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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있음. 시간전개 상관 X


특유의 분위기나 위험도와는 상관없이, 그녀는 이면세계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때는, 그녀에게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고 느껴지는, 그때는 이면세계를 좋아했었던 것도 같았다.

아니, 그곳에서 함께 싸우는 걸 좋아했었다.

존경하는 스승, 신뢰하는 동료. 인류를 위해 싸우는 동료들. 그들과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함께 한다는 목표가 있었다.


멍청한 년.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했으니까 넌 버림받은거야.


이수연은 스스로를 자조했다. 손이, 눈꺼풀이 떨렸다. 익숙하게 말아놓은 약을 꺼냈지만, 곧 자제했다. 

동료들은 이해해 줬지만, 취향을 모르는 손님이 곧 올 시간이었다. 피우기는 곤란했다.


"....대장."


"왔군요. 기다렸습니다."


"그래? 서둘러 온다고 왔는데, 대장도 참을성이 없다니까?"


"쓸데없는 말은 삼가라, 원숭이. 가뜩이나 거지같은 옷차림에 정신이 사납다."


이지수와 에이미, 육익의 동료들이 시덥잖은 투닥거림을 나누는 사이 이수연은 잠시 사고를 다른쪽으로 흘렸다.


이면세계는 변함없었지만, 그녀는 달라진 것들이 많았다. 


그래도,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올바른 방향은 아니었지만, 이수연은 여전히 인류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관리자와 나유빈의 '섬세한' 계획 따위는 알바가 아니었다. 

인류는 클리포트 게임 전까지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고, 수단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었다.


충격요법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이 테라사이드 계획도 그랬다. 어차피 리플레이서들에게는 큰 기대를 품지 않았다. 

거창하고 위선적인 인류 구원 계획따위가 성공할 리가 없지. 그 관리자가 개입하지 않을 리가 없으니까.


필요한 것은 다음 계획을 위해 클리포트 인자를 가진 종자의 발현 뿐.


유미나. 한 때 스승이었던 년과, 나유빈이 감싸고 도는 여자.


까득. 이빨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이수연의 정신을 되돌렸다.

두 사람은 아직도 떠들고 있었다. 한숨을 쉰 이수연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어쨌든 육익의 이름 아래 뜻을 함께하는 동료들이었다. 일해야 할 때는 확실히 일했고.

그리고, 그녀는 일이 어떻게 흘러가든 어떤 여자와는 달리 동료를 버리는 인간이 될 생각이 없었다.


"자. 다들 진정하시죠. 손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오늘의 계획 중 하나인 이 손님은 그녀에겐 매우 중요했다. 혹여라도 유미나가 실패한다고 해도, 보험은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주시윤은 필요한 존재였다. 그녀의 계획을 위해서도, 그리고 ㅡㅡ 같은 여자에게 복수심을 품은 동지로서도.


"네네, 알겠습니다."


"큭.."


"오랜만입니다. 주시윤 군. 다시 만나서 반갑군요."


실눈에 웃는 상이지만 뱀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남자. 이수연은 주시윤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타입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에, 비밀이 굉장히 많았다. 증오심을 잘 숨길줄도 안단 뜻이었다.

어린 시절의 자신이라면 싫어했겠지만 그녀는 이제 어른이었다. 


"...제가 할 말이네요. 이수연 씨라고 하셨나요?"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며 주시윤이 말을 받았다.


"언젠가 다시 뵐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기서 뵐 줄은 몰랐네요."


흘끗 띄여진 눈이 이수연의 뒤로 서있는 에이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에이미 씨도 당신과 한편이었구요.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꽤 크게 일을 꾸미고 있나 봅니다."


이때다 싶어 신이 나 위장 신분이었던 프리덤 라이더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에이미의 이야기는 착한 예전의 동료들에 대한 내용으로 이어졌다. 


시끄럽네. 머리가 아팠다. 습관적으로 이수연은 손을 더듬었다. 약이 필요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피워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쓰읍. 약기운이 차오르자 다시금 차분해짐을 느꼈다. 머리를 찌르던 편두통도 사라졌다. 


복수. 그리고 구원. 두 가지만 생각해. 이수연.


주시윤은 어정쩡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경계심이 없어보였지만, 칼을 쓰는 오른손을 보여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분위기에 따라서는 싸울 생각도 있어 보였다. 이수연은 문득 실없이 웃었다. 맹랑하게 까부는 후배네.


내가 누군 줄 알고.


"절 여기로 데려온 용건이 궁금하네요. 저보다는 미나 양에게 더 관심이 있으신 줄 알았는데.. 좀 의외입니다."


"그녀는 우리가 개입하지 않아도 잘 가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는 부득이하게 나섰지만, 더는 필요없는 일입니다.  ....스승님이 주시하고 있기도 하고."


"하하! 재미있는 이야기네요."


스승님. 말을 내뱉으며 그녀는 스스로를 찌르는 날카로운 아픔을 느꼈다. 


머릿속 어느 한구석에서는 어린 이수연이 로자리아도 사정이 있었을 거라고, 우릴 버린게 아니라고 울부짖었다. 잠시 잦아들었던 두통이 되살아났다. 머리가 아팠다.


멍청하고 어리석은 년. 다시 그녀는 타들어가는 대마초를 빨아들였다. 좋아. 계속하자.


역시 그녀는 약이 필요했다. 아니면 그녀를 움직이는 불을 꺼지지 않게 지펴 줄 더 큰 복수심이나.


"본론으로 들어가죠. 오늘 주시윤 군을 부른 건 특별한 재능 때문입니다. 용혈 말이죠."


이수연의 두 눈은 주시윤이 순간적으로 완전한 전투 태세를 갖추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덤비지는 않는군. 도망칠 생각도 아직은 없어 보이고.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저도 꽤 놀랐습니다. 스승님이 '새로' 데리고 다니는 걸 보고 보통 카운터가 아니란 건 알았지만."


쓰읍. 다시금 폐부를 약으로 가득 채웠다 내뱉는다.


"설마 그 번뇌하는 자의 용혈을 계승한 혈맥이라니."


주시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제지할 생각도 없어 보였다. 좀 더 들어볼 생각인가.


"지금은 그 재능을 썩히고 있지만, 당신은 용의 피를 이었죠. 그리고 우리 육익은 종말의 운명으로부터 세상을 떠받치는 여섯의 날개. 당신의 용혈, 아니죠. 변종 클리포트 인자는 세상에 닥쳐올 재앙을 극복할 아주 중요한 요소가 될 겁니다."


"요컨대, 보험이죠."


주시윤의 눈이 꿈틀거렸다.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숨기지 않았기 때문일까.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그녀는 핵심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는 그럴 필요가 없는 자리였다.


"하하하...말씀은 감사하지만, 전 아직 스승님에게 죽고싶지 않아서요."


"당신의 부모님처럼 말이죠."


까득. 이수연이 낸 소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슬며시 웃었다. 

화를 숨기는 건 서툴구나.


"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셨나 보네요."


"다른 것들도 꽤 알고 있죠. 예를 들면, 당신이 부모님이 살해당한 이유를 찾고 있다던지."


"......."


"불편하다면 미안합니다. 난 뭘 숨기는 성격이 못 되서."


나유빈처럼. 

한 때 믿음직했던 그녀의 동료는 수연과 뜻을 함께하지 않았다. 

함께 떠나잔 말에도 그저, 쓰게 웃었을 뿐이었다.

그래, 그렇게 버림받고도 그녀와 함께하겠단 말이지. 좋다. 맘대로 해.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함께 걷던 길은 달라졌고,  지금 이수연은 머리가 아팠다.


"눈치챘겠지만, 우린 구 관리국 출신의 올드 카운터입니다. 때문에 당신에게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죠."


다시 약을 한 모금 빨아들였다. 이번엔 꼭 필요하진 않았지만,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싶었으니까.


"....시윤 군이 용이 될 각오만 있다면요."


주시윤은 침묵했다. 그녀는 부디 같은 종류의 복수심을, 같은 사람에게 품고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한바퀴 빙빙 돌듯이 걷기 시작했다. 이지수가 움찔했지만, 수연은 손을 올려 제지했다.


"하하하, 이것 참.."


그런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말투지만, 곤란한 척 하는 저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진짜 악마의 유혹이란게 이런 거군요."


이수연은 원했던 대답을 포기했다. 어차피 거부할거잖아.


"거절하겠습니다."


그래, 너도 나유빈과 같군. 이수연이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주시윤은 말을 이어갔다. 


"전 이유를 스승님께 직접 듣고 싶거든요."


걸음은 멈춘 채였다. 이제 그는 오른손을 보여주고 있었다. 칼자루에 얹은 채로.


"그리고 아무리 고명하신 선배님이라고 해도...허락도 없이 남의 가정사에 끼어드는 건 좀 무례한 행동이죠."


이 자리에 와서 처음으로, 그의 눈이 뜨였다. 이수연은 그가 채 숨기지 못한 분노의 흔적을 읽었다.


"기분도 나쁘고 말이죠."


왠지, 상상했던 것 보다 거절당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당신은 상냥한 사람이군요."


"그건 또 무슨.."


주시윤이 품은 분노의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의구심이었다. 

이수연은 다 태운 꽁초를 대충 내던졌다. 그녀는 표면상 공무원이지만, 여기는 이면 세계였다.

하긴, 약 하는것부터 애초에 실격이지. 자조적으로 웃은 이수연은 주시윤이 숨긴 진심을 찌르듯 내뱉었다. 

그건, 그녀의 속에서 시끄럽게 울부짖는 또다른 자신에게 내뱉는 말이기도 했다. 분노가 파도처럼 철썩철썩 솟구쳤다.


"너는 그 년을 용서해야 할 이유를 찾고 있잖아. 딱하게도."


"........"


주시윤이 다시 웃었다. 여전히 칼자루에 손을 얹은채로. 표정을 잘 숨기는군.

이제 싸울 생각은 완연해 보였다. 멍청한 이지수도 알 만큼.

에이미는 뒤에서 킥킥 웃었다. 관망할 생각임이 확실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더 이상 용건이 없다면 전 이만.."


이수연은 몸을 쭉 뻗었다.  싸구려 도발이지만 주시윤이 그냥 갈 생각이 없는 건 뻔했다. 

오래 앉아있었던 만큼 찌뿌둥했으나 약 기운이 몸을 충만히 채워줬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뭐, 고작 이런 것에게 질 리가 없으니까.


"누가 멋대로 가도 된다고 했니?"


이수연이 그저 자세만 바꾸었을 뿐인데도 주시윤은 숨을 들이켰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란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빠져나갈 자신은 있었다. 방금 전 까지는.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었음 좋았을 텐데."


이지수가 넘겨준 대검을 가볍게 한바퀴 돌리며 이수연이 말을 이었다.


"사실 용혈만 깨우면 방법은 뭐든 상관없어. 협조했으면 좋았을 뿐이지."


붕, 한 눈에 보아도 거대한 대검을 이쑤시개 들듯이 가볍게 들어올린 이수연이 주시윤을 겨냥했다.


"네가 죽기 직전이라면 아마 각성할 수도 있겠지."


이수연은 풀어헤쳐 놓았던 머리를 끌어올려 대강 묶는동안, 주시윤은 자세 하나 바꾸지 못하고 서 있었다.

그래도, 그는 한숨을 푹 내쉰 다음 웃었다. 씩, 공포와 긴장을 이기기 위한 웃음이었다. 

다음 순간 칼이 매끄럽게 뽑혀나왔다.


"머리 조심하세요. 선배님."


"경험의 차이라는걸 똑똑히 알려주지."


이건 옳지 않아. 옳지 않아. 그만 둬. 머릿속 이수연이 울부짖었다. 

약기운이 온 몸을 가득채웠지만 여전히, 지독히도 머리가 아팠다.

그녀는 주시윤의 허리춤에 달린 늑대 문장에 눈이 갔다. 머리가 아팠다.


"늑대의 문장은 아무나 다는 게 아니야."


까득.

그녀는 여전히 인류를 위해 싸웠지만, 이제는 그것만을 위해 싸우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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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공익이랑 쥬지윤 유미나 처음 만난부분을 쓰고싶엇는데 어딘지 몰라서 포기하고 대강 테라사이드로 씀

육익 대사 쓰는데 약간 웃음 참기 힘들었다 류금태는 이걸 제정신으로 썼을까?

또 쓸만한게 머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