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윤아, 맛있냐. 스승님이 피땀흘려 번 돈으로 먹는 밥."

"스승님, 벌써 취하셨나요? 이 손가락이 몇개로 보이세요?"

"이 망할 놈이 스승님한테 중지 손가락을 피네? 아직 한잔도

채 다 안마셔서 멀쩡하다."

"...검지입니다. 취하셨네요 스승님."


적당히 포만감을 느낀 두 사람은 평소처럼 시덥잖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보통 질렸다는 듯이 찡그린 힐데로 귀결됐지만, 찡그림 속에 미세하게 

제자를 귀엽게 여기는 마음이 녹아 있었고 주시윤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먹는 거 좋아하는 신입도 데리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주시윤의 얼굴에 살짝 불편한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힐데는 남은

음식들을 아까워하느라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하하, 네. 미나 양도 이런 거라면 사족을 못 쓰긴 하죠."

"컵라면만 주로 먹는 것 같던데, 다음엔 신경 좀 써줘야 겠군."

"하하하... 소대장 다운 모습도 보일 줄 아셨군요."

"섭섭하군. 저번에 먹은 야식은 누구 카드로 샀는지 까먹은건가?"

"네, 스승님의 카드였죠. 저는 중간에 끼어든 거지만."

"후후, 맞아. 참 기가 막히게 야식먹는 낌새는 잘 알아채더군."


슬슬 취기가 힐데의 몸을 데웠다. 기분 좋은 나른함에 그녀는 

의자에 드러눕듯이 늘어졌다. 


"시윤아."

"네, 스승님."

"너도 아스모데우스가 불러서 온 거냐?"


주시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음, 아니요. 저는 입술에 피어싱을 하고 몸을 마구 흔들거리는 좀

이상하게 생긴 사람에게 권유받았습니다."

'도마를 시켰구나. 불쌍한 녀석같으니.'

"너네 스승은 이상한 사람 말 듣지 말라고 안가르치든?"

"얘기를 나눠보니 의외로 제대로 된 사람이었습니다. 공통점도

많았구요. 뭐.. 생계를 유지 하기 힘들다던가, 괴팍한 여상사를 

두고 있다는 점이라던가. 하하."

"이수연이 괴팍하긴 하지. 뭐라고 꼬시더냐?"

"'너의 취향을 알고 있다, 운명의 상대를 만날 것이다'랬죠, 아마."


힐데는 성대하게 웃참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푸하하! 시윤아, 날 골탕먹이려는 아스모데우스의 농간에 

조연으로 열연해 버렸구나! 내가 나와서 미안해서 어쩌냐. 

맛있는 밥이나 맘껏 먹고 다 잊자!"


주시윤은 말없이 빙그레 웃었다.

'글쎄요, 전 아직 제가 주연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승님.'

"제자야, 한 잔 더 따라보거라."

"네, 맘껏 드시죠, 스승님."

벌컥, 벌컥.

"캬, 물처럼 넘어가는구만. 술술 넘어가는 거 보니 술 맞지? 껄껄"

'물이니까요, 스승님.'


주시윤은 힐데가 어느정도 취한 것 같자 와인 대신 물을 따르기 시작했다. 완전히 취해버리면 에스코트하기 곤란해서 였지만,

물인줄도 모르고 마시면서 좋아하는 스승이 아이같이 귀여워서

미소만 흘러나왔다. 재미없는 아재개그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아

아무래도 적당히 취한 것 같으니, 스승의 흑역사는 그만 수집(촬영)하고 

집으로 모셔다 드릴 때가 된 듯 했다.


"시윤아, 나 오늘 7잔 마셨다, 신기록이지?"

'즉 물을 5잔이나 드셨으니, 뱃속이 물로 찰랑찰랑하시겠군요.'


주시윤은 뿌듯해하는 스승에게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스승님, 많이 드셨습니다. 슬슬 가실까요, 여왕님?"


힐데는 주시윤이 내민 손에 정중하게 자신의 작은 손을 올렸다.


"훗, 내가 맞춰주지. 네, 가시죠. 왕자님."


***


하지만 주시윤의 신사다운 에스코트는 그렇게 멀리 가지 못했다.

돌연 힐데가 구두때문에 발이 아프다고 뻗댄 탓이다.


"아, 아프다. 못 걷겠다."

"나 참, 스승님 애도 아니고 길 한복판에서 왜 이러세요? 놓고 갑니다?"

"아, 업히고 싶다. 못 걷겠다."


주시윤은 떼쓰는 스승의 낯선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 항상

냉철하고 엄격하던 그녀가 맞는지, 그냥 어린 소녀가 아닐지.


"졌습니다. 자요, 업히시죠."


힐데는 폴짝뛰어 주시윤의 등에 업혔다. 힐데에게선 와인 냄새와

향수냄새, 화장품 냄새가 섞인 좋은 체취가 은은하게 풍겼다.

말캉.

주시윤은 여자를 업어본 것이 처음이라, 그만 힐데의 엉덩이에 

손을 얹고 주무르고 말았다.


"이놈 제자야, 손버릇이 참 고약하구나?"


힐데는 주시윤의 목을 감은 팔을 더욱 조이며 말했다. 덕분에

그녀의 봉긋한 알가슴이(패드로 1차 방어선이 펼쳐져 있긴하지만)

주시윤의 등에 밀착되는 결과로 이어졌고 주시윤은 평소의

능글맞은 그답지 않게 허둥대고 말았다. 그런 제자의 모습에

힐데는 쿡쿡거리며 웃고 나서, 성장한 제자의 등에 얼굴을 기댔다.


"정말, 많이 컸구나. 내가 해 준건 없는데.. 잘 커줘서 고맙다."

"하하, 스승님 덕분이죠, 한 3푼정도는."

"3할도 아닌거냐. 쪼잔하네."


주시윤의 등에 업힌 힐데는 무척이나 가벼웠다. 하지만 이 깃털처럼 가벼운

여성이 모두의 선봉에서면 무엇보다도 든든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주시윤은 새삼 놀랐다. 어릴 때 커보였던 스승이 이렇게 자그마한

인간이라는 것에 오만감이 교차했다.


"시윤아."


정적을 깨고 힐데가 물었다.


"오늘, 요리 먹는 법이나 예절 같은 게 뛰어나더구나. 많이 겪었던 거냐?"

"하하... 안 듣는게 나으실텐데."

"큭큭, 뭐냐. 숨겨둔 여자친구랑 가봤다거나 그런건가?"

"..어릴 때 부모님이랑 한 번 가본 레스토랑에서, 어머니께 배운게 

잊혀지지가 않아서.. 이상하죠. 어릴 때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었나 봐요."


힐데는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에 걸려 뱉을 수 없었다. 이 어린 것이,

나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가 더 잘해줬어야 했는데. 내가 더. 

차라리 술이라도 취해있으면 더 나았을까, 이상하게 오늘따라

마신 양에 비해 정신이 말짱하다. 도움이 안되는구나 술이란 놈은.


"하하, 이대로 고려장 해도 괜찮겠습니까, 스승님?"

"해 봐라, 아득바득 돌아와서 네 눈앞에 얼굴을 들이밀어줄테니."


보름달이 휘영청 뜬 밤하늘은 구름 한점없이 맑았고, 서로에게

솔직하지 못한 외로운 늑대 한쌍은 오늘도 마음을 전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