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나하라편 통합 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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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이 밝게 떴으나 깊어가는 비와 호의 밤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완연히 내려앉은 끈적이는 어둠 속을 작은 불빛 하나가 헤치며 나아갔다.

쿄로 향하는 순환도로를 따라 질주하던 불빛의 정체는 작은 험비였다. 

 

차량은 어느 순간 컴컴한 호수 쪽으로 방향을 틀어, 

수호 가문 연합이 급히 설치한 침식지역 경고선을 지나 비포장도로에 접어들었다.

우르르르릉. 낮게 땅울림이 일었다. 흙길을 달리는 차의 덜컹거림과는 확연히 달랐다. 

 

"이건가?"

 

"맞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하야미 사나에가 물음에 긍정했다. 조수석에 앉은 로자리아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헤아렸다. 

 

첫 번째. 나나하라 측에서 전달받은 메세지에 따르면 이제 겨우 첫 매듭이 풀렸다.

봉인은 오행을 엮어 만든 것이었다. 앞으로 네 번의 지진이 지나가면, 뱀이 깨어날 것이다.

 

"당주가 실종된 시간을 따져보면 꽤나 여유있구나."

 

"점점 빨라질 겁니다. 세심하게 연결되어 있는 만큼 매듭 하나가 풀릴 때마다 다른 것들도 약해질테니까요."

 

"그러한가." 

 

히죽 웃었다. 조급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빠듯할수록, 처한 상황이 극적일수록 그녀의 호승심은 더 타올랐다.

 

"언제 도착하지?"

 

"최종 진출지역까지 5분 내입니다. 거기서부터는 저희끼리 돌파해야 합니다."

 

긴급 출동한 토벌조들은 꽤 오랜시간 교전했으나 교두보를 뚫는것이 한계였다. 

그들은 침식체들은 일정 구역 이상 확산되지 않고 있다고 보고했다.

적들이 외부에서의 공격을 막기 위해 집결해 있다는 뜻이었다.

 

"봉인지는 단순한 신사인가?"

 

"폭풍신. 스사노오를 모신 신사입니다. 대대로 나나하라 가문에서 봉헌과 관리를 맡아왔습니다만, 

제가 알기로 보통의 신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뱀의 모가지를 친 신을 모셨단 말이지. 봉인지로 그럴싸한 장소로구나."

 

"신사 자체는 아마 봉인지로 통하는 입구일 겁니다. 적이 이미 침투하면서 강제로 열었을 것이 뻔하니,

입구를 찾을 수고는 덜었다고 봐도 좋겠죠."


"흐음. 알겠다. 잠깐 뒤쪽 상태좀 보고 오마."

 

"...나으리."

 

"으응?"

 

"추태를 보여드린 점. 죄송했습니다."

 

"뭐 됐다. 어디, 나도 두들겨 팬 사과라도 해 줄까?"

 

"아뇨. 다만 하나만 약속해주십시오."

 

"무어냐?"

 

"당신께서 말씀하신대로, 저 나름대로 일을 벌린 책임을 지겠습니다. 제 목숨은 얼마든지 던지겠습니다. 

그러나, 당주님과 치후유님은 다릅니다."

 

운전중인 사나에는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뒷자리에 들릴까 작게 속삭였지만 어조는 단호하기 그지없었다. 

 

"당주님을 구하는 것은 우리의 공통된 목적이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치후유님은 다르죠. 나으리께는 가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래선 안 됩니다. 

그 분을 버리는 장기말로 쓰시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면 믿겠느냐?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텐데."

 

"믿는 수밖에요. 이미 한 배에 올라탔고, 우리는 전우였으니까요."

 

전우라. 과거의 그녀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울림이었다. 

정확히는 싫은 쪽에 가까웠다. 로자리아는 자신을 묶는 번잡스러운 속박들을 싫어했다. 이미 충분히 굵은 목줄을 차고 있었다.

 

그러나 관객과 배우의 차이일까. 지금은 생각보다 불쾌하지 않았다.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려 한 번 쓸어주었다. 대답 대신이었다.

 

"길이 거칠구나. 안전운전하거라."

 

안전벨트를 풀고 몸을 꼼지락거리며 움직였다. 그녀의 자그마한 체구덕에 쉽게 뒷칸으로 넘어오기 쉬웠다. 

뒷좌석의 두 사람은 다가올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투약이 끝난 나나하라 치후유는 팔과 다리를 쭉쭉 뻗어보고 있었고, 유미나는 총기 상태를 점검 중이었다.

 

"좀 어떤가. 호위?"

 

"조금 뻐근하군요. 하지만 싸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명심해 둬라. 그건 치료가 아니라 일종의 도핑이야. 몸을 속이는 거지. 분명히 부작용은 있을거다."

 

"각오한 바입니다."

 

자칭 올리비아 박인 코핀 컴퍼니의 주치의, 박정자 교수가 만든 전투지속용 약물, AID-GAP01은 강력한 효과를 발휘했다. 

카운터가 작전 수행을 지속하기 힘든 부상을 입었을 때에 상응하는, 

긴급상황에만 소대장의 판단으로 투약한다는 조건 하에 조제된 약물은 각성제며 진통제를 포함한 온갖 약들의 집합체였다.

본인이 사용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테라사이드 이후 알트 소대쪽에서 제출했던 보고서에 의하면 단기간이라도 약효는 확실했다.

 

적어도 3시간 정도는, 나나하라 치후유는 부상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만전에 가까운 상태로 싸울 수 있었다.

바꿔말하면 이 작전의 타임 리미트도 그 정도라는 얘기였다. 어차피 소수 전력을 이용한 강습이기 때문에 길어질 작전도 아니었다.

 

그 외에도 정제 이터니움을 이용한 충전제도 넉넉히 준비했다. 

치후유의 CRF는 고침식 환경에서 오래 버티기 힘들었기 때문에 여분이 필요했다.

그녀가 착용한 방호코트 안에 즉시 워치를 회복시켜줄 이터니움 카트리지들이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좋아. 본인 몸은 알아서 간수하라고. 그대를 걱정하는 사람이 있으니."

 

턱으로 운전석을 가리키자 치후유는 그저 씩 웃었다. 

흥. 저택에서 질질 짜는 소리 다 들었는데 이제 와서 늠름한 척 하기는. 

핀잔이 마려웠으나 그럴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로자리아는 운전석까지 들리도록 목소리를 높였다.

 

"자. 작전을 확인하자. 우선 신사 외부를 둘러싼 침식체부터 화력을 집중해 격멸한 뒤 봉인지로 돌입이다. 

길을 여는 건 내가 맡겠다. 예상되는 강적은 최소 둘. 저택에 침입한 침식체와 우리가 조우했던 그림자형 침식체다."

 

시선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운전중인 사나에도 귀는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호위. 저택을 공격한 놈은 독을 쓴다고 했지."

 

"맞습니다."

 

"중독되는 조건은?"

 

"확실치 않으나 대부분의 공격이 중독성을 띈다고 생각됩니다. 또한 체액도 독액으로 의심됩니다."

 

"공기 감염도 가능하고?"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낫습니다."

 

"좋다. 일단 가진 정보만으로 종합해 볼 때, 놈과 근접전은 어울리지 않으니 나와 사나에가 상대한다. 

맹랑이와 호위는 그림자 쪽을 맡는다. 가장 중요한 목표는 당주의 확보와 무사귀환이니 적극적 교전보다는 탐색을 우선시하자고.

모두 이해했겠지."

 

두 사람 모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작전 자체는 단순하기 그지없었다. 

원래부터 침식전은 복잡하고 섬세한 작전이 요구되지 않았다.


변수라면, 적이 한번에 얼마나 많은 숫자를 동원하는지.

그리고 제 시간에 한국에서 지원이 도착할 수 있는지. 두 가지였다. 

 

마지막 통신에서 나유빈이 이끄는 코핀함은 대한해협 위에 있었다. 

물리적 거리야 함선의 속도를 생각하면 순식간이다. 발목이 잡힌 이유는 진입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허가 때문이었다.


초국가적 기관인 관리국의 인증을 받은 정식 태스크포스임에도 불구하고 사후보고식으로 넘어갈 수가 없다니. 어이가 없었다.

과연 거의 망할뻔한 나라답다. 긴급 침식재난이 벌어진 상황임에도 미적대는 꼴이라.

 

뭐, 도착하지 못하면 어떤가. 내가 있는데. 

 

온갖 조건을 따져가며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다. 수가 얼마건 한낱 벌레들일 뿐. 태워버리면 그만이다. 

로자리아는 손가락을 까딱여 유미나를 옆으로 불렀다. 작전에 들어가기 전에 정리해두어야 할 일이 하나 더 남았다.

 

"묻지 않는구나."

 

"뭐가?"

 

"주시윤을 두고 온 이유 말이다."

 

"아, 사실 불만이지. 부상자인 치후유까지 끌고왔는데 선배는 남겼다니. 그래도, 소대장이 결정한 거라면 이유가 있는거지?"

 

"호오?"

 

"뭐냐, 그 반응."

 

"아니, 쉽게 수긍하네. 더 시끄럽게 떠들줄 알았다만."

 

"따지고싶은 건 없지는 않은데.. 선배가 남은 거. 당주 구출보다 중요한 일이야?"

 

"글쎄 어떨까. 필요한 일이긴 했다만."

 

"내가 사정을 알아선 안 되는 거고?"

 

"아니. 하지만 내가 말해줄 거리는 아니다. 주시윤이 직접 말한다면 모를까."

 

로자리아는 이제 너무 멀어진 저택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습게도 적을 눈앞에 둔 그녀의 신경은 그쪽에 더 쏠려있었다.


사실 그녀도 짐작밖에 하지 못했다. 그 도망치기 좋아하는 주시윤이 고집을 부린 이유.

제자 중 가장 사납게 싸우는, 진짜 늑대에 가까운 여자. 맹수인 이수연을 상대로 주시윤이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용혈의 힘을 쓴다면, 그래도 무리다. 애초에 쓰지도 않을 것이고. 

그렇다면 승패는 정해져 있었다. 단지 시간 문제에 불과했다.

주시윤이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을까.

 

영악한 녀석이니 분명 뭐라도 생각해 두었을 것이다.

물론 준비한 수가 실패하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이수연이 주시윤을 죽이지는 않겠으나, 

피가 끓어오르면 과격해지는 그녀라면 무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만에 하나 혹시라도, 주시윤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한다면.

 

거기까지 가정이 도달하자 끔찍한 상상이 떠올랐다. 주먹을 꽉 쥐었다. 

그녀에게 후회는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불길은 쓸고 지나간 자리에 항상 잿가루밖에 남기지 않았다. 건질 것 없는 후회는 무의미했다. 

복잡한 마음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동안 유미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말해주는 거구나. 그럼 됐어."

 

"응? 충분한 것이냐?"

 

"선배는 해야 할 때는 하는사람이니까. 이럴 때 빠지는건 이유가 있는거잖아. 그래서 소대장도 허락했을거고. 선밸 믿는 거잖아?"

 

"믿어? 내가?"

 

신뢰 역시 퍽 생소한 감정이었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으나 로자리아 본인이 품기엔 부적절했다. 

제자를 키우고 전대를 만들었던 것은 전부 목적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주시윤과 유미나가 변했듯, 그녀 역시 마찬가지로 달라졌다. 

관객의 입장에서 벗어난 순간부터, 명확한 대본이 없는 이 극의 등장인물이 된 그때부터 매 순간 조금씩 변화해갔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옳게 가는 방향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로자리아가 접어든 이 길은 낯설었다. 걸음걸이가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타오르고 남은 잿더미들 위에 쌓아올린 옥좌에 오롯이 앉아,

발버둥치던 사람들을 비웃던 과거에 비하면 자꾸만 약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가. 주시윤을 믿어보고 싶었나.

이래서는 그녀가 유흥거리로 즐겼던 나약한 것들과 다를 바 없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가.

꼴이 퍽 우스웠다. 그래도 싫지만은 않았다.

 

"너도 짬을 좀 먹었구나."

 

"그래? 뭐, 나도 이제 꽤 프로답긴 하지?"

 

"푸흡."

 

"방금 비웃었어!"

 

"그렇다만. 어쩔테냐?"

 

"...됐다. 됐어. 힘만 세면 단가. 그보다 소대장. 선배가 걱정돼?"

 

"뭐, 뭐라? 내가 주시윤을?"

 

"그게, 그런 얼굴인걸. 소대장."

 

"이익, 헛소리 말거라!"

 

괜히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다른 방식으로 반격에 성공해 웃은 유미나가 그녀의 작은 어깨를 감싸쥐었다. 

 

"힘내자. 처리하구 다 같이 돌아가자고."

 

몇 마디 말을 우물거리던 로자리아는 그냥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애송이가 도움이 되다니.

 

"흥. 너나 몸뚱이 간수 잘 하거라. 나야 늘 완벽하니까."

 

"여러분. 저지선을 통과했습니다."

 

사나에가 딱딱하게 말했다. 사실 그녀가 따로 말해주지 않아도 다들 알 수 있었다. 모두의 얼굴에 날카로움이 깃들었다.

손목에 달린 워치들이 곧 시끄러운 경보음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고농도의 침식 위험지대로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 *

 

차량에서 내려 이동하는 중, 초계목적으로 나와 있었던 침식체 몇을 쉽게 제거했다. 

숲을 끼고 호숫가를 내려다보는 야트막한 언덕에 세워진 신사는 새까맣게 메운 침식체들의 산이 되어 있었다. 

 

대충 숫자만 헤아려도 수백은 넘었다.

이곳이 신사였음을 알게 해주는 표지는 바글거리는 침식체들 사이에 외롭게 솟은 토리이 뿐이었다.

 

유미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전투 경험이 많이 쌓였기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적을 한번에 상대한 적은 손에 꼽았다.

옆에 선 치후유와 사나에도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전투준비를 마친 로자리아 한 사람만 여유로웠다.

 

"와 씨. 세상에. 이게 다 뭐냐."

 

"저도 이렇게 많은 숫자는 처음 봅니다."

 

"흐응, 겁먹었느냐?"

 

"이거 돌파할 수 있을까?"

 

들끓는 적의의 물결 한 가운데에 인영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사도였다.

가면 속에서 번들거리는 녹색 불빛이 일행을 훑고 지나갔다. 전력으로 부딪혀올거라 여겼지만 고작 넷 뿐이었다.


"이제 멸망은 피할 수 없거늘. 미물들이 발버둥치러 왔구나."

 

"이야, 꼭꼭 숨어있을 줄 알았는데 친절하네. 마중을 다 나왔어?"

 

"뭐가 무서워 너희들을 피해 숨지? 벌레가 무섭다고 피하느냐?"

 

"호오."

 

감히 벌레 취급이라. 로자리아는 한층 짙게 미소를 띄웠다. 오히려 좋았다. 

긴장한 듯 다리를 떠는 유미나를 확 끌어당겨 속삭였다.

 

"맹랑아. 작전을 바꿔야겠다."

 

"응?"

 

"저 침식체가 여기 있다면, 안에 남은 강적은 그림자 하나 뿐이지. 먼저 침투해라. 길을 열어줄테니."

 

"저렇게 숫자가 많은데 되겠어?"

 

"대강 쓸어버릴 수 있다. 여기 저 놈이 있는 이상 신사 안으로 진입하면 나머지는 잔챙이들이다. 너희끼리 돌파할 수 있어."

 

"그림자까지 나와있을 가능성은?"

 

"카드를 다 꺼내놓을 리가 있을까. 그것은 봉인지 안쪽, 당주 옆에 붙여놨을거다. 할 수 있겠느냐?"

 

"좋아. 알겠어. 해야지. "

 

"그래. 호위는?"

 

"저도 준비되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당주만큼 치후유님도 귀한 몸이십니다."

 

"알겠습니다. 사나에도 무운을."

 

넷은 빠르게 의견을 주고받았다. 사도가 따로 퍼뜨리지 않았음에도 독무가 퍼져나오고 있었다. 

발톱을 세운 침식체들은 뛰쳐나갈 타이밍만 기다리면서 으르렁댔다. 어디 뚫고 지나갈 테면 가보라는 것인가.


한 발짝. 앞에 나선 유미나가 숨을 훅 들이켰다. 기가 죽은 모양새였다. 눈으로만 봐도 전력 차이가 절대적이었다. 

 

"근데 소대장. 진짜 가능하긴 해?"

 

"하. 그렇게 여러번 보고도 못 믿는구나. 내가 누구냐?"

 

"드라마 중독자에 생활력 빵점인 폐인?"

 

"뒤질라고, 이게."

 

로자리아는 팔꿈치로 앞선 유미나의 등을 쿡 찍었다. 유미나가 작게 킬킬대며 웃었다. 그녀 나름의 긴장을 풀 방법이겠지.

불길한 보라색을 띄는 안개가 거의 일행의 발치까지 넘실거렸다. 교전까지 초읽기였다. 


자아. 전부. 불사르자.

  

눈동자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전장을 앞둔 마녀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 중 하나였다.

처음부터 최대화력을 쏟아붓는 시간.


"시작하자꾸나!"

 

따악. 경쾌하게 손가락이 튀겨졌다.

 

새카만 어둠에 뒤덮혀있던 밤하늘이 화악 붉게 달아올랐다.

새벽은 아득히 멀었으나 마치 여명을 밝히는 서광과도 같이, 

또는 꽃들이 한번에 화려하게 피어나듯, 송이송이, 허공에 무수한 주홍색 불길들이 타올랐다. 

인류의 적들에게는 아름답게 세공된 사형선고였다.

 

로자리아는 두 손을 활짝 펴, 장엄한 악장을 이끄는 지휘자처럼 그것들을 이끌었다.

대처할 새도 없었다. 바글거리는 침식체들의 위로 압도적인 홍련의 비가 쏟아졌다.

 

맹렬히 퍼붓는 열 광선에 침식체들이 불타올랐다. 한복판에 있던 사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괴성이 시끄럽게 울려퍼졌다. 위협적으로 다가오던 독무는 뜨거운 햇살을 만난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다시 한 번 손가락을 튀겼다. 불꽃 두 줄기가 적들이 쓸려나가 드러난 돌계단을 감싸는 벽을 만들었다.


"이동해!"

 

그녀가 연출한 비현실적인 광경에 굳어져 있던 두 사람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려나갔다. 

운좋게도 화마를 피한 침식체 몇이 덤벼들었다. 번쩍, 칼을 뽑아든 치후유의 일격에 조각났다.

둘은 재빠르게 계단을 뛰어올라 불붙은 신사 안으로 사라졌다.

 

거칠게 손을 털었다. 아낌없이 쏟아부은 능력의 백파이어가 돌아와 저릿했다. 

아무리 규격 외의 힘을 뿜어내는 그녀라고 해도, 클리포트 인자 없이 이런 공격을 여러번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불길 속에서 시커먼 숯검댕이 하나가 벌떡 일어섰다. 허물을 벗듯, 거죽을 안에서 부욱 찢으며 말끔한 사도의 모습이 나타났다.

 

"재미난 재생능력이구나?"

 

"너같은 것이 섞여있는 줄은 몰랐다. 방심했군."

 

"딱히 네 잘못은 아니지. 원래 잡스러운 악역들의 클리셰는 방심이니라. 그보다 두 명이 빠져나갔다만. 순순히 보내도 될까?"

 

"벌레 한 두마리 쯤이야. 안배해 두었다."

 

"호오."

 

호기롭게 웃으며 그녀는 다시 양 손바닥을 쭉 폈다.

 

"네 예쁜 침식체들도 다 태워버렸는데."

 

"잔해들은 또 퍼올리면 그만이다. 주인님을 위해 아낌없이 준비했으니."

 

사도의 말처럼 공간을 찢으며 무수한 침식체들이 쏟아져내렸다. 

처음 떨어진 것들은 로자리아가 만든 불구덩이로 떨어져 괴성을 지르며 타올랐다. 그 위로 침식체가 다시 쏟아지고, 쏟아졌다.


저급한 1종과 2종들이었으나 숫자는 끔찍이도 많았다.

그것들은 자신들을 삼키는 불길을 숫자로 찍어눌렀다. 

혀를 찬 로자리아는 손짓으로 불꽃을 불러들여 둥글게 원으로 만들었다. 


"사나에."

 

"말씀하십시오."

 

"엄호를 맡아라. 뚫고 접근하는 놈들은 다 쏘아 죽여."


"알겠습니다."


몇 걸음 물러난 사나에가 그녀의 무장, 다리미를 장전하며 버티고 섰다. 사격 실력은 제법이니 후방 지원은 맡길만했다.

조금 꼬였으나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상정했던 강적 중 하나가 여기 있다면, 

로자리아의 입장에서는 수고를 덜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바라던 바였다. 일 대 일이었다.


"어이. 궁금한게 있다만?"


답을 돌려주는 대신 사도는 맹독 광선을 날려왔다. 

사뿐히 피하려고 했으나 이상하게 몸의 반응이 느렸다. 광선이 스친 옷깃이 시커멓게 죽어들어갔다. 

독이 지글지글 타오르는 꼴을 본 그녀는 소매를 당겨 찢어냈다.


"은근히 보여주는게 매력인데. 이러면 노출이 과해진단 말이다.

아무튼, 답해줄 생각이 없다면 됐다. 직접 알아보지. 넌 몇 번 태우면 죽을까?"


따악. 또다시 손 위에서 내려진 사형선고가 사도의 몸을 뒤덮었다. 섬광처럼 쏘아진 열광선이 침식체를 불덩이로 만들었다.


"그와아아악!"

 

"흐응. 튼튼한 벌레인걸. 여러번 해보자꾸나."

 

즐거운 비명소리를 들으며, 바로 다음 불꽃을 튀기려던 로자리아가 멈칫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어지럼증이 일었다. 

눈치채지 못했으나 어느새 손 끝이 거무죽죽하게 물들었다.

 

중독됐다고?

 

공기 감염을 넘어서서 직접 공격을 하는 순간 중독되는 종류였나. 거의 저주에 가까운 개념이었다. 

뻔히 보였던 적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이유도 이것이었다. 과연 마왕의 사도인가.

 

"이거 참, 성가신 능력이로구나."

 

"괜찮으십니까. 로자리아 님?!"

 

"다가오지 마라. 맡은 일이나 해!"

 

침착하게 준비한 해독앰플을 주사했다.

어떤 종류의 독인지 파악할 수 없지만 그 박정자 교수가 '만능 해독약'이라고 부르는 만큼 여러가지 독성에 효과가 있었다. 


애초에 인간이 아닌 그녀의 몸에 잘 들을지 확실치는 않았지만,

안 쓰는 것 보다야 낫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독은 그녀에게 아직까지 심각한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형태로 중독이 일어난다면 공격을 교환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적이 재생하는 이상 몸에 독만 축적될 뿐이다. 반복적 공격보다는 그야말로 딱 한 번, 초열을 일으켜 잿더미로 만들어버려야 했다.

도착하지 못한 나유빈이 못내 아쉬웠다. 장비 없이 사용하기엔 조절이 곤란한데. 

 

"기세는 다 어디 갔지! 피하는 꼴이 우습구나 미물아!"


순식간에 다시 회복한 사도가 달려들었다. 공격의 주도권이 완전히 사도 쪽으로 넘어갔다. 

검을 뽑아들어 직접 가해오는 공격은 쳐냈고, 독을 품은 광선들은 불꽃을 일으켜 상쇄했다.

그녀는 수비에 전념하며 조금씩 힘을 끌어올렸다. 


독 때문인지 점점 반응속도가 느려졌다. 광선에 직격되는 것은 피했으나 자잘한 상처가 늘었다.

문득 눈치채면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콜록. 기침에 거무죽죽한 피가 섞여나왔다. 

씁쓸하게 웃었다. 역시 해독제는 쓸모없었네. 


사실 그동안 싸워왔던 초월적인 괴수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닌 상대였다. 

공격도 허접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잡것에게 고작 독 때문에 이렇게 밀리다니. 생소했다.


그러나 오히려 좋았다. 그래. 오히려, 오히려 좋아! 

얼마만에 이렇게 숨이 차는지! 몸을 좀먹어오는 고통은 벅찬 쾌감으로 바뀌었다.

욕지기가 치밀었다. 씨발. 이게 싸움이지.


내내 복잡했던 머리가 깨끗하게 비워졌다. 끓어오르는 호승심과 가학심이 춤을 추었다. 

빼곡히 두 사람을 포위한 독액 공격을 길게 검을 휘둘러 뿜어낸 불길로 지워냈다. 


준비가 끝났다.


"그래. 재롱은 다 떨었니?"


새빨갛게 달아올랐던 눈동자가 휙 반전해 가라앉았다. 시릴정도의 푸른색이었다. 

한계까지 억눌려있던 클리포트 인자의 고삐가 풀려났다.


"자. 천벌을 내려 보실까!"


눈의 색과 같은 시퍼런 창염이 솟아올라 사도의 몸을 덮쳤다.

입만 벙긋거리며 사도는 허우적댔다. 맹렬한 불꽃은 비명을 지를 성대조차도 집어삼켰다. 

잠깐 사이에 사그러들던 불길과는 달리 이번에는 한참을 타올랐다. 


발악처럼 날아든 독액들을 무거운 팔을 들어올려 막아냈다. 사방으로 녹색 독액이 튀었다. 중독이 더 심해질 것 같았다.

마침내 바짝 숯검댕이가 되어버린 사도가 쓰러졌다. 조금 꿈틀대더니 일어나지 않았다. 

거칠게 숨을 토한 로자리아는 칼로 밀어보았다. 텅 비어 알맹이가 없었다. 허물이었다. 


도망쳤나.


이걸로도 죽이지 못한 것은 의외였다. 입술을 깨물었다. 줄행랑 하나는 일품인 뱀의 권속다웠다.

그래도 클리포트 인자를 이용한 불꽃이었으니 치명상을 입혔을 것이다. 이제 따라가기만 하면..

사각에서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드는 침식체가 광선에 피격당해 반으로 갈라졌다. 사나에의 사격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싸우실 수는 있고요?"

 

"그거라면 숨쉬는 것만큼 쉬, 콜록. 컥."


시꺼멓게 죽어버린 피였다. 마왕의 독이 아닌 이상 온 몸에 독이 퍼진다해도 로자리아를 죽일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능력을 사용한 반동과 합쳐져 그녀가 거의 무력화된 것은 사실이었다. 너무 방심했다.

전투의 고양감이 훅 사라지자 전신으로 피로감와 고통이 몰려들었다. 휘청. 다리가 후들거렸다.

"정말 성가시기 그지없구나."


우르르르릉. 지면이 울부짖었다. 두 번째 울림이었다. 주기가 짧아지고 있었다.

처음의 울림은 지진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 것은 그렇게 부를 만도 했다. 


땅의 흔들림을 견디기 힘들어 그녀는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빙빙 돌아 어지러웠다. 

가쁜 호흡이 정돈되자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적의가 느껴졌다.

이마로 흘러내리는 것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식은땀이었다.

아이 씨.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데.


용광로처럼 뿜어냈던 불길이 조금씩 사그러들었다. 남은 침식체들의 괴성이 점점 가까워져왔다. 포위되고 있었다.


"어머나. 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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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자리아가 제 파워를 내면 넘모 쉽게 끝나니까 너프 좀 했음


기존 편보다 분량이 조오금 짧은 이유는 일에 치여서 글이 넘모 안써졋기 때문에.. 하긴 그래도 길구나

8월까진 시리즈 끝내고 싶은데 할 수 잇을지?? 주말에 두편정도 스면 어케 댈거같기두하고....

사실 현생보다도 이나즈마가 나와가지구,,그,,,매카노가,,넘모,,,재미가잇지몹니가,,,?


아모턴 개추 댓글 항상 고맙어! 템포 올려보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