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 관리부장은 어떠냐? 예쁘고 참해서 좋은데."

"주사를 감당못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분은 저라면 치를 떨걸요."

"클로에는? 4차원이긴하지만 귀여운 매력이 있는 아이다."

"그 분도 절 싫어할 겁니다. 제가 약점을 많이 쥐고있는 터라."


그 외에도 여러 후보자들이 힐데의 입을 통해 거론됐지만

주시윤은 비슷비슷한 이유로 그것들을 거절했다. 


"제자야, 네 말대로라면 여성들에게 너의 호감도는 바닥을 찍겠구나."

"아마 그럴 겁니다. 절 좋게 봐주는 사람이 흔친 않죠."

"다 널 잘 몰라서 그러는 거야."


주시윤은 힐데가 툭 던진 말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게 됐다. 

기대해도 좋은 걸까? 이윽고 힐데는 이제야 본론을 말하게 됐다는 듯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신입은 어때?"


주시윤의 억장이 무너졌다. 여기서 또 미나양을?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스승님은 어째서, 미나 양만 그렇게 싸고 도시는 겁니까? 아까

밥먹을 때도 신입, 신입. 지금도 ..."

"내가 뭘 잘못 했나? 둘이 나이도 비슷하고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미나 양은, 제 타입이 아닙니다."


주시윤은 딱잘라서 거절했다. 그 단호함에 힐데도 살짝 기가 죽을

정도로. 기분탓일까, 주시윤은 스승이 다소 울적하게 보였다.


"까다롭기는.. 그럼 네 타입은 누군데?"

"스승님."

"응?"


주시윤은 뭐라 말하려다가 그만뒀다.


"아닙니다."


대답은 이미 했다고 말하고 싶었다. 내 타입은 당신이라고. 

술이 부족했는지 거기까진 용기가 나지 않았다. 주시윤 특유의

능청스러움은 애석하게도 이런 방면에선 발휘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구나."


주시윤은 재빨리 힐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쓸데없이 감만 좋아서.


"스승님에게 털어놔봐라. 다리를 놓아줄테니."

"뭔가요, 그 중매쟁이 같은 멘트는.. 그리고 제가 알기론 스승님의

평판또한 저와 비견될정도로 우수합니다."

"뭐?! 내 평판이 그정도냐?"


힐데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입 걸걸하고 다소 꼰대스러운데다

씀씀이 쪼잔하며 자주 사라지는 상관이 평판이 좋을리가. 

아, 생각해보니 난 어쩌다가 이런 사람을 좋아하게 된걸까. 

주시윤은 실소를 터뜨렸다. 


"아~ 내 사랑스런 제자가 인기가 없다니, 너무 안타까운데."


힐데는 맥주 한캔을 더 따며 한탄했다.


"스승님은 어떤 타입을 좋아하세요?"

"나? 남자답고 키크고 잘생긴 남자."

"와.. 10대 취향속물.."

"뭐, 꼽냐. 사실 이때까지 혼자 지내보니까,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남자가 좋은 것 같다."


힐데는 아름다운 호박색 눈동자를 내리깔며, 자신의 발끝을 

만지작 거렸다. 그 모습이 꼭 처량한 요정같이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자신에 대해 거짓이 많은 여자를 품어줄 남자는

없겠지. 아무래도 혼자 살다 죽을 운명인가 보다."

"제가 함께 있어드릴게요." 


주시윤은 충동적으로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말을 하고 나니 

속이 후련해졌다. 안타깝게도 힐데는 그런 뜻으로 받아들인 것

같진 않았지만.


"고맙다, 역사 제자밖에없군. 혼자 쓸쓸하게 죽진 않겠네."


여기서 하하, 그렇죠 라고 넘어가면 평생 기회는 없을 것 같았다.

주시윤은 주먹을 불끈 쥐고 한걸음 더 나아갔다.


"하하, 그런 뜻이 아닌데요, 스승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푸웁?!"

"어이쿠!"


힐데가 당황하여 뿜은 맥주를 주시윤이 놀라운 반사신경으로 피해냈다. 

힐데의 백옥같은 얼굴은 홍옥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내가 취해서 잘못들었냐, 시윤아?"

"뭐라고 들으셨는데요?"


자기 페이스를 되찾은 주시윤이 싱글거리며 놀리듯 물었다.


"네가 나를 사..사..."

"사랑한다고요, 스승님."


힐데는 주시윤의 눈을 살폈다. 눈을 비비고 다시 살피고, 스스로의

뺨을 때리고 다시 살폈다. 주시윤 거짓말센서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진실을 말하는 눈으로만 보였다. 이 아이가 미쳤나?

망할 제자는 당황하는 스승이 재밌기라도 한 듯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감상하고 있었다.


"어때요, 이번엔 거짓말, 아니죠?"

"제, 제법이군, 과연 내 제자다. 그 짧은 시간에 약점을 보완하다니.."

"도망만 다니시는 건 스승님과는 안 어울립니다. 대답을 듣고 싶어요."

"너 그 ..스톡홀름 신드롬인가 그거 아니냐고 묻고 싶다."

"첫 만남때부터, 스승님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중간에

방황도 했지만, 결국 돌아오게 되더라구요."

"나, 나는 네 부모님을..."

"알고 있습니다. 십년을 넘게 스스로 묻고 고민하고 내린 결론입니다.

스승님이 어릴 때 밤마다 잠든 절 안고 울면서 사과하신 것도 알고, 

제 부모님을 베고 눈물 흘리시는 것도 봤습니다. 

그리고 사람 마음이 참.. 마음대로 안되더라구요. 하하."


그 말 대로다. 사람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 아들같은 제자라

여가고 있었지만 고백을 받고 나니 마음이 떨리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맹세코 주시윤을 한 번도 그런 눈으로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주시윤이라면 스스로를 속일 필요도, 내숭을 떨 필요도, 나이를

속일 필요도 없었다. 주시윤이 진심이라면 말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사랑해줄 남자아니던가. 힐데는 조금씩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힐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주시윤은 어리고,

나같은 여자보다 더 예쁘고 착한 사람을 만나 행복해져야만 한다.

존재만으로 트라우마를 자극할만한 부모살해자와의 행복이라니,

그건 나만을 위한 일이지, 주시윤을 위한 일이 아니다.

아마 주시윤은 너무 오랜기간 힐데를 알아왔다 보니 그녀만을

이상적으로 여기고 있는 사랑의 열병같은 것을 앓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그녀는, 어쩌면 이제 다시 없을 이해자이자 여전히 

미소짓고 있는 사랑스러운 제자를 거절할 준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