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 쇼핑몰 한복판에서 평생의 귀인을 만난다.>


클로에 스타시커의 아침은 이르다. 그녀가 몸담고 있는 코핀 컴퍼니는 빈말로라도 근무환경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며, 근래에는 거물급 의뢰인들이 마구 엮이는 터라 야근은 일상이고 조기 출근은 필수가 됐다. 클로에로서도 정령님의 은총을 널리 알릴 기회가 되니 나쁘다곤 할 수 없으나, 막상 굴려지는 몸으로서 쉬이 기뻐할 수만은 없다. 무엇보다 아침의 필수 행사인 양자고양이운세 점을 볼 시간이 줄어드는 게 불만이다. 


<휴일에  평생의 귀인과 조우한다.>


적어도 세번 정도는 점을 쳐서, 결과를 대조해는 수고까지 들여야 정령님께서 올바른 계시를 내려주시거늘 출근시간이 한시간만 당겨져도 일정이 스파게티마냥 꼬이지 않는가. 양자고양이운세 점 본 다음에는 별자리점 확인도 해야 하는데. 


<반드시 놓치지 말 것.>


"네 정령님. 말씀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시간이 넉넉하다. 벌써 시계가 8시 반을 가리키고 있지만, 느긋하게 양자고양이 점도 세번이나 쳤다. 별자리 운세는 신문에서 확인했고, 관상학 예습할 여유도 있다. 클로에는 포트에 내린 커피를 홀짝이며 사원 프로필 사진을 하나씩 넘겼다.


"음...별자리 점도 같이 따져보면 오늘 김하나 부장님은 술자리에 액운이 있군요."


다음 정기 찬양회 권유하는 김에 알려줘야겠다.


머릿 속 한켠에 담아두고 은빛 머리칼을 손으로 한데 모아 묶어올린다. 그리고 평소의 수트 차림이 아닌 하늘하늘하고 화사한 프릴 원피스를 입고 숄더 백을 가슴께에 멘 채 집을 나선다.


그렇다. 클로에 스타시커는 오늘 유급휴가인 것이다.


2.


"15만 크레딧이야 아가씨."


돈을 건네자, 주인이 솜씨 좋게 물건을 포장해서 클로에에게 건넨다. 그녀는 기분 좋게 팔에 느껴지는 묵직함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밀짚 인형 같은 건 왜 그렇게 많이 구하는거야? 이것도 그 '정령님'과 관계있는건가?"


"물론이지요. 혹시 주인 아저씨도 관심 있으신가요? 제가 특별히 인형 하나에 1만 크레딧으로 넘겨드리겠습니다. 의례제법은 서비스로 가르쳐드리죠."


"아니, 방금 개당 오천 크레딧에 판 물건을 그 가격에 사고 싶진 않은걸...."


두 배 정도면 양심적인 가격인데.


"안타깝네요. 혹시나 정령님에게 귀의하실 생각이 있다면 다음 정기 집회에""관심 없거든?"


싱글싱글 웃고 있지만 칼같은 사내다. 벌써 몇 번이나 권유에 실패했는지 모른다.


"...그럼 또 필요한 물건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다음엔 구하기 쉬운 걸로 의뢰해달라고."


가게 주인의 배웅을 받으며 가게를 나선다. 그녀는 각종 점에 필요한 의식용 도구들을 보충하기 위해 오늘 휴가를 썼다. 이 바쁜 시기에 대체 휴가가 웬 말이냐며 애꾸눈 부사장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댔지만 그녀에겐 딱히 상관없는 일이다. 당연한 권리를 쓰는 게 무슨 문제란 말인가? 애초에 신입사원이 너무 거물을 물어왔던 게 문제 아닌가? 휴가 때 대체 누가 거래처를 뚫느냔 말이다. 일 중독도 아니고.


클로에는 인파에 섞여 거리에 녹아들었다. 쇼핑몰을 오가는 군중은 쉬이 그녀를 사색에 잠기게 해준다. 별 의미도 없는 잡담과 남자 복 없어보이는 관상과 아이들이 다박거리는 소리, 기운이 충만한 것이 조만간 좋은 일 있을 듯한 사내, 그리고 커다란 등.


"읏."


풀썩.


그녀는 앞서 걷던 남자의 등에 그대로 박아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한눈을...." "클로에 양?"


"......사장님?"


3.


"하하, 이거 참 우연이군. 나도 오늘 휴가일세. 집 안에만 있으려니 좀이 쑤시더군."


"부사장님이 휴가를 허락하시던가요? 요즘 결제가 밀린 서류가 끝이 없다고 이를 아득바득 가시던데."


"뭐....유능한 부하를 두는 것도 사장의 덕목 아니겠나? 다 알아서 하겠지. 휴가 중에 무슨 일 얘기인가."


하긴 그렇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클로에는 홍차를 홀짝이며 생각했다. 마침 사장이 반갑다며 차 한잔 대접하겠다고 해서 쫄래쫄래 따라오긴 했다만, 과연 사장이 정말 이러고 있어도 되는 것일까? 내일 출근했을 때 이수연 부사장의 노한 얼굴을 상대할 생각하니 정신이 아찔했다.


"그런데 짐이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군. 대체 그게 뭔가?"


사장이 자신의 짐 봉투를 가리키며 묻자, 클로에는 부스럭거리며 그 안에서 밀짚 인형 하나를 꺼냈다.


"인형 점을 위한 도구입니다. 사장님도 하나 어떠세요? 마침 같은 회사 소속이시기도 하니 특별 할인가로 2만 크레딧에 넘겨드리겠습니다. 의식 치르는 법도 친절하게 가르쳐드리죠."


사장은 인형을 건네받더니 이내 영 아리송한 표정으로 인형을 살핀다.


"어...이걸로 대체 무슨 점을 보는 건가? 점이 아니라 저주 아닌가?"


"무슨 실례되는 말씀을. 정령님께 위난을 피할 수 있는 자리를 점지받는 귀중한 의식에 쓰이는 인형이에요."


"대체 어떻게 의식을 치르면 그런 자리를 가르쳐준다는 건가?"


"일단 한밤중에 대못을 인형 가슴께에 망치로 박아넣어야 합니다."


"...진짜 저주인형 아닌가?"


"걱정 마세요. 이 다음부터는 평범하니까요. 그리고 밀짚 인형의 사지를 불로 지져서...."


"이 이야기는 그만하는 게 어떤가?"


아직 2단계까지밖에 얘기 안 했는데.


4.


친절하게도 사장은 인형을 돌려주었지만, 재밌는 이야기를 들은 답례라며 디저트를 대접해주었다. 클로에는 생딸기를 올린 생크림 쇼트 케이크를 음미하면서, 커피를 홀짝이는 사장을 흘끔 살펴보았다.


'그러고보니 오늘 아침....'


<쇼핑몰에서 평생의 귀인을 만난다.>


신령님께서 그런 말씀을 내려주셨다. 별 생각이 없긴 했지만, 어쩌면 신령님이 말하신 평생의 귀인이 바로 사장님인 것이 아닐까? 망하지만 않으면 결국 끝까지 몸담을 회사이기도 하니, 평생의 귀인이란 말이 꼭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 회사가 굵은 동앗줄이니 잘 잡고 버티라는 신령님 나름의 표현일 수도 있고.


"음...."


생크림 묻은 포크를 빼어문 채 혀를 굴리면서, 사장의 모습을 위아래로 슥 훑었다. 휴일인데도 정장을 쭉 빼입고 있지만, 캐주얼한 느낌을 줘서 답답하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커피잔을 들어올리는 손목에 채워진 시계가 반짝 빛나고, 커피를 홀짝이는 사장의 목젖이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본다. 


묘하게 섹시함이 느껴지는 사내다. 머신 갑 로보 상태일 때는 아무 느낌도 없었는데. 그건 깡통이었지만.


달칵.


클로에가 멍하니 생각에 빠진 사이, 비워진 커피잔을 내려놓은 사장이 이제 겨우 절반 파먹힌 쇼트 케이크에 눈길을 주며 말했다.


"하하, 아무래도 휴일에 회사 사장과 너무 오래 있는 건 불편하지 않나? 마침 커피도 다 마셨으니,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겠군. 좋은 하루 보내게."


<절대 놓치지 말 것.>


놓치지 말라는 건 회사에서 뼈를 묻으라는 뜻인 것일까? 신령님의 계시는 과연 무슨 의미인 것일까.


"저기, 사장님?"


"왜 그러나, 클로에 양?"


명확히 이해하지 못한 채로 그녀는 사장을 불러세웠다.


"설마 이렇게 짐이 많은 여성을, 혼자 보낼 생각은 아니시겠죠? 할 일 없이 쇼핑몰이나 돌아다니고 계셨으니, 연약한 여성 한 명 에스코트할 시간은 충분하신가요?"


그 말에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는다.


"아, 물론이지. 코핀 컴퍼니의 오퍼레이터인 클로에 양이라면 모를까, 화사한 원피스가 잘 어울리는 연약한 클로에 스타시커 양 한 명 에스코트할 시간은 충분히 있다네."


하지만 뭐, 모르면 알 때까지 놓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클로에 스타시커는 커피를 한 잔 더 시키려는 사장의 소매를 장난스럽게 살짝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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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2까지만 보고 써서 설정이랑 앞뒤 하나도 안 맞는다고 느끼신다면 그건 제대로 보신 게 맞습니다


클로에 개꼴린다고 생각해서 새벽감성에 호소해봤는데 조또 표현이 안 된 거 같읍니다 빨리 에피 3 열어서 클로에 정가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