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첫사랑(初恋)

노래 - 토야마 나오(東山奈央)

원곡 - 무라시타 코죠(村下孝藏)


1편 - https://arca.live/b/counterside/25893541



눈이 마주치자 당황했던 나와 달리 선배는 덤덤하게 몇 초간 날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리고 방금까지 끄적이던 노트 페이지에서 새 페이지로 넘겨 다시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솔직히 눈이 마주쳤을 때 뭔가 한소리 들을 줄 알고 순간적으로 쫄았었다. 그러나 아무런 말 없이 고개 돌리는 것에 안도했지만 일단 멋대로 칸막이를 거둔 것에 사과는 해야 뒷탈이 없겠다고 생각했다.


"저기… 죄송합니다. 아무도 없는 줄 알고 그랬는데 계신 줄 몰랐어요."


최대한 미안한 표정과 말투로 저자세를 취하면서 말했다. 인생을 그렇게 오래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 화를 풀고 용서해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선배는 사과하는 나의 말을 들었는지 아니면 창밖 너머에서 울려퍼지는 응원의 환호성에 못들은 것이지, 아니면 무시를 하는 것인지 아무 반응도 없이 그저 계속해서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여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저기…."


"가만히 있어."


처음으로 입을 연 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이런 말 해서 미안하지만 외관상으로는 근육도 전혀 없어 보이고, 피부도 하얗고 기생오라비 같이 생겨서 얄상한 목소리의 소유자일 줄 알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중저음의 남성스러운 목소리에 한 순간 압도되어 나도 모르게 선배의 말에 따르게 되었다.


영국 버킹엄 궁전 앞 근위대처럼 부동자세로 서 있기를 2분 정도가 지났을까, 내 앞에서 열심히 오른손을 움직이던 소년은 마침내 손의 움직임을 멈추고 연필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연필을 휘갈기던 노트─ 정확히는 스프링 스케치북일 것이다.


어쨌든 그것을 쭉 뜯어낸 후 뒤집어서 백지면이 보이는 방향으로 나에게 건내주었다.


"가져."


"네?"


"가지라고."


무심하게 건내는 종이 한 장을 나는 어떨결에 받았고, 선배는 그 상황에서 침대에서 일어나 슬리퍼를 신고 유유히 양호실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게 뭔데 받으라는거야……."


생각해보니 일 대 일로 붙어도 내가 이길 것 같이 생겼는데 왜, 뭐 때문에 쫄았나 뒤늦게 뭐라 한 마디라도 개개볼 걸 후회하는 한편, 아무 것도 없는 백지면을 뒤집어 2분 동안 뭘 끄적였나 확인을 해보자──


"와… 대박……."


뒷면에는 긴장한 나머지 표정이 굳어버린 내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선배가 그려준 그림이 크로키인지, 데생인지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미술에 대해 조예는 없는 나였지만 확실한 건 2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내 모습을 종이 한 장에 담아낼 수 있는 선배의 역량이 대단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받은 초상화를 감탄하며 감상할 때 친구들이 내 상태를 살피기 위해 찾아왔고, 그 후 친구들과 교실로 가면서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의외로 선배는 학교에서 유명인사였다.


딱히 관심종자 같은 행동을 해서 유명해진 것은 아니었지만 '그림을 잘 그리는 학생'이라는 것 자체부터가 임펙트가 있었지만,


"아─ 이산해 선배? 그 선배 중학생 때 카운터 범죄자들이 일으킨 불산 가스 테러로 부모님 두 분은 돌아가시고 선배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호흡기 쪽으로 많이 손상됐다던대."


학교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으로 유명했었다.


같은 중학교 출신 친구에게 자세히 들어보니 중학생 때까지만 하더라도 굉장히 밝은 성격에 운동도 줄곧 잘했다고 하지만 테러에 휘말린 이후 폐 손상으로 뛰는 것 조차도 힘들게 됐고, 무엇보다 양친을 여읜 이후 늘 표정도 어둡고 말수도 적어져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왜였을까. 동정심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처음 봤기에 흥미가 생긴 것 때문이었을까? 그날부터 선배의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어쩌면 순전히 그림 그리고 있던 선배의 옆모습에 반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소녀의 마음이란 알 수 없는 법이니까.


어쨌든 매일 같이 방과후 선배를 보기 위해 미술실에 가기 시작한지 어느덧 1년하고 반 년이 지났고, 그런 나를 보고 선배도 처음에는 '뭔데 계속 오는 거지?'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는 당연스레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게 됐다.



오늘도 당연스레 올 줄 알았기에 선배는 바나나맛 우유를 준비해놨을 것이다.


"선배는 안 먹어요? 혹시 짬처리?"


"……나 우유 안 좋아해."


"뭐야뭐야 그럼 나 주려고 일부러 사놨다는거네? 소영이 살짝 감동!"


"………."


후배가 3인칭까지 써가며 끼부려도 선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지만 새빨개진 귀를 보고 부끄러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선배는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석고상을 교체한 후 원위치로 돌아가 목탄 연필을 잡고는 구도를 잡았다.


이제와서 얘기하지만 선배는 미대 지망생이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학생 때까지는 미대 지망생이었다.


선배가 지망하는 학교는 1순위로 경찰대, 2순위로는 남국대학교 경찰행정과였다. 만약 두 곳이 낙방되면 진학하지 않고 그냥 경찰 간부 시험 고시 공부를 하러 간다고 했다.


불산 가스 테러 이후로 호흡기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지만 부모님과 자신을 이렇게 만든 카운터 범죄자들을 붙잡아 복수하고, 자신과 같은 제2의, 제3의 카운터 범죄 피해자가 나오지 않게 하겠다는게 이유였다.


선생님들은 체력검정에서 탈락할 위험이 있으니 경찰로의 진학을 만류했지만 선배도 체력검정은 염려해두고 있는지 매일 같이 재활로 폐활량을 늘리고 있다지만 글쎄… 내 생각엔 한 번 망가진 몸이 회복되기엔 어려울 것 같다.


나는 그런 선배를 보며 예전부터 궁금했던 것에 대해 질문했다.


"선배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선배는 미대에 안 갈건데 왜 계속 그림을 그리나요?"


선배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는 건 흔한 일이었고, 대답하고 싶지 않은 건가 보다하고 생각하며 넘어가려고 했을 때 선배는 대답했다.


"집중하게 되면 잡념이 사라지니까."


"잡념이요?"


"그 녀석들에 대한 분노, 외로움, 장래에 대한 불안감, 건강에 대한 불안감…."


열심히 움직이던 팔이 멈추고 힘없이 축 늘어진다.


"그리고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 그 날 이후로부터 머리속에서 떠나지 않는 잡념들이 그림만 그리면 생각이 안 나더라."


선배는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고, 감은 눈에서는 한 방울의 눈물이 천천히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보고 차마 함부로 힘내라라는 말을 할 수도, 그렇다고 그를 뒤에서 안아줘 다독여줄 수도 없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11월 11일.


수능이 코앞에 다가왔음에도 선배는 그 날도 미술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무리 지망하던 학교 두 곳이 수시로 다 붙었다고는 하지만 선배는 최저 등급은 맞춰야하는 상황에 공부도 안 하고 계속 그림만 그리고 있었다.


"곧 수능인데 공부 안 해도 돼요?"


정말 걱정되는 마음에 선배에게 물어보자 선배는 자신이 넘치는지 평소와 달리 버퍼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원래 공부 잘 했던가?"


"2등."


"반에서?"


"아니, 문과 전교 2등."


"헐……."


선배를 쫓아다닌지 1년 하고도 반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 난 선배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었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이라고는 그림을 잘 그리고, 다소 불행한 과거가 있으며, 장래희망은 경찰이고, 감정 표현이 많이 서툴다는 것. 이게 내가 아는 선배의 전부였다. 심지어 전화번호도 모른다.


친구들은 지금까지 도대체 뭘 한 거냐며 좋으면 좋다고 말하든가 아니면 진도를 빼든가 답답하게 굴지 말라고 하고, 나도 알고는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게 막상 당사자 앞에 서게 되면 멀리 돌아가게 되는 법이다.


수능이 끝나면 3학년들은 4교시가 끝나면 바로 집에 가게 돼 있다. 그렇게 한두어 달 어영부영 등하교하다가 겨울방학을 맞이할 것이고, 그 후 졸업을 하면 고등학교를 떠나게 된다.


즉, 이제 선배와 이렇게 있을 수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 주먹을 강하게 쥐며 마음 속으로 무언가를 다짐할 때 선배는 그림을 그리다가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그림 그리기를 중단하고 자신의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무언가를 꺼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그것을 건냈다.


불쑥 내민 것을 확인하자 선배의 손에 쥐어진 것은 매년 11월 11일이면 전국의 남녀를 들썩거리게 하는 초콜릿 막대 과자였다. 그것도 녹색 상자인 아몬드 맛으로.


"이, 일단 줘야할 것 같아서…."


평소와 달리 말까지 더듬어가며 말하는 선배는 부끄러운 것인지 아니면 그냥 멋쩍어서인지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보나마나 이 표현력 9등급짜리 쑥맥은 속으로 줄까말까 수백, 수천 번을 갈등하고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하진 않을까 고민하다가 큰 마음을 먹고 줬을 것이다.


평소엔 엄근진 그 자체인 인간이 그런 걸 생각하면서 고뇌했을 것을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육성으로 터져나왔다.


"푸, 푸웁, 푸하하하하하하─!"


"왜 웃는거야?"


"아, 선배 미안해요. 선배는 이런 날은 안 챙길 줄 알았는데 의외여서요."


"나도 일단은 고등학생이다. 받을 거면 빨리 받든가."


틀딱 취급 받는 게 기분 나빴는지 빠직 마크가 보일 정도로 표정을 찌푸리는 선배의 모습에 나는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고 선배는 삐쳤는지 내가 앉은 책상 옆에 막대과자 상자를 두고 씩씩거리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사실 선배를 틀딱 취급은 했어도 선배에게 막대과자를 받는 기대를 안 한 건 아니다. 못 받았다면 그걸로 어쩔 수 없는 것이였겠지만 실망감도 없지 않아 컸을 것이다. 이건 역지사지로 생각한다면 선배도 마찬가지일 거다.


아무리 내색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오늘 같은 날 막대과자 하나 주지 않으면 마음 상할 것을 알고 있기에 싱글벙글 웃으며 나도 가방에서 막대과자를 꺼낸 후 선배에게 주기 위해  책상에서 일어나 다가가려는 순간,


"수능날에 수능 끝나고 만날 수 있을까?'


생에 첫 데이트(?) 신청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