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시간에 호다닥 써옴

제목 너무 길어서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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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말이 맞아. 인간의 마음은 측정할 수가 없는 변수지."


나유빈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조용한 회의실에는 담배연기만이 피어올랐다.


"그리고 내가 꽤 많이 마모된 것도 사실이지. 또한..... 그녀가 내게 '다소' 집착하는것도 알고있네."


"그 정도가 아니란 것도 아실텐데요."


"그렇기 때문에 서윤 양은 차질없이 업무를 수행할걸세. 그녀는 내게 버림받는 걸 두려워하니까."


이것도 관리자가 좋아하는 말버릇인 '상정 범위'안쪽임이 분명했다.

나유빈은 관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야위었지만 전체적으로 잘 생긴 얼굴이었다.


지금같은 차가운 눈만 빼면. 좋은 인상이었다.


이런 '중요 국면'에서, 나유빈은 가끔씩 그의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이럴때면, 침식체보다도 그가 두려웠다. 

자신도 작전 상황에서 사람을 수치와 변수로 다뤘지만, 관리자가 그리는 그림은 나유빈보다도 훨씬 컸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람을 온전히 사람으로 볼 리가 없었다.

수십, 혹은 수백번? 어쩌면 그 이상의 시간을 반복해서 싸워온 남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당연히, 인간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을리가 없었다. 전부 닳아버렸을 테니까.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으니까.


"전 가끔 관리자님이 참 무섭습니다."


"그럼에도 자네가 날 이해해 준다는 사실이 기쁘네."


"가보겠습니다."


더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그의 스승이 투입되는 문제를 포함해서 할 일도 많았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하고싶었다. 자신은 관리자의 이해자니까. 그의 완전히 사라졌을지도 모를 인간성이 어딘가 살아있음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경각심을 주고 싶었다.


"관리자님."


"이해한다는게 당신의 모든 행동을 지지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 *


"빵!"


찰칵.


"와아아아아악! ....어?"


"아하하하하! 네 표정 정말 웃겼어! 사진이라도 찍을 걸!"


"무...무슨 짓이야, 이거!?"


"치, 침입자를 제압하는데 성공했군! 잘했다, 서윤! 네가 아군에 합.."


"뭐래. 잔챙아."


드르륵. 서윤의 손짓 한번에 유미나를 포위했던 리플레이서의 태반이 죽어자빠졌다.

유미나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경악한 표정이 즐거웠다.

바이저때문에 볼 수 없었지만, 운 좋게 살아남은 지휘관 역시 이 상황에 당황했음은 확실했다. 

서윤은 질척거렸던 기분이 확 상쾌해짐을 느꼈다.


아. 즐거워라. 콧노래라도 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 니들 아군이 어디에 있니?"


"너...너 배신을.."


"너희 잘못도 있지."


드르르륵. 다시 한번 총열이 불을 뿜었다. 이번엔 살아남은 리플레이서는 없었다.

어리석은 리플레이서들. 그녀가 몸뚱이를 갖다 바친 것 하나만으로 얼터너티브 인자에 창까지 날로 먹을줄은 몰랐다.

이제 미스틸테인은 서윤이 맡은 임무에 유용히 쓰일 것이다. 분명 관리자님이 기뻐해 줄 것이다.

더불어 그녀의 불행했던 과거를 끝장내는데도 좀 쓸 거고.


"난 원하는걸 얻었을 때, 그걸로 만족하기보다... 왜 이렇게 늦게 줬냐고 원망하는 타입이거든."


"대, 대장! 그만둬!"


한 템포 늦었지만, 전장에는 그녀의 알트 소대가 오고 있었다. 

서윤은 자신이 연기했던 인격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배신자인 그녀를 찾아 여기까지 와주다니. 꽤나 인복이 있는 걸. 나.


"그래! 승부는 났잖아! 구, 굳이 미나 씨를 죽일 필요는.."


"잠깐! 뭔가 분위기가 이상해!"


"....린."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르게 샤오린은 미심쩍어하면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남은 계획엔 이들이 필요했다. 그러니, 안심시키려면 또 연기를 해내야 했다. 가족이니까.

그녀의 소중한 알트 소대원들. 나의 전부들. 내 보물들.


아니, 그랬던가? 한때는 그랬던 것도 같았다.


머리 한구석에 문득 의구심이 들었지만 아무튼 서윤은 연기를 이어갔다.

그녀는 우선 관리자가 맡긴 일을 깔끔히 마무리해야 했다.

서윤은 경계를 풀지 못하는 샤오린에게 다가가 그녀를 포옹했다.


"날 위해 여기까지 와 줬구나. 고마워."


"대, 대장..... 아니, 이번엔 대장이 심했어!"


얘가 귀찮게 왜 이래. 척하면 척 이해해줘야지. 물론 설명이 필요했지만 그러기에는 아직 남아있는 잡것들이 시끄러웠다. 

리플레이서들을 한번에 쓸어버릴 수도 있었지만 필요 이상 힘을 드러내면 곤란했다.

유미나를 적당히 봐준게 탄로날 수도 있으니까. 

여기선 기세를 살려줘야 유미나도 맡은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한번에 설명할게. 자, 알트 소대! 집합!"


"!"


"유미나, 일어설 수 있겠어?"


"글쎄... 누구한테 흠씬 두들겨 맞아서말야."


씨발년이 엄살은.


"말대꾸 하는 걸 보니 별 문제 없겠네. 지금부터 코핀 컴퍼니 비밀 작전. 브레인 데스를 개시한다."


"브레인 데스? 뇌사 작전..?"


"알트 소대, 주목!"


"주.. 주목!"


"소대장으로서, 너희에게 오해를 일으킨 점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작전 수행을 위한 기만책이었음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지금 우리는 테라사이드 프로젝트를 단숨에 파괴할 수 있는 전략적 분기점에 서 있다."


최대한 가련해보이게. 


"하지만... 나 혼자서는 해낼 수 없어."


미안하게. 죄책감 느껴지게.


"염치없지만, 너희들이 아직도 날 대장이라고 생각한다면.... 부디 도와주길 바란다."


눈빛들을 보니 잘 풀린것 같았다. 상황이 관리자와 서윤의 구상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래. 여기까지 와 준 내 가족들. 이왕 이렇게 됐으니 내가 예쁨받을 수 있게 고생 좀 더 해 줘. 


우린 가족이잖아.



* *


그녀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싸움은 좀 하는 유미나와 서윤의 수족인 알트 소대가 더해졌기 때문에 

리플레이서 통신망을 박살내고 부대를 제압하는 건 손쉬운 일이었다.

이제, 임무 완수까지는 비숍만 남았다.


"잠깐, 너 왜 울어?"


"아?

......

잠깐만."


오른손을 들어올려 눈가를 만졌다. 축축했다. 

서윤은 혼란스러웠다. 유미나와의 싸움의 승자는 자신이었다.  거기다 계획은 순탄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어째서?


상황이 너무 웃겨서? 그건 아니었다. 일이 잘 풀려가서? 이건 울 이유조차 못되었다.

유미나의 꼴이 우습기는 했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아하.


서윤은 안도하고 있었다. 

버려지지 않을거야. 난 쓸모있었어! 칭찬받을 수 있어!

이번에도 내 가치를 그에게 증명했어.

서윤은 그게 참을 수 없을만큼 기뻤다.


유미나가 신경써주는 꼬라지가 역겨웠지만 대답은 해야 했다.

유미나는 군데군데 찢어진 옷과 그 사이로 드러나는 상처들, 잔뜩 먼지를 뒤집어쓴 모습이지만 중상은 없었다.

그녀가 관리자를 해줘야 할 일이 많았으니, 서윤은 유미나를 기분 내키는대로 적당히 쥐어패두었다.

때문에 그녀의 몰골은 딱 꼴사납게 싸움에 진 패잔병에 알맞았다.


어, 그런데, 나는?

이 싸움에서? 자신은? 너무 말끔했다?


'고생많았네, 미나 양'


불현듯 생각이 스쳐갔다.


아하. 어림도 없지.


씨발년이 감히. 진짜 몸뚱이 굴려가며 고생한건 나인데.

그 분의 마음은 내 거야.

서윤은 감정없이 자신의 몸을 훑었다. 


음. 비숍쯤은 오른팔만 있으면 충분하겠지. 나머지 싸움은 여기 부품들이 알아서 할 것이다.

퀸이 나타날 수도 있지만, 그건 그때가서 생각할 일이었다. 당장 그녀에겐 부상이 필요했다.

망설임없이 서윤은 자신의 왼팔을 총으로 갈겼다. 여러 방. 꼼꼼하게.

염동소총이 불을 뿜었다. 드르르륵.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알트 소대원과 유미나 모두 경악했다.


"대장! 갑자기 무슨 짓이야!"


"너..너 미쳤어?"


후두둑 떨어진 피가 바닥을 적셨다. 끔찍한 고통이 솟아올랐지만 서윤은 기뻤다. 

급작스런 총격에 찾아온 쇼크로 몸이 덜덜 떨리고 팔에 힘을 주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좋아. 난 훌륭하게 아작났어.


이 정도면, 복귀한 후 그가 병문안을 와 줄것이다. 꽃다발은 뭐가 좋을까? 선물도 가져올 것이다. 그녀의 취향을 어디선가 알아내서.

힘줄은 피해서 겨냥한 것 같았지만 뭐, 아니어도 별 상관 없었다. 회사의 주치의는 실력있는 닥터니까 잘 고쳐주겠지.

후유증이 남으면 어때? 그건 그것대로 죄책감으로 관리자를 속박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테라사이드 작전은 꽤 큰 판이었으니 어쩌면 아마 평생 신경써서 돌봐줄지도 모른다.


아. 쓸모없는 여자가 되었는데도, 관리자님에게 쭉 예쁨받는다니. 개씨발.


그의 보살핌을 받는 상상에 뇌가 행복한 비명을 질러댔다. 지금의 고통따위는 순간에 불과했다. 

상상의 나래가 이어졌다. 기쁨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다리 사이가 질척였다. 확인하지 않아도 젖은 것 같았다.


"으흣."


동료들에게 고통스러운 비명으로 들릴것이다. 이제 그녀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서 일해야 했다.


"아흐...으... 총알이 참 따갑다. 진짜 눈물이 다 나네.

비숍의 병력은 더 많으니 기만책이 필요해. 너희를 포로로 잡았다는게 기습하기 적합하지.

이 정도 부상은 있어야 자연스럽게 투닥거린거같지 않니? 너희를 '겨우' 제압한 것 같잖아."


혼자 전부를 제압한 쪽이 일방적으로 부상을 입었다니 사실 웃기는 논리였다. 

하지만 완전히 고장나버린 서윤의 뇌는 정상적인 사고방식으로 동작하지 않았다.


유미나. 너같이 자각없이 모든 걸 누리는 년은 모르겠지만, 난 이렇게라도 해야 해.

네가 그분의 관심을 독점하게 둘 수는 없잖아.


하얗게 질린 김소빈이 달려와 지혈제와 붕대를 감았다. 금방 응급처치가 끝났다. 

충동적으로 총을 갈겨댔지만 얼터너티브 인자가 꽤나 강력한지 재생능력이 활발히 움직이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슬쩍 힘을 줘보니 처음과는 다르게 놀랍게도 팔이 움직였다. 


씨발. 좀 더 갈겨버릴걸. 아픈 척이라도 해야겠네.


서윤은 피가 확 빠져나가서 어지러웠지만 이 몽롱한 기분이 마음에 들었다.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시간은 없고 할 일이 많아. 알트 소대! 집합!"


비록 코핀 컴퍼니로 돌아간 다음에도 관리자에게 그녀가 첫 번째는 아니겠지만, 그녀는 오늘 자신의 쓸모를 증명했다. 

정확히는 아직 아니었지만 증명할 것이다. 그럼 당분간은 버림받지 않을것이다. 이대로 유능한 정상인을 연기한다면.

스스로를 자제한다면.


"최종 목표까지 한 걸음 남았어. 작전을 설명하겠다."


'고생했네. 서윤 양.'


관리자의 따뜻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터져나오는 것 같았다.

정말 한 발자국 남았다. 하필 남은 일은 그녀 혼자 수행할 수 없었다. 

서윤에게는 끔찍한 일이지만 유미나가 필요했다.

제발 네 쓸모를 증명해줘. 내가 칭찬받기 위해. 예쁨받기 위해.


서윤은 주의깊게 그녀의 브리핑을 듣는 유미나의 얼굴에 총알을 꽂아넣는 상상을 했다.


이건 생각만 해도 즐거웠다. 기분이 좀 나아졌다. 그녀는 싸늘하게 웃었다.


유미나. 난 니 생각보다 훨씬. 아주 많이 미쳐있어. 

내가 정말 내 생각대로 저지르기 전에 제발 참아줘. 네가 맡은 역할만 해 줘.

제발. 제발 제발 제발 그를 빼앗아 가지 말아줘.


아쉽게도 그녀를 죽이는 게 오늘은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기회는 많았다.


그래. 주인공은 너겠지만, 그를 갖지는 못 할 거야.


못 하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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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년 느낌 살려보려고 노력했다 맨헤라가 자해하는건 국룰맞지? ㄹㅇ ㅋㅋ

쓰다보니 미친놈 미친년 유니버스가 된거같네...

다음은 아?마? 이유?리?유미? 가?아닐까?

몰?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