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맞지?"


부사장인 이수연의 불호령에 헐레벌떡 공원까지 뛰어온 유미나가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나름 급하게 뛰어온 건데 정작 공원엔 운동하러 동네 마실을 나온 어르신을 제외하면 사람 그림자 한 점 안 보였다.


그래도 나름 관리국 공인 태스크포스 부사장이란 직위에 앉은 사람이 만나려 한 상대인데 저렇게 후줄근한 츄리닝 복장일 리가 없다는 합리적인 판단 하에, 유미나는 노인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그런다고 공원에 부사장과 미팅을 할 법한 사람이 나타나진 않았다.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양손을 외투 주머니에 꽂은 유미나가 인상을 찌푸렸다.


주머니 속에서 부사장이 건넨 카드의 감촉이 너무 거슬린다. 그녀가 까글까글한 카드 표면에 새겨진 번호를 긁으며 투덜대는 사이,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이봐요 아가씨."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어째선지 익숙한 목소리에 유미나가 고개를 돌리려 했다.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과 벚꽃잎이 시야를 가리는 사이, 차가운 감촉이 등목에 닿았다. 캔커피였다.


"꺅!"


유미나가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거꾸로 곤두선 머리카락 너머로 언뜻 곤란한 미소를 짓는 남성의 모습이 보였다.


"아하하.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화들짝 놀라 주저앉은 유미나에게 남성이 양팔을 들고 사과했다. 태양의 역광 때문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 같았다.


"대신이라기엔 뭐하겠지만, 이거라도 드실래요?"

"... 고맙다는 말은 안 할 거에요."


남성이 유미나의 등목에 닿았던 차가운 캔커피를 건넸다. 유미나는 여전히 물기가 남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조심스레 캔커피를 받았다.


"진짜 깜짝 놀랐네."

"죄송합니다. 아는 얼굴이라 저도 모르게 장난기가 발동했네요."

"아는 얼굴이요?"


유미나가 고개를 들어 자신을 놀래킨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역광과 화들짝 놀라 좁아진 시야 때문에 몰랐는데.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보자 남성의 모습이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단정한 갈색 머리카락이 어울리는 부드러운 인상의 미남이었다. 신장도 유미나가 서서히 무릎을 피고 일어섰음에도 고개를 올려다 봐야할 정도로 훤칠했다.


'내가 이런 사람을 만났던가?


간신히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두근거린다. 머릿속에서 이상한 기시감이 그녀를 자극한다.


"뭔가 더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가요?"


무심코 너무 빤히 쳐다본 나머지 서로 눈이 마주쳤다. 유미나는 자기도 모르게 흠칫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녀는 눈을 내리깐 채, 캔커피 뚜껑을 손톱으로 툭툭 치며 물었다.


"혹시 오늘 우리 부사장하고 만날 예정이라고 한 사람이 그쪽... 인가요?"

"부사장이란 분이 코핀 컴퍼니의 이수연 씨라면. 네, 그런 모양이네요. 예쁜 아가씨."


유미나가 뒤늦게 말을 높이고, 남자는 그 모습이 귀여운지 부드럽게 웃었다.


'뭐지? 회사에서 스치듯 본 사인가?'


마침 부사장 말대로면 상대는 코핀에 꽤 큰 투자를 하는 대주주다. 어쩌다 한 번 정도는 스치듯 봤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런 것치곤 어딘지 모르게 유미나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익숙하고, 또 친근했다. 생각해보면 목소리조차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단순 착각으로 치부하기엔 포근한 느낌이 자꾸만 가슴을 한켠을 간질였다. 


만약 둘 사이에 추억이란 게 존재했다면 반드시 그 장면이 떠올랐을, 그런 기분이었다.


사실 둘은 실제로 만난 적이 있었다. 남자가 먼저 그 부분을 지적했다.


"오늘은 토끼귀도 안 쓰셨네요. 아가씨."

"토끼귀?"


토끼귀는 유미나의 기억 속에 딱 두 번 존재했다.


론 리 박사가 추진한 발렌타인 때 초콜릿 나눔 행사와, 에이미와 함께 도시관리국 경계망을 돌파하던 때. 그리고 두 기억 사이로 남성이 처음 말을 건넸을 때와 똑같은 대사를 들은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아, 아아! 설마...!"


뒤늦게 부끄러운 흑역사를 떠올린 유미나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 저희, 발렌타인 때 본 거 맞죠...?"

"기억나셨나보네요."


벌써 1년도 더 된 일 아니냐며 남자가 능청스럽게 웃었다.


"사실 저도 그때 먹은 초콜릿의 맛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맛있었죠."

"아, 아으... 그, 그러니까 그때 그건 좀..."


그냥 잊어주세요...


수치심에 말문이 막힌 유미나가 개미가 기어가듯 작아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째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차라리 바니걸 차림을 중학교 동창에게 들키는 게 더 낫다고 여겨질 정도로 커다란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바들바들 떨며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고개를 푹 숙인 유미나의 모습은 시니컬한 평소 이미지와 대조되어 유난히 색달랐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그래.


무척이나 귀여웠다.


사실, 원래 이런 모습이 더 잘 어울리는 소녀다. 부끄러움에 몸을 비틀고 있으나 의젓하면서도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모두의 지지를 받는 소녀.


패시브 마냥 어두웠던 안색이 조금은 밝아지자 남자도 자신의 입가가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정산 때마다 10원 하나 안 떼이려고 부사장한테 끈질기게 들러붙는 수전노가 제 나이 또래에 걸맞는 모습을 보이는 건 그로서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이게 그 아이의 잔재에 대한 속죄가 될진 모르겠지만...'


어른답지 못하게 늘 어렵고 무리한 부탁만 요청해온 그는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그녀에게 속죄하고자 지금 자리를 마련했다.


"어려운 부탁이네요. 잊어버리기엔 너무 자극적인 모습이라..."

"아니. 그냥 쫌! 눈치를 주면 대충 알아채달라구요!!"

"아하하!"


결국, 수치심을 참다 못한 유미나가 먼저 터져버렸다. 이불을 걷어차듯 바닥을 뻥뻥 발로 챈 그녀는 꺄으으, 하고 무릎까지 굽힌 채 머리를 감쌌다.


일부러 그녀를 위해 주선한 의도적인 만남이었지만, 관리자는 재미난 장난을 멈출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슬쩍 휴대폰을 꺼내 다음 스텝을 밟았다.


"당시 활동 기록이 관리국 네트워크에 공식 홍보 자료로 올라가 있더군요. 그때 이후 생각보다 알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았나요?"

"네? 거짓말... 그 말 진짜에요?"


관리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관리국 네트워크를 검색한 뒤 그녀에게 보여주었다.


거기엔 유미나와 하트베리, 그리고 카운터 아카데미 중등부에서 온 학생들이 일반 시민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는 사진이 여러 장 찍혀 있었다.


일부러 홍보물 맨 아래 댓글 반응까지 보여주자 유미나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도를 넘어선 댓글들은 삭제됐지만, 여전히 시민의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어, 어째서 소대장이랑 그 귀족처럼 보이던 영국 아가씨는 안 찍힌 건데!?"

"글쎄요...?"


전자는 순전히 농땡이를 피워서 그렇고, 후자는 기관의 요청 때문에 사진이 내려갔다. 관리자는 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능청스럽게 고개를 기울였다.


"나 완전 망했어..."


차라리 모르는 게 더 나았다며 유미나가 투덜댔다.


"부끄러워서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라고..."


"아하하. 들은 것과 달리 밝고 재미난 아가씨네요. 덕분에 아침부터 크게 웃었어요."

"이쪽은 하나도 안 웃겼는데요."


입술을 댓발 내민 유미나가 잠시 관리자를 노려보았다.


"그렇게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요. 관리국 공식 홍보 복장이잖아요?"

"직접 입어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면 동의해드릴게요."

"크흠!"


관리자는 대답 대신 시선을 피했다.


유미나의 한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발상을 거쳐야 공식 홍보 복장을 바니걸로 고를 수 있냐구요. 안 그래요?"

"관리국 높으신 분들의 감성이 조금 특이한 건 유명한 이야기죠."

"특이하다구요? 정신이 헤까닥한 노인네가 아니라?"

"크, 크흠!"


유미나가 툭 던진 말은 비수가 되어 관리자의 가슴에 푹 꽂혔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의 취미나 감성은 남들한테서 이상한 시선을 받기 일쑤였고, 이를 관리자 본인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으니까.


어쩌면 그녀 말대로, 관리자는 정신이 헤까닥한 노인네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기억을 조정해가며 600년이란 시간을 살아왔으니 살짝 미쳐도 이상할 건 없다.


게다가 옛날부터 관리국의 요상한 감성에 대해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의견이 분분한 편이었다. 통계적으로 남성들은 환영하는 편이지만, 여성들은 질색하는 비율이 더 높았다.


유미나도 여성인 만큼 엄연히 후자에 속했다.


"그도 그럴 게 남자한테도 같은 옷을 입힐 건 아니잖아요?"

"길거리에서 바니옷을 입은 남자를 보고 싶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왜요? 저는 한 번 보고 싶은데. 왠지 재밌을 거 같지 않아요?"

"아하하. 별로 상상하고 싶진 않은 광경이네요."


아포칼립스가 별 거 있나?


바니옷 남자가 길거리를 돌아다니는 세상이 곧 아포칼립스지.


관리자는 다짐했다. 바니옷 입은 남자들이 관리국을 홍보하는 꼴을 볼 바에 차라리 세계의 멸망과 함께 눈을 감겠다고. 대적자 나유빈도 동의할 것이다.


그만큼 바니걸 홍보대사는 중대사항이었다.


대부분 관리국 고위 인사가 이에 동의할 거라고, 관리자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의 취향은 특이해도 틀린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도.


그래도 계속 바니걸 이야기를 했다간 자신이 입게 될까봐 말을 돌렸다.


"우리 바니 이야기는 그만하도록 할까요? 부끄러운 기억을 자꾸 들춰내는 거 같아 죄송하네요."

"... 배려해주셔서 참 고맙네요."


지친 얼굴을 한 유미나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녀는 이미 놀릴 만큼 다 놀려먹은 주제에 퍽이나 고맙겠다며 관리자를 노려봤다.


"사죄의 뜻으로 점심은 제가 사드리겠습니다."

"아직 점심까지 한참 남았거든요?"


평소라면 공짜밥에 냉큼 낚일 유미나였으나, 관리자의 놀림에 삐딱해진 그녀는 이번에도 말꼬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확실히,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네요."


평일 오전, 점심을 먹긴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꼬르륵.


하지만 급하게 나오느라 삼각김밥 하나에 쿨피스 하나로 배를 채운 유미나의 배는 분위기를 읽지 못하고 꼬르륵 소리를 내었다.


"..."


간신히 색을 되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빨갛게 물들었다. 무표정을 가장했으나 씰룩이는 입가는 당장이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유미나를 위해 관리자는 최대한 새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고, 어른스럽게 접근했다.


"그러고 보면 미나 양은 한창 많이 먹을 나이 때죠?"

"그, 그렇죠? 아하하. 제가 아직 발육이 한창인 나이라서... 아하... 하."


발육이 한창인 나이라는 발언에 둘의 시선이 동시에 특정 부위를 향했다. 유미나는 또래치고 이미 충분히 큰 편이었다. 저기서 더 커지면 속옷 구매에 들어가는 비용이며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다.


'조만간 사내 복지를 좀 더 신경 써야겠군.'


물론, 당황해서 튀어나온 변명인 걸 알지만, 관리자는 신사답게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면서도 부사장한테 어떤 이유를 들먹여 복지 지원을 늘릴지 고민했다. 그럴려면 우선 관리국 지원금부터 해결해야 했다.


"죽고 싶다..."

"포기하지 마세요. 세상은 아직 살만하니까요."

"아으윽!"


나름 위로를 했는데도 역효과가 나자 관리자가 식은땀을 흘렸다.


오랫동안 쌓은 경험에 따르면 그녀를 달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바로 먹을 것이다. 그녀가 맛난 음식에 혹하는 건 1주년 취임식 때도 느껴본 것이다. 하지만 선뜻 식사를 제안하기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그는 딱 하나 남은 방법을 골랐다.


"어?"


관리자가 유미나의 손을 낚아챘다.


"점심 먹기 전 가벼운 입가심이나 하죠."


신기한 감각이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느낌.


머릿속으론 거절을 떠올린 주제에 입은 어째선지 굳게 다문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관리자가 이끄는대로 움직이는 몸뚱아리에 의문을 표할 틈도 없이 둘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마침 제가 추천하는 카페가 하나 있습니다."

"카페요...?"


기대해도 좋다며 그가 자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하아. 재미없기만 해요."


어디 두고보자는 빈정거림에도 그는 실실 웃을 따름이었다.






무능한 자 특, 글이 늘어지다.

원래 상하로 끝내려 했는데 실패.

그나저나 유미나는 반말 찍찍 싸야 하는데 억지로 이러니 애매하네.


+전편 수정 좀 많이 한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