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시그마가 내게 취하는 태도가 이상하다.

항상 웃으며 아빠 아빠 하며 따르던 애가,

별 것도 아닌 일을 하나하나 보고하며 자랑하던 애가,

지나가다 마주치기라도 하면 함박웃음 지으며 안겨오던 애가

요즘은 타이탄이나 로이 버넷과만 붙어 다니고 

이젠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않는다. 그저 미래전략실 문을 꽝 닫으며

방에 틀어 박힐 뿐.

이것 참..  타이탄은 그렇다 치고, 로이 버넷과 붙어다니는 것은 도통 마음이

놓이질 않는다. 녀석은 청소를 잘하고 보기보다는 바른생활 청년이지만

근본적으로 금발 양아치의 관상, 그런 놈팡이와 딸이

가까이 하는 것을 달가워 하는 아버지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모종의 사유로 금발만 보면 욕지기가 치밀어 오른다.


내가 시그마의 친아빠는 아지니만, 딸처럼 생각했고 그 아이도

나를 아빠처럼 생각하는 관계였기에 허탈함은 강하게 나를 옥죄였다.

하긴, 그 아이가 나를 진짜 아빠라고 생각하기는 했던 걸까.


늘어나는 업무, 도박수 튜닝의 실패, 채용에서의 실패, 지부에서 채용권만

성공하고 불합리한 난이도의 격무에 지쳐있었다. 특히 다른 회사와 

경쟁에서 혜성같이 나타나 내 사원들로 하여금 나를 치게 만드는 

금발 헤드헌터 스나이퍼년덕분에 나날이 스트레스를 받아가던 요즘.

그아이의 변화는 나를 좀 더 힘들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데이터를 실수로 시그마의 저장공간에 저장한 모양이다.

그 아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어울리지 않는 화를 냈다.


"아, 진짜! 누누이 말했지! 아빠 데이터랑 내 데이터랑 섞지 말랬잖아!"

"아,, 미안.. 하다, 우리 딸. 아빠가 실수 했나봐."

"몰라! 아빠랑 말 안해!"


그 말을 마지막으로 시그마는 또 미래전략실에 틀어박혀 버렸다.


"웃기지도 않는군요. 깡통이 사춘기 소프트웨어로 업데이트나 했답니까?

꼭 옷 같이 빨았다고  화내는 꼴불견 딸내미 같군요."


원래부터 시그마를 곱게 보지 않던 부사장이 비아냥 거렸다.

나는 살짝 화가 났다. 내 편을 들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물론 나도 시그마에게 화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게 내 딸에게 욕을 해도 된다는 정당성을 부여하진 않지.

나는 아무 대꾸없이 서점에가서, 녀석이 읽고 싶어하 했던, 

부사장 눈치에 사지 못했던 동화책 전집을 샀다.

그 아이가 기뻐해주면 좋을 텐데.


회사로 돌아가 미래전략실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연봉협상때마다 장난스레 신부나 공주님 대사를 치던

시그마의 모습이 생각나 조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딸을 이기는 부모는 없지. 내가 사과해야지.

나는 노크 후 한참을 기다리다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시그마, 우리 딸. 아빠가 미안해. 읽고 싶어하던 동화책 사왔.."

"아빠, 누가 허락도 없이 들어오래? 나가! 얼른 나가!"


나는 당황하여 날뛰는 시그마 뒤로 책상밑에 삐져나와있던 보라색 셔츠깃과

금발을 봐버렸고, 이성의 끈이 끊어지고 말았다.


***


지옥같은 회사에서 벗어나, 농촌생활을 즐기게 된 지 3일쯤 됐나,

여기는 농기구 튜닝실패도, 경쟁도, 내 농작물과 가축을 NTR해가는

빌어먹을 금발년도 없다.

...

하지만 나만 바라보던 사원들도 없다.

나를 지켜주겠다던, 패퇴할때 자신은 버리고 먼저 가라던 저격수도,

나를 선생님이라 부르며 따르던 흰 토끼도,

자기야 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자신만큼 예쁜 화단을 가꾸던 여인도,

바라만 보고있어도 피로가 풀리는 미소를 지어주던 딸아이도 없다.


내가 여기에 있는 게 맞는 걸까?

내가 버리고 온 회사, 직급, 사원, 그리고 딸아이.

이렇게 사라질 일은 아니었다. 나는 들고 있던 괭이를 내팽개치고

회사로 돌아갔다.


회사는, 돌아가고 있었다. 이터니움이 꽉 차있었고, 열렸던 다이브가 닫혀있었고,

파견에서 복귀했지만 보고를 끝마치지 못한 지부장과 파견소대를 제외하면.

나는 서둘러 보고를 받고 시그마를 찾아다녔다. 그 아이가 상처받지 않았어야

하는데. 나는 왜 어른스럽지 못하게 사라지고 만걸까. 


그 아이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시그마는 보이지 않았다.

타이탄이 쉬고있는 격납고에도, 금발 놈팡이와도 함께하고 있지 않았다.

나는 허탈하게, 사장실로 들어갔다.


사장실 책상위에는 -.

라고 적힌 카드와, 받을 사람을 잃고 시들어버린 꽃다발, 

오래되어 반쯤 무너진 케이크가 놓여있었다.

사장실 구석에는 웅크린채 훌쩍거리는, 흐릿한 시그마가 있었다,

나는 황급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내가 미안해, 미안해..


"아빠... 아빠야..?"

"응, 우리 딸, 아빠 왔어. 착하지, 울지마렴."

"아빠 놀래켜주려고 몰래 준비했는데.. 아빠가 사라져서..

로이 오빠랑 케이크도 구웠는데 ... 아빠가 없어져서."


시그마는 말을 채 마치지 못했고 홀로그램이 지지직 거렸다.


"아빠, 화내서 미안해, 나는 놀래켜주려고..시그마 때문에 화났어?"

"아니, 아빠는 화 하나도 안났어, 잠시 쉬고 온 거란다.

말도 안하고 사라져서 미안해.. 우리 딸, 많이 힘들었지..?

"아빠 와서.. 이제 괜찮아! 근데 케이크.. 꽃다발.. "


나는 카드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시그마를 따스하게 안아주었다.


"아빠는 카드만으로도 충분해. 이제 시그마를 떠나지 않을게. 

그러면 또 케익 만들어줄거지?"

"응! 더 맛있고 예쁘게 만들어줄게!"


시그마는 다시 한번, 내가 가장 사랑했던 함박웃음을 지어보인다.

"시그마는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좋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