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복도에서 한숨을 쉬고 있는 알트 소대의 리더 서윤, 요즘 들어 그녀의 기분은 항상 저기압이었다.

 

리플레이서 사태가 마무리된 직후, 겉으로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사장에 대해 내심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 

자신과 그가 특별한 사이가 되었다는 기대감, 그가 자신이 믿어준다는 충족감 등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채웠던 것이다.

앞으로는 가장 신뢰받는 직원으로서 그의 관심을 독차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당시의 그녀는 굳게 믿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실은 그녀에게 그리 녹록지 않았다. 관심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무시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개인적인 시간을 바란 것까진 자신의 욕심이었다는 걸 안다. 그러나 그가 개인적인 임무마저 내리지 않을 줄은 몰랐다. 

미나에게는 잘만 내리시던데.

그 생각을 하니 또다시 마음 깊은 곳에서 질투심이 솟아올랐다.

 

자신이 그녀보다 못한 게 뭔가?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외모나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실력도 얼터그레시브 인자를 얻은 지금이라면 그녀에 비해 자신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혹시 다른 게 문제였던 걸까.

예를 들어...헤어스타일이라든지...

 

한창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옆으로 다가온 린이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대장, 부사장님이 찾으시는데?”

 

 

 

 

“그렇게 됐으니, 운동회에 참가해서 소원구슬을 가져오세요.”

 

말을 듣자마자 서윤은 행복감에 감겼다. 

이것이 얼마 만에 그녀에게 내려온 개인 임무란 말인가. 역시 사장님은 아직 자신을 잊지 않으셨다. 

한참을 싱글벙글 웃고 있으니 이수연이 그녀를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그녀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간만의 개인 임무에 신이 났을 뿐이니까, 이상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 그녀를 재수 없다는 듯 바라보며 이수연은 말을 이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서윤 양에게 이 얘길 하는 걸 깜빡했군요.”

 

처음부터 전혀 깜빡하지 않았던 눈치이긴 했지만, 어쨌든 그녀는 이를 너스레 웃어넘겼다.

늙은 암코양이. 웃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서윤이었다.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수연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기에.

 

“이번 임무에는 사장님도 동행하실 겁니다.”

 

 

 

 

 

**

 

 

1년에 한 번, 아카데미에선 정기적으로 운동회가 개최된다.

카운터들의, 카운터들에 의한, 카운터들을 위한 하나의 거대한 축제.

허나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매년 참가율은 저조했고, 그 요인인지 올해 아카데미는 강력한 카드를 꺼내들었다.

 

1등 상품으로 내걸린 소원 구슬과, 블루로즈 아일랜드라는 개최 장소가 바로 그 카드였다.

소원을 들어주는 아티팩트인 소원 구슬의 가치는 말할 것도 없었고, 개최지인 블루로즈 아일랜드 또한 그 특유의 아름다움이 정평이 나있는 아카데미의 사유지였다.

그야말로 연인들이 시간을 보내기에 알맞은 때와 장소.

그리고 그런 섬의 해안가에서 서윤은 콧노래를 부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몇 시간 전, 그녀는 이곳에 미리 도착했다.

외부인인 그녀가 운동회에 참가하려면 사전에 미리 참가 절차를 밟아놓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이는 어디까지나 겸사겸사인 일이었다.

참가 절차를 끝마치자마자, 그녀는 곧장 탈의실로 달려가 옷을 갈아입었다.

 

가슴과 아랫도리만을 가린 채, 드러낼 곳은 모두 드러낸 과감한 옷차림. 그녀의 탄탄한 복근이나 쇄골과 같은 것들이 아무런 여과 없이 밖으로 노출되는, 그런 옷차림이었다.

아무리 운동복이라지만 학생들에게 이런 걸 입혀도 되나? 아카데미의 복장 센스가 살짝 의심이 가기도 했다.

아무리 그녀가 평소 몸에 쫙 달라붙는 타이즈를 입었다 할지라도, 이렇게 맨살을 드러내는 옷은 조금 부끄러웠다.

 

그럼에도 ‘사장님이 좋아하시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이런 기회는 흔하게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그녀에겐 이 순간들을 소중하고 의미 있게 보낼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기대감과 부끄러움이 공존한 상태로 거울을 바라보다, 그녀는 무심코 머리를 매만졌다.

길게 뻗은 그레이 톤의 생머리. 누가 보기에도 충분히 아름다운 머리칼이었지만, 오늘의 그녀에겐 그것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머리카락을 주섬 거리던 그녀는 이내 뒷머리를 머리끈으로 묶더니 포니테일을 완성하였다. 

마치 누군가를 의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제야 그녀는 만족했다는 듯 씨익 웃고는, 해안가로 나가 다가올 배를 기다렸다,

앞으로 다가올 둘만의 바캉스를 기대하며 그녀는 바닷바람을 음미했다.

 

 

 

 

둘만의 바캉스

분명 그럴 터였다.

사장님의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는 저 여인을 보기 전까지는 그랬었다.

 

“...그래서 제 임무에 낙하산으로 내려오셨다는 거네요.”

 

눈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입꼬리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사장의 어깨에 몸을 푹 기대고 있는 알렉스라는 여인에게 시선을 쏟으며 그녀가 말했다.

 

“저번 파티 때도 그렇고 사장님이랑 많이 친하신가 봐요. 아.줌.마.”

 

“아줌마라니, 혹시 질투하는 거야? 귀여워라~.”

 

질투라니?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계속 붙어있는 부사장님이나 그가 큰 관심을 쏟고 있는 미나에게라면 모를까. 만난 지 단 두 번 밖에 안 된 어중이떠중이 같은 여성에게까지 질투심을 쏟을 정도로 그녀는 속 좁은 여성이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난번 만남에서 그녀가 사장님을 ‘자기’라고 불렀던 건이라든지, 스스로를 사장님과 특별한 사이라고 했던 건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암, 그렇고말고.

 

“저는 저희 둘만 오는 줄 알고 있었는데 이상하네요.”

 

그녀를 노려보던 서윤은 원망의 대상을 옆에 있는 남성으로 바꾸었다. 

그녀가 쳐다보니, 옆의 남성은 여자들의 기싸움에 어쩔 줄 모른 채 땀을 삐질삐질 흘리고 있었다.

 

“그, 그게 말일세, 서윤 양. 알렉스 부 전대장은 어디까지나 호위 겸 감시 역으로서...”

 

“우리 자기, 오늘따라 왜 이렇게 쑥스럼을 타?”

 

“부...부 전대장?!”

 

그의 변명을 지켜보던 알렉스가 갑작스레 그를 갑작스레 와락 끌어안았다. 

 

“우린 우리 임무를 수행할 테니까, 너는 네 임무를 수행하렴~. 그게 맞잖니?”

 

“...알겠습니다. 저는 제 임무만 신경 쓸 테니 잘해보세요”

 

막장 드라마 속 여인과 같은 그녀의 행동에 서윤의 눈에서 불길이 요동쳤다.

이 혼란스런 감정이 어떤 것인지는 그녀 자신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저 그녀는 분할뿐이었다.

저 자리에 서있지 못했다는 것에, 그리고 자신은 그녀처럼 하지 못한다는 것에. 그녀는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러나 옆에 서있던 사장님의 눈치가 보였기 때문인지,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갔다.

 

“그래~, 나중에 꼭 도시락 먹으러 오고!”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알렉스가 소리쳤지만, 떠나가는 그녀에게 그 소리가 들리긴 했을까.

 

 

 

 

“자네 갑자기 왜 그런 건가?!”

 

그녀가 떠나가고 해안가에 둘만이 남아있게 되자 당황한 관리자는 알렉스에게 소리를 질렀다.

 

“음~, 그 아이가 조금 귀여워 보였거든.”

 

그녀는 넉살을 떨며 가볍게 그 질문을 웃어넘겼다.

그런 그녀를 보고 있자니 관리자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괜히 그녀의 소원을 들어줬다고 후회하기도 했지만 이미 배는 지나간 참이었다.

 

“그리고... 약간의 질투랄까...?”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생긋 웃으며 그런 말을 하자, 관리자는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운동회가 시작했지만, 서윤의 마음속은 여전히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놓여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일지라도 이런 쪽은 아직 어린 그대로였기에, 그녀는 소란스런 마음을 다스릴 줄을 몰랐다. 

사장님과 대화를 해봤다면 조금 화가 풀리기라도 했겠지만, 경기 시작 전까지 그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응원이라도 해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분노 속에서도 그녀는 못내 아쉬움을 드러냈다. 그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기가 이렇게도 어려운 일이었단 말인가.

 

그러나 그때, 그녀의 눈에 관객석에 있던 두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알렉스와 사장님이었다.

서로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대화를 하던 그들은, 서윤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본 적 없던 그의 표정. 그녀의 마음을 알기는 하는 걸까.

그녀는 입술을 꽉 물었다. 피가 나오진 않았지만,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속이 복잡했다. 빨리 어딘가로 화를 풀어내고 싶었다.

 

 

 “이봐~ 네가 편입생이야? 이 아카데미 최강의 2종 슬레이어 나이엘님이 친히 인사하러 와주셨으니까 고마워하라고~.”

 

잘 됐다. 마침 화풀이 대상을 찾고 있었는데, 넝쿨째 굴러 들어왔다.

금발 트윈 테일의 이쁘장한 얼굴과는 반대로 멍청하고 오만해 보이는 눈매. 이 일에는 그녀가 딱 적임자였다.

 

“편입생이 참가했다길래 누군가 보러온 거였는데, 별거 아니었네~. 이 나이엘님의 상대도 안되ㄱ...”

 

“이봐, 아마추어 씨. 나중에 지고 엉엉 울지나 말라고.”

 

“뭐, 뭐야?!” 

 

멍청한 소리를 떠벌리는 말을 끊고, 서윤은 호기롭게 그녀를 쳐다봤다.

방금 전까지의 그녀는 어디로 갔는지, 서윤은 우선 프로답게 임무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마저도 실패해버리면 이도 저도 아니게 돼버릴 테니까. 그녀는 지금의 임무에 최선을 다해야 했다.

 

 

 

“자, 그럼 경기~ 시작합니다!”

 

요상한 복장을 입은 꼬마 치어리더의 말을 끝으로 시작한 경기는, 일방적인 학살극의 형태를 맞았다. 물론 어디까지나 비유적인 의미로서.

 

청팀의 서윤은 시작하자마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홍팀의 꼬리를 모두 빼앗았고, 홍팀은 경기가 종료될 때까지 그 꼬리들을 건드려보지도 못했다.

 

특히나 홍팀의 나이엘에게 그녀는 조금 더 가혹했다. 그녀의 바로 눈앞에서 보기 좋게 꼬리들을 흔들며 그녀를 유혹해놓고는, 그녀가 정신을 놓고 달려오는 족족 카운터를 먹여 그녀를 날려 보내는 모습은 조금 비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녀가 날아가면서 “꾸엑?!”하는 비명소리를 몇 번이나 질렀는지, 관리자는 이제 셈을 세던 것에도 지친 참이었다.

 

“서윤 양이 그래도 신나 보여서 다행이군. 아까 일을 그렇게까지 신경 안 쓰는 모양이야.”

 

운동회를 휘젓고 다니는 그녀를 보며 관리자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옆자리의 여인은 그런 그의 모습을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자기 그거 진심이야...?”

 

“응? 방금 뭐라고 했나?”

 

“......자기는 여자의 마음을 더 공부할 필요가 있어.”

 

“응?!”

 

옆에 있던 쑥맥이 한심해 보였는지, 알렉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관리자는 영문을 모른 채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어쨌든 난 그녀가 좋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네. 애초에 그러려고 그녀를 이곳에 데리고 왔으니 말이야.”

 

그 말은 진심이었다.

애당초 그가 그녀를 이번 임무에 배정했던 것 자체가 그 탓이 가장 컸다.

소원구슬이 강력한 아티팩트임은 맞지만, 굳이 그녀까지 이곳에 올 필요는 없었다. 

애당초 그 정도의 현실 조작 능력이 없기도 했고, 기껏해야 아카데미 수준의 카운터들 사이에서라면 코핀 컴퍼니의 누구라도 닭 떼 속의 두루미가 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럼에도 그가 굳이 이번 임무의 배정자로 아껴왔던 카드인 서윤을 내놓은 것은, 그녀가 보내지 못했던 학창 시절의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매우 신난 아이 마냥, 운동장을 거닐고 있었다.

그야말로 대성공, 만만세였다.

소원구슬도 회수하고, 그녀에게 좋은 추억도 만들어주고, 일석이조가 아닐 수 없었다.

자신은 그저 한 발자국 뒤에서 그녀가 좋은 추억을 쌓기를 응원하면 될 뿐이었다. 

딸을 키우는 아버지의 마음이랄까? 왠지 모를 뿌듯함이 그의 마음속에서 샘솟아 올랐다.

 

“자기, 그럼 나를 데려오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부성애가 넘치는 미소를 짓는 그를 보며 알렉스는 자조적인 질문을 던졌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귀까진 그 소리가 닿지 않았다.

 

 

 

 

 

 

꼬리 잡기 경기가 끝나고, 몇 번의 경기가 더 이어졌다.

피구, 토너먼트 대결, 줄다리기 등등 많은 종목이 치러졌고, 서윤은 그때마다 압도적인 성적을 내며 1위를 거두었다.

 

“흐엉엉... 난 쓰레기야,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

 

경기장 구석탱이에서 울고 있는 나이엘을 보며 자신이 조금 과했나 싶기도 했지만, 솔직히 나름 기분이 좋았던 걸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이젠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녀는 최고의 샌드백이다. 반응도 반응이었지만 그녀의 일관된 태도 자체가 원인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살던 여자의 콧대를 누르는 쾌감이라니. 

그 쾌감을 생각하자 서윤은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았다.

하아, 이런 나쁜 버릇 들면 안 되는데.

 

어쨌든 처음에 비해서 그녀의 기분은 조금 풀린 상태였다. 

지금이라면 사장님과 알렉스가 꽁냥거리는 장면을 아까보단 평온한 마음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신 차리자, 정신.

 

“다음 경기는 뭐더라...”

 

잡스런 생각을 떨쳐버리고, 그녀는 일정표를 보며 다음 경기를 찾아봤다.

그녀의 기억에 따르면 이제 슬슬 운동회의 막이 내릴 시간이 된 참이었다.

그녀의 예상대로, 경기는 이제 단 두 개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다.

다음 경기는 달리기였다.

 

“달리기라...”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이 또한 그녀가 승리를 차지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조금 시시하긴 했지만, 그거면 됐다.

자신은 우승 상품인 소원 구슬을 얻기만 하면 될 뿐이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진행을 맡은 양하림이에요!”

 

그녀가 그런 생각에 빠져있자, 아까 전의 꼬마 치어리더가 다시 단상 위로 튀어 올라왔다.

볼 때마다 적응이 되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아카데미의 재봉사는 머리에 나사가 한 개 빠져있기라도 한 걸까?

 

“이렇게 제가 올라온 건 다름이 아니라 예정 변경 때문이에요!”

 

사람들의 쏠리는 시선에도 그녀는 꿋꿋이 자신의 업무를 다 했다.

그나저나 예정 변경이라니?

 

“원래 다음 경기는 달리기였지만, 특정 학생 몇 명이 계속해서 승리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학생회 측에서 경기 내용을 조금 변경했답니다!”

 

“...?”

 

일순간 이래도 되는 건지 의문이 들기도 했지만, 그녀는 이내 수긍했다.

뭐가 됐든, 그녀가 우승하면 그만이었으니.

 

“바뀐 종목은 바로 이인삼각 달리기! 참가 선수만 아니라면, 관객이든, 코치든, 지인이든 상관없어요! 여러분 운과 인맥, 그리고 협동심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죠? 경기는 10분 뒤에 시작되니 참가자 여러분들은 그때까지 팀원을 구해와주세요!”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단상 밑으로 쫄래쫄래 내려갔다.

 

이인삼각이라니, 전혀 예상치도 못한 게 튀어나왔다. 

그녀와 합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커녕, 이곳에는 제대로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운에 기대어 관객 중에서 아무나 한 명을 뽑아가야 하나 했던 찰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아.

한 명이 있었구나.

 

 

그를 보자마자 그녀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왜 이걸 진작에 생각 못 했을까?

관객석에서 눈을 돌리는 그 인물에게 그녀는 눈웃음을 지으며 내려오라는 손짓을 했다.

 

“내려오세요, 사장님.”

 

 

 

 

 

“서윤 양...정말 나로 괜찮겠나? 차라리 지금이라도 부 전대장을 불러오는 게...”

 

“괜찮다니까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사장님.”

 

얼마 뒤, 그들은 트랙의 출발선에서 발을 끈으로 묶고 있었다.

사장은 왼발은, 그녀는 오른발을 끈으로 묶은 상태였다.

 

“아,아니, 사실 내가 운동을 안 한지가 꽤 됐는데 말일세..”

 

사실은 알고 있다. 그가 이런 운동 쪽에는 젬병이라는 것쯤은.

사실 그를 데려온 것부터가 이번 경기는 1등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가 자신의 속도에 맞출 수 있을 거라곤 처음부터 기대도 안 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그를 데려온 이유는 약간의 화풀이였다.

자신을 잊고 꽁냥거리던 그에 대한 화풀이와, 하루 종일 그를 뺏고 있던 알렉스에 대한 화풀이.

지금만큼은 온전히 그와 그녀만의 시간이었다.

 

묶여있던 발을 시작으로, 허벅지나 어깨 등등이 조금 조금씩 부딪혔다.

서윤은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했다.

쌓였던 체증이 단숨에 확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그도 자신과 같은 기분이 들고 있을까.

 

 

“자 그럼~, 제자리에~ 준비~땅!”

 

준비를 다 마치자, 꼬마 치어리더의 땅 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다.

역시나 예상대로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하위권으로 뒤쳐져버렸다.

처음부터 예상한 일이니까 별문제는 없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옆에서 헥헥거리던 남성에게 그녀가 말을 건넸다.

 

“헉,헉... 괜찮긴 하네만 너무 뒤쳐진 게 아닌가?.

 

“흐음...역시 그렇죠? 그럼 조금 스퍼트를 올려 볼까요?”

 

“자,잠깐 서윤양?!”

 

그녀가 템포를 올리자 그의 숨소리가 더욱 가파졌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시라니까.

그의 건강 상태에 조금 걱정이 가는 그녀였다.

 

“이봐, 편입생~ 겨우 그 정도야? 그 정도론 이 나이엘 님의 라이벌이라 하기 쪽팔린 수준인데~”

 

그들이 한창 오붓한? 분위기로 달리기를 하고 있을 때, 언제 정신을 차린 것인지 나이엘이 다가와 도발을 했다. 그렇게 당해놓고도 질리지도 않나 보다.

그나저나 왜 같은 하위권끼리 도발을 하고 있는 걸까?

 

“그런 말을 하는 너도 하위권 아냐?”

 

“훗, 이 몸은 힘을 아끼고 있는 거야! 원래 영웅은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니까!”

 

“후훗, 그럼 나도 그런 걸로 해둘게.”

 

나름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서인지 처음에 비해 그녀는 너그럽게 나이엘을 대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조차도 다음에 올 말은 그저 넘겨짚을 수 없었다.

 

“하핫! 옆에 그런 멸치를 껴놓고 나를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거야? 나를 이기고 싶으면 파트너부터 바꿨어야지!”

 

서윤의 눈꼬리가 조금 꿈틀거렸다. 

자신은 그렇다 쳐도 사장님에게까지 도발을 하다니, 그녀는 이를 가만히 웃어넘길 수 없었다.

 

“...그 말 후회하지 마렴, 아마추어 씨.”

 

“어, 어엉?!”

 

“사장님, 오른발은 들고 계세요.”

 

“음, 그게 무슨 소린ㄱ...”

 

‘무슨 소린가’라는 말이 끝마쳐지기도 전에, 그녀는 그의 허리를 와락 감싸 안았다. 

정확히는 거의 반쯤 들어 올렸다.

식겁하는 관리자를 뒤로하고, 그녀는 이전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앞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그리고 그렇게 이인삼각 달리기마저 압도적인 격차로 그녀가 우승을 거머쥐었다.

비록 옆의 남성은 반쯤 들린 채 깽깽이 걸음으로 골인한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뭐가 중요하랴.

사장님과의 시간도 즐겼고, 도발에 복수도 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한편, 경기장의 한구석에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두 사람이 쭈그려 앉아 있었다.

 

“우으...난 쓰레기야...”

 

“이게 무슨 망신인지...”

 

그녀는 두 사람을 위로해 줄까 하는 생각에 발걸음을 돌렸지만, 그녀의 앞에 나타난 누군가에 그 발걸음은 막혔다.

 

“저기, 잠깐 나 좀 볼까?”

 

어느덧 다가온 알렉스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갑자기 왜 보자 하신 건가요?”

 

서윤은 경계심을 담은 눈초리로 그녀를 째려봤다.

그러나 그녀는 이를 딱히 신경 쓰지 않는 듯 말했다.

 

“오늘 운동회는 재밌었니?”

 

“뭐, 어디의 누구 씨만 없었다면 재밌었겠죠.”

 

서윤은 입술은 빼쭉 내밀었다.

그 모습을 알렉스는 웃으며 바라봤다.

 

“그래도 네가 뛰노는 모습을 보니 그이가 좋아하더라.”

 

“사장님이요?”

 

“그래, 객석에서 계속 네 얘기만 하더라고. 네가 좋은 추억을 쌓았으면 좋겠니 어쩌니 하면서.”

 

그 말을 듣자 서윤은 얼굴을 붉혔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동시에 사장님이 그렇게까지 자신을 생각해 준다는 사실이 내심 기쁘기도 했다.

 

“조금 부러웠어.”

 

“네?!”

 

알렉스는 그녀를 보며 의외의 말을 내뱉었다.

자신이 부러웠다니?

 

“사실 이곳에 온 것 자체가 내 고집이었거든. 그이가 내 고집을 들어준 거지.”

 

“...”

 

“나는 이런 곳에 올 기회가 많이 없어. 자유롭지 못한 몸이기도 하고,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거든.”

 

그녀는 슬픈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도 이곳에 오니 그이는 네 이야기만 하더라? 솔직히 약간은 질투가 나더라고.”

 

그 말을 들으니 서윤의 마음속에선 죄책감이 꿈틀거렸다.

자신은 지금까지 누구를 상대로 질투를 했던 것인가? 정작 질투의 대상이 됐어야 할 사람은 자기 자신이었는데.

 

“...죄송해요.”

 

“죄송할 필요 없어. 사과를 바라고 한 말이 아니니까. 그냥 네가 기분을 좀 풀었으면 해서.”

 

알렉스는 일관된 표정으로 그 사과를 웃어넘겼다. 서윤은 조금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제가 뭔가 해드릴 건 없을까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그녀는 갑자기 그런 말을 했다.

 

“후훗, 걱정해 주는 거야? 참 착한 아이네. 그럼... 경기가 끝나고 같이 도시락을 먹는 건 어때?”

 

“도시락이요?”

 

“그래. 죽은 전대원이 도시락을 좋아했었는데 한 번도 싸주질 못했거든. 그래서 주변 사람들과 같이 싸온 도시락을 먹어보는 게 내 소원이었어.”

 

“...그러면 제가 그 도시락 같이 먹어드릴까요?

 

조금 툴툴거리는 투로 서윤이 대답하자, 알렉스는 쓸쓸한 웃음을 멈추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의 대답이 예상외였다는 표정이었다.

 

“응?”

 

“경기가 끝나면 저랑 사장님이랑 같이 도시락 먹어드릴게요. 알렉스 씨가 그러고 싶었던 것처럼.”

 

알렉스 씨. 그녀가 처음으로 알렉스를 이름으로 불렀다.

이 또한 그녀 나름대로의 사과 표시이자 신뢰 표시였으리라.

알렉스의 눈에는 그런 서윤이 토라졌다 사과하는 귀여운 아이처럼 비쳤다. 마치 예전의 류드밀라처럼.

 

“후훗, 좋아.”

 

알렉스는, 어쩌면 오늘 본 표정 중 가장 진실된 표정으로, 얼굴에 커다란 미소를 띠었다.

 

 

 

 

 

 

알렉스와 화해를 하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녀는 섬의 숲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럴 거면 도대체 지금까지 경기는 왜 했던 거야...”

 

마지막 경기의 내용은 바로 보물 찾기였다. 

섬에 숨겨진 1위 보상인 ‘소원 구슬’을 찾으면 게임이 종료가 되는 그런 간단한 경기.

그러나 이전까지의 경기 결과들이 무색해지는 경기 내용에 그녀는 짜증이 났다.

게다가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다면, 달리기 종목은 왜 바꾼 거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산의 꼭대기에서 어떤 물체가 반짝거리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찾았다. 

영롱한 빛이 아른거리는 동그란 구슬. 한눈에 봐도 대회의 상품인 소원 구슬이었다.

그 물체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곧장 산꼭대기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늦었다.

그녀가 도착했을 때 즈음엔, 구슬은 이미 그 색채를 잃어버린 채 시꺼멓게 변해 땅바닥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누군가가, 구슬에 소원을 빈 것이다.

 

그녀가 너무 방심했다.

아무리 풋내기라 할지라도 상대는 카운터들. 조금의 운만 따라준다면, 그녀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할 수 있는 것이 당연했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구슬을 움켜쥔 그녀는 그대로 산을 내려왔다.

누가 봐도 빈 껍질이었지만, 이것만이라도 사장님께 보여드려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서윤 양! 수고 많았네!”

 

결과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손을 흔들며 스타트 지점에 내려온 서윤을 반겼다.

서윤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사장님...죄송해요. 소원 구슬이...”

 

“음?!”

 

관리자는 그녀의 손에 올려져 있는 검은 구슬을 보고 일순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잠시에 불과했다.

 

“음...음, 그렇게 된 건가...”

 

“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그를 올려다봤다.

무언가를 알고 있기라도 한 걸까.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처음부터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였으니.”

 

그는 신경 쓰지 말라는 말로 그 의문을 일축했다.

그러나 그 말이 서윤의 가슴엔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실패할 걸 예상했다니. 그에게 제대로 된 기대감조차 주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흑...흑... 사장님 죄송해요...”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관리자는 당황하며 허둥지둥 그녀를 달래주려 하였다.

 

“아,아니 서윤양, 그게 아니라...”

 

“소원 구슬도 못 가져오고...저 같은 건...”

 

“서윤 양!”

 

갑자기 그가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괜찮다네, 내 소원은 이미 이뤄졌거든.”

 

무언가를 결심한 듯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그렇게 말했다.

이를 보니 아까 전 알렉스가 했던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혹시 ‘자네가 좋은 학창 시절의 추억을 만드는 것이 내 소원이었네’ 같은 진부한 대사를 하시려는 건 아니죠?”

 

뜨끔.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정곡을 찔린 양 관리자는 “크흠! 크흠!”하며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그녀의 손을 슬며시 놓았다.

무심코 그를 올려다보니, 그곳에는 시뻘개진 귀를 감추지 못하고 눈을 돌린 남성이 있었다.

울던 것도 잊은 채로, 푸흡 하고 그녀는 작은 미소를 터뜨렸다.

 

아아, 그래. 이것이 바로 그가 좋아하는 남자의 모습이었다.

 

강인한 척을 하지만 어딘가 연약해 보이는 남성. 

항상 침착한 척을 하지만 어딘가 허당인 남성.

모든 것을 홀로 책임지려 하지만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남성.

그가 바로 그녀의 사장님이었다.

 

얼굴이 조금 화끈거렸지만, 그녀는 이를 개의치 않았다.

 

꽈악-

방금 전 관리자가 당황하며 떼어놓았던 손을 그녀는 다시 움켜쥐었다.

그것도 각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깍지를 끼며 더 강하게.

 

“서윤 양?!”

 

“그거 아세요, 사장님? 방금, 제 소원도 이뤄졌어요.”

 

“소원이라니?

 

“후훗, 글쎄요. 궁금하시면 맞춰보세요.”

 

요염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는 그렇게 말한다.

소원의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그녀 말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겠지.

 

“자, 사장님! 알렉스 씨랑 도시락이나 먹으러 가죠! 빨리 오세요!”

 

뒤에서 “자네 둘이 화해한 건가? 언제?”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서윤은 그저 싱글벙글한 표정으로 그를 관객석으로 끌고 갔다. 물론, 여전히 손을 잡은 채로.

 

그녀의 운동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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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회 막차 탑승

요즘 서윤 2차 창작들 보면 서윤이가 너무 정신병자 같길래 좀 다르게 써봤읍니다

읽어주시면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