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우리가 게임을 접으면 일어나는 일들





"그 후로 계속 방에서 안 나온다고?"


"네 언니... 그리고 제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요... 가은이가..."


"가은이가?"


"가은이가 울어요..."


"울고 있다고?"








"가은아? 이나 언니도 왔어... 듣고 있지?"


"가은아? 나야 최이나. 괜찮니?"


"가은아..."


"가은아? 안에 있지? 안에 있으면 대답해 주렴."


최이나는 문을 두드렸다.


"가은아? 괜찮으면 무슨 일인지 말해줄래?"


"가, 가은아. 언니도 걱정하고 있어."


두 명은 한참 동안 가은 방의 문 앞에서 몇 번이고 가은의 이름을 불렀지만, 처음부터 그랬듯이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문 너머에선 어떤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가은이가 언제부터 저랬니?"


"그게... 가은이가 어딜 나갔다 왔거든요. 갔다 온 후로 계속 저래요. 아무런 말도 없고...

제 생각엔 아마 코핀 컴퍼니를 갔던 것 같아요."


"코핀 컴퍼니를?"


최이나는 이마에 손을 짚으며 천천히 말했다.


"네. 언니도 알다시피 가은이가 찾는 곳이 그렇게 많진 않거든요."


"그러고 보면 이제 코핀 컴퍼니랑은 함께 일하지 못한다고 한 뒤로 상태가 죽 이상하긴 했는데...

그게 가은이한테 그렇게 충격이었을까?"


미야는 소심하게 웃었다.


"하..하하... 언니도 알다시피 가은이가 일에 그렇게 열심인 성격은 아닌데..."


"그건 그래. 하지만 뭔가 있긴 했어. 그곳과 일하게 됐다고 했을 땐 좀 과하게 들뜬 모습이었고..."


최이나는 기억을 되살렸다. 가은은 원래부터 표정이 그렇게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로 극단적인


기분 변화는 누구든 간에 쉽게 알아챌 수 있었다.


"협업이 끝났다고 들었던 때 이후론 상태가 죽 이상하긴 했어.

시청자들도 느낄 만큼."


최이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미야야. 아까 가은이가 울고 있다고 그랬지?"


"네 맞아요 언니..."


미야는 이걸 말해야 하나 잠깐 망설이는 듯 했다.


"언니...언니는 가은이가 어떤지 잘 아시잖아요. 가은이가 어떤 앤지. 그런데 전 가은이가...

우는 걸 처음 봤어요. 언니는 본 적 있어요?"


미야는 목소리를 떨며 말을 이었다.


"이상해요. 언니. 많이 충격받은 것 같았어요. 정말 심한 표정이었거든요

웃는 것도 그렇게 드물게 보여주는 앤데..."


"이유에 대해 짚이는 거라도 있어?"


"가은이는 자기 이야기는 잘 하지 않으니까요..."


"뭐라도 좋아. 내가 너희들 매니저긴 하지만, 서로 가장 많이 시간을 같이 보낸 사람은 너희들이잖니."


"그럼..."


미야는 짚이는 곳이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가은이 사생활이라 이걸 이야기해도 될 지모르겠는데... 

가은은 예전부터 그 회사 사장님이랑 아는 것 같았어요."


"그 로ㅂ...아니 머신 갑인가 뭔가 하는 사장님 말이니?"


"네 언니. 언니도 방송을 보셨겠지만 저희가 태스크포스 컨텐츠로 거길 찾아갔을 때 

사장님을 보자마자 자길 구해 주신 분이라고 했거든요. 

사장님은 모른댔으니까 착각인가 했지만..."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그 특이한 로봇이랑 다른 사람이랑 착각할 리가 없잖아?"


"맞아요. 그런 로봇이 세상에 둘도 있을 리가 없고... 

누가 조종하는 물건이라고 해도 누가 조종하는 건지 모르잖아요?"


미야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가은이 코핀 컴퍼니를 찾아갔다가 기절한 적도 있잖아요. 

거기서 뭘 했는지는 회사 분들이 얼버무리셔서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가은이는 그 회사에 집착했어요. 아마도 가은이는 정말로 그 회사 사장님이 자기가 찾는 선생님이라고 믿었나 봐요."


"그래..."


최이나는 가은이 코핀 컴퍼니의 본사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그 사건을 떠올렸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몰랐지만, 코핀 컴퍼니가 불평하기는커녕 모든 피해 추산 금액을 일체 청구하지 않고


가은을 병원까지 보내 줬다는 뒷처리 내용만 알았다.


그리고 친절하게도 전화로 자신을 회사 임원이라고 소개하는 사람이 하트베리와 협업을 제안하고,


가은의 병문안까지 가 줬다는 것도.


이상하다. 왜 피해자 입장인 회사 임원이 가은의 병문안까지 가 줬을까? 보통 그렇게까지 하나?


"그래서 보미랑 루미가 그 회사를 찾아간 거니?"


"네. 루미는 화가 잔뜩 났거든요... 누가 가은을 울렸는지 알아야 한다고 보미 손을 억지로 끌어당기면서 코핀 컴퍼니를 찾아갔어요.

이 시간에 찾아가봐야 회사에 누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이나는 시계를 바라봤다. 벌써 시간은 9시가 다 되어 있었다. 


태스크포스의 야간 작전 스케쥴이 잡혀 있지 않은 이상 당직 인원 외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었다.


"방송도 가은이가 많이 아프다고 하고 끝냈어요. 시청자 분들이 이해를 해 주긴 하시던데... 죄송해요."


"괜찮아 미야야. 네 잘못이 아니잖니."


그녀는 울상인 미야를 부드럽게 안아 주면서 말했다.


"잘했어. 나라도 그랬을 거야. 나는 너희들이 제일 우선인걸."


풀이 죽은 미야 역시 자신에게 기대는 것을 느끼며 최이나는 가은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기획사를 나와 자신의 오랜 꿈이던 자신만의 프로젝트를 준비할 때,


자신이 찾는 인재를 구하는 것이 가장 문제였다. 일하면서 얻게 된 인맥과 수중에 조금 남은 재산을 총동원했지만,


아이돌 원석이라는 건 길바닥에 마구 굴러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원석이 정말로 길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땐 그녀도 기절할 만큼 놀랐다.


거기다가 그 원석이 아직 아무 데서도 스카우트 제의를 받은 적이 없으며, 설득해야 할 가족과 지인도 없고,


본인도 계약 조건으로 그닥 원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로 어딘가에 신이 존재해서 


그간 열심히 살아온 자신에게 보답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그녀를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본적으로 거의 모든 것에 감흥이 없었고, 춤이든, 노래든 뭐든 재능이 있다고 하긴 어려웠다.


재능이 있을지도 몰랐지만, 정말 필요한 만큼의 열의만을 보이니 그녀로서는 그녀에게 얼만큼의 잠재력이 있는지 알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녀에겐 사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그녀는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그건 그녀를 처음 마주쳤을 때부터 안 사실이었다.


머리는 대충 풀어헤치고, 유행하는 화장법도 몰랐으며, 티셔츠만 대충 걸친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최이나는 그런 껍질을 꿰뚫고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감싸고 있는 매력은 그런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예쁘다고? 예쁘기만 한 사람은 그녀도 길에 채일 정도로 많이 봐 왔다.


그건 당연히 갖춰야 할 장점이었지만, 이 바닥은 그것만으로 모든 것이 해결될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솔직했다.


물론 미야도 솔직하고, 루미도, 보미도 마찬가지였지만, 가은만이 가진 솔직함은 그런 것들과는 달랐다.


그녀에겐 선의의 거짓말도, 에둘러 말하는 화법도, 어떤 선입견도 없었다. 


사람이라면 십수 년간 살아오면서 누구든 간에 얽매이게 되는 당연한 것들이 그녀에겐 일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에서는 악담보단 친절함이 먼저 나왔다.


그녀를 대할 대면 누구든 간에 자신을 하나의 인간으로서 솔직하게 보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신비로움이 있었다.


신비로움. 그 표현이 정확했다. 그녀는 현실을 초탈한 것 같았다.


그녀는... 이 세상에서 온 것 같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최이나를 처음 만날 때부터 꾸준하게 보인 관심사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노동 시간? 몰라요. 주급? 몰라요. 인센티브? 몰라요. 숙소? 몰라요. 선생님을 찾아야 해요.


사람이라면 관심을 가질 만한, 가져야 할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데, 모든 설명에 그녀가 보인 반응은 '그래서 선생님은?'이었다.


애시당초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선생님이라는 작자를 도대체 어떻게 찾는다고?


유명해지면 그쪽에서 찾아올 거라고 설득했지만, 최이나가 그랬듯이 가은 스스로도 그걸 얼마나 믿는지는 미지수였다.


이 아이에게 선생님이란 사람이 갖는 자리가 얼마나 큰 걸까?


평범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가은이 보여 주는 이 엄청난 집착은 그녀와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의 관계가


그녀가 상상하던 것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 아니야. 연인과의 관계? 그것도 아닌 것 같고...


어쩌면 둘을 합친 것 같은, 이질적이고 더 섬세한 관계일지도 몰랐다.


그녀 생각에 가은은 꽤 유명했다. 자랑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프로듀스는 꽤 성공적이었다.


'난 최고니까.'


이 정도라면 그녀를 찾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었다. 


은발에, 분쟁 지역 출신의 외국인이고, 꽤 자주 미디어에 얼굴이 오르락내리락하는데, 누군가 그녀를 찾고자 한다면


산에 은거하지 않은 이상 소식을 듣지 못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가은이 점점 유명해질수록, 최이나의 불안감도 점점 커져 가더니 마침내 현실에 가깝게 되었다.


가은의 이 애정은 양방향의 것이 아니었다.


가은이 찾는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에게 있어, 가은은 별로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이미...


현관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둘이 돌아왔나 보다. 가 보자."





돌아온 보미와 루미는 어째서인지 흠뻑 젖어 있었다.


"어? 이, 이상하다? 비가 온다는 소리는 없었는데? 소나기가 왔었나?"


놀란 미야가 황급히 수건을 꺼내 오고 따뜻한 차를 내 왔지만, 잔뜩 성질이 난 루미는 몸을 닦는 둥 마는 둥 하고 


미야가 정성스럽게 끓여 온 차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보미 역시 보기 드물게 잔뜩 풀이 죽어 있었다.


"진짜 최악이야! 결국 회사에 못 들어갔어. 소나기는 또 왜 오는 거야!"


루미는 젖은 옷 그대로 거실의 소파에 풀썩 주저앉고선 투덜거렸다.


평소라면 최이나가 도끼눈을 뜨고 당장 혼을 냈을 테고, 미야도 제지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야 그렇겠지...시간이 시간인데..."


미야가 말했다.


"아니야! 사람은 있었어! 오히려 회사가 이상할 정도로 밝더라고!"


"응?"


"무슨 일이 난 것 같았어. 거기 사람들이 엄청나게 동요해 있더라고! 들여보내 달라고 했는데, 들은 체도 안 했어!

그리고 인상 잔뜩 쓴 웬 여자애가 지금은 여기 있으면 안 된다고 해서... 아니 뭐..."


그녀는 점점 더 목소리가 줄어들더니 말을 맺었다.


"내 또래 같던데... 걔가 그러니까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분위기가 뭔가... 엄청 심각했어..."


옆에서 보미가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구... 가은이를 누가 울린 건지도 모르는데 거길 찾아가서 어쩌겠냐고..."


그 말을 듣자마자 루미가 다시 흥분해서 말했다.


"너도 가은이 얼굴을 봤잖아!"


"그렇지만..."


최이나가 끼어들었다.


"루미야. 가은이가 정말 코핀 컴퍼니에 갔었던 건 맞니?"


"맞아! 나보고 집에 가라고 했던 애가 은색 머리 예쁜 여자애가 여길 왔었던 건 맞대.

알다시피 그런 애가 많지는 않잖아? 근데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안 말해 주더라고.

어쩌면 가은이가 가서 또 사고를 친 걸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거기까지 말한 루미는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무슨 회사가 사람 인상을 그렇게 묵사발을 만들어 놓는대? 걔가 뭘 했다고!"


보미가 소심하게 딴지를 걸었다.


"루미야... 가은이는 저번에도 그 회사를 거의 박살 내 놨었어..."


"그, 그건 그거고!"


얼굴이 새빨개진 루미가 되받아쳤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숙소의 거실에 갑작스런 적막이 찾아왔다.


다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미야는 자기가 끓여 온 차만 홀짝거렸고,


최이나 역시 팔짱을 끼고 심각하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미 역시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잔뜩 줄어든 말수를 유지하면서, 졸지도 않고 조심스럽게 모두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한참 지속된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것은 석연찮은 표정으로 다 식은 찻잔을 응시만 하던 루미였다.


"역시 문을 열어야겠어!"


"어, 루미야?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은데..."


"맞아 루미야. 오늘은 그냥 그대로 두는 게..."


하지만 루미는 막무가내였다.


"아니야! 쟤가 오늘만 저런 줄 알아? 최근 상태가 계속 이상했단 말이야! 

매니저도 알잖아? 요즘 모든 방송을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루미야. 조금만 진정하렴."


"게다가 오늘은 아예 펑크까지 내 놨다고.

저게 언제 끝날 줄 알고 기다려?

가은이가 뭐 내 백댄서라면 다른 누군가를 알아보겠지만 쟤는 하트베리 리더잖아!"


"이왕 이렇게 된 거 내일 말해 봐도 늦지 않잖니? 오늘은 그만..."


"매니저는 너무 물러! 뭔가 문제가 있으면 말을 해 줘야 알 거 아냐?"


최이나가 천천히 루미를 타이르려고 시도했지만,


말을 마친 루미는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가은 방 쪽으로 달려나갔다.


곧이어 와장창 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 무너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루미!!!"


모두가 소리를 지르며 쫒아갔을 때에는 이미 가은의 방문은 완전히 뜯겨 나가 있었다.


가은의 방 앞에서 잔뜩 화난 표정을 짓고 있던 루미는, 


뭔가 말하려다가 문턱 너머를 보자마자 자신감을 급속도로 잃은 듯 그대로 입을 닫아 버렸고 주눅이 든 표정으로 바뀌었다.


최이나가 급하게 루미를 막아섰지만, 이미 늦었음이 역력했다.


루미를 제지한 자리에서 그녀는 환하게 뚫린 방문 너머로 웅크리고 앉은 가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전 가은이가... 우는 걸 처음 봤어요. 언니는 본 적 있어요?"


최이나는 미야가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가은은 최이나가 그녀과 함께 일하면서 한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눈가가 안쓰러울 정도로 발갛게 달아오른 그녀는 세상을 잃은 표정을 지은 채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방금 그녀의 방문이 산산조각이 났지만, 그녀는 거기에 신경조차 쓰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알기는 하는 건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미...미하... 가은아 안...ㄴ..."


가은의 방문을 마주선 최이나의 어깨 뒤에서 미야가 고개를 살짝 내밀었지만,


그녀도 가은의 모습을 보자마자 하려던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무슨 말이든 해 봐! 문을 박살낸 건 너라구!'


'모, 몰라! 저런 상태인 줄은 몰랐다고!'


루미가 속삭이는 보미에게 억지로 대꾸했지만, 문을 박살낼 때의 패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최이나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문턱을 밟은 그녀는 뭔가 소름 돋는 기분이 들었다. 두 번째로 발을 내딛어 방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알 수 없는 파동이 그녀를 강하게 밀어냈고, 그녀는 방에서 튕겨 나가 맞은편의 벽에 부딪혔다.


"언니!"

"마미!"

"매니저!"


비에 젖은 개마냥 주눅들어 있던 루미는 깜짝 놀라 가은의 방에 달려들었지만,


그녀 역시 달려들 때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튕겨나가 최이나의 옆에 내던져졌다.


"언니! 괜찮아요?"


"난...난 괜찮아. 진정하렴. 그보다 루미가..."


최이나는 보미와 미야를 안심시켰다. 실제로 내던져진 속도도 그렇고 그렇게 아프진 않았다.


그러나 루미는 달려든 속도 때문인지 그 반동이 훨씬 커서, 부딪힌 벽 쪽에 살짝 금이 가 있었다.


카운터인 만큼 그녀는 보미가 부축해 주자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털고 일어났지만, 화가 단단히 나 있었다.


그녀가 최이나의 몸 위에 내던져졌으면 그녀가 아닌 최이나가 위험했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야! 너! 이게 무슨 짓이야?? 매니저가 다칠 뻔 했잖아!

울면 다인 줄 알아?"


"루미야! 위험하다구!"


그녀는 다시 가은의 방으로 뛰쳐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아까와는 다르게 튕겨 나가지 않았다.


루미는 가은의 멱살을 잡으려다 말고 자기가 생각해도 거기까진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무슨 말이든 해!"


가은의 눈에는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그녀는 무력하게 루미가 어깨를 흔드는 대로 마구 몸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나 뒤따라 들어온 최이나는 루미를 말리며 조심스럽게 가은의 표정을 살폈다.


그리고선 가은의 손을 잡으며 나직히 말했다.


"가은아? 나야. 괜찮니?"


그러고 있기를 한참 있자, 마침내 가은 쪽에서 뭔가 반응을 보였다.


"매니저...언니?"


"그래 나야. 최이나."


그녀는 가은을 꼭 안으며 말했다.


"괜찮아?"


그녀는 부어오른 눈에서 눈물을 다시 흘리며 억지로 말했다.


"...미안해요."


"아니야 가은아. 괜찮아... 다 괜찮아..."


눈에 초점이 돌아온 가은은 울먹이기 시작했다.


"정말 미안, 미안 해요. 방송도... 모두, 제가 다 망쳤어요."


"화난 게 아니야 가은아. 걱정돼서 그래."


그녀는 가은을 안은 채로 등을 다독여줬다.


"괜찮으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래?나도 그렇고..."


그녀는 어색하게 선 미야와 보미, 언짢은 표정을 한 루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모두가 널 걱정했거든."


가은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마구 울먹이기 시작했다.


"매니, 매니저 언니. 이상해요. 선생님이, 없어요. 없어진 것 같아요. 선생님이..."


그녀는 횡설수설했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선생님이, 없어요. 뭔가 이상해요 언니.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없는데, 그냥 가 버리셨어요."


말문이 튼 그녀는 북받히는 감정을 참기 어려웠는지, 목 아래서 올라오는 딸꾹질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없어졌다고요. 없어졌는데,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아요. 실종된 건지, 어딘가 멀리 떠난 건지, 아니면..."


그녀는 생각하는 것조차 두렵다는 듯이 마구 흔들리는 동공으로 어떤 단어를 말하려고 했다.


"주, 죽... 주..."


거기까지만 간신히 말한 그녀는 눈을 꼭 감고 귀를 틀어막고선, 고개를 무릎 아래로 파묻었다.


"가은아? 선생님은 괜찮을 거야."


최이나는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가은이가 선생님은 분명 가장 멋지고 강한 사람이라면서?

그런 사람은 쉽게 사라지거나 가은이를 버리거나 하지 않을 거야. 너도 알잖니?"


"아뇨, 아니에요..."


고개를 푹 숙인 채 이따금 어깨를 들썩이는 그녀는,


그녀만의 절망적인 상상에 압도되어 서서히 질식해가는 것 같았다.


"가은아? 선생님은 잠시 어디 바쁜 일이 생기셨을 거야."


"아니에요 언니..."


가은은 최이나가 무슨 말을 하던 간에 부정했다.


"언니, 저는 알아요. 알아버렸어요.

이 불안감의, 공허함의 정체가 뭔지."


그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예언과도 같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선생님이, 정말 사라졌어요..."


고개를 다시 든 그녀는 최이나에게 물었다.


"언니, 저는 이제..."


"가은아, 우리 같이 찾아 보자. 방송에도 이야기해 보고. 그럼 누군가 분명..."


"거짓말."


가은이 말을 잘랐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최이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울고 있었고 울먹임도 그대로였지만,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니도 자기 말을 믿지 않잖아요."


그 말을 듣자마자 최이나는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짓말이 아니야. 가은아. 우리가 도와줄게."


"언니, 언니는 그럴 수 없어요."


"가은아..."


"언니."


가은은 최이나에게 눈을 맞췄다.


최이나는 가은의 눈을 보고 섬뜩함을 느꼈다.


평소 자신을 바라보던 소녀의 눈빛이 아니었다.


거기엔 최이나가 이유를 알 수 없는, 깊은 불신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진심이 통하길 바라면서 가은을 간절히 바라봤다.


적어도 그녀가 가은을 돕고 싶어하는 마음은 정말이었으니까.


그러기를 한참, 가은은 마침내 체념했다는 듯이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시작된 이야기는 자주 갑작스런 울먹임에 가로막혔지만 가은은 마침내 숨을 고르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아주 천천히.


그녀는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눈먼 맹인이던 자신, 잘 기억나지도 않는 가족의 죽음,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로 먹거리를 구하던 나날, 잦은 구타, 총성, 비명소리,


그녀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 담담하게 읊어 나갔다. 


그녀는 어떤 광경에 대한 묘사를 하지 않았다. 


그녀는 귓가를 맴돌았던 모든 소리들을 언급했다. 


지옥을 이루는 백만 가지 소리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그것만으로도 몹시 끔찍한 것이었지만,


가은 주위에 선 사람들은 그녀가 그것을 말하는 태도에서 가장 공포를 느꼈다. 그녀는 견디기 힘든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었던 사건을 나열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는 어떤 회한도 두려움도 담겨 있지 않았다.


기나긴 방황, 자신과 잠깐 알았던 고아들의 실종, 굶주림, 갈증 같은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고통스런 과거에 대한 일방적인 나열에 모두가 겁에 질릴 때쯤,


마침내 주제는 그러다 만난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그에게서 느낀 이 세상 모든 온기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따스함을 말했다.


그는 그녀에게 따뜻한 식사를, 말을, 마음을 주었다. 그녀가 태어나서 가져 보지 못한 모든 것,


그녀가 감히 자신에게 허락된 것이라고 믿지 않았던 것을 모두 주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와 함께한 잠깐의 여행, 힘들지만 비단으로 짠 꿈결 같았던 그 여행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건 인형에게 처음 마음을 준 것 같은 일이었다.


천천히 앞서 내용을 말해 나갔던 것과는 다르게, 선생님의 대목에 이르자 그녀는 서서히 자신의 이야기에 도취되어 갔다.


동시에  이 이야기를 대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막막한 것도 같았다.


그녀는 선생님이라는 사람과 관련된 모든 일을 마구잡이로 나열했다.


마치 눈 앞에 엄청난 만찬이 차려져 있는데, 무엇부터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어린아이처럼,


이 이야기도 하고 싶지만, 그걸 하다 보면 다른 일화도 생각나서 그 이야기도 하다가, 마침내 하던 이야기가 뭐였는지도


헷갈리게 되는 그런 모양새였다. 이야기의 순서, 시간, 그런 건 부차적인 문제였다. 가은에게 있어서는 자신의 끝없는 애정이


오직 그에게만 향해 있다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그는 가은의 구세주이자 창조주였으며, 그녀가 사랑해야 할 이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에.


최이나는 가은에게서 항상 느꼈던, 속세를 초월한 것 같은 신비로움이 어디서 왔는지 비로소 알아챌 수 있었다.


선생님 이야기를 하는 그녀의 모습은 구도를 위해 기도하는 소녀 같았다.


박물관에서 본 어떤 명화처럼 범접하기 어려운 숭배의 아우라가 그녀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그의 행렬은 그리고 끊이지 않았다.


그가 떠나던 날, 그가 살던 나라에 도착하던 날, 그를 만나기 위해 최이나와 계약하던 날,


그를 처음 코핀 컴퍼니에서 발견했던 날, 목요일마다 그를 위해 일하는 것을 허락받게 된 날...


오로지 선생님, 선생님 뿐이었다.


최이나는 느꼈다.


'이 아이는 과거가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은에겐 확신이 있었다. 선생님과 만났고, 선생님과 이야기하고, 선생님 주변에 있는 것을 허락받았기 때문에,


그런 나쁜 일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었다.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은 자기 이야기가 아니었다. 자신이 찾는 선생님의 이야기였다. 


자신의 감정이 거기 담겨 있을 리가 없었다. 거기엔 오로지 선생님 뿐이었으니까.


이야기를 듣던 최이나는 부끄러워졌다. 이 아이에게 내가 약속한 것들이 얼마나 우습게 보였을까?


부, 인기, 명예, 명성, 최고에 자리에 올려놓겠다는 그 약속들이 얼마나 하찮았을까?


그런 시덥잖은 것들을 확신을 갖고 거듭 약속하는 자신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 아이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처음부터 명확했는데.


자신을 처음 만나던 그 날부터 자신에게 계속해서 이야기했는데.


최이나는 가은 눈에 보이던 불신감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그녀와의 관계는 첫번째 만남부터 뒤틀려 있었다. 최이나가 선생님이란 사람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진심으로 그를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 가은은 그녀와의 관계에 선을 그어 버렸다.


최이나가 아무리 애써도 좁힐 수 없었던 미묘한 거리가 바로 거기서 시작됐던 것이다.


'거짓말.'


최이나의 귓가에 가은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그래. 그녀는 내게 그렇게 솔직했는데. 나는...


그러는 사이 가은의 이야기는 과거를 다시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여기 선 사람들이 가은을 위로하기 위해 모였다는 것도 잊고 질색할 정도로.


이미 했던 이야기가 세 번쯤 반복되는 것 같았지만, 그녀는 그걸 알아채지조차 못한 것 같았다.


아무도 어떤 반응도 보일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듣는 사람이 없더라도 그녀에겐 상관없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자기 자신에게 수없이 되뇌었던 기도문 같은 회상들이


그냥 어쩌다 입 밖으로 나온 것 같은, 그런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모두가 이 이야기가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다고 느낄 때쯤,


가은이 마침내 질문했다.


"언니는 이해할 수 있어요?"


최이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해한 적이 없었다.


"맞아요. 언니는 알 수 없어요. 미야도, 보미도, 루미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해도 그녀는 최이나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게 거짓임을 알 것이었다.


최이나는 왜 그녀가 이런 이야기를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이렇게 진심을 다해 오랫동안 열변을 토했지만, 결국 누구도 가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가은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가은은 입을 꽉 다물더니 애써 한 마디를 내뱉었다.


"매니저 언니는 좋은 사람이에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천천히 일어서더니 자신의 방을 뛰쳐나갔다.


현관 문이 급하게 열리고 다시 닫히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자리에 선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