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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수고하셨습니다."

"고생했어."

"수고했다."





남은 침식정화 작전에 후방 지원을 자처해서 나왔다. 그렇게 나오긴 했는데... 다른 소대들도 대단하지만 역시 펜릴소대는... 압도적이었다. 애초에 지원 따위 필요 없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여기는 펜릴소대. 작전 구역 모든 침식체를 처리했다."

"모든 소대 임무 완수 확인. 함선으로 복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알겠다."




시간은 오후 5시 26분을 가리켰다. 하루종일 정신없이 총만 쏜 것 같다. 하지만, 이 작전조차 어제의 여파라고 생각하면 절대 쉴 수 없었다. 펜릴 소대장님은 사과 할 필요 없다며 딱 잘라 말했지만, 도저히 내게 책임이 없다고 생각 할 수 없었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했다. 


... ...



함선으로 복귀하자마자 두고 온 소지품을 먼저 찾았다. 핸드폰 액정에는 시간만이 띄워져 있다. 늘 내가 먼저 연락하긴 했지만... 


갑자기 어제 함선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얼굴이 화끈거려서 손을 얼굴에 갖다 댔다. 남자 품에 안겨서 거의 대성통곡을 하다니. 어제는 상황도 상황이여서 너무 슬픈 나머지 그랬지만... 상황을 단독으로 놓고 생각해보니 너무 부끄러웠다.




"어디 아파? 왜 그래?"

".. 네, 네?! 미, 미나씨 언제 오셨어요?"

"방금? 왜 이렇게 놀래고 그래. 얼굴도 빨간데? 아픈 거 아니야?"

"자, 잠시 멍을 때려서..."

"으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부사장님이 찾아. 함선 대기실 3번으로 오래."

"아,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해요."

"아프면 아프다고하고 쉬어. 선배처럼 꾀병 부리는 거 아니면 웬만하면 쉬게 해주니까. 무급이지만..."




미나씨가 갑자기 걸어오는 말에 너무 크게 놀라버렸다. 으으, 정신차려야해... 일단 부사장님이 찾는다고하니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고, 알려준 곳으로 갔다. 대기실 문을 열자 부사장님이 웃으며 반겨주셨다.




"오늘 고생했어요. 카린양. 다른 건 아니고, 줄 게 있어서 불렀어요."

"줄 것 이요?"




부사장님은 안 쪽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작은 유리병을 내게 건냈다. 분홍 빛이 조금 도는 하얀 가루가 들어있었다.




"이건..."

"원래라면 너무 부서진 탓에 정제는 커녕 폐기 처분이 되어야 했을 이터니움입니다."

"... ..."

"사장님이 카린양에게 주라고 하시더군요. 불과 어제 일어난 일이라서 카린양에게 괜히 힘든 기억을 꺼낼까봐 망설였습니다만... "

"괜찮습니다. 오히려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이미 이터니움으로서의 빛은 잃은 상태입니다. 사실상 불순물이 가득한 평범한 먼지 같은 상태죠. 지니고 다닌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부사장님."

"그래요. 마음 잘 추스리고요."




나는 유리병을 두 손에 소중하게 쥐었다. 뜻하지 않게 기억 할 수 있는, 기억해야 하는 사람의 흔적을 얻었다. 부사장님이 내 어깨를 살짝 톡톡-토닥이고 대기실을 나갔다.



'안녕...카린...'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다시금 귓가를 울렸다. 눈물이 고이고,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어제 울면서 털어냈다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살아있을지 죽었을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을 텐데. 고작 나를 찾겠다고, 나를 위로 하겠다고 죽지 못한 채 그림자가 되어서 까지 나를 찾아왔다.




"제가 지키고 싶었던 것 처럼, 시영씨도 같은 마음이었을까요...?"




손에 감싸쥔, 하얗고- 색이 바랜 가루를 보며 질문을 던졌다. 당연하게도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당신이 나를 찾기 위해 벌인 일은... ...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오늘 다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계 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하지 못 했을 거에요."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계속 말한다.




"오늘 이후로도 제게 주어진 시간 동안 늘 그랬듯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계속 울음을 삼키고, 뒤늦게 전해지지 못 할 말을 이으며, 나는 다시 유리병을 쥐고, 도착을 알리는 방송이 나올 때까지 나는 계속 그 자리에 서있었다.








*





... 깜빡 잠이 들었나?

악몽의 원흉이 사라지자 더 이상 깨질 듯한 두통도 소름 끼치는 꿈도 꾸지 않는다. 대체 뭐 때문에 꿈에서 까지 나와 괴롭혔는지 모르겠다. 뭐, 애초에 차원 계면을 직접 찢고 나오는 거부터 엄청나게 비정상이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부상을 입은 나 빼고는 전부 일요일에도 정화 작전에 들어갔다. 차원 균열이 완전히 비활성화 된 걸 확인했지만 여전히 1-2종 침식체가 그라운드 원 외곽을 활보하고 있어서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마 그 여자가 끌고 온 게 아닌 그저 그림자의 침식파에 반응해서 몰려든 놈들 일 것 이다. 


생각보다 다리를 깊게 베었는지 하루 종일 집안을 걸을 때마다 진한 통증이 느껴졌다. 걷어 차인 복부도 괜히 아프다. 망할 그 그림자 때문에...

... ... 이 상태면 내일 출근하더라도 짐덩이다. 평소 같으면 오히려 이득이라며 기뻐했겠지만, 지금은 왜 인지 별로 기쁘지 않다. 그럴만한 이유에 해당하는 사람은 지금 바쁘려나. 머리론 그렇게 생각하면서 침대에 누워 시간만 동동 떠있는 핸드폰 화면을 봤다. 오후 6시 40분을 지난다. 하루 종일 아무 연락도 없는 거 보면 엄청 바쁜 모양이다. 바쁜데 굳이 연락 할 필요는 없겠지. 점심은 대충 때웠는데, 저녁은 오랜만에 배달음식이라도 먹어야겠다.

그렇게 생각 했을 때 핸드폰에 진동이 울려왔다. 빠르게 홀드 버튼을 다시 눌러 화면을 확인했다.




[시윤씨. 오늘 업무가 모두 끝나서 메시지를 남깁니다. 부상은 괜찮으신가요?]




사무적이고 딱딱하지만 걱정이 묻어나는 내용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핸드폰을 손에 쥔 채로 대(大)자로 누웠다. 내심 하루 종일 기다렸던 걸지도 모르겠다. 다시 양손에 쥐고 답장을 써내려갔다.




[너무~ 아파서 낮잠 한숨 자버렸어요. 오늘 많이 바쁘셨나봐요?]




어차피 경험 상 이 정도면 내일이면 충분히 걷겠지만 괜히 엄살을 부렸다. 다시 한 손에 핸드폰을 쥐고 침대 위에 늘어졌다. 손바닥에 온 신경이 집중 되는 것 같다.

... ... 답장이 없다. 나는 물어본거 답해줬는데. 이건 완전 반칙이다. 그냥 저녁이나 먹어야겠다 싶어서 배달앱을 키려는 순간 전화가 걸려왔다.





"왜 답장을 안ㅎ..."

"시윤씨!! 많이 아파요? 괜찮아요?"

"...카린양 매번 말하지만 소리 안 질러도 잘 들린답니다?"

"아..! 그래도요! 많이 아픈거에요?"




찰나에 잠깐 고민했다. 더 엄살을 부려보면 무슨 반응일 지 궁금했다.




"하하, 글쎄요? 하~루종일 움직이기가 힘드네요~ 점심도 대충 빵으로 때우고 이제 저녁은 어떻게 먹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어요~"

"아... ... 그럼 저녁 식사는 아직 못 하신 건가요?"

"네~ 뭐, 그래도 일상생활 하는데는 지장 없어요. 너무 걱정 마세요."

"... ..."





나의 대답에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를 들으니 더는 장난을 칠 수가 없었다. 스피커에서 한참 동안 아무 소리가 들리 질 않아서 괜히 장난쳤나 미안해졌다.





"저기- 카린양?"

"... ..."

"카린양~"

"...죄송해요. 시윤씨. 많이 힘드신 것 같은데 제가 도와드릴게 없을까요? 아니... 도와드릴게요!"

"네? 그...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저는 괜찮..."





채 다 말하기도 전에 스피커에서 통화가 끊겼다는 수신음이 흘러나왔다. 다짜고짜 도와준다고 하고 전화를 끊어버리면 뭐 어떡하라는건지...

그래도 뭔가 하려는 것 같으니 이대로 있기도 좀 그렇고, 힘겹게 일어나서 윗 옷을 후드티로 갈아입고, 거울을 보며 머리를 대충 손으로 정리했다. 바지는 그냥 지금 입은 트레이닝 바지로 있어야겠다. 거울에 비친 몰골이 처참하다. 금방 낫는다 쳐도 지금은 몰골이 누가 봐도 환자라고 이마에 써있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은 그 누구더라도 별로 보이고 싶진 않은데. 무의식적으로 후드 모자를 써버렸다.



그보다 한참 동안 아무 연락도 없고, 뭘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모르겠다. 대체 뭐냐고 물어보기 위해 핸드폰을 집는 순간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평소 같으면 이 시간에 올만한 사람이 없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인터폰 화면을 봤다. 예상대로 화면에는 뛰어왔는지 숨을 고르고 있는 카린양이 보였다. 아니 그전에 우리 집 주소는 어떻게 안 거야...

문을 열자 인터폰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양손에 쇼핑백이 보였다.




"카린양...? 저희 집은 어떻게 알고..."

"아..! 하나씨한테 업무를 배우면서 회사 사원 정보를 받았습니다. 관리부 일을 할려면 사원 정보 숙지는 중요하니까요."

"...스토킹?"

"그런 거 아니에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부정한다. 그리고 이내 양손 가득한 쇼핑백을 나에게 건넸다.




"설마 저녁 못 먹었다고 해서 챙겨 주시는 건가요?"

"...어제 점심식사도 그렇고, 여태껏 챙겨주셨는데 뭐라도 해드리고 싶었어요. 거기다가... 제가 직접 해를 입힌 건 아니지만 어제 일 때문에 다치시기도 했고-"

"그건 카린양 잘못이 아니에요. 애초에 태스크포스에서 일하면서 카운터가 다치는 건 흔한 일 이라고요?"

"그, 그래도요!"





여태까지의 일과 어제의 사건을 마음에 담아둔 모양이다. 이렇게까지 해왔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일단 건네받았다. 종이백 안에는 포장 음식이 가득했다. 패스트푸드긴 하지만...





"오~ 제가 좋아하는 걸로 사오셨네요. 어떻게 아셨을까요?"

"관리부 사원 정보 문서에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대체 그런 건 왜 있는건지 모르겠네요. 하하..."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그래도 얼굴을 보니 엄청 심각해 보이진 않아서 다행이에요."





카린양은 안심했다는 듯 생긋 웃음을 지었다. 미소를 보니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뒤집어쓴 후드때문인가, 더워지는 것 같다.





"잘 먹을게요. 카린양. 근데 양이 좀 많네요?"

"아..! 그, 그게... 키오스크? 라고 했던 것 같은데... 처음 해보는 거라 실수로 세트 메뉴를 하나 더 샀어요."

"풉-"

"그.. 웃지 마세요! 써본 적이 없어서 한 실수였습니다"





왜 양손에 하나 씩 들고 왔나 했더니 두 개를 산 거 였구나.

웃음 참기에 실패했다. 카린양은 창피한 듯 또 날 때리려다가 멈추었다.





"하하하- 평소처럼 안 때려요?"

"부상자인데 그럴 순 없습니다."

"아~ 근데 이거 저 혼자 못 먹을 것 같은데 어떡하죠?"

"... ...어..."

"저녁 아직 안 드셨으면 같이 드실래요?"






다른 의도는 없다. 진짜로! 정말 그냥 혼자 다 못 먹으니까 한 말인데... 왠지 점점 빨개지는 카린양의 얼굴에서 스팀이 나오는 듯 했다.






"그... 오해 하실까 봐 하는 말인데 그냥 정말 먹고 가시라는..."

"오, 오해 같은 거 안 했습니다!!"

"아~ 고막 나가겠어요. 일단 서 계시지 말고 들어오실래요?"

"...시, 실례하겠습니다."

"으음, 근데 정말 무슨 생각 하셨길래 얼굴이 그렇ㄱ.."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결국 환자고 뭐고 한 대 맞았다.













-





처음에는 쭈뼛쭈뼛 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식탁에 앉아 우리는 이야기 꽃을 피웠다. 부상은 괜찮은지, 오늘은 하 루종일 작전지역을 뛰어다녔다던지, 펜릴 소대장은 사원 정보에 나온 거보다 더 굉장하다던지... 이번에도 나는 여전히 듣기만 하는 쪽이었지만, 매일 혼자만 있던 집에서 누군가와 밥을 먹으니 알 수 없는 포근함이 느껴졌다. 


즐겁다. 행복하다.

따뜻하지만 이런 건 나에겐 너무 안일하고, 거리가 먼 감정이다. 나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어차피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고, 스승님은 나에게 그런 감정 따위 주지 않았다. 애초에 내가 주변인에게서 그런 걸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만났던 날을 세어봐도 알게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그런 조건인데도 어느 순간 마주치면 나는 '안일함'에 빠진다. 왜 일까.




"시윤씨?"

"네~"

"듣고 있는 거 맞아요? 게다가 햄버거가 하나도 줄 질 않아요. 입맛이 없으신가요?"

"아니에요. 그냥 다른 생각을 좀 했네요. 하하-"

"아무리 카운터라도 잘 챙겨 먹어야 부상이 빨리 낫습니다. 얼른 드세요."

"아~ 잔소리는 싫어요."

"잔소리가 아니에요! 저는 사실 만을 말한겁니다."






날 부르는 소리에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적도 별로 없는데.

내 앞에서 오물거리며 햄버거를 먹는 카린양은 평범한 사람인데... 마치 무방비해지도록 무장 해제를 시켜버리는 느낌이었다.






"카린양은 보다 보면 군인이라는 생각이 안드네요."

"안 그래 보여도 혹독한 훈련병 생활을 거치고 군인이 된 거에요.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요? 그냥 평범한 소녀 같은데."

"켁..!"

"어, 괜찮아요?"

"콜록..! 저번에도 그렇고, 낯 간지러운 말은 좀 자제해주세요."

"하하하하- 콜라 마셔요."






그냥 던져본 말인데 반응이 격렬하다. 사레 들리게 한 건 미안하지만 매번 이런 걸 보는 재미가 있다.






"그리고 이제 군인이 아니라 평범한 태스크포스의 사원이 되어야 하지 않겠어요?"

"역할 자체는 여기 세계도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군인이든, 평범한 이익 집단의 직원이든 저는 사람을 지키는 일을 할 거에요."

"카린양 다운 대답이네요. 그럼 소녀도 하고 군인도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 일단은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하하. 칭찬이에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부시럭 거리는 종이 포장 소리만이 집안을 울렸다. 그렇게 말없이 햄버거를 다 먹었다. 카린양이 종이 포장지를 접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정장 자켓 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유리병 안에는 가루가 들어있었다.





"부사장님께서 주셨어요."

"이건... 이터니움인가요? 쓰지는 못하겠네요."

"네. 시영씨의 그림자에서 나온 걸 가져오신 것 같아요."

"... ... 근데 이렇게 박살이?"





의문을 표하자마자 그림자를 처치한 인물이 누군지 떠오르고 바로 납득해버렸다.





"제가 대신 사과할게요. 미안해요. 너무 처참하게 가루가..."

"아니에요. 오히려 그 덕에 폐기 처분을 받아서 제 게 올 수 있었습니다."

"... ..."

"그림자가... 정말 시영씨의 기억과 자아를 가지고 움직였다면, 시윤씨에게 저를 잘 부탁한다는 말은 진심이었을까요."

"... ..."



미세하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유리병을 조심스럽게 한 손에 쥐었다.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만으로... 그런 행동을 했다는 건 살아있기를, 살아가기를 바랬다는 거라고..."

"...제가 그림자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것 같네요."

"...!"

"누구든 소중한 사람이 죽길 바라지 않으니까요. 당연하지 않겠어요?"




감싸 쥔 유리병를 보다가 나를 쳐다본다.




"...그렇네요. 어차피 살아있어야 누군가를 지키니까요. 비록, 모든 걸 지킬 순 없었지만요."

"... ..."





손에 쥐었던 유리병을 원래 보관했던 자켓 안주머니에 넣고, 나를 보며 웃는다.

또 다시 현실 감각이 멀어진다. 그런 일을 당하고도 웃어 보이는 그녀가 대단하다. 불과 며칠 전 만해도 마음이 버티지 못해서 무너지기도 했던 사람이었는데.

너무 들뜨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슬퍼 보이지도 않는 웃음이 마음을 울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되기까지엔 저를 구해주신 분들과 시윤씨의 덕이 컸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힘낼 거에요. 제가 살아 갈 수 있는 동안. 앞으로도 계속."





지키고자 했던 세계가 무너졌다는 절망 속에서도 일어나서 나아 갈려는 모습을... 나는 그 모습이 부러워졌다. 


나도, 나에게도 그런 힘이 있을까.



남에겐 행복을 누리라하고, 일으켜 세우면서 정작 나는...







"시윤씨..? 너무 제 얘기만 했나요?"

"아니에요. 나아지는 모습을 보니 제가 다 기분이 좋네요."





나도 모르게 쓴 웃음을 지었다. 카린양이 묘한 표정을 짓고, 무언가 생각하는 듯 나를 계속 응시한다.






"시윤씨에게도..."

"..."

"저라는 존재가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말 진심인가요?"

"진심입니다."





그녀는 다시금 생긋- 웃음을 지어 보인다.

나도 한 번 쯤은... 이번 한번만 그래도 되지 않을까.

그런 안일한 생각을 하니, 그제서야 내 앞에 있는 그녀에게 집중 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요. 카린양."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아프신데 쓰레기는 제가 치울게요."

"에이- 손님에게 그런 걸 시킬 순 없죠."

"제가 도와 드릴려고 온 거에요. 같이 먹길 잘한 것 같아요. 혼자 드셨으면 치우느라 고생하셨을텐데."

"걷는덴 아~무 문제 없어요. 카린양 이건 과잉보호입니다. 과잉보호-"

"하루 종일 휠체어를 밀어주셨던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그리고 내일은 오늘 대신에 쉰다고 하니 출근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가 종이 포장지를 치우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알겠다고 답하고 미소 지었다.









-






"오늘 그렇게 힘들게 일하셨는데, 저까지 챙겨주시느라 고생하셨어요."

"괜찮습니다. 이래 보여도 체력은 좋아서요."

"하하. 역시 카린양은 대단하네요."

"군인의 기본 소양이니까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푹 쉬세요. 시윤씨!"

"조심해서 가세요."







문이 닫히고, 그녀가 떠난 집안엔 정적이 흐른다.



그녀의 미소를 떠올린다. 그 미소를 따라서 안일함이라는 바다에 빠진다. 바닷물의 따뜻한 온도를 느끼고, 행복이라는 파도에 몸을 맡긴다.

이미 어릴 적 잊어버렸던 포근함을 따라 흐르고, 파도를 타며... 애정이라는 육지를 찾아간다.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와 육지에 도착한다. 육지에 발을 디딘다.  파도가 닿지 않은 마른 모래에 발을 올린다. 아름답고,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나는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다.




며칠 전부터... 애써 무시해서 나 자신을 속이고 부정해왔던 감정을 천천히 납득한다.

... ...마음을 얻고 싶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아니다... 그냥 이대로 친하게 지내도 좋다.

너무 행복하면 사라질 것 같다. 이대로가 좋을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한다. 


항상 그렇게 이별해왔으니까. 인사도 채 나누지 못하고 영영 돌아오지 못하거나,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수 년 동안 사라지거나. 


그렇다. 찬란하게 빛나는 고운 모래에 내가 남긴 발자국이 상처가 될까 봐. 모래들이 나의 발에 화상을 입힐까 봐. 겁이 난다. 


겁쟁이 같으니.




끝없이 갈등하고 주체하지 못하는 마음이 온몸으로 쏟아져 나오는 것처럼 아프기 시작한다. 칼로 베인 다리의 상처보다, 두들겨 맞는 듯한 허상의 통증이 더 고통스럽게 느껴져 벽에 기댄 채 주저 앉았다.




눈을 질끈 감는다. 이런 우유부단한 행동과는 모순적으로 욕심이 난다. 


더 친해지고 싶다. 지금보다 더. 1초라도 더 같이 있고 싶다.










"... ...멍청한 새끼."














*








시윤씨의 집에서 나와 돌아가는 길. 뒤늦게 피로가 몰려온다. 8시 30분을 지난다. 10시에는 자야하니까 서둘러야겠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하늘을 가르는 빛 기둥을 본다. 시윤씨가 말했던 관리 실패의 흔적... 그 주위로 깔린 어둠엔 별들이 빛났다. 이따금 밤하늘을 가르는 함선도 보였다

길을 걸으며 잠시 이전 세계를 추억 한다. 침식 재난으로 뒤덮여 항상 어두침침했던 하늘을 기억한다. 


현관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안으로 들어오니 고요하다. 군 기숙사에서 지낼 땐 시영씨가 자기 방은 가지도 않고, 내 방에 들어와서 장난을 치곤 했다. 지금은 전혀 다른 곳에서 고요함만이 나를 반긴다. 작은 서랍장 위에 머리띠를 벗어 내려놓고, 그 옆에는 유리병을 둔다. 서랍을 열어서 델타 세븐의 제복에 있던 노란 리본들 중 하나를 꺼냈다. 비록 시영씨는 불편하다며 처음 한 번만 입고, 마지막까지 입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원이 됐었으니 어울리는 추모법이지 않을까. 가지런히 정리하여 옆에 놓고 거수경례를 했다.





"시영씨, 저는 종교도 사후 세계를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에 존재한다면, 당신 말대로 지옥에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요."





손을 내리고, 방안의 큰 창문을 커튼으로 가린다. 씻기 위해 입었 던 옷을 벗으며 다시 생각에 잠긴다. 


시영씨에겐 사후 세계 같은 건 안 믿는다고 입이 닳도록 말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게 있다면... 나는 지옥행이지 않을까.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진다. 멍하니 물을 맞으며 온도를 느낀다.

사소한 행복 정도라고 했지만, 사실 오늘 저녁의 일은 욕심을 부린 거였다. 그냥 공적이든, 사적이든 우연찮게 주어진 시간 안에서만 누리겠다고 한 건데. 이번엔 내가 일부러 만들어낸 시간이었다. 아니 토요일에도 그랬다. 어느 순간 욕심을 점점 부리는 나 자신이 두렵다.


눈을 감는다. 계속 눈을 감고 있으니 다시 문을 열고 반겨주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머리카락까지 모두 푹 젖어가는 게 느껴진다. 심장이 뛴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뛴다. 이대로도 행복하니까 더 가지려 하지 말자. 채우지 못할 욕심이니까. 지금 이대로 만족하자.





"... ...미안해요."





샤워기에서 나오는 물과 함께 내 눈물은 섞여 내려갔다.



... ...










+) 각시윤뜨니까 진짜 너무 기대되는데 문학은 드럽게 안써지더라... pv보니까 7장은 다크할거라고 생각했는데 왠지 그럴것같진않아서 지금 쓰는 문학을 매운맛으로 쓰기가 좀 고민되네

맨 첫화에도 사족으로 달긴했는데. 지금쓰고 있는거는 크로스로드 이벤트를 지난 메인에피6장 이전을 시점으로 잡고, IF물로 쓰는거라 6에피랑은 아예 접점이 없슴... 그래서 읽을 때 그 점 감안하고 읽어주면 너무 고마울것 가타!!