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연한 봄이 다가온 화창한 날이었다.


변덕스런 그라운드 원의 날씨도 오늘 만큼은 봄 기운에 밀려난 모양이다. 고개를 들면 속이 뻥 뚫릴 만큼 티 없이 맑고 시원한 하늘이 보인다.


어린이들에겐 소풍을 연상케 하는 날씨였고, 수험에 치이는 학생들에겐 책 읽다 잠들기 딱 좋은 날씨였다. 평범한 직장인들이라면 동료끼리 점심 후 산책이나 하자고 제안할 정도로 좋은 날씨였다.


다만 불행히도, 태스크포스 소속 카운터에겐 오늘도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들이 다이브할 이면세계는 따스한 봄하고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끄으읏! 흐아아... 진짜 날씨 한 번 엄청 화창하네."


코핀 컴퍼니에 마련된 직원용 휴게실에서 유미나가 기지개를 켰다.


전신이 노곤해질 정도로 땃땃한 날씨였으나 창가에 상체를 기댄 채 규칙적으로 신발코를 바닥에 툭툭 건드리는 모습은 영락없이 지루해서 죽겠다는 학생들이 보이는 모습이었다.


"선배랑 소대장은 아직도 안 온 건가?"


창가에서 회사 입구를 슬쩍 쳐다보다가도, 혹시나 약속 장소가 바뀐 건 아닌가 싶어 펜릴 소대용 단톡방을 기웃거린다.


아침에 시간을 잘못 봐 예정된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출근해버린 탓에 어디까지 왔냐고 닥달하기도 뭐했다.


"하아. 시계 약이 다 된 줄 누가 알았겠냐고..."


그녀가 위화감을 깨달았을 땐 이미 서둘러 버스에 올라탄 후였다.


평소라면 학생과 직장인의 인파에 치여서 정신이 없었을 텐데 어째 오늘은 이상하리만큼 손님이 적고 쾌적했다.


설마, 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한 유미나는 깊은 탄식과 함께 좌석에 주저앉았다.


그렇게 그녀는 버스 기사와 등산객으로 보이는 중년인을 제외하면 아무도 없는 쓸쓸하기 그지없는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출근하게 되었다.


"부사장 아줌마 엄청 화내겠지?"


물론이다. 대개 미혼 여성들은 아줌마라 불리면 백이면 백 전부 화낸다.


그러거나 말거나 본인이 들으면 큰일날 호칭을 멋대로 붙인 유미나가 시원한 창턱에 볼을 부볐다.


이수연 부사장은 한때 블랙기업의 모범과 같은 코핀 컴퍼니를 이끈 수장답게 수당 없는 잔업은 반기는 반면, 추가 수당을 챙겨줘야 하는 추가 근무에 대해선 굉장히 엄격했다.


조금이라도 일찍 출근한 직원들에겐 성실한 모습이 보기 좋다면서 대뜸 칭찬과 함께 이런저런 대화를 걸어온다. 과거에 사장이었던 사람이 느닷없이 말을 걸어오니 하급자는 꼼짝도 못하고 이를 상대하는 처지가 된다.

 

알트 소대의 리더, 서윤은 이를 두고 정시까지 출근 카드를 찍지 못하게 만드는 치사하고 낡은 수법이라며 대놓고 뒷담을 깠을 정도로, 부사장은 돈에 관해선 한없이 약자 포지션이었다.


본의 아닌 가난함은 그녀를 이토록 집요하고 악찰낙귀처럼 만들었다. 유미나가 그녀의 행동거지에 은근히 감화되는 이유 중 하나다.


"알트 소대는 출근했으려나?"


기다리는 지루함에 지친 유미나가 고개를 들었다.


알트 소대는 누구보다도 유대감이 끈끈한 소대지만, 의외로 작전중일 때를 제외하면 함께인 경우가 드물었다.


방문할 때마다 식당 한 켠을 차지하는 유진과 곁에서 엄마처럼 구는 소빈, 저격수답게 단독 행동이 잦은 샤오린, 그리고 작전실에서 마주칠 때마다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는 서윤.


각자 활동 영역이 명확해서 사원의 개성이 강한 코핀에서도 꽤 또렷한 존재감을 지니고 있는 소대이나 아쉽게도 오늘은 회사에서 보이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없네..."


특히 서윤은 부사장을 골탕 먹인다고 조기 출근하는 경우가 잦아 내심 기대했으나 적어도 오늘 만큼은 그녀도 코빼기 하나 안 비췄다.


그렇다고 수확이 없는 건 아녔다. 하염없이 복도를 거닐다 이른 아침에만 볼 수 있다는 시설 관리인을 마주쳐 가벼운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일에 치일 때와 다르게 여유로운 마음가짐은 평소 보지 못한 회사 풍경을 눈에 쏙쏙 들어오게끔 만들었다.


"우리 회사도 은근히 넓었구나."


역시 내부 인테리어가 중요하다. 겉으로 볼 땐 형편없는 회사로 보였는데 막상 안을 둘러보면 그녀가 거쳐간 여타 태스트포스 못지않은 전문적인 설비를 갖추고 있다.


그렇게 회사 여기저기를 탐방하다 불현듯 정신을 차렸을 땐 눈앞에 사장실로 향하는 대문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생각해보니 사장실은 연봉 협상 때를 제외하면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네..."


처음 사장이란 작자를 마주했을 때, 유미나는 당황했다.


그만큼 사장은 이상한 사람이었다.


아니, 과연 그걸 사람으로 취급해도 되는 걸까? 유미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뭐, 인공지능이 발달한 시대니까 그리 이상할 건... 없으려나?"


당장 격납고에 머무는 거대한 로봇, 자칭 세기말 결전병기만 봐도 요즘 인공지능은 사람과 크게 구분이 안 가는 형편이다. 사장의 딸을 자처하는 미래전략실장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적어도 유미나는 그들을 딱히 사람과 별개 존재로 구분 짓지는 않았다.


문득 유미나는 궁금해졌다.


과연 자칭 머신갑, 로봇이 아니라 머신이라고 외쳐대는 사장은 출근을 했을까? 안 했을까?


똑똑.


"노크했으니 들어가도 되겠지?"


유미나는 과감하게 문고리를 아래로 잡아당겼다.


"실례합니다...?"


마냥 어렵게 느껴진 사장실 침입은 시시하리만큼 쉬웠다. 툭 건들자 열린 문 사이로 빼꼼 고개를 내민 유미나가 스윽 사장실 내부를 훑었다.


"아무도 없나요~?"


문이 활짝 열린다. 발소리와 숨을 죽인 게 무색하게 사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유미나는 마음 속 메모장에 적었다. 코핀 컴퍼니, 의외로 보안에 취약함.


"여기는 여전하네."


코핀 컴퍼니에서 가장 높은 장소에 발을 들인 유미나는 새록새록 떠오르는 연봉 협상 때 기억을 되새기며 사장실 안을 누볐다. 화려한 장식장에 황금색 머신갑 트로피의 수가 전보다 늘어난 거 같았지만, 그 부분은 애써 모른 체 넘어갔다.


부사장이 뒷목 잡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만 머릿속 한켠에 조용히 메모해두었다.


"그러고 보면 사장님, 은근히 내 연봉을 높게 쳐줬지..."


다른 태스크포스에서 방출되고 여기저길 전전하다 간신히 정착한 한낱 C급 신입 카운터에겐 너무나도 후한 연봉 책정이었다.


뭐, 1년이 넘게 지난 지금은 가볍게 웃어넘길 수 있는 추억거리에 불과하지만.


당시엔 특별대우 비스무리한 걸로 다른 사원들에게 차별 받을까봐 아닌 척하면서도 내심 전전긍긍했던 기억이 떠올라 유미나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좋아. 사장실도 대충 다 구경했겠다. 슬슬 휴게실로 돌아가 선배랑 소대장이나 기다릴까...?"


유미나가 뒷짐을 진 채 뚜벅뚜벅 사장실을 걸어나왔다.


그러나 문을 연 건 유미나가 아니라 바깥에서 온 사람 아니, 기계였다.


"미나 양?"

"어라? 사장님?"


문틈을 사이에 두고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깔렸다.


먼저 입을 연 건 머신갑 사장이었다.


"미나 양이 사장실엔 어쩐 일인가? 아직 연봉 협상 시즌은 꽤 남은 걸로 아는데."

"아뇨! 그냥, 소대장이랑 선배를 기다리다보니 심심해져서 회사 구경이나 해볼까 하다가 마침 사장실도 열리길래..."

"으음. 괜히 접근 권한을 최고 등급으로 높여뒀나..."

"어? 뭐라고 했어, 요?"

"아무것도 아니네!"


빠밤! 하는 소리와 함께 사장이 두 팔을 흔들었다.


"허면 내 비장의 무기, 훗날 사내 야유회 때 쓰일 머신갑 황금 트로피도 보았겠군!"

"아 그게 야유회 때 쓰일 거였어?"


혹여라도 외부에 알려지면 사원들의 거센 반발이 예상되는 보상이었다.


"다른 이들에겐 비밀로 해줄 수 있겠지? 서프라이즈를 망치는 건 감봉 사유에 해당되니까."

"방금 멋대로 지어낸 규칙이지?"

"크흠! 요즘 부사장의 눈빛이 무서워서 말일세. 대신 내 이걸 주도록 하지!"


머신갑이 어디서 난 건지 알 수 없지만, 하여튼 책을 한 권 꺼냈다.


"이게 뭐야? 한정판 머신갑 트로피 사진집?"

"오호호! 그렇다네! 무려, 세상에 단 아홉밖에 남지 않은 초초초초 희귀 굿즈라네!"


다시 한 범 빠밤! 소리가 울려퍼졌다.


"아... 그, 그래. 고마워."


이거 되팔면 돈은 되나? 유미나가 사진집을 짜게 식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펜릴 소대는 오늘 휴무인데 미나 양은 왜 출근한 거지? 둘을 기다린다는 걸 보면 따로 약속이라도 잡았나?"

"네? 아니, 분명 오늘 다이브 임무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럴리가. 오늘 스케줄은 알트 소대와 플로라 메이드 서비스 제외 전부 공란이야."


머신갑의 설명에 유미나가 황급히 휴대폰을 꺼냈다.


[나] : 소대장! 우리 오늘 임무 없어?

[꼬맹이대장] : ㅇ • ㅣㅂ ㅆ다ㅏ

[실눈선배] : 없는데요?


[실눈선배] : 설마 미나 양...

[실눈선배] : 오늘 출근하신 건가요?

[나] :  

[꼬맹이대장] : Today is holiday for our squad. 

[실눈선배] : 스승님 최신문물로부터 도망치지 마세요. 맞서 싸워야죠.

[꼬맹이대장] : ㅗ

[실눈선배] :


"말도 안 돼!"


유미나가 경악했다. 너무 놀라 사제의 만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군. 펜릴 소대의 다이브 예정일은 다음주로 알고 있다네."

"진짜? 아니, 나 설마 시간 착각한 걸로 모자라 날짜까지 착각한 거야?"


나이가 들어 치매에 걸린 노인도 아닌데 이게 무슨 추태냐면서 유미나가 한탄했다.


"젊은 친구가 뭘 새삼스럽게. 나도 가끔은 절전 모드에서 깨어날 때 하늘이 어둑어둑하면 밤낮을 착각하곤 한다네. 흔한 일이야. 흔한 일."

"사장님은 로봇인데도 그런 착각을 하는 거야?"

"..."


무심코 위로해주려다가 정체가 탄로날 뻔한 머신갑이 가위손을 스잉스잉 까딱이며 말을 아꼈다.


잠시 후 머신갑이 변명했다.


"... 원래 절전 모드일 때는 네트워크 연결이 끊겨 있다네."

"아아 그렇구나. 사장님도 고생이네. 기계의 삶이 마냥 편한 건 아니었구나."


다행히 유미나가 눈새라 별다른 의문 없이 잘 넘어갔다.


머신갑은 그녀가 보기보다 둔감한 것에 안심했다.


"그나저나 미나 양, 오늘 예정은 있나?"

"오늘 다이브할 줄 알았는데 일정이 있을 리가 없잖아." 


유미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일할 때 빼면 집에 틀어박히거나 쭉 병원..."

"병원?"


아차! 자기가 말해놓고 유미나가 허둥지둥 당황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장 앞에서 사생활을 드러내는 건 좀 그렇지 않나? 유미나가 황급히 자기 입을 꾹 다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난 평소에도 완전 프리하다고."

"흐음?"


유미나가 뒷말을 얼버무리자 머신갑이 눈을 빛냈다.


뭐, 대놓고 부사장한테 사원들 뒷조사나 시키는 양반이라 얼버무린 이야기가 뭔진 다 파악하고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마침 할 일이 없다면 이 몸과 좀 어울려줄 수 있겠나?"

"무슨 일인데? 아, 혹시 이것도 일하는 걸로 취급 가능해?"

"물론! 내 사장 권한으로 승인하지!"

"콜!"


대개 사람들이 다 그렇지만, 가난한 자들은 더욱 그렇다. 그들은 돈에 쉽게 굴복한다. 예외는 없었다.


"근데 무슨 일인데?"

"별 거 아니야. 마침 날씨도 좋겠다. 같이 나들이라도 가는 게 어떤가?"

"나들이? 내가 사장님이랑?"


유미나가 자신과 사장이 나란히 산책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 묘한 그림이다.


회사의 사장이 여사원에게 나들이를 하러 가자는 그림은 누가 봐도 불건전해 보인다. 하지만 그 사장이 기괴한 감성을 지닌 로봇이라 생각하니 그림이 한층 더 요상해진다.


다행히 주변의 이목을 끌지언정 불순하게 보이진 않는다는 점이 유미나의 경계심을 몇 단계나 낮춰주었다.


그래도 역시 사장과 일개 사원이라는 꼬릿표가 그녀에게 망설임을 주자 머신갑이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이대로 회사에 있어봤자 부사장이 난리칠 게 뻔하고, 퇴근해도 할 일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 지?"

"그럼 부사장 잔소리도 피할 겸, 외근 수당도 챙길 겸 함께 나들이나 가자는 거지. 이토록 좋은 봄날을 칙칙한 시멘트 벽 안에서 보내긴 너무 아깝잖나?"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좋아. 대신 이것도 엄연히 근무의 일환이니까 밥은 사줘야 해?"

"직원의 밥 한 끼 해결 못해줘서야 사장의 수치지. 식비는 필요 경비로 충당하지."

"그럼 좀 비싼 거 시켜도 되려나?"

"얼마든지."


머신갑이 사악하게 웃는 표정을 띄우자 유미나도 공짜 밥을 얻어먹을 생각에 실실 웃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귀여운 작당모의는 시작부터 커다란 난관에 부딪치게 되는데.


"꽤 재밌는 이야기를 나누고 계시더군요, 사장님?"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에 주변 공기가 얼어붙었다.


"어, 어라?"


기계인 주제에, 머신갑이 바들바들 떨면서 몸체를 돌렸다.


그곳엔 부사장 이수연이, 해맑은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웃는 얼굴이 이토록 무서울 수 있다는 걸, 유미나는 절감했다.


"부, 부사장...?"

"시설 관리인이 아침 일찍부터 출근하는 성실한 사원이 있다기에 와봤더니..."


움찔!


이수연의 차가운 시선이 유미나를 훑자 그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깡통 사장이 은근히 부사장 앞에서 꼼짝도 못한다는 건 사원 모두가 아는 공공연연한 사실. 유미나는 괜히 사장의 꾐에 넘어갔구나 싶어 뒤늦게 후회했다.


"하아. 진짜 닮긴 닮았네요."


이제는 떠올리기만 해도 쿡쿡 쑤시는 안대 안쪽을 매만지며 이수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유미나 양은 거기 이따 할 말이 있으니 거기 가만히 계시고..."


이수연이 슬쩍 도망가려고 한 사장을 붙잡았다.


"어딜 그리 급히 가시나요? 사.장.님?"

"그, 급한 볼일이 생각나서 말일세!"

"어머? 마침 저도 급한 일로 사장님과 상담이 필요했는데 잘 됐네요."


콰직!


머신갑의 두부를 이수연의 악력이 짓누르자 불길한 소리가 새어나왔다.


"웬일로 좀 일찍 기동하시나 했더니 상당히 깜찍한 계획을 꾸미고 계셨네요, 사장님?"

"아, 아하하. 이것 참 면목이 없구먼~."


머신갑이 삐질 식은땀을 흘리며 딴청을 피웠다. 


"뭐, 됐어요. 자아, 이거 받아요 미나 양."

"자, 잘못했습니... 다?"


반사적으로 혼날 줄 알고 허리를 바짝 숙인 유미나가 의아한 시선으로 이수연이 건넨 카드를 받았다.


"저기, 이건...?"

"뭐긴요. 법카죠."

"버, 법카!?"


유미나가 깜짝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이수연이 건넨 카드를 면밀히 살폈다. 검은 바탕에 붉은 테두리가 새겨진, 관리국 인증 마크가 붙은 카드는 딱 봐도 쓰기가 무척 부담스럽게 생겼다.


"마침 아.주. 중.요.한 외부 인사가 찾아올 일이 있는데. 저는 사장님과 개인적으로 나눌 이야기가 있어서 바쁘거든요. 그쪽이 대신 나가주지 않을래요?"

"내, 내가? 회사 돌아가는 것도 잘 모르는 일개 사원한테 너무 막중한 임무 아니야?"

"막중한 임무라는 건 몰래 세계적인 테러 조직의 본거지에 침입하는 임무를 뜻해요. 유미나 양."

"윽!"


리플레이서 사태로 찔리는 게 있는 유미나의 어깨가 움찔했다.


"근데 진짜 괜찮아? 막 내가 실수해서 회사에 폐를 끼치고 그러는 건 아니지?"

"물론이죠. 마침 요인께서 유미나 양에게 굉장한 관심을 표하고 계시거든요."

"으엑! 그렇게 말하니까 괜시리 더 불길한데..."


유미나가 슬쩍 자기 몸을 가렸다.


어처구니가 없다는 머신갑과 이수연의 시선에 뻘쭘해진 나머지 헛기침으로 이를 무마했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혹여나 그런 식으로 나오면 맘껏 줘패도 되요. 부사장인 제가 허락하죠."

"그러다가 큰일 나면? 나 회사에서 잘리고 막 불이익 생기고 그러는 거 아냐?"

"뭐, 그럴 일은 없겠지만... 폐를 끼쳐봤자 우리 회사가 더 나빠질 구석이 있나 모르겠네요."


어차피 최고 관리자가 자기네 사장인데 뭐 어쩔 거란 말인가? 안절부절 못하는 유미나를 보며 이수연이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기, 부사장...? 그 사람을 너무 나쁘게 말하진 말게나..."

"왜죠? 자기 사업 말아먹고 미래가 창창한 소녀를 애꾸눈 청년 실업자로 만든 희대의 악당을 욕하는 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요?"

"하, 할 말 없음..."


이수연이 따박따박 반박하자 머신갑의 양팔이 아래로 축 쳐졌다.


표정도 어째선지 굉장히 지치고, 또 침체된 모습이었다.


"뭐야. 부사장이랑 아는 사람이였어?"

"... 뭐, 은인 겸 원수 겸 여러모로 얼굴 볼 일이 잦은 우리 회사 최대 주주시니까요. 취미가 괴팍하긴 해도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흐응, 그렇구나."

"참고로 방금 제가 건넨 법카도 그 양반 카드니까 가능한 많이 뜯어먹고 오세요.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죠?"

"어, 응. 알겠어."


어째선지 화난 거 같은 이수연의 모습에 유미나는 멀뚱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미 사장은 두 사람의 안중에도 없었다.


"그럼 슬슬 가보도록 하세요. 아마 기다리고 있을 테니."

"벌써? 어, 어디로 가야해?"

"회사 앞 공원으로 가면 쓸데없이 잘생긴 남자가 한 명 있을 겁니다."


착각일까?


점점 작아지는 머신갑을 뒤로한 채 유미나가 회사를 빠져나왔다.


"후우. 뭔가 정신없는 하루네..."


부사장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어디 걱정이 안 될 수 있나?


자신의 직장이 걸렸을 수도 있는 자리가. 유미나는 과연 자신이 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공원으로 향했다.


이를 사장실 창가에서 지켜보던 이수연이 사장 아니, 관리자에게 물었다.


"그래서. 멋대로 임무 날짜만 서로 다르게 공지한 이유가 진짜 사원이랑 데이트 한 번 해보려고 그런 건 아니겠죠?"

"... 으음. 노코멘트 하겠네."

"에휴. 진짜 이딴 남자도 사장이라고..."


두통이야. 이마를 짚은 이수연이 지금 이 자리에 없는 관리자에게 경멸의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시답잖은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기 있는 공원 방향으로 점점 멀어지는 유미나를 눈에 담으며, 작게 한숨을 내쉰 이수연이 힘없이 읊조렸다.


"하아. 이번만이에요."

"... 고맙네."


짧은 감사를 끝으로 머신갑은 절전 모드로 들어갔다.


사장실에 홀로 남게 된 이수연이 쓸쓸하게 몸을 움츠렸다.


"나도 오랜만에 정자랑 낮술이나 마실까..."


그러지 않고서야 가슴 속 한켠에 쌓인 이 케케묵은 감정을, 그녀는 도저히 해소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 이제 데가하러 가야해서 하편은 빨라야 내일?

참고로 건모티콘 아카콘 찾아준 챈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