역할이겠지?”

 

적어도 그때까지는 마왕이 아닌, 그냥 로자리아였다.

 

 

 

 

……………

 

…………

 

………

 

……

 

 

 

관리자는 눈을 떴다.

혼자 눕기엔 조금 큰 침대 위였다.

 

…….”

 

무심코 옆으로 팔을 뻗었으나 손에 닿는 건 없었다. 이불 밖으로 벗어난 손이 금세 차갑게 식었다. 몸을 휘감는 싸늘한 공기는 전혀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었다.

 

아침인가…….”

 

옷을 차려입고 본 창밖에는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토록 밝았던 만월은 태양에 밀려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해와 달은 함께할 수 없다. 그것이 세상의 규칙이었다. 물과 불처럼. 혹은, 혹은…….

 

나는 길들여진 거야.

 

…….”

 

관리자는 다시 한번 허전한 방을 둘러봤다. 분명 짝이 있었을 물건들이 제 반쪽을 잃고 힘없이 시들어 있었다. 덩그러니 한사람분만 남아 있는 모습이 참을 수 없게 허전했다.

 

과연 길들여진 쪽은 누구였는가. 아니, 애초에 어느 한쪽이 길들이는 그런 일방적인 관계였는가.

 

결국 우리가 잡고 있던 건 서로의 목줄이었으니.

 

관리자는 옷매무새를 조금 더 꼼꼼히 여몄다.

 

불꽃이 떠난 자리는, 생각보다 훨씬 차가웠다.

 

 

 

***

 

 

 

라는 내용의 각본을 방송국에 보냈는데 어때? 이번엔 왠지 느낌이 좋군!”

 

아니, 주인님. 저번에 떨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또.”

 

에잇, 시끄럽다!”

 

로자리아는 제 시종, 프리데릭 도마의 말에 빽! 소리를 질렀다. 안 그래도 도마는 저번 드라마 공모전에서 입상하는 바람에 묘하게 미운털이 박힌 상태였다.

 

덕분에 예산 문제는 해결됐지만 아무래도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다. 내가 쓴 각본이 시종 녀석보다 못하다니!

 

사랑의 마왕(자칭) 로자리아는 마왕답게 프라이드 또한 하늘을 찌를 만큼 높았다.

 

이번 각본은 필멸자들의 눈높이에 맞게 너무 자극적인 내용은 뺐단 말이다! 그래, 관리자! 네 감상을 말해보거라!”

 

…….”

 

뜬금없이 불똥이 튀긴 관리자가 침음을 삼켰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평화로운 하루였을 터였다. 프리데릭 유마가 회사 비품을 깨 먹고 덕분에 오빠인 도마가 와서 사과하던 상황이긴 했지만, 어쨌든 관리자가 돈이 부족한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관리자라도 이런 상황은 조금, 아주 조금은 곤란했다. 마왕 출신은 상대가 까다롭다. 말 잘못 했다가 회사채로 날아갈 일이 있나.

 

안 그래도 요즘 에델의 눈치가 이상해 간이 쪼그라드는 경우가 늘었다. 아인과 츠바이가 보는 앞에서 채찍을 들고 오는 세라펠도 문제였다. 존재 자체가 불건전한 심의의 마왕 같으니.

 

다행이라면 로자리아는 그들과 비교하면 그나마 낫다는 점일까. 옆에서 도마가 힘쓴 덕분인지 적어도 상식은 있었다.

 

관리자는 각본의 내용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큼큼, 내 감상이 궁금한 건가?”

 

그래! 아내의 작품이라고 너무 띄워줄 필요는 없다. 솔직하게 말해 보도록.”

 

아내? 키나 더 크고 와서.”

 

뭬야?”

 

,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내 감상이란 말이지.”

 

슬쩍.

 

칭찬! 칭찬해주셔야 합니다!

 

으음.”

 

관리자는 고민했다. 도마의 저 열성적인 아이컨택을 무시하긴 좀 그랬다. 그는 이 회사의 양심이라고 해도 될 만큼 훌륭한 사원이 아닌가.

 

관리자는 최대한 도마의 의견을 존중하는 쪽으로 가기로 했다.

 

근데 이 남자 주인공, 아무리 봐도 나 같은데

 

관리자는 자그마한 의문을 속에 품은 채 로자리아의 각본을 처음부터 훑었다. 적어도 자신은 이런 난봉꾼이 아니라 생각하면서.

 

또다시 공모전에 떨어진 로자리아가 관리자에게 쳐들어오는 건 조금 훗날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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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에 쓰겠다고 후반에 너무 날림이 된 느낌이네. 글 쓰는 속도가 느려서 문제야.

재미없었으면 미안...하다... 캐붕이라고 느껴도 미안...하다....

사실 윗내용은 로자리아의 각본이라 그렇다.

가끔 글 말고 그림을 그렸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드는데 그랬으면 지금쯤 경찰서에 있지 않을까 싶다. 2D 인권은 소중하니까.

휴, 글이라서 다행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