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통합 포탈

https://arca.live/b/counterside/26385206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어요! 드디어 아카데미 운동회의 마지막! 보물 찾기를 시작할게요!"

 

진행을 맡은 활기찬 소녀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흘러나왔다. 섬 곳곳에 퍼져있는 드론으로 영상이 중계된다던가, 오전 경기에서 상위권으로 진출한 사람들을 소개한다던가 하는 내용들이 이어졌다. 관람석 한구석에 다리를 꼬고 앉아있던 나유빈은 가장 본질적인 의문점은 왜 설명해주지 않는지 궁금했다.

 

"흠. 학생들이 전부 참여한다면 오전 경기는 왜 있었던 걸까요?"

 

"웅? 뭐라고 말했어 아저씨?"

 

통신기에 연결되어 있던 다른 소녀가 물었다. 구 관리국의 테라브레인 중 하나이자 관리자의 딸을 지칭하는 인공지능. 시그마였다. 이 경기에서 나유빈이 우려하는 사태가 혹시라도 발생한다면, 정신상태ㅡ인공지능인 그녀의 그것을 정신상태라고 불러야 할 지는 의문이었지만ㅡ가 유아수준이건 어쨌건 그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했다.

 

"아닙니다. 어쨌든 부탁드린 일은 가능하단 말이군요. 그럼 신호를 보내면 실행해주세요. 시그마 양."

 

"웅! 섬을 전부 몰래 해킹하면 되는거지? 이거 완전 재밌겠다! 그러니까 뭐냐.. 대....대도! 의적 시그마 나가신다!"

 

이번엔 또 뭘 챙겨읽은지 몰라도 그녀가 장르 스펙트럼을 넓힌 걸 칭찬해 줘야 할까. 잠시 고민했지만 나유빈은 곧 포기했다. 현재 상용중인 어떤 인공지능보다도 뛰어난, 압도적인 성능의 모듈인 시그마가 그 끝내주는 처리능력을 활용하는게 겨우 동화 읽기라니. 우스운 일이었다. 

 

"근데 이거 아빠한테 비밀로 해야 해 아저씨?"

 

"예. 제가 직접 말씀드릴테니 걱정 마십시오."

 

조치를 취한 나유빈은 경기가 펼쳐질 숲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전에 나타났던 침식체들이 등장할 가능성이 있었으니 아카데미 학생들을 보호해야 했다. 또한 만일 그가 상정한 최악의 사태가 발생한다면, 시그마를 동원해서라도 해결해야 할 일도 있었다. 

 

* *

 

매우 순조로웠다. 서윤은 여유롭게 함정들을 피해 나아갔고, 중간중간 마주친 학생들은 염동력으로 적당히 흔들어서 나무에 널어주었다. 그러지 말란 룰은 없었으니 잠재적 경쟁자들은 적당히 제거해도 무방했다. 그렇게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걷던 그녀는, 잠시 잊어버렸던 장난감을 발견했다.

 

"으, 완전 끈적거려.. 회장한테 다음엔 이런 건 하지 말자고 말해야지.."

 

"아이씨, 더러워 죽겠네..생각보다 더 지독한 녀석이다. 임시 편입생 너."

 

"구해줘서 고맙다구? 어머. 솔직하지 못하긴. 인사는 됐어."

 

"아니, 진짜 성격 나쁘네 얘!"

 

"나이엘 니가 할 소리냐고..."

 

나이엘은 울상으로 다리에 붙은 큼직한 이물질들을 뜯어내고 있었다. 함정에 뿌려두었던 강력 접착제가 묻어 끈적끈적해진 꼴은 엉망이었다. 다행히 머리카락까지 오염되진 않았지만 반짝거렸던 금발은 완전히 산발에 먼지를 뒤집어 써서 지저분해졌다. 몸은 더 심각했다. 낙엽이며 진흙 같은 온갖 지저분한 것들이 잔뜩 들러붙어 있었다. 서로 섞여있을 때 쥐어뜯었는지 핑크색 머리카락도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아카데미 최강을 자처했던 것과는 아주 다른 추한 모습이었다. 미카 스타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얼굴엔 다 숨길 수 없는 눈물자국까지 있었다.

 

처음엔 적당히 구경하다 지나갈 생각이었지만,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몰라도 갑자기 침식체가 접근했을 때 둘이 부둥켜 안고 시끄럽게 우는게 매우 볼만한 구경거리였다. 침식체가 구멍에 얼굴을 들이밀기 직전에 그녀는 우연히 현장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구해주었다. 그리고 나서 웃기는 꼴로 뒤엉켜있었던 나이엘과 미카를 한참 비웃어준 다음 꺼내주었다. 보물에 가장 근접해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여유였다.

 

"좀 쉬면서 천천히들 떠들다 와. 이제 시간이 없는 것 같으니까 먼저 갈게."

 

"시간이 없다니? 무슨 말이야?"

 

"여기 나타나기 시작한 침식체들은 분명 아티팩트의 영향 때문일테니까. 얼른 구슬을 얻어서 소원을 쓰든 케이스에 넣든 해야 없어지지 않겠어?"

 

"흥, 난 아까부터 알고 있었지. 누구 맘대로 혼자 주인공 행세를 하려고 들어? 좋아 편입생. 10초 있다 따라갈테니 먼저 가게 해주지!”

 

"이 상황에서 배려같은 걸 하는거야? 너 참 재밌는 애다."

 

“아니, 쫌!”

 

“아무튼 고맙게 받아들일게.”

 

시끄러운 두 사람을 내버려둔 서윤은 먼저 출발했다. 침식체들이 더 몰려나오기 전에 어서 구슬을 챙겨야 했다. 구해놓고 처리하기도 애매했고, 짐덩이들을 달고 움직이기는 귀찮았는데 꼴같잖은 배려를 해줘서 다행이었다. 

 

무장을 여러 개 챙겨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타난 침식체들이 1종 중에도 급수가 떨어지는 것들이었기에 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걸었고, 그녀는 곧 목표였던 소원 구슬을 발견했다. 불행히 구슬만 있지는 않았다. 최소 2종은 되어보이는 거대한 침식체와 두 소녀가 함께였다. 아이들에게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다. 서윤이 다급히 목소리를 높이려고 할 때였다.

 

“조심..!”

 

환한 빛이 터져나와 눈을 가렸다. 다음 순간 아이들을 덮치려던 침식체가 사라졌다. 어떻게? 서윤의 시선이 느리게 이동했다. 단상에 놓였던 소원 구슬이 사라져 있었다.  모르는 초등부 아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누구였더라, 아. 그 꼬마. 스카이였나? 그녀가 든 구슬. 서윤이 회수해야 할 그 소원 구슬은 영롱했던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어?...??" 

 

아하. 소원을 써서 침식체를. 다치지 않아서 잠깐, 그러니까 구슬을 썼 다행 아니 씨발 있어봐 구슬을 써버렸????다행이야 그렇구나. 미친? 빛을 잃어버린 구슬, 구슬 구슬구슬구슬구슬구슬구슬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구슬.

 

내가, 가져가야 하는 구슬.

 

써버렸어. 감히 소원을. 전부 써버렸어. 지금 뭘 한거야?

 

순식간이었다. 숨막힐듯한 공포가 그녀를 짓눌렀다. 이성은 손 쓸새도 없이 완전히 으깨져버렸다. 소녀의 자그마한 손에 서윤의 시선이 못박혔다. 서윤의 눈이 초점을 잃었다.

 

미션 실패. 이 쉬운 임무를 망쳤어. 난 이제 끝났어. 이런 것도 못 하다니. 관리자님에게 버림받을거야. 

 

이성이 황급히 자취를 감춘 그녀의 머릿속을 익숙한 광기가 가득 채웠다. 억지로 눌러두었던 그것은 활화산처럼 터져나왔다. 미처 뚜껑을 덮을 새도 없이 뜨거운 분노가 솟구쳤다. 서윤은 어쩔 새도 없이 새까만 감정에 집어삼켜졌다.

 

내 인생을 망쳐버렸어. 왜 이렇게 됐지? 좀 안일했기 때문에? 꼬마들 우정 놀음 때문에? 별 것도 아닌 침식체 몇 마리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내 삶이 끝나버렸어? 어떡하지? 어떻게 책임질래? 아니, 씨발 너희같은 잡것들이 책임을 질 수 있을리가 없겠지. 그냥 죽어버리지 그랬어? 왜 소원을 썼어? 좋아. 돌아갈 수 없게 됐으니 여기서 죽어버리자. 그 전에 내 삶을 조져버린 너희부터 죽여버리겠어. 

 

파탄난 논리가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조립됐다. 그녀는 망설임없이 손을 들었다. 이대로 손목만 튕겨도 두 소녀의 목을 꺾어버릴 수 있었다.

 

‘응! 아직 친해진지 얼마 안됐지만, 소중한 친구에요!’

 

능력을 쓰기 직전, 벼락에 맞은 것처럼 서윤은 전율했다. 

퍼뜩 정신을 되찾았다. 뭐야? 지금 뭘 하려고했지?

자각한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끔찍한 자괴감이 찾아왔다.

 

알고 있었잖아 서윤. 저건 급이 높은 아티팩트가 아니야. 관리자님이 날 보낸 이유도 여기 와서 금방 이해했잖아. 그런데.. 그런데.


나, 지금 이 아이들을 죽이려고 했어.

 

관리자에게 구슬을 멀쩡한 상태로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그냥 '가져오라'고만 말했으니까. 중요한 임무도 절대 아니었다. 영리한 서윤은 여기 와서 곧 관리자의 속내를 깨달았다. '가져 오라'는 '쉬다 와라'와 같은 뜻이었다. 나름의 배려였을 것이다. 자신을 떼어 놓는 건 아쉬웠지만 이렇게 챙겨주는 것도 특별 취급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았다. 

 

승부인 만큼 질 생각은 없었지만, 방금은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자신은 정신줄을 거의 놓았었다. 조금만 더 폭주했다면. 이 아이들은 그녀의 손에 죽었을 것이다. 뒤쳐져서 따라오고 있는 두 명도 당연히 입막음 겸 화풀이로 죽였을게 분명했다. 역겨운 괴물이 된 자신이 새삼 두려웠다. 황급히 손을 되돌려 입을 틀어막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완전 미쳐버렸구나. 진짜.

 

“어, 언니? 엄청 무서운 얼굴인데.. 화났어요?”

 

“아냐. 미안해. 언니가 생각을 좀 하느라..너희 괜찮니?”

 

“응. 케이시가 소원을 써서.. 둘 다 무사해요.”

 

아이들은 완전히 겁먹은 표정이었다. 이런. 안심시키려면 웃어야지. 서윤아. 그런데 오늘 하루 몇번이고 자연스럽게 띄웠던 미소를 짓는 방법이 더는 기억나질 않았다. 얼굴 근육을 움직이는 방법 자체를 잊어버린 것 같았다. 골똘히 생각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했었더라. 몇 번 웃어보려고 애써보았지만 어느새 잘 되질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익숙한 가짜 웃음을 지었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서윤은 이제 어떡해야 좋을지 잠시 생각했다. 곧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소원 구슬에는 아직 힘이 한 줌은 남아있는 것 같았다. 문제가 있다고 했었지.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어도 남은 일부 힘을 이 아이들에게 주고싶었다. 아니, 줘야만 했다.


“미안해, 스카이.. 소원을 써버려서.”

 

“아냐! 그게 아니었음 우리도 언니도 위험했을텐데..”

 

"저기, 구슬 말인데. 아직 힘이 조금 남았거든. 남은 소원은 너희한테 줄 테니까. 언니한테 구슬만 줄래? 나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

 

그녀의 생각에 두 아이도 동의했다. 남은 소원을 빌었고, 구슬은 서윤의 손으로 넘어왔다. 상상대로 소원이 작동하는지는 지켜봐야 할 일이었다. 

 

"다행이야. 스카이.."

 

“고마워, 케이시. 진짜진짜 고마워..”

 

부둥켜안고 울기 시작한 둘은 아까처럼 손을 꼭 맞잡은 채였다. 서윤은 가만히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너무 여러가지 생각이 몰려들어서 감정을 세심히 통제하기 어려웠다. 애써 고개를 돌렸다. 망가져버린 자신과 비교되는 것 같아서 더는 이 아이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힘이 다 빠져나간 구슬을 집어들고 일어섰다. 축제는 끝났다. 이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다음이 운동회편 마지막

이번 글 쓰면서 얻은 교훈 진행중인 이벤트 스토리는 꼭 다 나온 다음 쓰자 시발

페도나 나이엘파트 최대한 들어냈는데도 5천자씩 찍히네 읽기 힘들면 미?안?해?

개추댓글 항상 꼬맙어 카붕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