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릿해진 기억 너머로,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울려퍼졌다.


솨아아.


가뜩이나 나쁜 귀를 간지럽히는, 박자를 무시한 무차별적인 빗소리 사이를 나는 전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찰박이는 뜀박질 소리 뒤로 팀장의 외침이 들렸다.


"한 경위! 어서 돌아와!"

"잠깐만 기다려주세요, 팀장님! 제 달리기 속도면 늦지 않고...!"

"안 돼! 이미 끝났어, 빨리 이쪽으로 돌아오라고!"


나는 팀장의 말을 무시한 채 앞만 보고 달렸다.


어쩌면, 우리의 첫 실적일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순직율 높다고 소문난 우리 기동대의 첫 사상자 제로 작전. 그런 영광스런 날에 찝찝함을 남기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나는 달렸다. 내 다리를 믿었기에 가능한 기행이었다.


카운터 범죄자의 실험으로 약에 절은 무기력한 소녀가 코앞에 있었다. 거센 비 때문에 흐릿한 시야 너머로, 흐리멍덩한 눈빛이 이쪽을 향한다. 눈이 마주친 소녀는 내게 천천히 팔을 뻗어왔다.


그 하얗고 가냘픈 손에 내 팔기 맞닿기 직전, 성대한 폭발과 함께 내 시야가 블랙아웃 당했다.



- 마리아 안토노프 중장께선 새로 창설된 특수 전략부대 델트 세븐의 사령관으로서 리플레이서 사태 해결의 중역으로...


삑!


- 이번 테러로 전세계 이터니움 공급 차질에 관한 해결책으로 관리국이 제시한...


삑!


- 대정화 전쟁 참전 영웅, 도미닉 킹 레지날드 준장이 사실 이번 테러 사태의 해결사가 아닌 주모자라는 충격적인 첩보를 저희 방송국이 단독으로 입수했...


삑!


피요옹...


"음?"


멍했던 정신이 각성한다.


기계적으로 누르던 리모컨을 옆으로 치우자 소파에 축 늘어진 나를 비추는 텔레비전 화면이 반갑게 반긴다.


이미 햇수로 스물을 훌쩍 넘긴 고물 덩어리가 드디어 수명이 다 됐나?


"그럴 리가 없지..."


나는 비비적거리며 엉덩이를 당겨 소파에 등을 바짝 기대곤 고개를 뒤로 꺾었다.


그러자 소파 등받이 위에 축 늘어진 뚱냥이 한마리가 보였다.


"또 너냐, 리처드."


애옹.


이름을 부르자 고양이가 하품을 하다 말고 멀뚱멀뚱 나를 쳐다봤다.


리처드, 어머니가 키우던 고양이다.


품종은 회색빛 털을 지닌 브리티시 쇼트헤어. 어머니가 어찌나 많이 먹였는지 네 다리로 일어서도 배가 땅에 닿을 정도로 비만인 녀석이다.


얼마나 보기 안쓰럽냐면 고양이 애호가인 전 여친이 리처드를 보고 기겁할 정도다. 뭐, 여친이 말뿐인 고양이 애호가였을지도 모르지. 사람들은 자신을 수식하는 단어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자기가 더 위대해지거나 아름다워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집 리처드는 고양이 특유의 귀여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쿰척이며 얄미운 미소를 짓는 꼬라지를 보고 있으면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뭐, 실제로 때린 적은 없지만."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오는 한숨을 뒤로한 채 녀석의 등을 거칠게 쓰다듬었다. 옛날엔 이렇게 하면 할퀴어서 손톱 자국이 남곤 했는데 이젠 녀석도 익숙해진 건지 편한 자세로 내 쓰다듬을 받아냈다.


다행히 혈통의 힘은 위대해서, 리처드의 털은 별다른 관리를 해주지 않았는데도 제법 부드러웠다. 만지면 만질수록 점점 중독되는 특유의 감촉은 확실히 쓰다듬는 맛이 있다.


반려동물 힐링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녀석의 등과 목덜미를 쓸어내리다보면 나도 모르게 심신이 편안해지곤 한다.


"매번 널 버린다고 투덜댔지만, 끝까지 이 집구석에 남아준 건 결국 너밖에 없구나."


오랜 투병 생활을 마치고 집에서 편안히 숨을 거두신 어머니.


한창 대정화 전쟁 당시 침식체와 함께 산화한 아버지.


불구가 된 남친을 버리고 떠난 여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이야."


젊을 땐 어머니가 고양이 키우는 걸 반대했는데. 나이를 먹은 후에야 왜 어머니가 리처드를 키우려고 갖은 애를 썼는지 깨달았다.


"내가 그만큼 신경 써드리지 못한 탓이겠지..."


 냐아!


리처드가 쓰다듬을 받다 말고 내 머리로 달려들었다. 집고양이라 냄새는 덜하지만, 대놓고 비강에 털을 문대니 누린 냄새가 났다.


"알았어. 아빠 땅 그만 팔 테니까 좀 떨어져라."


애옹!


차마 한 팔로 안 들려 두 팔을 이용해 녀석을 내 배로 옮겼다. 현역일 때에 비해 현저히 물렁해진 뱃살이 마음에 들지 않는 나와 달리 리처드는 즐겁게 갸르릉 소리를 내며 식빵 자세로 내 배 위에 눌러앉았다.


고작 고양이 하나 얹었을 뿐인데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겁다. 가쁘고 답답한 숨이 녀석의 무게를 짐작케 한다. 아무래도 조금씩 밥을 줄이던가 해야겠다.


제발 이번 만큼은 작심삼일이 되지 않길 빌면서, 나는 리모컨을 찾았다.


"또 어디에 갔다 팔아먹었냐..."


방금 꺼진 텔레비전은 이 뚱냥이의 짓이다. 심심해 보여서 사준 장난감 대신 리모컨에 관심을 가지더니 끝내 고장까지 낸 말썽꾸러기.


막상 버리자니 리모컨에 손을 대려 할 때마다 하악질을 하길래 그냥 장난감으로 쓰라고 던져줬더니, 내가 티비를 볼 때마다 이렇게 훼방을 넣는다.


"진짜 배터리를 빼놓던가 해야 하는데."


언젠가 다 닳겠지, 같은 안일한 사고로 방치했더니 나만 고통받고 있다.


'웃기는 노릇이야.'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뺏어갈 수 있는 주제에 시답잖은 변명만 던져대는 꼬라지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여친이 이런 우유부단하고 한심한 남자에게 질려버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좋은 여자니까, 분명 나보다 훨씬 좋은 남자를 찾겠지. 누군지 모를 남자는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자신보단 사랑했던 여인의 행복을 빌며 나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꼬르륵.


"... 그냥 밥이나 먹자."


냐?


"하이고. 밥 소리에 귀신같이 반응하네. 누가 돼지 아니랄까봐."


아마 세상에서 밥 소리에 제일 민감한 고양이를 뽑자면 우리집 리처드가 당첨되지 않을까?


다른 이야기를 할 땐 흥미없는 것처럼 굴다가도 밥 소리만 들리면 귀신같이 귀를 쫑긋 세운다. 참 한결같은 녀석이라고, 나는 녀석의 턱을 긁어주며 헛웃음을 지었다.


"좀 기다려라. 일단 내 몫부터 만들고."


내 배를 점령한 녀석을 슬쩍 옆으로 밀어내곤 노곤노곤한 몸을 일으킨다.


다행히 리처드는 내 배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대신 녀석은 전신을 흐느적거리며 아직 온기가 남은 소파 위를 뒹굴었다. 확실히, 썩어도 준치라고 뚱냥이 주제에 은근히 귀엽게 논다.


리처드의 재롱에 피식 웃어주곤 주방으로 향한다.


식단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늘 한결 같았다.


적당히 익힌 토스트, 토마토를 함께 볶은 스크럼블 에그, 마지막으로 양송이 크림수프. 간혹 시리얼이나 밖으로 나가 외식을 하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론 이렇다.


밥심? 밥솥 고장난 뒤로 건들지도 않았다.


대충 냉장고에서 눅눅해진 식빵을 꺼내 토스트기 안에 넣고, 대량으로 구매한 인스턴트 3분 수프를 전자렌지에 돌리면 자잘한 준비는 끝난다.


마지막으로 딱 두 개 남은 달걀로 토마토를 곁들인 스크럼블 에그를 만들면 된다.


달걀을 깨서 후라이팬에 뿌리면 스크럼블 모양이 나올 때까지 달걀을 휘젓고, 미리 잘라둔 토마토를 들이부어 마저 볶아준다.


처음엔 불편했던 의수도 이제는 능숙하게 후라이팬을 흔들 수 있게 된 걸 보면 역시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인가 싶다.


그렇게 한창 점심식사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전자 메시지함이 알람을 울렸다. 케케묵은 관리국 홍보 메시지를 차단한 이후 꽤 오랜만에 수신된 메시지였다.


"열람해."


- 메시지를 열람합니다. 음성 메시지입니다. 재생할까요?


"어."


- 메시지를 재생합니다.


[야호! 오랜만이에요, 선배. 잘 지내고 계신가요? 갑자기 연락해서 놀라셨죠?]


"강소영?"


확실히 놀랐다. 4기동 시절, 나와 사이가 제일 나쁜 녀석을 꼽자면 망설임없이 강소영 경위를 골랐을 테니까.


[실은 제가 요 근처로 파견 지원을 왔는데.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버린 거 있죠? 선배도 알가시피 원칙대로면 곧바로 복귀해야 하는데. 본부로 돌아가봤자 보고서 작성하라고 위에서 닥달할 게 뻔하잖아요?]


"참 내."


나는 뻔뻔한 강소영의 얼굴이 떠올라 헛웃음을 지었다.


저 뒤에 나올 말은 안 봐도 비디오였다.


[그래서 땡땡이 좀 치려고 하는데. 선배 여기 근처 사는 거 맞죠?]


요즘 뉴스 단골이 된 걸 보면 한창 바쁠 텐데 내 집은 또 어떻게 알아냈는지 몰라. 아닌 척 정의로운 저 성격상 몰래 남의 개인정보를 뒤질 타입은 아닌데.


[어차피 외출도 안 하고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시죠? 어머님 장례식 때도 태양 보개 싫다고 틀어박혀 지내셨잖아요. 이참에 광합성도 할 겸 예쁜 후배에게 한 턱 내드릴 기회를 드릴까 하는데. 어떠신가요?]


참 얄미운 계집 같으니라고. 끝까지 4기동에 남는다고 고집을 피워서 걱정했는데 강소영의 목소리는 늘 그렇듯 여유가 있었고, 능글맞았다.


"그래. 간다 가."


나는 오랜만에 핸드폰을 켜 연락처 목록을 열었다.


연락 대상은 당연하게도, 툭하면 경찰차를 꼴아박는 빌어먹을 난폭 운전범이었다.






메밀대회 준비하던 거엿는데 취소됐으니 창작탭으로.

주인공은 킬러 강의 단짝 패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