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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벽 감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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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의 시간은 누구에게나 생각의 우물을 파고 내려갈 기회를 준다.


이 우물은 내가 평소에 느끼지는 못하지만, 내게 꼭 필요한 감정을 채워주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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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꿈 속에서 주시윤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눈을 뜬다는 느낌이 들었다. 


거대한 침묵이 꿈 전체에 덮여 있다. 시야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자신을 감싸고 있는 것은 오직 칠흑같은 어둠이 전부였다.


볼수도, 몸을 움직일 수도, 말을 걸 수도 없는 어둠 속에서 주시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듣는 것 뿐.


언제나와 같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허공 저 너머로부터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뜨거라. 나의 아이야.


네가 가진 고귀한 피를 깨워라.



음산한 톤의 목소리가 부드러운 깃털처럼 주시윤의 마음을 쓰다듬었다. 


또 이 꿈인가. 일본에 온 뒤로 이 꿈을 안 꾸는 날이 없었거늘. 주시윤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요 근래 꿈만 꾸면 항상 어둠 뿐인 공간 속에서 정신이 든다. 그리고 간지럽게 속삭이는 정체불명의 목소리가 계속 말을 걸어온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여긴 어디인지, 목소리의 주인은 누구인지 묻고 싶은 것이 산더미임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러다가 꿈에서 깨길 반복한다.



축복받은 아이야. 


고귀한 피를, 이어받은 계승자야.


결단의 때가 왔다.



널 묶고 있는 족쇄를, 끊어내야 한다.


너를 구속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거라.



쉭쉭하고 바람이 불듯 목소리가 침묵의 베일을 걷어낸다.


순풍을 맞아 움직이는 한 척의 배와 같이, 목소리의 방향으로 자꾸만 마음이 이끌리는 듯 했다. 


평소라면 이런 영문 모를 소리에 경각심을 갖고 의도적으로 관심을 끊었을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럼에도 소리의 정체에 대한 의구심은 끊임없이 늘어만 갔다.


말하고 싶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알고 싶었다.


주시윤은 열리지 않는 입을 갖고 어떻게든 한 마디를 떼려고 바둥거렸다.


_________


____아.


아아.


됐다.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이제 말만 건다면-



"거기 누구-!?!"



목소리가 나온 순간 침묵을 깨고 굉음이 몰아닥친다. 주변을 뒤덮은 어둠이 마치 유리가 깨지듯 산산조각난다.


속삭여오는 소리도 연기처럼 사라진다. 꿈의 세계가 무너지고 있었다.


몸의 통제권이 돌아오고, 시야는 익숙한 천장을 한가득 담는다.



“또, 이상한 목소리에 그 꿈...”



꿈이 아니라 가위에 눌린 것 같이 몸이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고개를 털며 몸을 일으키자 식은땀이 목을 타고 흘렀다.


주시윤은 한 차례 심호흡을 하며 긴장된 몸을 이완시켰다. 


일본에 온 이후로 그는 꽤 자주 이런 식으로 꿈에서 깨어났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누구에게든 이야기를 털어놓고 상담을 받고 싶었으나, 이번 꿈은 그 경우가 살짝 달랐다.


문제가 있다면 문제에 대해 설명을 해 줘야 듣는 사람도 해결책을 제시해줄 수 있는 법.


그러나 불행히도 주시윤의 악몽에는 내용을 설명할 어떠한 단서도 없었다.


들리는 것은 오직 목소리. 사슬을 깨라는 둥, 잠에서 깨어나라는 둥, 고귀한 피라는 둥, 계속 같은 말만을 반복한다는 것.


누군가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해봐야 충분한 단서가 되지 못한다. 그저 공포영화를 너무 많이 봤다는 식으로 응수하겠지.


실로 기분 나쁜 꿈이었지만, 아무에게나 털어놓고 해결지을 수 없는 문제였다.


머리 맡에 있는 물컵을 들어 시원한 물을 한 모금 들이켰다. 시간을 확인하니 벌써 새벽 2시였다.


엇차.


주시윤은 침대에 다시 눕지 않았다. 대신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잠은 다 깨버렸고, 다시 잠들려고 해도 악몽 때문에 기분이 복잡해진 상태에서는 잠에 들기 힘들다.


산책이라도 하다 보면 마음도 좀 정리가 되겠지. 운이 좋다면 피곤이 찾아와 다시 잠을 청할 수도 있고.



.......



저택 밖으로 나오니 시원한 밤공기가 주시윤의 양 목덜미를 감쌌다. 몸에 서려있는 땀이 몽롱한 기운과 함께 싹 날아가는 듯 했다.


온통 어두울 거라고 생각했지만 바깥은 주시윤의 염려와 달리 청명한 달빛 덕에 예상 외로 밝았다. 시야 건너편에 무엇이 보이는지 어렴풋이 식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조금 걷다 보니, 달빛이 비추는 저 너머로 누군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시간에 누구지? 자신은 꿈 때문에 잠을 설쳤다지만, 이 새벽 시간에 밖에 나올만한 사람이...


주시윤은 달밤의 문객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음? 어쩐일로 이 시간에 밖에 나와 있어?"



귓가에 들리는 명랑하고 귀여운 목소리. 달빛을 받아 희미하게 빛나는 금발.


달밤에 주시윤을 맞은 문객은 첫날부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명랑한 소녀, 루시아였다.








“아하. 그렇구나. 밤에 잠을 설쳐서 밖에 나왔다니."  


"하하하. 꿈자리가 영 좋질 못해서요."


"마침 심심했는데 잘됐다. 옆에 앉을래?”



벤치에 앉은 그녀가 반갑다는 듯이 이리 오라는 듯 손짓했다. 강아지를 부르는 것처럼 보채는 손짓이 묘하게 귀여웠다. 


주시윤은 멋쩍은 웃음을 흘리며 루시아의 곁으로 갔다. 


가까이 붙어 앉자 향긋한 샴푸 향이 코를 간지럽혔다.



"경호원 하는건 어때? 거기도 할만해?"


"여유로워요. 사람들 성격도 좋아서 일하는 것도 편하고. 침식체도 안 나타나고."


"일 때문에 계속 떨어져 있어서 궁금했는데. 잘 지내는 거 같아보여서 다행이네. 후후."



사소한 대화들이 쭉 이어졌다.


가까이 붙어 있어서 그런지 주시윤은 어둠 속에서도 루시아의 표정이 더욱 잘 보였다. 


그녀는 귀여운 미소를 띈 채 다행이라며 웃고 있었다.


웃는 얼굴을 보니, 굳어 있던 얼굴이 펴져 자연스러운 웃음이 지어졌다.


그 뒤로는 숨기는 것 없는 자유로운 대화다. 이전에 그랬듯이.



"루시아 양은 봉인지에 계속 계시는 거죠? 거기는 어떤가요?"


"가주님이랑 너의 그 스승님이란 사람이 계속 봐주고 있어서 아직은 괜찮아. 그래도 혹시 몰라서 계속 결계를 짜올리고 있어."


"이미 봉인되어 있는 곳에 또 결계를요?"


"기존의 봉인을 더 옥죄어놓을 겸, 플랜 B로 만들어 놓는거지."



루시아는 기다렸다는 듯 자기가 짜놓은 결계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움직임을 묶는 결계는 기본이고, 닿는 즉시 잘려나가는 것, 방향의 개념을 바꾸는 것, 세뇌결계에 이르기까지. 


각 결계들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한 설명은 덤이었다.


주시윤은 루시아의 이야기에 틈틈이 맞장구도 쳐주고, 적절한 감탄사나 제스쳐로 화답해주었다. 


어디까지나 예의 상이었다. 예의 상.


이야기를 받아주면서도 괜히 스위치를 누른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이거, 의도치 않게 말려들은게 아닐지.



"루시아 양."


"응? 왜?"


"혹시나 싶어서 그런데, 봉인지 쪽은 많이 바쁘신가 보네요. 기다렸다는 것처럼 신나서 얘기하시는걸 보면요."



주시윤은 떠보는 질문을 슬쩍 던져봤다.


신나서 떠들어대던 루시아의 입이 한순간 멎었다. 놀라움으로 그녀의 두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어떻게 알았대?"



결과는 예상적중.


봉인지에서 힐데에게 조용히 좀 하라며 꾸중들은 이후로는 억지로 말수를 줄여야 했다나.


루시아는 있는대로 입을 삐쭉거리며 고해성사를 이어갔다.



"아니 글쎄, 가주님이랑 가주님 동생은 내 얘기 잘 들어주신단 말이야?"


"네네."


"근데 너네 스승님한테는 말 좀 몇마디 했다고 시끄럽다며 꾸중 들은거 있지?"


"어이쿠, 저런..."


"요즘 것들은 재잘재잘 거리는게 진중함이 없다나 뭐라나, 나 때는 어땠다 부터 시작해서, 무슨 말을 못하게 한단 말이야. 웃겨 증말."


"하하하, 큭큭.... 맞습니다. 저희 스승님이 좀, 그런 구석이 있긴 하시죠." 



예민한 고양이처럼 으르렁 하고 성질을 내는 힐데의 모습이 주시윤의 눈 앞에 아른거렸다. 


펜릴 소대 특유의 지X같은 성격이 어쩌자고 이 관계 없는 사람에게까지 불똥을 튀겼을까.


죄송합니다, 우리 애가(?) 원래는 착한데 성격이 좀 모난 데가 있어서.


마음 속으로 주시윤은 루시아에게 전해지지 않을 사과를 수도 없이 반복했다.



"어째 제가 대신 사과드려야 할 것 같네요."


"으응, 아냐아냐. 방금 얘기 열심히 했으니까 그걸로 됐어. 너가 잘못했다는 것도 아닌데 뭘."



입이 대빨 나와 있다가도 주시윤이 말을 꺼내자 루시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 밤하늘에 뜬 달은 새벽 별빛을 머금고 서서히 여물어갔다.


대화 주제도 시시각각 바뀌었다.


좋아하는 음식, 자기가 경험했던 일, 거기로부터 뻗어나가는 여러 이야기들, 과거 이야기.



“그런데 시윤이 넌 카운터 아카데미에 가지 않고 왜 태스크포스에 있게 됐어?”


“학교를 갈 여건이 안됐거든요. 부모님이 두 분 다 돌아가셔서, 스승님이 속해계신 태스크포스에 몸을 의탁하게 된 거죠.”


“아.... 그랬구나. 실언을 해서 미안해.”



굉장히 미안했는지 루시아는 양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을 땅으로 향했다. 잘못을 저지르고 꼬리를 말은 채 풀이 죽은 강아지 같았다.


쭈그러든 루시아를 향해 주시윤은 괜찮다고 연이어 손을 저었다. 


부모님 이야기를 서로 꺼낼 만큼 친한 사람이 적기도 하고, 루시아와는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그보다 루시아 양은 학생이신데, 카운터 임무를 하느라고 타국까지 나와 있는걸 부모님께서 걱정하진 않으시던가요?"


“아. 나도 너와 마찬가지야. 부모님이 안계시거든. 두 분 다.... 정체불명의 살인마 때문에 돌아가셨어.”



이번에는 주시윤의 고개가 땅으로 떨궈졌다.



"...죄송합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뭘. 괜찮아. 우리가 서로 이런 얘기를 선뜻 할 만큼 많은 시간이 허락됐던 건 아니잖아?"



루시아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싱긋 웃었다.


그녀의 말대로, 첫날에 이야기한 것과 저녁 식사 이후 지나다니는 김에 얼굴 몇 번 마주친 걸 제외하면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눈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친한 사이처럼 변죽 좋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은 두 사람의 성격 덕분이겠지.



이런 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의외로 공통점이 많은 상대에게 주시윤은 슬슬 흥미가 생겨났다.


스승인 힐데에 의해 부모님이 돌아가신 주시윤과, 누군가에게 부모님이 살해당한 루시아.


의도치 않게 서로의 큰 치부를 건드렸다는 점과, 그 치부가 서로 닮아 있다는 점, 이런 종류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처음이라는 점.


그녀와의 대화가 가져다주는 신선함은 주시윤에게 있어 양자의 거리를 급속도로 끌어당기기에 충분했다.



"같은 처지의 사람끼리 서로 사과하고 있는 풍경이라니. 별나다면 별나네."


"하하. 그러게요. 별로 좋은 공통점은 아닌 것 같지만요."


"너와 나 뿐만 아니라, 다들 비슷할거야."



고운 손이 펼쳐지자 희미한 푸른 빛의 선이 허공에 구조체들을 수놓았다. 


결계능력이 만들어낸 백색 폰 말 두개와 흑색 폰 말 여덟개가 루시아의 손 위에 둥둥 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역사 시간에 배웠어. 대정화 전쟁을 겪고 나서, 수많은 사람들이 소중한 이를 잃었지. 부모 없는 아이들, 자식 잃은 어른들."


"...."


"모두가 같은 상처를 마음 한 켠에 품은 채 힘겹게 살아가고 있는거잖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을 뿐."



흑색 폰은 누군가를 잃은 이들, 백색 폰은 운 좋게 살아남은 이들.


주시윤은 루시아의 손 위에 둥둥 떠 있는 흑색 폰 중 하나에게 눈길이 갔다.


폰의 색깔처럼 자신의 마음도 까맣게 칠해져 있는 것만 같았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찰나, 체스 말들이 사라졌다.



“너도... 분명 많이 힘들게 살아왔겠지.”


"......"



루시아가 고개를 돌려 주시윤을 바라봤다.


간략했지만 굉장히 무거운 한 마디가 의중을 찌르고 들려온다.


루시아의 한 마디는 주시윤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힐데를 따라 코핀에 들어간 것, 어린 나이부터 태스크포스 업계에서 일했던 것,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던 것, 부모님이 생각날 때마다 남몰래 사무치게 그리워했던 이전의 기억들.



"어이쿠. 이번엔 제가 간파당했는걸요."



새벽은 인간이 가장 솔직해지는 시간이란 말이 있다.


주시윤은 그 말이 실로 지당하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었다.


말은 장난스레 한다지만, 이미 주시윤의 마음은 한 켠 열려 있었다.



"힘들긴... 힘들었죠."



솔직한 진심이 조심스럽게 흘러나온다.


루시아의 말대로였다. 지금에서야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주시윤이라는 소년은 부모님이 없는 채, 덜 채워진 채로 살아왔다.


힐데와 함께 살아왔다지만,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영역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부모님의 공백은 주시윤에게 있어 큰 결핍이었고, 가려지지 않는 결핍이었다.



"그래도 대단하네. 무너지지 않고 여기까지 걸어온 것만 해도, 정말 대단해."


"네? 아....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한 루시아의 자상한 말투. 주시윤은 머릿속 한 켠이 따스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이런 따뜻한 말을 들어본 적이 별로 많지 않았던지라, 루시아의 말과 눈빛이 기분 좋은 잔향으로 남아 주시윤의 마음 가운데 침전물처럼 쌓였다.



"저 혼자만의 힘은 아니었어요. 지금의 스승님이 계속 곁에 있어주셔서... 탈선하지 않고 지금껏 잘 살아왔던 거겠죠."


"후훗. 그건 잘 된 일이네."



많은 것들이 생각났지만 주시윤은 대부분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다.


항상 숨기거나 돌려서 말하는 것이 습관이 되서일까, 아니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약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눈 앞의 소녀는 자신과 이렇게나 닮아 있는데, 그녀라면 자신이 품고 있는 이야기를 이해해 줄지도 모르는데,


스승님이 부모님을 죽인 탓에 그 응어리가 여전히 제 마음 속에 남아 있다는 사연을 공감해 줄지도 모르는데,


그저. 단순하게. 잘 살아왔다는 말 한마디로 많은 것들을 일축해버린다.


이 순간만큼은 스스로 얘기를 간단히 끝내버리는 자신이 속으로 원망스러웠다.



“루시아 양은 그럼 어떻게 살아오셨나요?”


“응? 별로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닐텐데... 괜찮겠어?”


“얼마든지요."



스스로를 털어놓는 것에 미숙했던 소년은, 더 진솔한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다음 기회가 또 있겠지. 자신과 닮은 그녀의 이야기를 먼저 듣는다면, 자신의 속마음을 밝힐 용기를 얻을 수도 있을 테니까.


어디부터 얘기를 해야 할까. 루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곰곰히 생각에 잠겼다.


이번에 들려온 것은 활기찬 목소리가 아닌, 어딘가 모르게 어두워보이는 목소리였다.



“부모님이 살해당하고 난 뒤, 나는 모든 걸 잃고 혼자 살아야 했어."



다시 고운 손이 유려하게 펼쳐지며 허공에 희미한 푸른 빛의 선이 그려졌다.


작은 사람의 형상이 셋, 아니, 여럿. 수도 없이 많은 사람 모형이 만들어졌다가 하나만을 남기고 단번에 먼지처럼 사라진다.



"지금이랑 비교하면 그 때의 나는 정말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지. 모든 것에 증오를 품고 있었거든. 도와줬던 사람이 있긴 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크게 싸우고 갈라서버렸고." 



손에서 펼쳐지는 결계 자수는 루시아가 말하는 내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어갔다.


혼란스럽게 얽히다가 바스라지고, 사람의 형상을 갖춰가는가 싶더니 반으로 갈라지며 산산조각난다.


루시아의 빛나던 눈에는 희미한 슬픔이 감돌아 공허한 빛을 머금었다.



"그 때부터 인간을 믿을 수가 없게 되더라. 세상이 미워서, 인간이 싫어서, 뭐가 옳은 건지 모르겠어서, 그냥 콱 죽어버릴까 하고 침식지대를 향해 몸을 억지로 내몰았어."


"....어떻게 그런."


"거기서 친한 동생들을 만났지.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버려진 채, 하루하루를 근근히 살아가는 아이들이 거기엔 많거든.


죽어버릴 생각이었으니 처음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어느새 아이들을 침식체와 악한 인간들로부터 지켜내고 있던 나를 발견할 수 있었어."



손바닥에서 푸른 빛의 선들이 사람 모양을 만들고, 작은 사람의 모양이 네 개 더 만들어졌다.


뾰족한 선들이 사람 모양을 둘러쌌으나, 곧 연기처럼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묘하게 맑아졌다. 소리에 형체가 있다면 살짝의 빛을 머금은 듯한, 정겨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이러니하지? 죽으러 간 곳에서 살아야 할 이유를 찾아버리고 말다니 말야. 그 이후로는 내가 구해낸 아이들을 위해 계속 살아가기로 했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난 진작에 죽었을거야."


"....."



안타까움과 숙연함에 주시윤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루시아가 들려준 이야기는 주시윤 자신의 이야기보다 훨씬 잔혹했다. 


삶의 근간이 파괴된 주시윤에게는 힐데가 곁에 계속 있었고, 새로운 삶의 근간을 마련할 수 있었다.


반면 루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삶의 근간이 파괴된 채 도움도 받지 못하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 어쩌다 보니 새로운 삶의 근간을 외부에서 찾아냈을 뿐이다.


운이 좋지 못했다면 동갑내기 친구로 마주한 것이 아니라, 카운터 범죄자나 그림자 침식체로 마주했을 수도 있었겠지.



"정말... 힘들게 살아오셨네요. 루시아 양이야말로."


"뭘. 너도, 나도. 비슷하지. 소중한 사람을 잃은 채 방황했잖아. 아, 살짝 다르긴 하구나. 너는 곁에서 엇나가지 않게 붙잡아줄 사람이 처음부터 있었으니까."



루시아의 얘기를 듣다 말고 주시윤은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더 끔찍한 일들을 겪어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신이 겪어온 이 괴로운 과거를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할 수가 있는걸까.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고 자신의 경험을, 가장 아픈 경험을, 이리도 허심탄회하게.


그녀는 얼마나 강하길래 그런 비극에도 굴하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걸까.



"뭐, 지금은 어찌저찌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 카운터 아카데미도 다니고, 친구들도 만들고, 그렇게 잘 지내고 있지. 그런 표정 짓지 마. 너도 나도 잘 살아왔으니까 이렇게 번듯하게 만나게 된 거 아니겠어?"


"그건.... 그렇긴 하죠."


"아. 설마 너 나 걱정하고 있는거야? 흐흥, 좀 감동스러운걸?"


"....걱정은 맞지만 그 이상으로 바라보지 말아주시죠."



진지한 이야기를 하던 건 언제고, 갑자기 장난 태세를 드러내며 루시아는 능글맞게 주시윤을 쳐다봤다.


대체 뭘까. 이 사람은. 활기차게 이야기하다가도, 한없이 수렁에 빠져들어가는 이야기를 하다가도, 다시금 활기찬 모습으로 돌아온다.


밝은 것이 그녀의 본래 성격인 것인지, 그녀도 자신처럼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인지.


루시아의 모습 속에서 주시윤은 자기 자신을 투영해 바라보았다.



"그래도 좋네. 오랜만에 이런 얘길 할 사람을 만나서. 원래 아무한테나 해주는 이야기 아니거든."



의도치 않은 실수 때문에 그러긴 했지만. 그렇게 말하며 루시아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어느덧 새벽 3시를 넘어 있었다.



“벌써 3시 넘었는데. 내일 일과에 지장이 가지 않겠어?”


"흠. 그러네요. 이만 자러갈까요?"


"후후. 그러자."



말하면서도 주시윤은 슬슬 눈이 감기는 것이 느껴졌다. 이만큼이나 얘길 하다 보니 몸이 금새 지쳤나보다.


주시윤보다 먼저 루시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꽤나 졸렸는지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키고 있었다.



"오늘 같이 있어줘서 감사했어요."



작별하기 전, 주시윤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솔직한 진심을 루시아에게 전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갸우뚱 하더니 기쁘다는 듯이 수려한 미소를 입가에 드리웠다.



"나야말로. 잘 자."



기분 탓일까, 고개를 돌린 그녀의 푸른 눈은 새벽별의 은은한 빛을 머금은 듯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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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프 와서 못쓰다가 지금 썼다 미안하다.


화가 난다면 글쓴 나를 마음껏 때려주심씨오.


아 그렇다고 고로시는 하지말고 어어 루리웹 링크 내려놔라 게이야 그거 지지다 지지


+) 이번에 처음으로 서술은 한칸씩, 대사는 두 칸씩 줄간격 크게 띄워봤는데 볼 때 좀 편한거 같음?? 아니면 너무 과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