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은한 조명.

 

고풍스러운 실내장식.

 

분위기를 돋우는 클래식 음악.

 

마지막으로 실내를 가득 채우는 씁쓰름한 홍차 향기까지.

 

일반 카페와 다르게 커피를 일절 취급하지 않는문자 그대로 오직 차만을 즐기기 위한 마니아층을 위한 가게다.

 

하지만 전문적으로 차를 즐기는 사람은 소수고손님도 대부분 부유한 자들이다.

 

실제로 내부엔 자신의 부유함을 뽐내는 손님이 대다수였다태연히 웃는 얼굴로 남의 흉을 보는 귀부인들과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고고한 척하는 자들로 가득한 가식적인 공간은 역겨울 정도로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고급스런 분위기에 걸맞지 않은 불청객이 한 명 나타났다.

 

짤랑.

 

여긴 코끝이 아주 찌릿찌릿하네.”

 

가게에 들어서기 무섭게 코끝을 찌르는 차향에 청년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반쯤 흘러내려 콧등 끝자락에 걸친 선글라스와 가슴팍까지 과감히 풀어헤친 단추마지막으로 싸구려 금속 장신구까지누가 봐도 양아치 내지 포주처럼 생긴 청년이 남들에게 들리지 않는 작은 목소리로 투덜댔다.

 

홍차 폭탄은 뭐가 좋다고 이런 델 약속 장소로 잡는담.”

 

푸념은 자신의 상관인제멋대로인 아가씨를 향한 것이었다뒷골목 출신답게 그가 짜증을 내자 선뜻 접근하기 어려운 사나운 기세가 내뿜어지고웬만한 진상도 다 상대해봤던 숙달된 종업원조차 그와 함부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모든 시선이 주변 배경과 동화되지 않는 이질적인 손님청년에게 집중된다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자연스럽게 사람들은 청년에 대한 주제로 웅성거림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왜들 이렇게 타인에게 관심이 많으실까.”

 

쓸데없이 좋은 청력을 원망하며 혀를 찬다.

 

자기 몸 하나 간수하기도 힘든 세상인데 참으로 오지랖들이 넓다.

 

막상 저런 인간들이 도박장에 들어서면 속임수에 놀아나 머리부터 발끝까지 싹 다 털린다며 냉소를 머금는다.

 

저렇게 남에게 신경 쓸 시간과 여유가 있으면 눈앞에서 속임수를 거는 딜러의 손놀림부터 알아채라고마구 소리치고 싶은 심정이다.

 

사람이 말한다고 들으면 세상에 전쟁은 안 일어났지.”

 

그는 자신의 금발을 잔뜩 헝클어놓으며 카페 안을 가로질렀다주변의 쑥덕거림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 뻔뻔한 태도였다.

 

당당한 발걸음이 향하는 곳은 방문하는 손님들 중에서도 VIP에게만 내준다는 가장 깊숙한 곳청년 자신이 생각해도 본인과는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는 장소였다.

 

하지만 그의 상사는 구태여 이런 곳에 그를 불러냈다.

 

진짜 악취미라니깐.”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 속에서청년이 남몰래 이죽거렸다.

 

각도에 따라 상석에 앉은 손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구석 자리주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반대편에 앉는 사람의 모습은 같은 VIP 이용객이라면 훤히 보이는 노골적인 디자인.

 

최근제자 하나 들였다가 그 상관인 메이드장으로부터 쓸데없는 지식을 이것저것 주입받은 청년이 피식 웃으며 인기척이 느껴지는 테이블로 향한다.

 

그곳엔 선객이 있었다청년과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젊은 여인이었다.

 

나 왔다홍차 폭탄.”

 

청년의 부름에 홀로 홍차를 홀짝이던 여성이 슬며시 고갤 들었다.

 

늦었군요.”

 

절벽 위의 한 떨기 꽃 마냥 가녀린 모습과 다르게옅은 분홍빛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누가 들어도 짜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침 그 모습이 방금 자신이 부린 짜증과 비슷해 보여서 청년이 내심 키득거렸다몇 달 정도 사소한 걸로 처맞으면서 일하다보니 그세 닮기라도 했나보다.

 

미안한데이게 최대한 빠르게 온 거라고.”

그야 그러시겠죠.”

 

매번 드는 생각이지만눈앞의 여인은 느긋하고 우아한 겉모습과 달리 급한 성질이 흠이다대책 없이 즉흥적인 행동력도 문제지만가장 큰 건 역시 저 성질머리다.

 

저 왈가닥에게 맞춰준다고 총알택시까지 타고 최대한 빠르게 달려온 게 내심 후회되는 그였다.

 

차라리 한참 기다리게 할 걸 그랬다후환이 두려워 감히 시도는 못하겠지만.

 

여기서 택시비 내달라고 하면 나이프부터 던지겠지?’

 

다행히 그는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남자다정직하지만구태여 스스로 맞을 짓을 찾아서 하는 바보는 아니었다.

 

이 동네는 툭하면 사고가 터져서 길이 막힌다고좀 봐줘라.”

저도 천재지변까지 뭐라 할 생각은 없어요.”

 

그렇게 말하는 주제에 상석의 주인은 찻잔을 입가로 나르던 손을 멈추고 싸늘한 눈초리를 흘렸다누가 봐도 불만이 가득한 얼굴이다.

 

똑바로 눈을 마주치자 투명한 연둣빛 녹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친다.

 

당당한 줄 알았던 마음가짐과 달리 표정은 조금 굳어 있었다흘러내린 선글라스를 고쳐 쓰고그는 조금 더 뻔뻔히 나가기로 했다.

 

그러게 누가 갑자기 호출하래?”

 

금발의 청년로이 버넷은 괜한 허세를 부리며 껄렁한 자세로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찬가지로 허세의 일환으로 그는 자리에 앉기 무섭게 메뉴판부터 훑었다하지만 원하는 음료는 메뉴판에 없었고어째서 여긴 커피가 없냐며 불평하다 VIP석에 비치된 냉수를 컵에 따랐다.

 

여기 물맛 좋네안 그러냐홍차 폭탄?”

 

천박한 행동거지에 그녀의 곱게 쳐진 눈썹이 작게 씰룩인다.

 

사실부른 측도 반쯤 억지를 부렸으니 마냥 잘못이 없는 건 아니었다그녀도 자신의 요구가 얼마나 잘못됐는지누구보다도 잘 인지하고 있었다.

 

후우천박하게 굴지 마세요물벼룩.”

 

하지만 지각한 쪽이 저리도 뻔뻔하게 나오니미안한 마음도 쏙 들어가 버린다.

 

여긴 차 전문점이랍니다예의 없게 굴지 마시고 차라리 홍차를 주문하세요마침 제가 적당한 걸 추천해드리죠.”

됐어추천은 무슨내가 너한테 한두 번 당하냐?”

 

로이가 손사래까지 치며 그녀의 추천을 극구 거부했다순진하게 그녀가 추천한 홍차를 맛보았다가 쓴맛을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영국 신사답지 못한 대답이네요.”

 

거만한 부하에게 한 방 먹인 그녀가 후후 웃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기가 죽은 그의 모습은 꽤 볼만했다자신도 몰랐던 숨겨진 가학성을 끌어내는 맛이 존재했다특히 아무리 굴려도 굴하지 않고 우뚝 서는 끈기와 노력은 그를 저평가하는 그녀가 드물게 고평가하는 부분이다.

 

대놓고 날 골탕 먹이려는 녀석에게 당해줄 의리는 없다고.”

 

자신이 무슨 일을 당할지 아는데굳이 불구덩이 속으로 몸을 던지는 것만큼 미련한 짓도 없다멀리서 뒤통수를 노리는 저격수라면 몰라도면전에서 총을 겨누는 사람 정도야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그였다.

 

게다가 난 신사보단 양아치에 가깝잖아젠틀맨이 아니라 훌리건이라고영국 신사 운운은 라이언 영감에게나 해.”

방금 발언은 돌아가신 버넷 경에게 꼭 들려드리고 싶네요현역 시절이라면 아마 당신을 두들겨 패서라도 교육했을 테죠.”

나로서는 우리 할배의 악랄한 모습이 도통 상상이 안 가는데 말이지.”

 

로이가 턱을 긁적였다.

 

여전히 로이 안에서 그의 할아버지는 마왕으로부터 세상을 지키는 비밀 요원이 아니라허구한 날 유유자적한 분위기 속에서 낚시를 즐기는 평범한 영감탱이였다.

 

비록 세월이 흘러 기억에 마모가 생기긴 했지만특유의 온화한 분위기 속에서 날카로운 전사의 모습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가 눈을 치뜬 채 로이를 바라봤다주제를 모르는 물벼룩이긴 하지만버넷 경을 소중히 다루는 마음가짐은 기특했다.

 

좋아요버넷 경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좀 더 나누도록 하죠.”

할배의 옛 이야기는 굳이 알고 싶지 않거든?”

 

영감에 관한 추억은 추억으로만 남겨두고 싶은 로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이 조직은 죄다 우리 영감의 영웅담을 늘어놓기 바쁜지.”

 

로이가 기어가는 목소리로 짧게 푸념했다.

 

가끔은저들이 이미 죽은 영감의 모습을 자신에게 투영하는 것 같아 괜히 부담스럽다

 

자아잡담은 이걸로 끝내죠특별히 오늘은 지각에 대해 구차하게 변명할 기회를 드리도록 하겠어요.”

안 따지겠다며그세 말 바꾸기야?”

마음이 바뀌었어요막상 이렇게 얼굴을 보니 짜증이 나서요.”

 

역시 그녀는 제멋대로다로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 성실한 사원 노릇 좀 하느라 바빴다.”

성실당신이지나가던 원숭이가 나무에서 떨어지겠군요.”

나야 성실하지툭하면 집무실에서 사라지는 누구와 다르게 말이야.”

.”

 

그 점에 관해선 그녀도 할 말이 없었다.

 

어깨에 걸린 무게와 책임을답답하단 구실을 변명삼아 도망치곤 했으니까.

 

뜻밖의 반격에 말문이 막힌 엘리자베스가 입술을 오므린 채 그를 노려봤다.

 

당신건방져졌군요?”

나도 현장 요원으로 구른 지 꽤 됐잖아그만큼 노련해진 거지.”

 

정확히는 뒷골목을 전전하던 옛날부터 사람 허점 찌르기 하난 잘했다그리고 무력으로 진압당해서 그렇지로이는 비교적 직언을 자주 날리는 편이었다.

 

딸깍.

 

엘리자베스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이 찻그릇과 맞닿으며 나는 소리가왠지 조금 거칠게 들린다.

 

화났나?’

 

로이가 흘러내린 선글라스 위로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은 엘리자베스를 훑었다.

 

아쉽네요.”

 

다행히 그녀가 분노한 것으론 보이지 않았다.

 

아니대신 수상할 정도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차분했다속내를 감추는 법이 없는 여자가 저러는 모습에 로이는 영문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자베스가 수상쩍은 미소를 지었다.

 

접선 장소가 여기가 아니라 본부였으면 바로 훈련장으로 갔을 텐데 말이죠.”

훈련장?”

훈련장이요과연 물벼룩이 얼마나 노련해졌는지직접 두들겨 패서 확인할 수 있잖아요안 그런가요실전에 강한 로이 버넷 요원?”

 

양손에 깍지를 끼고위에 턱을 얹는다.

 

여인의 그윽한 시선이 로이를 눈에 담는다입가엔 뭇 남성들의 혼이 쏙 빠질아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물론저 미소에 얼렁뚱땅 넘어갈 로이가 아녔다.

 

역시 괴롭힘을 빙자한 특훈이 맞았잖아.”

후후어떨까요?”

 

엘리자베스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로이를 훑는다.

 

마치 먹이를 노리는 포식자를 연상케 하는 모습에 로이의 간담이 서늘해졌다그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낸 뒤 빠르게 대화 주제를 바꿨다.

 

됐고나랑 잡담이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니잖아왜 불렀냐?”

 

세상엔 잡담을 나눠서 즐거운 사람이 있고반대로 불편한 사람이 있다.

 

적어도 눈앞의 상관은 명백히 후자에 속했다.

 

로이는 슬슬 본론을 시작해 눈앞의 변덕스런 상관이 자신을 호출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엘리자베스도 굳이 시간을 질질 끌고 싶진 않았는지 동의했다.

 

좋아요그럼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죠.”

 

드디어로이가 안심하며 귀를 기울였다내심 그녀가 두 번이나 호출할 정도면 꽤 진지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과연 이번엔 무슨 임무일까?

 

로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별건 아니에요그저당신에게 부탁할 게 하나 있답니다.”

부탁명령이 아니라?”

 

로이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웬일이냐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물벼룩 눈에는 제가 공사 구별도 못 하는 사람으로 보였나 보네요.”

 

기관장으로서 이미지 관리를 제대로 못해 불찰이라며 엘리자베스가 이마를 짚었다.

 

기관이 투입되어야 할 임무라면 마땅히 기관장으로서 명령을 내리겠지만제 개인적인 용무라면 응당 부탁을 드려야겠죠.”

 

정 힘들면 거부해도 된다며 엘리자베스가 덧붙였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괜히 더 무서운데대체 뭔 부탁을 하려고 그러냐?”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로이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그녀가 저자세로 나온다는 건그만큼 요구사항이 터무니없다는 걸 뜻한다적어도 로이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너무 심려치 마세요.”

 

반면 엘리자베스는 태연하다그녀는 잔뜩 긴장한 로이를 보며 음미할 정도로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혼자서 이면세계에 다이브하거나맥크레디 포인트에 쳐들어가라는 등의 자살 임무는 아니니까요.”

그럼 뭔데?”

보다시피제 용건은 이거예요.”

 

펄럭.

 

엘리자베스가 품에서 길쭉한 종이 두 장을 꺼내 팔랑거렸다.

 

뭐냐그게?”

 

마치 상품권처럼 생긴 종이 쪼가리의 등장에 로이가 의문을 표했다.

 

보면 모르시나요놀이공원 이용권이랍니다.”

놀이공원?”

 

대체 무슨 부탁을 할까 두려운 나머지 번잡했던 로이의 머릿속이 단숨에 표백됐다.

 

맞아요놀이공원.”

잠깐만.”

 

로이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볐다.

 

하지만 엘리자베스가 흔드는 티켓엔 확실히 그라운드 원을 대표하는 놀이공원어드민 랜드의 상표가 그려져 있었다너무 유명해서 길거리를 걷다보면 전광판에서 보게 되는그 어드민 랜드였다.

 

리플레이서 사태로 폐쇄를 당해 한동안 잠잠했던 놀이공원이 최근 재개장했다는 소식을로이도 어렴풋이 들어본 것 같았다.

 

뭐지설마 또 무슨 잠입 임무 같은 건가?’

 

입술이 바짝 마른다.

 

로이는 답답한 속을 진정시키고자 연신 찬물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의 폭탄 발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참고로 커플용이죠.”

푸흡!”

 

황급히 입을 가린다.

 

그가 뿜은 물이 주륵하고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렸다.

 

커플용이라고드디어 미쳐버린 거냐?”

멋대로 사람을 미치광이 취급하지 말아 주시겠어요저는 지극히 정상이랍니다.”

 

태연하다너무 태연해서 도리어 자신이 이상해진 거 같다그녀의 태도가 어처구니없었는지 로이는 삐뚤어진 선글라스를 고칠 생각도 못했다.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냐?”

무례하네요.”

 

여전히 새침한 엘리자베스의 태도에 로이는 의심을 지우지 못했다멋대로 이마를 짚어봤지만그녀의 체온은 지극히 정상적이었다.

 

이상하다머리에 열은 없는데.”

이제 손 좀 치워주시겠어요물벼룩?”

 

엘리자베스의 시선이 점점 가늘어지자 로이가 황급히 손을 회수했다.

 

잠시 후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던 그가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그래놀이공원그럴 수 있지어디서 난 건지 모르겠지만지나가던 팬한테 받았을 수도 있지암 그렇고말고.”

 

눈앞의 여자는 어디 비밀 기관의 수장답지 않게 바람 좀 쐬겠다며혹은 심심풀이로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며 얼굴을 제법 팔았다.

 

최근유명세가 팍 오른 하트베리와 합방하는 건 물론이고 그라운드 원에서 행해지는 이벤트에도 심심찮게 얼굴을 비치곤 한다주변에선 그녀를 모르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정도로아주 유명인이 다 됐다.

 

굳이 그녀가 집무실을 박차고 뛰쳐나왔단 걸 보고하지 않아도, SNS를 조금 살펴보면 그녀의 행적이 다 드러날 정도다세상은 이미 그녀를 유명한 카운터 겸 셀럽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대체 누가 이런 엉뚱한 아가씨를 보며 세상의 멸망을 초래할 마왕의 파편을 봉인하는 비밀 조직의 수장이라 여길까?

 

만약 이게 전부 의도된 행동이라면 로이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그녀는 천재다.

 

근데 우리 홍차 폭탄이 그럴 리가 없지.’

 

그냥 내키는 대로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했을 게 뻔히 보인다.

 

다만 너무 잘나서제멋대로 행동해도 모든 상황이 본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뿐이다참 부럽고 편한 재주라며 로이가 질린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상투적인 감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단어.

 

커플용커플용커플용.

 

문득 섬뜩한 발상이 그를 엄습해온다.

 

홍차 폭탄너 설마 날 부른 이유가.”

다행히 물벼룩치고 눈치가 없진 않네요이게 다 현장에서 쌓은 경험 덕인가요?”

 

어째선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는 법이 없더라니로이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엘리자베스가 가소롭다는 듯이 그를 내려다본다.

 

아니거짓말이지?”

 

로이의 황망한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진짜 나라고?”

 

그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시나요?”

당연하지네가 뭐가 꿀려서 나랑 놀이공원을 가냐?”

 

로이가 자신을 올려치자짧게나마 엘리자베스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웬만하면 사이좋은 사람이랑 가기 마련이잖아우리끼리 가면 놀이기구는 개뿔대판 싸우다 SNS에 찍히는 그림밖에 안 그려진다고.”

후후그런가요하지만 제가 선택한 파트너는 당신인 걸요물벼룩.”

그니까 왜 하필 그 파트너가 나냐는 거지!”

 

아직도 의심을 걷어내지 못한 그에게엘리자베스가 눈을 감고 나긋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받아들이기 힘드셔도당신의 눈앞에 있는 건 진실이랍니다.”

 

불가능을 전부 제외하면설령 그게 믿기 힘든 사실일지라도 진실일 수밖에 없다.

 

사실상 사형선고에 로이가 제 머리를 쥐어뜯었다.

 

아니 미친!”

 

아주 격한 반응에 엘리자베스가 웃음기를 애써 끅끅 참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흥분하시죠한낱 물벼룩에겐 굉장히 영광스러운 제안 아닌가요?”

영광은 무슨너랑 같이 다니다가 사진부터 찍힐 생각을 하면 앞이 아주 막막하다!”

 

현재 대외적으로 코핀에 소속된 그는 목요일마다 하트베리를 마주치곤 한다.

 

딱히 친분을 맺은 사이는 아니지만지나가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할 정도 사이는 된다보통은 가은이란 세상물정 잘 모르는 여자가 찾아와 큰 문제가 되지 않지만간혹 그녀의 감시 역할로 딸려오는 미야라는 여자가 문제다.

 

머리가 청순해 보이는 이 여자는 공교롭게도엘리자베스와 친분이 있다그리고 방송중이 아니더라도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 않는 진성 휴대폰 중독자. SNS도 예외는 아니다.

 

만약 엘리자베스와 로이가 놀이공원에 함께 있는 모습을 대중들에게 찍혀 SNS에 올라가게 되면삽시간에 소문이 퍼지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비단 미야뿐만 아니라코핀 내부에서도 온갖 질문을 던져 둘의 관계를 캐물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특히 남녀 간의 애정 관계에 굶주린 어느 관리부장이 말이다.

 

아무래도 최소 목요일은 연차를 내거나출근하더라도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틀어박혀야겠다고 생각하던 로이가 일순 흠칫했다.

 

잠깐난 왜 홍차 폭탄이랑 놀이공원에 가는 걸 기정사실인 것처럼 행동한 거지?’

 

애초에 그녀가 말하지 않았던가?

 

명령이 아니라부탁이라고.

 

즉 제안을 거절해도 된다는 뜻 아닌가로이가 힐끗 그녀의 모습을 훑었다.

 

아직도 고민 중이신가요?”

 

진정하지 못하는 자신과 다르게 그녀는 시종일관 느긋해 보였다.

 

마치 자신의 선택은 어찌 되든 상관없는 듯한 고고한 태도가 로이의 심기를 건드렸다.

 

직감이 속삭인다전부 홍차 폭탄의 교활한 함정이라고.

 

하지만 사나이는함정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빠져줘야 하는 경우가 있다.

 

로이는 미끼를 덥석 물었다.

 

좋아어차피 너도 같이 갈 녀석이 없어서 나한테 온 거지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아가씨 시중든다고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지.”

 

어쩌면 이번 놀이공원 데이트에서 그간 그녀에게 당한 것들을 복수할 기회가 생길지도 모른다로이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표출하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데이트로 받아들인 순간 이미 패배가 결정된 걸아직 깨닫지 못한 모습이다.

 

원만히 해결되어서 다행이네요.”

 

어차피 이렇게 될 걸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엘리자베스는 그리 말했다.

 

당신이 안 받아주면 또 누구한테 권해야 하나 고민했거든요.”

진짜 내가 안 받아줬음 어쩌려고 그랬냐?”

글쎄요아마 페리어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요?”

아니그 그림은 좀 이상하지 않냐?”

 

집사와 아가씨라는 훌륭한 그림이커플 이용권 하나로 단숨에 위험한 냄새가 나는 비주얼로 전락한다이건 무조건 이상한 소문이 난다로이는 미래에 찾아왔을지도 모를 참사를 막아낸 자신을 칭찬했다.

 

그나저나 이 티켓은 대체 어디서 난 거냐?”

지인한테 선물 받았어요.”

지인?”

 

제멋대로에 기분파인 여자에게 선물을 줄 정도로 친한 사람이 존재한단 사실에 로이가 전율했다.

 

너한테 선물을 줄 정도의 지인이 있었어?”

저는 당신과 다르게 발이 아주 넓답니다.”

 

그쪽과 같은 취급하지 말라며 엘리자베스가 눈웃음을 지었다.

 

물론 말이 눈웃음이지누가 봐도 협박용 미소였다.

 

제가 물벼룩인 당신에게 굳이 권한 건남에게 받은 선물을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랬어요남의 호의를 헛되게 만들 수 없죠저는 귀족이니까요.”

 

적어도 선물한 자의 성의는 지켜줘야 하지 않겠냐며 엘리자베스가 은은하게 웃었다.

 

방금 수락한 거취소 가능해갑자기 엄청 내빼고 싶어지는데.”

낙장불입입니다.”

 

자신이 가는 걸 기정사실로 취급하는 모습에 로이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거만하기 짝이 없는 귀족 아가씨한테 티겟을 선물한 별종이 누군지 의문이다.

 

그래서 그 지인은 누구냐너한테 선물할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닐 거 같은데.”

맥크레디 양이요.”

?”

 

로이의 선글라스가 주륵 흘러내렸다.

 

설마 했던 그녀의 지인은 기관의 숙적레지나 맥크레디였다.

 

엘리자베스가 부연 설명을 이어갔다.

 

지난 할로윈 가장 대회 때의 보답이라며 보내왔어요.”

아니할로윈이 지난 지가 언젠데.”

 

그때의 보답이라기엔 너무 늦은 거 아닌가로이가 머릿속으로 달을 세어보았다.

 

대충 세어도 이미 반년 이상 훌쩍 지나버렸다숙적에 대한 이상한 선입견이 생겨나고 있을 때엘리자베스가 직접 그의 의문을 해소해주었다.

 

실은 선물로 받은 지는 한참 되었답니다다만 그 존재를 여태 잊고 있었죠.”

 

 최근 방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했다며 그녀가 덧붙였다.

 

마침 티켓의 유효기간이 내일까지라급히 당신을 부른 거예요.”

차라리 하루만 더 늦게 발견하지 그랬냐.”

 

그랬으면 눈초리가 무서운 부사장의 눈치를 보며 급히 회사를 빠져나올 일도 없었을 텐데로이는 웃는 얼굴이 무서운 부사장을 떠올리며 목 주변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나저나 우리 기관의 톱과 숙적 관계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사이였다니뭔가 좀 충격적인데.”

본디 귀족은 정적 관계임에도 교류가 이어지곤 하죠맥크레디 양도 마찬가지랍니다명문가 자제로서 제게 빚지고 싶지 않았던 거죠.”

 

여전히 자존심 하나는 콧대만큼 높은 여자라며 평한 엘리자베스가 흐뭇하게 웃었다.

 

노력하는 모습만큼은 가상하네요사악한 고대 가문의 피를 이은 자다워요.”

함정 같은 건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티켓을 선물한 의도를 모르겠다.

 

역사가 오래된 귀족 같은 집안이라면 좀 더 이렇게그리고 저렇게 그런 게 있지 않나?

 

이번 대의 가주는 함정을 팔 정도로 음흉하지 않아요팠더라도 연기를 못해서 초조한 모습을 보였겠죠저한테 하루라도 빨리 이 티켓을 사용해라같은 거요.”

 

하지만 그런 모습은 눈곱만큼도 없어 보였고티켓도 어영부영 잊고 지내다보니 기한까지 딱 하루를 남겨놓았다모로 봐도 함정일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그거믿어도 되는 정보 맞아?”

 

정보의 출처가 출처다보니 여전히 로이의 눈엔 깊은 의심이 서려 있었다.

 

물론이죠그리고 마침 잘 됐어요이래봬도 놀이공원은 처음이거든요.”

뭐야홍차 폭탄 너그 나이 되도록 놀이공원 한 번을 안 가본 거냐?”

갈 예정이었죠.”

 

아주 어린 옛날부터.

 

엘리자베스가 그리운 듯이 로이를 빤히 쳐다본다그녀의 눈은 로이가 아닌다른 누군가를 투영하고 있었다.

 

그녀가 넌지시 흘렸다.

 

그런데 약속하신 분이 먼저 세상을 떠나버리셨네요.”

.”

 

마침 한 노인의 모습이 로이의 뇌리를 스친다.

 

하필 남겨도 이런 폭탄을 남기고 갔냐며로이는 내심 자신의 할아버지를 저주했다.

 

그래서어떡하시겠어요물벼룩?”

어떨 거 같냐?”

 

서로 완전히 상반된 생각을 가진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교차한다.

 

주전자 주둥이에 맺혔던 물방울이끝내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먼저 눈을 감은 건 로이였다.

 

벌써부터 기대되네요놀이공원.”

그러게.”

 

로이는 고개를 떨궜다.

 




기존 상하편은 지움.

글은 일단 완성해서 텀 두고 내일까지 쭉 올릴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