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을 지나 겨울이 다가온다. 올 한 해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리고 유달리 기억에 남는 날도 많았다. 

 

봄에는 그녀를 만났다. 여름에는 그녀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거리를 다녔다. 그렇게 즐겁게 거리를 다닌 것도 5년만이었다. 그리고 가을이 올 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하지만 위대한 현대 의학의 힘으로, 바퀴벌레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그리고 가을이 끝난 지금, 나는 내 인생을 뒤흔든 소녀와 함께 걷고 있다. 그것도 나란히 손잡은 채로.

 

“아저씨, 출근하는데 손잡고 가면 어떻게 해요. 그리고 오늘 휴가라면서요?”

 

“오늘 휴가 맞아. 오늘은 학부모 참관이야.”

 

“그 이야기 꼭 소대장님 앞에서 해요. 아, 그 때는 손 놔야 해요!”

 

내 머리의 어떤 회로가, 정확히는 부끄러움을 나타내는 회로가 고장 난 모양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남들 시선 때문에 하지 못할 짓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으니...... 부끄러워하는 소녀와는 달리 나는 미소를 지우기 위해 노력해야할 정도로 행복하다. 그래, 이렇게 출근하고 싶었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이제 진짜 사옥 근처인데 관리부장님이 보시면 어떻게 하려고 해요......”

 

“괜찮아, 그 사람 포섭해놨어.”

 

괜찮은 남자 소개해달라고 했거든, 그래서 한 명 꽂아줬지. 당분간은 너한테 뭐라 안할거야. 원래 귀여워서 많이 봐주고 있다고 이야기하긴 하시던데, 그 이야기는 비밀로 해야겠지만.

 

내 이야기에 소녀는 잠깐 나를 쳐다보더니 눈매가 가늘게 변했다. 무언가 불편하다는 신호였다.

 

“아저씨가 왜 그 분이랑 친해요?”

 

“아니...... 안 친해, 전혀 안 친해. 완전 남이야.”

 

“근데 어떻게 포섭을 해요? 막 따로 연락도 하고 그래요?”

 

큰일이다. 뭔가 잘못 건드렸다. 원래 이런 꼬마애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요즘 들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할 때 질투심을 보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애초에 질투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지.

 

“어, 저기 우리 소대장님 지나간다. 인사드려야지.”

 

“칫...... 나중에 그 이야기 꼭 해요. 안녕하세요. 소대장님!”

 

소녀는 내 손을 놓지 않은 채로 힐데 소대장에게 목소리 높여 인사했다. 그녀의 인사에 소대장은 뒤돌아서다가...... 손 잡은 우리의 모습을 봤는지 다시 돌아섰다.

 

“크흠, 오늘 휴가 아니었나? 그리고 꼬맹이, 출근길에서도 손잡고 다니는 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아. 애초에 나이도 10살 가까이 차이나면서......”

 

그녀는 우리의 모습에 조금 놀랐다는 듯 갈수록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소녀 또한 손잡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는지 급하게 손을 뿌리치려고 했다.

 

“아야야, 손 뿌리치지마. 상처 벌어지려고 하는 거 같아.”

 

“아! 어디 괜...... 이 아니고 상처 다 나았잖아요! 아저씨, 또 엄살이에요? 아저씨 요즘에 막 엄살 부리고, 장난치고, 그리고, 그리고...... 막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다니고...... 아저씨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원래 이런 사람 아니었는데. 소녀를 보면서 씩 웃었다. 그러자 소녀는 굉장히 별로라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다시 쳐다봤다. 역시 웃는 건 아직 어색한 모양이다.

 

“아저씨, 아저씨는 오늘 뭐할거에요? 사업부에 출근 안할거에요?”

 

“말했잖아, 오늘 휴가라고. 거기다가 부서 이전 신청도 해놨으니 휴가 끝나고서는 펜릴소대 소속이야. 아니, 정확히는 이중소속으로 올리겠대. 그리고 오늘은 펜릴소대 쪽 사무실에서 커피나 한 잔 하면서 꼬마아가씨가 사무 일은 얼마나 잘하나 봐줄거야.”

 

“지난번에 봤잖아요. 그러면 다들 일부러 밖에 일 만들어서 나간단말이에요. 오늘도 사무실지킴이가 되겠네요.”

 

그게 좋은건데. 볼을 귀엽게 부풀리는 그녀를 보면서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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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nd Beta : 예상과는 달리 쉽게 인재를 고용하셨네요.


Sound Alpha : 그냥, 진솔하게 이야기를 한 번 나눴지. 멸망하는 세계에서는 혼자서 모든 것을 못 지킨다는 것을 그 친구도 알고 있으니까.


Sound Beta : 문제는 그 인재가 온 이후입니다. 사내연애조항도 고치고, 프리랜서 고용 조건도 전례 없는 파격적인 계약에, 새로 들어온 신임 카운터를 포함해서 다른 일원들까지 가끔 그 사무소로 가보고 싶다고 이야기를 해서 문제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알고 계십니까?


Sound Alpha : 하하...... 다들 사랑하는 나이이지 않나. 궁금한 모양이지.


Sound Beta : 태평해서 부럽군요. 그러면 그 인재의 병원비는 사장님 월급에서 제하겠습니다.


Sound Alpha : 그건...... 어쩔 수 없겠군. 그리고 분명 그런 인물도 필요할거야. 좋은 눈을 가진 친구니까. 그리고 나처럼 잃을 게 많은 절박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힘내겠지. 그러면 좋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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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것은 많았고 생각이 드는 것도 많았지만 이렇게 가볍게 완결을 내기로 했습니다.


사랑 이야기를 길게 풀고도 싶었고 조금 더 행복한 이야기를 많이 풀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이렇게 끝내는게 제일 깔끔해보이네요.


사실 처음에는 굉장히 많은 것을 구상했습니다. 사장은 소녀를 함선에 태우는 오퍼레이터 겸 카운터로 키울 생각이었고 그 용병을 그녀의 교육담당, 오퍼레이터 서포트, 그리고 관측담당과 같은 다양한 역할을 부여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도 정리를 하고 있었죠.


그래서 신규 함선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규 함선이 예상과는 달리 프리드웬의 적폐로 보이는 함선이라서 그냥 거기까지는 안 풀고 정리를 했습니다.


첫 편부터 지금까지를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중간에 쓰는 놈이 바뀌는가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을겁니다.


최근에 한소림 이야기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원래 3인칭으로 생각을 쭉 풀어내면서 쓰는 스타일이었고 배경묘사나 행동묘사를 유독 못하거나, 안하거나 하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소설도 굉장히 오래 쓰지 않았죠.


그래서 이번에는 1인칭으로 써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많은 좋은 글을 쓰시는 분들이 작품을 쓰셨고 그런 것들을 읽으면서 제 나름대로 여러가지 시도, 여러가지 문체의 변경을 가져와보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처음이랑 비슷하게 쭉 생각을 나열하고 풀어쓰는 방향으로 가게 된 것 같네요.


앞으로도 또 재밌는 소재가 있으면 이 세계관에 다른 인물의 세계를 덧대서 써나가겠습니다. 그 때도 역시나 지금처럼 느릿느릿 새벽에 잠깐 쓰는 형태겠지만 최대한 재밌게, 좀 트렌드에 맞게 써보게 노력해볼게요. 그리고 새벽에 쓰다 보니 늘 한붓그리기식으로 한 번에 쓰고 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문장이 비문이 많을 수도 있고 이상할 수도 있는데 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럼 다음에 또 재밌는 거 써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