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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지역 이후의 시점


1편~마지막 편까지 모음

https://arca.live/b/counterside/39057596


"무리? 제가 지금 무리하고 있는거라고는 초면부터 남의 부모님 거들먹거린 것도 모자라서 반 죽음으로도 만들고 이젠 병실에 무단 침입까지 해서 남의 자는 모습을 관음까지 한 당신을 향한 살인 충동을 참고 있는 것 정도 밖에 없는데요?"


존댓말을 쓰고 있다고는 믿기지 않는 비아냥과 짜증. 할 수만 있다면 저 속이 시꺼먼 여자를 눈 앞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어른이시잖아요? 나잇 값은 하셔야죠? 고작해야 10대 후반 밖에 안 된 애새끼한테 폭행에 장난질이나 하시는걸 봐선 치매라도 오신 것 같으니 요양 병원이라도 알아봐드릴까요?"


하지만 유린은 이런 비웃음 마저 예상 했다는 것처럼 별로 신경 쓰지 않고 하던 말을 계속 했다.


"아하하...단단히 미움을 사버렸네요. 뭐 예상 못한건 아니니까 욕하고 싶은 만큼 욕하셔도 괜찮아요. 대신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병문안도 병문안이지만 여기 온 또 다른 목적이기도 하거든요. 이 말만 들어주신다면 얌전히 돌아갈게요."


어차피 저 년은 자기 말 안 들어주면 해 뜰 때까지 순순히 나가줄 것 같아보이지도 않으니 대충 흘려듣고 빨리 보내버리자. 시윤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머리를 짚었다.


"하아....네. 어디 잘난 선배님께서 후배한테 하고 싶으신 덕담이나 좀 들어볼까요? 전혀 부탁하지 않았지만."


"방금 시윤군이 지나치게 무리하고 있다고 한 얘기예요. 정말 말 그대로랍니다."


"대체 제가 뭘 무리하고 있다는건가요?"


"그거야 당연히 시윤군 주변 인물들과 시윤군의 관계죠. 힐데 스승님, 유미나양 같은 분들이요. 우선 스승님이예요.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찾겠다고 하셨지만, 정말 용서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시윤군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 분은 제 목숨을 구해주셨어요. 저는 용혈이란 대체 무엇이고, 제 부모님은 왜 죽어야 했으며, 왜 미나양만이 스승님께 특별하게 취급 받는지를 알아내고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찾겠다고 맹세 했습니다. 고작 당신 같은 불 여우한테 휘둘릴 것 같나요?"


용혈, 부모님, 미나, 스승님.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뱉어낼 때 마다 시윤의 표정에서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느껴졌다. 


"그렇다면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알려드릴 수는 없어도, 그 전에 얘기하신 모든 것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용혈의 정체, 시윤군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유, 미나양이 특별 취급 받는 이유. 모두 다."


"네.....?"


"다만, 스승님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제가 아니라 시윤군 본인이 가장 잘 아실테죠. 거들먹거리지 않겠다고 했지만, 얘기를 하기 위해서는 언급이 불가피 하네요. 이 점은 죄송합니다."


시윤은 입술을 꽉 깨물고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유린이 언급할, 자신이 힐데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기에.


"바로 시윤군의 부모님이예요."


"읏.....!"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자 시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유린의 멱살을 잡았다.


"그만 하세요."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역시 기분이 나쁘실테죠. 아니, 그게 아니면 외면했던 것을 확인 사살 당하는게 두려우신건가요?"


"그만."


"시윤군, 스승님이 당신의 부모님을 처분한 것은 폭주해서 시윤군을 죽이려고 했다는것 뿐이었을까요? 사실, 시윤군이 잘 알고 있을테니 굳이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언제까지고 도망만 치실 셈이세요?"


"더 이상 말하지 마시죠."


멱살까지 잡혔는데도 유린은 당황한 기색 없이 태연한 얼굴이었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기도 해요. 당신이 힐데 스승님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 그것은..."


"그만 하라고 했잖아!!"


결국 시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당신에게서 평범한 사람으로서 살아갈 운명을 앗아가고 전장에서 싸워야할 운명을 부여 했기 때문이죠."


짜악.


결국 시윤은 유린에게 손찌검을 했다. 그 백옥 같이 하얀 피부가 손자국으로 붉게 물들었다.


"저번에 죽기 직전까지 몰아간 것에 대한 앙갚음 치고는...제법 싸게 먹힌 편이네요."


뺨을 맞았는데도 유린은 아픈 기색은 커녕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유지하며 느긋한 눈빛으로 시윤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더 못 들어주겠으니 나가세요. 간호사 부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사실은 제 얘기에 흥미가 생긴거죠? 용혈의 비밀부터 시작해서 유미나양 이야기까지. 그리고 제가 시윤군 주변의 다른 사람들 중 아무나 포섭할 수 있었는데도 굳이 시윤군을 선택한 이유가 정말 용혈 뿐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럼 그 놈의 용혈 때문이지, 또 뭐가 있다고...!"


"저는 제법 닮았다고 생각하거든요, 주시윤군과 저 나유린이."


"당신 같이 기분 나쁜 여자하고 같은 취급 하지 마세요."


시윤의 눈이 붉어지자 유린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 속삭이듯이 말 했다.


"우리의 공통점은 힐데 스승님께 배신 당했다는 것."


배신? 저 여자가 힐데에게?


"당신이 스승님께 배신을 당했다고요?"


"네.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육익의 보스이기 이전에 미나양과 시윤군보다 오래된 힐데 스승님의 제자이자, 전 펜릴 소대. 펜릴 전대의 대원이었습니다. 얘기를 하자면 대략 20년 전 쯤이겠네요."







20년 전, 클리포트 게임 당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가고 죽어가는 자들의 신음과 비명소리, 침식체들의 울음소리가 천지사방을 뒤흔들었던 때. 주변에는 방금 전까지 함께 싸웠던 자들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널브러져 있었던 참혹한 광경.


유린은 한쪽 눈을 잃은 채 심하게 부상 당하고정신을 잃은 수연을 부여잡고 힐데에게 도움을 요청 했을 때를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절체절명의 상황. 그 누구의 도움도 기대할 수 없는 아비규환. 스승이 보이자 유린은 자신도 모르게 안도하며 웃었다.


'스승님.....!'


하지만 힐데는 유린에게도, 수연에게도 눈길만 한번 주고는 그대로 그녀들을 지나쳐 어디론가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어, 어?!'


그나마 멀쩡해보이는 유린은 몰라도 누가봐도 죽지 않은게 기적으로 보이는 수연을 봤다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다가오지 않을 수 없을텐데 힐데는 그런 수연도 매정하게 외면해버렸다.


힐데가 외면해버린 그 순간 유린은 직감했다. 여기서 스승님을 놓치면 정말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애타게 부르고 또 불렀다.자신은 몰라도 수연만이라도 어떻게 해달라고,설마 자신들을 버릴 셈이냐고, 우리는 당신의 제자들이고 당신은 우리들의 스승이라고.


'스승님....! 설마 우리를 버리실 작정이십니까?!'


'미안...하다....'


그 말만 하고 힐데는 수연과 유린을 외면한 채 작전 지역을 이탈해 어디론가 휙 사라져버렸다.


하염 없이 사라져가는 힐데의 뒷 모습을 비치는 유린의 푸른 눈동자에서 결국 눈물이 흘러내렸다. 간절히 기도하고 애원 했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지마, 그러지마, 안돼, 전우들도 죽어가고 수연이도 심하게 다쳤는데, 저 혼자서 어떡하라고, 그러지 마세요. 평소처럼 같이 있어주세요. 가지 말아요. 스승님... 제발, 제발-.







"......"


잠시 그 때를 회상하자 유린의 얼굴에서 그제서야 미소가 사라졌다. 주변에 즐비한 전우들의 시체와 침식체들의 위협 속에서 한쪽 눈을 잃은 채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어보이는 수연을 끌어안고 부들부들 떨었던 것을 회상하는 것은 당연히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까지가 20년 전에 있었던 수연이, 즉 당신의 부사장님과 제가 스승님께 배신 당한 이야기입니다."


힐데를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했었지만, 사실 아직도 아직 어리고 미숙했던 그 때 힐데로 인해 강제로 떠안아야 했던 절망감과 공포, 그리고 배신감은 아직도 유린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유린의 과거를 듣자 시윤의 눈빛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마치 들어선 안 될 것을 들었다는 것처럼 초조해하는 것 같아 보였다.


".....저는 배신 당한적 없어요."


"아니, 당신은 확실히 배신 당했습니다. 힐데 스승님이 당신을 거둘 때, 자신이 시윤군의 스승이 되어주겠다고 했었죠? 스승이란 것은 제자를 챙겨야하고,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옳은 길로 이끌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장 저는 말할 것도 없겠고, 미나양과 시윤군을 대하는 것을 보면 이미 시윤군의 제대로 된 스승이라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요? 거기다가 시윤군을 거둔 후에 다시 어디론가 잠적하신 모양이던데."


"........!"


"저는 스승님을 원망하지 않지만, 그래도 스승님이 저지르신 일까지 부정하진 않을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진실이니까요. 정 믿기 힘드시면 수연이에게라도 물어보는게 어떨까요? 수연이가 답을 해주진 않더라도 시윤군 정도 눈치면 수연이의 반응을 보고 제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판단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확실히 그랬다. 시윤이 생각하기에도 힐데는 항상 자신에게는 용혈을 쓰면 죽이겠다고 협박하면서 미나는 달랐다. 미나가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써도, 죽이려고 들기는 커녕 아무런 말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왜 당신의 부모님이 죽어야 했느냐에 대해서는 지금 말해드릴 수 있겠네요. 힐데 스승님은 과연 시윤군의 부모님을 죽이셔야만 했을까요?"


유린은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는 시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했다.


"시윤군, 잘 생각해보세요. 제 말은 스승님이 굳이 시윤군의 부모님을 죽일 필요가 있었느냐는거예요."


시윤의 표정에 더 크게 동요가 일자, 유린은 다시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클리포트 인자의 힘이 폭주 중이었으니 설득은 못하더라도 스승님의 힘이라면 충분히 죽이지 않고 살려둔 채로 제압한 다음에 시윤군의 부모님을 제정신으로 돌려놓을 방법을 찾아볼 수도 있었을텐데. 왜 굳이 죽여야 했을까요?"


"그건,"


"즉 스승님에게 있어서 시윤군과 시윤군의 부모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나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요?"


"헛소리 좀 작작-"


"용혈이 특별해서 그렇다고는 쳐도,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사용한 자들을 처분하고 다니시는 스승님 본인은 모순되게도 유미나양 만은 내버려두셨고, 전에 리플레이서와의 전투에서 클리포트의 힘을 쓰셨잖아요. 결국 그 힘은 일단 전부 클리포트 인자인데."


시윤의 눈 앞에 순간 수년 전 부모님을 죽이던 순간의 힐데의 모습이 스쳐갔다. 잊고 싶어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그 잔인한 순간.


"큭...."


시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린다.


"결과만 따지면 스승님은 시윤군의 목숨을 구한거지만, 어쩌면 스승님의 목적은 시윤군을 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사용한 자들을 처분하기 위해서였던 것이겠죠."


힐데가 괴성을 내지르는 부모님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악몽 같은 장면이 스쳐지나간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다.


"아무리 미나양이 특별하다고 하지만, 부모님까지 살해 했는데 그런 시윤군에게 힘을 쓰면 너까지 죽인다느니 스승님은 그런 소리를 하시면 안돼죠. 시윤군, 무얼 망설이는거죠?"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무척이나 달콤했지만 달콤함과 동시에 사악하기 짝이 없었다.


"저는 당신의 선택을 지지해줄 수 있습니다. 제가 용혈 때문에 시윤군을 포섭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이미 더 강경한 방법을 썼을 수도 있어요. 그런데도 제가 이렇게 전투 의사가 없다는 것도 밝히고 얘기를 한다는 것은, 제 말을 조금은 들어주셔도 손해가 없다는거죠."


누군가가 보면 이 상황이 마치 유린이 시윤을 붙잡고 끔찍한 말과 협박을 하는 것처럼 보일 것이지만 그런 모습과 대비되게 유린의 말투는 침착하고 상냥했다.


"저로서는 시윤군이 육익에 와주시면 좋지만 그래도 중요한건 시윤군의 의사니 굳이 오지 않으셔도 저는 시윤군의 선택을 존중할게요. 그저, 귀여운 후배님이 저처럼 배신 당하는 것이 안타까워서예요."


그리고 유린은 에코백에서 메모지와 펜을 꺼내 무엇인가를 적더니 침대 옆 테이블에 올려놓은 쿠키 상자에 붙여놓았다.


"제 얘기는 끝이예요. 그럼 이제 바라시는대로 나가드릴게요. 시윤군의 답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쿠키 맛있으니까 꼭 드세요."


또각또각거리는 유린의 하이힐 소리가 멀어지자 다시 병실에는 고요함 만이 내려앉았다.


"허억....허억......"


분명 유린은 전과는 다르게 협박도 하지 않았고, 폭력적인 수단을 쓰지도 않았다. 하지만 유린이 사라지자 마치 폭풍이 한바탕 휩쓸고 간 것만 같았다.


"아무리 그래도....스승님을 배신 할 수는.."


힘이 풀린 다리를 억지로 일으키자, 유린이 두고 간 쿠키 상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상자 뚜껑에는 아까 유린이 무엇인가를 적어 붙여놓은 메모가 붙어있었다.


'제 전화 번호예요.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전화하셔도 좋아요. 기다릴게요.'


단정한 글씨 아래에는 유린의 것으로 보이는 전화번호 하나가 적혀있었다. 유린이 적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은 분명 자신이 육익에 들어가 용혈을 각성 하겠다는 말이리라.


"참나...쓸데 없는 짓을."


한 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상자는 제법 묵직했다. 맛있을거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닌 것 같아 보였지만 시윤은 가차 없이 뜯지도 않은 쿠키 상자를 뚜껑에 붙어진 메모지를 떼지도 않고 함께 쓰레기 봉투에 거칠게 버렸다.


"아니야, 아니야. 보나마나 전부 거짓말이겠지...."


괜찮아, 전부 그 빌어먹을 여자의 헛소리야. 시윤은 애써 유린이 했던 말들을 잊어버리려 노력하며 비틀거리며 다시 침대에 누웠다.







"주시윤."


유린이 다녀간 다음날, 힐데가 드디어 시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응? 스승님이 병문안까지 와주시고, 세상 살다보면 이런 일도 있네요!"


평소처럼 능청스럽게 힐데를 대하는 시윤이었지만, 유린이 했던 말들이 계속해서 시윤을 괴롭혔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스승님을 용서할 이유를 찾겠다고 하셨지만, 정말 용서하실 수 있으신가요? 저는 시윤군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되지 않아요.'


'스승님에게 있어서 시윤군과 시윤군의 부모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나 어느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는 존재일 수도 있다는 뜻 아닐까요?'


'시윤군, 무얼 망설이는거죠?'


"......."


설마, 아무리 그래도 힐데는 자신의 스승이다. 이렇게 병문안까지 와줬는데. 정말로 아무 상관 없었다면 병문안을 와줬을까? 역시 그 말은 헛소리겠지.


"생각보다는 멀쩡한 모양이군. 굳이 찾아올 필요도 없어보이고."


"아하하, 그래도 병문안 와주셔서 감사해요."


"내가 병문안을 온 것처럼 보이냐? 설마 목숨이 위험하다고 그 힘을 쓴건지 확인하러 온거다."


뭐?


"다행히 클리포트 인자의 힘이 느껴지진 않는군. 원래는 곧장 오려고 했는데 다른 사냥감 때문에 늦게 됐다."


"아니, 스승님. 그래도 저 죽을 뻔 했는데 걱정도 안 하시는...."


"힘을 쓰지 않았으면 됐다. 언제나 말하지만, 절대. 절대로 그 피를 깨우지마라. 네 부모 곁으로 가고 싶지 않으면. 그럼 볼 일은 끝났으니 이만 가지."


결국 부모님이 언급되자 시윤은 평소의 그 능글맞은 미소 마저도 지우고 힐데를 노려보며 말했다. 평소 같았으면 그저 넘겼을텐데, 유린의 말 때문에 계속 신경이 쓰여 미칠 것 같다.


"스승님. 가기 전에 이거 하나만 대답해주세요."


"뭐지?"


"6년 전, 제 부모님을 죽이셨을 때 제가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어떤 선택을 하셨을건가요?"


사실 힐데는 시윤의 부모님을 죽이고 나서야 시윤의 존재를 눈치 챘기에 시윤은 힐데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서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때 힐데가 만약 시윤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면 무슨 생각을 갖고 어떤 선택을 했을지. 그리고 시윤의 부모를 죽일 때 느꼈던 첫번째 감정은 무엇인지. 그것을 알고 싶었다.


"대답해줄 필요도 없이, 네가 보고 있다고 해도 난 망설임 없이 네 부모를 죽였을 것이다.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사용한 이상, 누구라도 처분하는 것이 내 일이니까."


힐데의 대답을 들은 시윤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 힘을 물려받은 너도 마찬가지로 힘을 쓰지 않은 지금은 내버려두지만 힘을 사용한다면 그 때부터 더 이상 넌 내 제자가 아닌 사냥감이 되겠지. 답이 됐나? 그럼 이제 정말 가겠다."


힐데는 쌀쌀맞게 대답하고는 나가버렸다.







"고작, 저와 제 부모님은 그것 밖에 안되는거였나요?"


힐데가 남기고 간 말에 시윤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유린의 말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속으로 계속 자기 암시를 걸었지만 그럴수록 유린이 했던 말들과 힐데의 말이 맞물려 더욱 시윤을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었다.


똑똑.


그런 시윤을 다시 현실로 끄집어온 것은 노크 소리였다.


"주선배, 미안! 아카데미 다니느라 바빠서 이제 오게 되네. 들어가도 되지?"


노크 소리의 주인은 미나였다. 시윤은 미나의 목소리를 듣자 다시 평소처럼 가식적인 웃음을 지으며 미나를 맞았다.


"하하, 신경 쓰고 있지 않았으니 괜찮아요. 학교 생활은 즐겁게 하고 계신가요?"


"물론이지.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었고 즐겁게 보내고 있어."


미나는 들고 온 비닐 봉투에서 음료수 두개와 편의점 도시락을 꺼내 내밀었다.


"이것 밖에 못 사와서 미안. 병원 밥은 맛 없다고 들어서 일단 가져와봤는데 입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앗, 감사합니다. 주신 것 만도 감사한데요 뭘.잘 먹을게요."


"그나저나 소대장이 선배 병문안을 온 것 같은데. 나 진짜 깜짝 놀랐다? 그 소대장이 신경도 써주고 병문안도 오다니. 선배, 소대장한테 사랑 받는 것 같아."


"스승님이 조금 전에 다녀가긴 하셨죠. 스승님을 만나셨나요?"


"응.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만났어. 마주치자마자 힘든건 없냐, 아카데미 생활은 잘하고 있냐면서 이것저것 묻더라. 아, 오늘은 볼 일이 생겨서 안되지만 내일 밥 사주기로 했어. 소대장이 밥까지 사주다니, 다시 봤다니까?"


"그런가요."


"근데 소대장은 병문안까지 와주는 선배를 더 챙기는 것 같아. 그리고 아카데미 생활 말인데 애들한테 관심 받는 것도 좀 피곤할때도 있고 말야. 전에 무슨 기록 측정인가? 그거 했었는데 내가 신기록이나 뭐래나. 다들 놀라더라고. 그러고보니까 선배는 학교 생활 해본적 있어? 선배도 아직 미성년자니까 학교 다닌적은 있을 것 같은데."


학교 생활 이야기를 듣자 애써 웃음을 유지하던 시윤의 표정이 무너졌다. 학교 생활이라, 미나의 말이 맞다. 시윤은 지극히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했었다. 물론, 그것은 시윤의 부모가 클리포트 인자의 힘을 깨워 힐데에게 살해 당하기 전으로 한정되는 초등학교 때의 이야기이지만.


시윤의 부모가 죽은 후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소식이 시윤이 다니던 초등학교에 그 사실이 알려졌고, 그 결과 고아라면서 하나 둘씩 시윤을 멀리하거나 놀리고, 괴롭히기까지 했다. 결국 시윤은 상처만을 안은 채 초등학교를 마친 직후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은 전부 검정고시로 때우며 코핀 컴퍼니에서 카운터 생활을 했던 것이다. 어차피 학교에 다녀봤자 부모도 없다면서 손가락질 당할텐데.


가끔 자신 또래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나 부모와 함께 있는 아이들을 보면 시윤은 알 수 없는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어쩌면 나도 카운터로서 침식체와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이지는 대신에 저렇게 평범한 10대의 삶을 누릴 수 있었을까 하고.


"나한테 있어 선배는 동경의 대상이기도 해. 그리고 특별한 힘도 있으니 가끔은 진짜 질투도 나고 부러울 정도야."


"미나양."


미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것은 참작이 될 수 있고 실수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상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죄송하지만 오늘은 이만 돌아가주시겠어요? 머리가 조금 아파서 그런지 혼자 있고 싶네요."


"아, 가방에 두통약 있는데. 그거라도 줄까?"


"아니요. 그냥 나가주세요. 지금 당장."


생전 처음 보는 시윤의 태도에 미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평소의 시윤이라면 그러지 않았을텐데 이런 강압적이고 날이 선 태도는 처음 본 것이다.


"어.....그럼, 몸조리 잘하고. 시간되면 다시 올게."


미나도 방에서 나가자, 시윤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다들...다들 저를 이 이상 비참하게 하지 말아주시겠어요?"


모든걸 다 가졌으면서 자꾸 그것을 부정하며 깎아내리는 미나. 클리포트 인자 보유자들의 사냥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처럼 보이는 힐데.


"큭....."


그런 시윤의 눈에 별안간 들어온 것은 쓰레기 봉투에 처박힌 유린이 주고 간 쿠키 상자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 상자 뚜껑에 붙은 메모지였다.







"흐음...아무리 그래도 진짜로 그렇게 대답하실거라고는 솔직히 몰랐는데."


시윤의 병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복도에서 한 여자가 중얼거렸다. 여자는 조금 전 힐데와 미나가 왔다 갔던 것을 전부 보고 듣고 있었다.


"스승님 진짜 매정하시네요."


여자, 유린은 묘하게 미소 지었다. 유린의 옆에는 또 다른 육익의 일원인 이지수와 에이미 퍼스트윙이 있었다.


"그 주시윤이라는 애도 진짜 불쌍하네. 나 같으면 부모님 죽인 사람을 스승이라고 부르면서 따르는 짓은 못하지."


"그건 동감이다."


"만약 시윤군이 육익에 오신다면 선배로서 제가 하나하나 잘 돌봐드려야겠어요. 후훗."


유린은 그렇게 말하고 시윤이 입원한 병실의 반대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대장,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시려는겁니까?"


"네. 어제야 늦은 밤에 왔으니 그렇다고 쳐도 지금 들어갔을 때 저희 말고 다른 누군가가 시윤군을 찾아와서 저희와 마주치면 곤란하고, 굳이 그렇게 안 해도 곧 시윤군에게서 연락이 올 것 같거든요. 오늘 온 건 단순히 스승님이 시윤군에게 하실 말이 궁금해서예요."


"그런거면 감시 카메라나 도청기를 몰래 설치해서 옅들으면 장땡 아냐?"


"아하하...에이미양, 아무리 그래도 제가 10대 후반인 소년의 사생활까지 일일히 감시하는건 시윤군에게 미안하잖아요. 나중에 알게되면 안 그래도 최악인 인식이 더욱 곤두박질 칠걸요? 어쨌든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테니, 지수씨와 에이미양은 이만 돌아가세요."


지수와 에이미를 돌려보내고, 유린은 잠깐 동안 시윤의 병실 문을 보며 웃은 후 유유히 복도를 걸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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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 힐데랑 미나를 혐성으로 묘사한 느낌....짤은 저렇게 그렸지만 아마 나중에 제대로 그려올 수도 있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